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욕을 당하고도 부인(不認)하는 여심 어느날 평일과 다름없이 예정은 예형을 찾아왔다. 마침 허견은 시골에 가 고 입에 없던 때였다. 아무러한 눈치가 없이 종일 지내고 이내 예형의 집 에서 자고 가려고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정에게 돌연 청천벽력이 내렸으니 일은 이제부터 벌어지게 된 것이다. 냉면으로 밤참이 들어와서 맛있게 먹고 난 후였다. 방은 더웠으나 예정은 냉면을 먹은 후라 달달 떨었다. 예형은 하인을 시켜서 강차(薑茶)를 끓여 오라고 호령을 하면서 예정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호호호호, 아마 인제는 옥동자를 낳으려나 보구먼. 이렇게 더운 방에서도 춥다고 떨고 야단이니?" 이런 말을 했다. "아이구, 형님두, 별말을 다 하시는구료, 하늘에 올라가야 별을 따지 않 수." "왜 그래, 내가 들으니 귀동자를 낳을 만하겠던데." "왜 무슨 소리를 들으셨수?" "우리 집 대감을 어째서 자네네 집 건너방에 사흘씩 묵혀 두었나?" 갑자기 예형의 얼굴에 독기가 팽창했다. 예형은 계속 예정을 보고 코웃음 을 치면서 "입이 광주리만 해도 할 말은 없겠지?" "그렇지만 나는 아무 죄도 없어요." "요, 앙큼한 년! 그래도 변명이야?" 예형은 옆에 놓인 퇴침으로 예정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때에는 예정도 암상이 날대로 났다. "그런데 왜 까닭없는 사람을 땅땅 때리는 거예요? 어디 더 때려봐요." 몸을 예형에게로 들이대면서 이렇게 발악을 했다. "네깐 년은 죽여놔도 좋다, 그 따위 버르장머리 하다가는..." 예형은 한층 더 호통을 치면서 그의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아니, 댁 대감이 어떤 년 하나를 잡아다가 놓고 이틀 사흘 그 따위 짓을 한 것을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 말이 믿기 어렵거든 대 감께 물어보라니까, 내가 그리 만만해보이슈?" "아따, 부원군의 첩실이니까 어깨가 으쓱한가 보다. 그 알뜰한 죽은 영감 장이의 첩실, 누가 알아 준다고 으쓱거려. 그나마 누가 그 자리에 가게 해 주었는데... 그러고 저러고간에 내 말은 다른게 아니야. 우리 집 대감이 어떻게 아무 일 없이 남의 집, 그야말로 부원군 첩실의 댁을 찾아가서 그 건넌방을 치우고 버젓이 그런 짓을 했느냐 말이다. 네가 그전부터 그 따 위 짓을 하다하다 못해서 나중에는 다른 계집까지 천거를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예형은 노기충천해서 예정을 넘어뜨리니 예정은 장지에 부딪쳐 쓰러지면서 입에서 피를 쏟았다. 이 두 개가 몽땅 뽀사져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있던 이듬해 봄이었다. 청풍부원군의 조카되는 김석주(金錫胄) 는 돌아간 그 숙부의 옛 정의를 생각해서 그 서숙모가 되는 예정을 가끔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다. 그러던 중 김석주는 그 서모 예정과 허견의 처 예형과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서 예정의 이까지 빠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김석주가 그 서숙모를 찾아와서 "지금 형편으로는 좀 거북한 일이지만 다시 허견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쪽 내막을 자세히 살펴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예정은 김석주가 자기에 대해 마음 쓰는 일을 늘 고마워 해 오던 터라 그 만한 부탁을 안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정은 다시 예형을 찾아갔다. "형님, 더러운 것은 사람의 정입니다. 그렇게 이가 뽀사지게 싸우구두 십 년 가까이 든 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그대로 견디겠습니까. 기왕 일은 누가 잘했건 누가 잘못했건 그만두고 우리 형님이 그리워서 왔으니 그전대로 의지하고 삽시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그때 무슨 살이 들어서 그랬는지 그 후에 퍽 후회했 네. 조금도 예전일을 생각치 말고 앞으로는 여전히 잘 지내세. 이렇게 와 서 먼저 풀어 주니 고맙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고 두 사람은 전과 같이 왕래를 했다. 김석주는 예정을 통해서 허견의 일을 어느 정도까지 알게 되었다. { 허견은 매일 만나는 사람이 벼슬아치보다도 아직 벼슬하지 않은 이들, 대개는 모양이 초라하고 자비하나 변변히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그 중에도 복선군이란 종실과 가장 친하다는 것, 그리고 밤중에 남의 이목을 피해서 슬그머니 왔다가는 슬그머니 나가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다는 것. } 이런 일들을 차차 알게 된 것이다. 김석주는 곧 의관을 차리고 자비를 준비해서 상동에 사는 한성좌윤(漢城左 尹) 남구만(南九萬)을 찾아갔다. 김석주는 예정에게서 들은 허견의 이야 기를 남구만에게 대강 들려주고 이 기회에 허견을 내쫓고 서인들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구만은 결기 있는 사나이였다. 이런 단서가 알려지지 않아 애를 쓰며 기 회 있는 대로 남인을 쓰러뜨리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곧 조정에 다음 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신이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이미 작고했으나 그 부실 오씨(吳氏=예정)가 아직 옛집을 지키고 있사온데, 오씨는 허견의 처 홍씨와 결의 형제를 맺은 사이옵니다. 그런데 허견의 처 홍씨는 항상 제 집에 드나드는 오씨가 그 남편과 어떠한 정사관계가 있다고 해서 마구 때리고 싸우다가 드디어 오씨의 앞니를 몇 개나 빼어놓았다 합니다. 부원 군의 첩은 비록 천인이지만 중전의 서모가 되는 분이요, 어찌 이것을 그대 로 두겠습니까?" 한번 이 상소문이 나오자 세상은 뒤숭숭해졌다. 이튿날 허적이 사연을 밝혀서 상소했다. "신의 소자 허견의 처는 죽은 홍순민의 첩의 딸로서 그 성품이 괴악하여 이루 말하기 어렵고 당초에 결혼 때도 속아서 결혼한 것이요. 그간 그의 결의형제라는 예정이란 여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말은 들었어도 서로 싸웠 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요. 아마 그의 성품이 흉패해서 그런 좋지 못한 소문이 나는 모양이요."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우윤(右尹) 신정(申晸)이 다시 상소를 올려 이차옥 의 사건을 들어내 놓고 공박했다. 임금은 그 상소를 포도대장 구일(具鎰) 에게 내주며 이 사실을 조사해 올리라 분부했다. 구일은 어명을 받들어서 당일로 허견과 차옥을 잡아가두고 문초를 해본 결 과 차옥이 그 일을 전연 부인하니 마침내 무근지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 다. 이튿날 남구만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세상에서 다 아는바이지만 허견은 집에서 하는 일 없이 친구를 모아가지 고 시국을 의논하는 것과 남의 집 유부녀를 겁탈하는 것으로 농사를 삼는 터입니다. 이차옥의 사건으로 말하면 허견의 아내 예형과 그의 결의 형제 인 예정이 증거이온대 그들을 다 젖혀 놓고 허견과 이차옥만을 불러서 물 어봤으니 그 일의 진상이 드러날 리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윤휴가 싸 고도는 때문에 결국 무소가 된바이오나 윤휴로 말하더라도 바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나라에서 금하는 소나무 수천주를 베어다가 자기 집을 지었다합니다. 국법에 산 소나무 열주만 베어도 사죄(死罪)에 이른다고 했는데, 법을 맡은 자가 이와같이 하니 어떻게 백성을 조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를 보고 젊은 임금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즉시 형조판서 이관징(李 觀徵)을 불러 "듣자니 요즘 권문 세가에서 처지를 믿고 부정한 짓을 하는 모양이니 이 사실들을 전부 밝혀내어라." 했다. 며칠 후 이관징이 임금께 아뢰었다. "전후 사실을 조사해 본 결과 허견의 집 일은 지각 없는 낭속들이 터무니 없이 떠들어서 소문이 났던바이오며, 윤휴의 집은 살펴보니 그 집은 새로 지었으나 모두가 헌 재목으로 지었습니다." 이때에 임금은 남구만이 두번이나 올린 상소가 전혀 무근지설을 무소해서 남을 헐뜯으며 임금을 속인 것이라 하여 그 자리에서 남구만의 관직을 삭 탈하고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강화도의 계선돈대(繫船墩台)를 쌓는 역사가 있어서 팔도의 승군(僧軍)들을 불러모아 일을 시키고 수사(水使) 이우(李偶)가 이 일을 감독하게 되었다. 하루는 이우가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무명인의 투서를 올 려보내 왔다. 김석주는 그 편지를 보고 그대로 쥐고 있을 수 없다 하여 조정에 내보였 다. 그 투서의 내용은 시국을 비방하고 현 조정을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 슬프다. 이때는 정히 나라가 위태하기 짝없는 시기로구나. 임금은 유충 하신 중에 다 병유약하고 국정은 몇 사람의 재상의 손에서 마음대로 농권 되니 백성은 모두 도탄에 빠져서 민심은 점점 불안하여 장차 내란이 일어 날 것이니, 남의 나라를 막기 위해 돈대를 쌓는 것은 도리어 우스운 일이 로구나. 제공은 이런 일을 치우고 승군(僧軍)을 수백명 모집해 가지고 도 성으로 들어가 삼개(麻浦)에서 기다리라, 그러면 의군(義軍)은 승군과 합 세해 가지고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臨昌君)을 추대해서 거의(擧義)하려 는 터이다.} 이 글을 보던 모든 사람은 창황망조해서 그날로 어전회의를 열어가지고 선 후책을 강구하기에 급급했으니 사태는 목첩간에 긴박한 듯이 보였다. 우선 투서한 사람을 찾고자 이우를 문초하였다. 이우의 말에 의하여 사십세 넘 은 키가 크고 수염이 많은 자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수소문할 때 또 대궐 근처에 누가 익명서(匿名書)를 던지고 갔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서인과 남인의 감정은 당장 폭발할 듯이 극도로 팽창되었다. 이러한 중에 허적과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허목(許穆)이 상소를 올렸으니, 그 상소는 {영의정 허적은 선왕의 고명(顧命) 유신으로 주상을 도와야 할 처지에 있 음에도 불구하고 당색(黨色)을 가려서 사람을 쓰고 그 교만과 사치가 날로 심한 중에 요즘에는 내시와 궁녀들과도 연결하여 전하의 동정을 시시로 내 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자 허견은 아비의 세력을 믿고 양가의 부녀 자를 겁털간음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들이나 조정에서는 그 누구 한 사 람 탄핵하는 사람이 없고, 혹시 여론을 일으키는 자가 있어도 번번이 바른 말하는 사람만이 귀양 가고 죄를 입으니 이같이 하다가는 종묘사직이 위태 해질 것입니다. 급히 상당한 조처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임금은 이 상소를 보고 곧 노염을 지으며 "한동안 아무 일이 없더니 또 남구만 같은 자가 생겼구나. 이 무슨 주제넘 고 쓸데없는 짓이냐. 영의정 허적은 나라의 기둥인데, 그를 해치려는 자가 누구냐?" 이런 말을 하고 도리어 허목을 귀양 보냈다. 숙종이 허적에 대하여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이만치 깊고 두터웠던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음번 주제
색마의 末路와 경신대옥(庚申大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