생명의삶 큐티. 20250212수.
요한복음12:1~11. 헌신의 사람, 탐욕의 사람. / 소중한 향유를 더 소중한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12:1-3
아낌없는 헌신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헌신’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고 있다면 ‘헌신’한다.
; 가족, 사회, 국가, 직업... & 종교
[마하마트 간디가 말하는 7가지 악덕]
● 철학 없는 정치 = 정치모리배 ; 사적 이익을 최고로 하기 위해 정치를 정략적으로 이용
● 도덕 없는 경제 = 善과 德과 윤리적 의무감
● 노동 없는 부 = 정당한 대가 없이 부를 얻는 사회를 용인하면 공동체는 붕괴
● 인격 없는 교육 = 인격이 없는 지식은 인류의 칼이 될 수 있다
● 인간성 없는 과학 = 인간성을 상실한 과학은 인간을 말살하는 무서운 도구일 뿐
● 윤리 없는 쾌락 = 윤리 없는 쾌락은 육체를 병들이듯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 헌신 없는 종교 = 헌신과 희생, 봉사가 따르지 않는 종교는 사회에 해악이 된다
[로마서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그리스도인은 모두 헌신해야 한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은 당연히 헌신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은 사람들이라면, 그분 앞에 헌신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헌신의 기본은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고 전폭적으로 동의하는 삶, 그것이 헌신이다.
[헌신은]
첫째, 포기하는 것이다.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둘째,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대하 20:1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셋째, 충성하는 것이다.
고전 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예수님의 의도적인 여정에 대한 암시이다.
내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평안한 나의 안전인가, 고단한 사명인가?
잔치 자리에서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시신에서 나던 악취가 예수님으로 인해 영광의 향기로 변했다.
예수님께 영생을 얻은 자들은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세상 가운데 영광의 향기를 퍼뜨릴 것이다.
마리아의 행동에서 신앙인이 본받을 덕목에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감사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둘째, 아낌없는 헌신입니다. 향유 가격은 300데나리온으로, 이는 당시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입니다. 셋째, 겸손입니다. 그는 엎드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넷째, 영적으로 깨어 있는 모습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장차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준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7절).
-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발에 부어 드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마리아가 당신의 장례를 위해 헌신했다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제자들도 간파하지 못한 주님의 죽음을 내다보고 있다. 숙련 노동자의 1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 한 근은 아마도 그녀의 전 재산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예수님은 재물보다 소중한 분이시다.
재물을 사용하는 그곳이 우리 마음이 머무는 곳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와 사랑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기꺼이 그리고 아낌없이.
- 내가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드릴 헌신은 무엇인가요?
비난하는 가룟 유다 12:4-11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헌신을 비난합니다. 가룟 유다의 태도에서 신앙인이 경계할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위선입니다. 그는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사용하지 않았다고 질책했으나, 사실 그의 마음에는 돈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둘째, 비난(헐뜯음)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를 구실 삼아 마리아의 선한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셋째, 도둑질입니다. 돈궤를 맡았던 그는 궤에 든 돈을 훔쳐 갔습니다. ‘훔쳐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미완료 시제로, 그의 도둑질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넷째, 영적 무지입니다. 제자였음에도 그는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영적 무지와 탐욕으로 인해 가룟 유다는 구원자 예수님과 점점 멀어집니다.
-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향기 없는 위선자 가룟 유다, 이는 마치 유대교 지도자들이 성전의 돈궤를 맡고 말로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면서 정작 자기들의 배만 불리는 모습과 완전히 일치한다.
욕심을 비워야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 빈마음을 채워야 한다.
- 내 마음의 욕심으로 인해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진정한 플렉스』 신동재 저.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랐지만 내 안에 뜨거운 신앙심은 없었다. 피아노 반주와 가끔 하는 교회 청소를 고되고 귀찮은 노동으로 여겼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어 불만투성이였다. ‘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지 않고 힘들게만 하시지?’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나를 방치하시지?’ 이런 생각뿐이었다. 그때 나도 하나님을 내 욕망을 이루어 주는 조력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하나님께 삿대질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고 채워주셔야 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다 스무 살이 넘어서 예수님을 만났다. 주님을 증오했던 나였다. 수많은 수련회를 참석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 울고불고하던 친구들과는 달리 조금의 감흥도 없던 나였다. 그만큼 그분과의 만남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그분이 찾아오셨다. 만나고 싶다거나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은혜’였다. 그때 눈물을 펑펑 쏟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약해지기 싫어 잘 울지 않던 나였다. 울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하던 완고한 나였다. 그런 내가 예수님을 만나니 눈물이 쏟아졌다. 하나님께 삿대질하며 욕했던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니 그제야 불안한 인생이 평안해졌고, 안심되고, 감사가 넘쳤다. 그렇게 내 영혼의 그늘이 한 꺼풀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불만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술이 불가항력적으로, 뭐에 홀린 듯 이렇게 움직였다. “주님 이제 주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이의 눈물, 그리고 그 눈물 뒤에 따라오는 헌신의 다짐이 모두 이와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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