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17
9월18일[연중 제2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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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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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E09TtumapI?si=xSuLCKeEit7IX9lt
(예수회 박민웅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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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무능한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의 깊이와 넓이를 잊지 않는 겸손!>
백인대장 소유 노예의 치유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자주 강조하신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보기 드문 이방인 장교가 한 명 있었습니다. 계급은 백인대장이었습니다. 백인대정은 로마 군사 조직 안에서 나름 힘과 권위를 지녔던 계급이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당시 로마는 스코틀랜드 산악 지방에서 시작해서 오늘 날 이란 동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파르티아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대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경 도시였던 카파르나움에는 세관과 국경 수비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군대 안에 여러 국적의 용병들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시리아인, 트라키아인, 게르마니아인, 갈리아인 등이 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이방인 출신이지만 동시에 로마군의 장교 신분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유다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인대장은 비록 이교도였지만 출중한 성품과 인성을 갖춘 인물로서, 유다인들로부터도 칭송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루카 복음 7장 4~5절)
이처럼 백인대장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지극한 겸손의 덕까지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신원을 늘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부정하고 죄인인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 청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 역시 유다인들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오는 것으로 확신한 나머지, 유다 원로들을 통해 자기 소유 노예의 병의 치유를 청했던 것입니다.
유다 원로들을 통해 백인대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백인대장 집으로 향하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집을 향해 다가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백인대장은 너무나 행복하고 감격했지만, 동시에 크게 황송스러웠던 나머지, 2차 사절단으로 자신의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복음 7장 6~7절)
우리 가톨릭교회는 이 겸손한 백인대장, 유다 원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신앙을 소유했던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을 미사 전례 안에 수용하여,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미사 때마다, 탁월한 신앙인이었던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을 반복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진정한 신앙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지극히 무익하고 무능한 우리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의 깊이와 넓이를 잊지 않는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광대무변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들이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백인대장이 외친 겸손한 기도뿐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있는 심연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결국 무능하고 연약한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광대무변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상봉하고자 발버둥 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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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Jz5UknUz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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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법칙이 있음을 믿기 시작할 때 신의 존재도 믿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엄청난 칭찬을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도대체 백인대장이 어떤 사람이길래 로마인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큰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먼저 카파르나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배하는 동네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위해 회당도 지어준 인물입니다. 그리고 자기 가족의 병을 위해 치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을 위해 그것을 요구하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수준은 어쨌거나 사랑의 수준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방 종교에서 자란 그는 어떻게 이런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수준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세상의 법칙을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의 법칙을 찾았고 그러다 보니 사랑하면 다 잘 된다는 법칙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의 법칙을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법칙만 깨달으면 그 법칙의 주인을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은영 리포트 결혼지옥 – 절벽부부’를 보았습니다. 남편 이송웅 씨는 평택에서 작은 횟집을 운영하고 아내 이소정 씨는 연기자로 활동하다가 결혼하면서는 남편의 일을 돕습니다.
아이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편은 아내와 사는 것이 군대에 있을 때보다 더 숨 막힌다고 말합니다. 아내도 남편과 살게 되면서부터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을 겪으며 그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술로 때우고 있었습니다. 둘 다 알코올 의존증이 의심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느낄 수 없고 상대 때문에 자신이 힘들다고 비난의 말투가 일상입니다.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받지 못해서입니다.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처럼 자라왔습니다. 어머니가 부모 몰래 미국에서 결혼해서 낳은 아이가 주인공입니다. 엄마는 미국을 떠나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왔고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엄마도 아빠를 닮은 소정 씨를 냉대하였습니다. 두 삼촌은 어른이면서도 소정 씨를 심하게 구타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소정 씨도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송웅 씨와 결혼했고 엄마는 소정 씨에게 지금까지 키워준 돈을 내놓으라고 소송까지 건 상태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송웅 씨가 평택에서 서울로 소정 씨가 좋아하는 닭발을 싸 들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단 두 번 만나고 결혼합니다. 처음 받아본 사랑에 취해 있었고 빨리 집을 벗어나고 싶어서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공허함은 채울 수 없었고 눈을 감으려면 술과 수면제가 꼭 필요했으며 다음 날 눈이 떠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상태입니다. 송웅 씨도 하루 종일 술만 마시는 아내가 한심하고 자신 때문에 그런다고 말하는 것에 화가 납니다.
사실 송웅 씨와 결혼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송웅 씨와 결혼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기에 더 그러는 것입니다. 송웅 씨도 무뚝뚝한 부모에게 자라서 위로해 주는 법을 알지 못했고 그렇게 두 부분은 절벽에 서서 알코올 중독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없었습니다. 다만 소정 씨에게 알코올 치료 센터에 입원하여 치료받고 남편도 치료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부의 사랑을 논해야 하는 자리에서 알코올 중독 치료가 제일 시급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사랑의 문제가 알코올 치료를 하면 해결될까요? 알코올 중독은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사랑의 문제를 어떻게 술 때문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사랑 없이도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법칙은 사랑받아야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존감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문제를 술로 해결하려 하는 사람에게 술만 끊는다고 부부관계가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법칙을 믿어야 하느님도 믿게 됩니다. 백인대장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깨달은 법칙에 예수님을 적용했습니다. 부자의 법칙이 있다면 그것을 따라 해 보십시오. 법칙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나는 예외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러한 법을 세상에 놓어주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널린 다양한 수치 자료에서 첫 자리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수는 무엇일까요. 얼핏 생각해보면 수치 자료에는 1부터 9가 11.1%씩 동등하게 분포하므로 첫 자릿수도 1부터 9가 같은 비율로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1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2에서 9로 갈수록 그 빈도는 현저히 낮아집니다.
미국의 천문학자 사이먼 뉴컴(1835~1909)은 1881년에 로그표가 담긴 책을 보면서 앞쪽 페이지가 뒤쪽 페이지보다 더 닳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로그표에서 1로 시작하는 값들을 더 자주 찾아봤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물리학자 프랭크 벤포드(1883~1948)는 뉴컴의 이런 발견을 1938년에 공식화했습니다. 벤포드는 강 335개의 넓이, 물리학 상수 104가지, 분자 중량 1800가지 등 20개 분야 자료들의 첫 자리 수 분포를 분석해 ‘벤포드의 법칙’을 내놓게 됩니다.
벤포드의 법칙은 회계 부정을 적발하기 위해 197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수학자 마크 니그리니(Mark Nigrini)는 벤포드의 법칙을 이용해 에너지 기업 엔론의 회계 부정을 밝혀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밖에도 벤포드의 법칙은 2009년 이란 선거에서 부정 선거의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 정부가 유로존에 가입하기 위해 EU에 보고한 거시경제 데이터가 벤포드의 법칙을 통해 조작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벤포드의 법칙을 증명할 수 있는 수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법칙이 많은 분야에서 적용되는 것입니다.
법칙이 있다면 분명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이러한 법칙과 특별히 행복, 사랑의 법칙을 깨닫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모든 율법이 이 사랑의 법칙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세상에서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믿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그 법칙을 만드신 분을 만나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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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1-10: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 한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로마의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고쳐 주십사고 청한다. 그 종은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쳐 주실 수 있는 병이다. 종은 치명적인 욕정으로 병들었거나 세속의 노예로 묶여 주님께서 깨끗하게 해주고 계시다. 유대인들은 백인대장을 칭찬하고 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주실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4-5절)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신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6-7절)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 백인대장의 이 말은 “저는 주님을 제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의로움의 태양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한 줄기 작은 빛살도 어둠을 물리치듯이 이 병도 주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유다인의 원로들과 그 친구들에게 모두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이 없다고 꾸짖고 계시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이방 민족들에게서는 첫 번째의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 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말씀하셨다. 백인대장은 스스로 자격이 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백인대장이 주님께 자기 종을 위해 간청한 이 말은 우리가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기 전의 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한 이방인의 예수님께 간청한 말이 기도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우리도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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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말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6-9)
여기서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주님께서 ‘병’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 ‘병’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해서 떠날 것이고, 그러면 병자가 낫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신앙고백입니다. 백인대장이 군대 이야기를 한 것은, ‘예수님과 병의 관계’는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라고 믿고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감탄하시며’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 백인대장의 믿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의 믿음이 올바르다고 확인해 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는 말씀은, 그 백인대장이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고백하더라도, 예수님을 예언자로만 믿는 경우가 있고, 메시아로만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예수님을 예언자,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로 표현하긴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예언자,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로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런 종파를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병자를 고치는 일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도, 파도를 잠잠하게 만드는 일도 ‘말씀만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만으로 고쳐 주신 일이 많은데, 그 일들은 당신의 ‘의지’만으로 하신 일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병자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만으로’는 곧 ‘의지만으로’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또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말씀의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말씀이 잘 들리는가?” “잘 들린다면 잘 듣고 있는가? 듣고 있다면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들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안 들린다고 불평만 하는 것은 아닌가?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말씀의 힘’을 체험할 수 없다고 투덜대지는 않는가?” 사람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영적 독서나 강론을 통해서 듣거나, 기도 중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떠오르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경로로 듣게 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말씀을 잘 새겨듣고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듣기 싫은 말씀은 안 들으려고 하고, 자기 마음대로 듣고 싶은 말씀만 골라서 듣거나,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0.66)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과 당신의 ‘살과 피’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요한 6,48-58), 대부분의 제자들은(신자들은) 그 말씀이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면서 떠나버렸습니다. 거북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떠나버렸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싫으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떠나는 그들을 붙잡지 않으셨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이해보다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남아 있던 열두 사도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라고 물으셨습니다.(요한 6,67) 이 말씀은, “너희도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 말씀이 듣기가 거북할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고,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하고, 주님의 말씀을 온 삶으로 받아들여서 실행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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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루카 복음서에서 백인대장의 종을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처음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카파르나움에 주둔하던 백인대장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죽을병에 걸린 자기 노예를 살려주십사 간청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몸소 찾아가지 않고, 유다인 원로들을 보내어 대신 청하도록 합니다. 우리 정서에는 예수님을 몸소 찾아가는 것이 더 진정성과 예의를 갖춘 청원 일단 ㅔ터인데, 이방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유다인들의 정서를 헤아려 보면, 오히려 그러한 간접적인 청원이 훨씬 예를 갖춘 방식이라고 생각하였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유다인 원로들은 그 백인대장을 극찬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유다인들이, 그것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원로들이 이방인을 칭찬하는, 매우 드문 경우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으로 향하고 계실 때, 그가 다시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부정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유다인의 정서로 볼 때, 백인대장은 정말로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감히 제집에 그분을 모실 자격도 없고 이방인으로서 그분을 만나 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스스로 한껏 낮추는 자세는, 그의 청을 들어주실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긴 유다 원로들의 높은 평가와 대비되며 백인대장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만으로 제 종이 나으리라는 믿음은 주님께서 지니신 권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는 차별 없이 당신을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기에, 이방인 신분인 우리도 그분을 주님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로 주님을 실제로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도 감탄하신 백인대장의 세심한 배려와 겸손한 마음과 굳건한 믿음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영성체 전에, 백인대장이 지녔던 마음으로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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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티모테오에게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편지를 씁니다. 그래야 그들의 관할에 있는 사람들이 품위 있고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차별 없이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시기를 원하신다고 아울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언제가 기도를 해야 하는 거룩한 의무에 충실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군대 지휘관은 자신에게 맞겨진 군인들을 자기 자신처럼 존중하고 아껴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백인대장이 데리고 있는 아픈 종을 주님께서 치유해 주신 이야기는 공관복음 (마태 8,5-13;루카 7,1-10) 기록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가셨을 때에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통해서 자신의 종을 살려주십사하고 청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마태오 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이 직접 예수님께 다가와 자신의 종을 위해 청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원로들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반대자로 등장했는데 이번에는 백인대장의 종을 주님께서 고쳐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믿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직접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사람들의 그동안의 예수님에 소문을 들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은 유대인은 아니고 이방인지만 예수님께서 참으로 유능하시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이면서도 자기의 관할에 있는 주민인 유대인들에게도 호의적일 뿐 아니라 비록 종교는 다르다 해도 유대인들의 회당을 지어주었기에 그곳 유대인들에게도 호감을 사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청할 때 백인대장의 그동안의 호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루카 7,4-5)
백인대장은 부하를 아끼는 유능한 지휘관일 뿐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었고 거기다가 겸손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가 주님께서 자기에게 가서 그이 종을 고쳐주시겠다고 하자 그는 부하를 보내어 주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의 마음으로 ‘주님’이라는 칭호를 쓰며 다음과 같은 전갈을 보냅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6-7절)
백인대장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해서 직접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알고 존경받는 유대인의 스승에게 최대한의 예의와 겸손을 갖추어 전갈을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유대인들에게서 이렇게 신로의 절대적인 모습을 보신 적이 없으시기에 감탄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
심부름 왔던 부하들이 돌아가 보니 백인대장의 종은 이미 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정작 예언서들을 통하여 누구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메시아로 받아들여야 하는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지만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주님께 청했던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도 주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으로 치유되는 기적을 그곳의 사람들은 목격하게 됩니다. 원론적인 질문이 되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는 한분이신 유일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가 짚어본 문제이지만 하느님이라는 ‘엘로힘’(창세 1,1)이라는 단어자체가 복수이라는 점은 해석하기가 힘듭니다.
또한 인간창조 때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습’(창세 1,26)라는 표현을 쓰신 점도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관련된 단어와 표현도 복수인데, 유일신이라는 데에 묶어서 성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고착된 생각에서 더 전개되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폐쇄적인 유대인들과는 달리 오히려 백인대장처럼 이방인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열려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인간의 관습이나 전통에 매이거나 또한 어정쩡한 믿음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백인대장을 통해서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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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로마 백인대장의 이 겸손한 고백은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천주교 신자에게 영성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고, 미사를 통하여 날마다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를 통하여 우리와 일치하시고, 우리가 당신 안에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백인대장의 확신에 찬 말은 예수님께는 믿음에 대한 감탄으로, 그리고 그 종에게는 치유의 은총으로 다가갑니다.
세상의 수많은 방해와 불신 속에서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의 눈은 한계가 있어 실지로 많은 것을 볼 수 없고, 우리의 뇌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하고 조작하기도 한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본 것, 우리가 경험한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백인대장이 보여 준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 삶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의 시간, 신비 안으로 초대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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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파 사람>
-참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주님,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얼마전 어느 자매로부터 오랜만에 받은 박카스 선물이 참 반가웠습니다. 70년대 초등학교 교편시절 가난하고 순박한 어머니들이 가장 많이 사들고 온 선물이 박카스였습니다.
“이념전쟁”
이번주 ‘시사IN’ 주간지 표지 제목 글자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이 이념전쟁에 이념중독입니다. 극단의 이념에 중독되어 광신(狂信)이 되면 약이, 답이 없습니다.
정말 무서운 악령같은 것이 이념입니다. 좌우 이념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념전쟁으로 한반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요! 그래서 어제 집무실 태극기 아래 제 신원의식을 분명히 하는 글귀를 써서 붙였습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수도사제이다.”
예수님의 복음만이 이념중독의 병의 치유제입니다. 이념중독을 치유해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때로 이념전쟁의 전쟁터와도 같은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양 진영 서로간의 증오와 멸시의 댓글들이 난무합니다. 똑같은 사실에도 반응은 얼마나 극단인지 인간성 상실을 목도합니다. 참으로 냉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념이 아닌 민생이, 복음적 삶이 참으로 절실하고 절박합니다.
참으로 이념에 중독되지 않은 참사람이, 예수님파 참 복음의 사람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참고로 오늘 강론 제목은 “예수님파 사람-참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입니다.
바로 14년전 2009년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이 그런 분입니다. 추기경이기 이전에 참사람, 예수님파 복음의 사람 김수환 추기경이었습니다.
어제 뜻밖에 14년전 당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의 추도사를 읽으며 공감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하신 한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 곁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주교직에 오르고 추기경직에 오르시며 그것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의 밑바닥에서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큰 빚을 지고 사셨습니다. 연세가 높아지신 다음에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요모양 요꼴’이라 탄식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바보야!’라고 읊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추기경님, 저는 믿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내 사랑하는 바보야! 그만하면 다 이루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평안히 가십시오, 추기경님. 그리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당신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사랑하셨던 우리 백성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여 주십시오. 많이 아껴주셨던 강우일이 인사 올립니다. 2009년 2월20일”-
김수환 추기경님은 좌우 이념에 물들지 않은 참 복음의 사람이자 참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푸른 하늘에 흰구름 같은 영혼이었습니다. 저에게 자주 사진을 보내 주는 분의 사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있는 사진들입니다. 부단히 푸른 하늘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영혼입니다. 어제는 예전 글이 생각나 답글로 대신했습니다.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되네!”
또 하나 이런 글도 생각납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푸른 하늘 안
흰구름이 되어
임의 품안에 노니는 이”
분명 참사람, 복음의 예수님파 사람, 김수환 추기경님 영혼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반갑게도 이런 순수한 영혼을, 겸손한 믿음의 참사람을 만나니 바로 이방인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의 평지설교후 등장하는 첫 인물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순수한 영혼의 참사람은 종파를 초월하여 곳곳에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과정 전체에서 백인대장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러납니다. 감동적인 것은 자기가 아끼던 노예가 죽어갈 때 자존심을 내려 놓고 겸손히 주님을 찾는 모습입니다. 백인대장의 진면목을 증언하는 유다인 원로들입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백인대장의 진면목의 절정은 다음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주님의 방문을 만류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
바로 여기서 유래된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어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는 예수님이요 곧장 백인대장 노예는 치유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일이 없다.”
참으로 이런 진실하고 겸손한 믿음이 주님은 물론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도 바로 이런 믿음의 표현입니다. 겸손한 믿음의 사람, 백인대장이야말로 참 예수님파 사람이라 할 수 있겠고 이후 그의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도 날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참으로 예수님파 참사람이 되어 신심깊고 품위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물론이고 모두를 위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모두를 위한 끊임없는 감사 기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예수님파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파 바오로의 신원의식과 이어 우리를 위한 기도의 권고에 감동하게 됩니다.
“나는 이 증거의 선포자요 사도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과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이념에 중독되지 않고 참사람 예수님파로 살기위해 진실하고 항구한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백인대장같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몸 둘곳 하느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시편7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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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저 말씀만 하소서>
한 신자분께서 “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마음은 간절한 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 ‘내일은 잘해야지’ 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제가 그렇습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 불만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 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주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그러니 믿고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으로 기도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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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아이가 방학 때 하루 종일 게임만 했던 적이 있다고 말해주더군요. 부모님께서 마침 친척 집에 가신 날, 이날은 후회 없이 게임만 하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화장실 갈 때와 주문 배달한 피자 먹을 때 말고는 게임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원 없이 게임했으니 이제 게임하기 싫겠다.”라고 말했더니, “아직도 부족해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게임만 하는 것이 몸에 좋을 리가 없겠지요. 이 사실을 아이도 잘 알고 있었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임을 끊기는 힘들었습니다.
우리가 동물보다 품위 있는 이유는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품위를 버리는 사람이 점점 늘어납니다. 욕구를 계속 표출해서 자기에게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아마 대표적인 예가 ‘묻지마 범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욕구 조절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가 품위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인간이기에 어렵더라도 반드시 욕구를 참아낼 수 있다는 자기에 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욕구를 조절하면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 때, 주님의 멋진 자녀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욕구를 참아내서 자기 품위를 높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백인대장의 품위를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로마의 백인대장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께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편하고 쉬운 방법일 것입니다. 하지만 백인대장은 쉬워 보이는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입장도 헤아립니다. 유다인이 이방인의 집 안으로 들오면 불결해진다는 율법을 알고서, 당신 말씀만으로도 자기 노예의 병이 고쳐질 것이라는 믿음을 보입니다. 이 믿음이 너무나 대단하기에 우리는 영성체 때에 그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굳은 믿음이 없다면 그러한 행동을 전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백인대장의 품위였고 그 품위가 사랑하는 노예의 병을 고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품위는 어떤가요? 그냥 품위는 치워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하는 편하고 쉬운 길만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절대로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표징도 볼 수 없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동물처럼 본능에만 충실한 것이 아니라, 그 본능을 조절하면서 품위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품위를 지키면서 멋진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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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곁에 당신 아니 계셔도>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내 곁에 당신 아니 계셔도>
내 곁에
당신 아니 계셔도
당신께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마냥 좋습니다
내 곁에
당신 아니 계셔도
당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마냥 좋습니다
내 곁에
당신 아니 계셔도
당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마냥 좋습니다
내 곁에
당신 아니 계셔도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마냥 좋습니다
내 곁에
당신 아니 계셔도
당신께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마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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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나도 평온하고 세상도 평온하도록>
우리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미래와 관련하여 기도해야 하고,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과 특히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선 무관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하는 짓을 보면 눈 감아 버리고 입을 다물고 싶습니다. 꼴 보기 싫고 입 더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것이지요.
두 번째로 기도하는 것은 걱정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사도 걱정하지 말고 기도해야겠지만 국가 대사는 더더욱 걱정에 머물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기도하는 것은 분노와 비난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인 특히 내가 반대하는 정당의 정치인을 볼 때 분노하게 되고 비판과 비난으로 일관하기 쉬운데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부정 에너지를 사랑 에너지로 바꿀 필요가 있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살만한 공동체로 바꿀 것입니다.
이 얘기를 길게 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지금 우리나라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앞을 향해 달리지 않고 뒤를 향해 그렇게 달립니다.
지금 우리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 싸움꾼인 것 같고, 그래서 싸움만 하지 발전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으며,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도 힘들어 허덕이는데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대통령과 국회의원으로 뽑은 것 아니잖아요? 이러라고 우리가 뽑은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두 가지로 잘 대처해야 합니다. 다음 선거에선 현명하게 투표하고 지금 당장은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는 정당인이 되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당인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정당에 속하고 그 정당을 따르지 하느님 나라에 속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는 신앙적인 자존심을 잃지 말고 그깟 정당에 몸을 담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복음화해야 할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러나 흙탕물 속의 연꽃처럼 세상에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향기를 풍기고 다른 한편 복음으로 세상을 심판하는데 그 심판이 선거에서 복음적인 투표로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미 우리가 뽑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걱정이나 하고, 욕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온하도록 그래서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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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도로 돌리기>
요즘 제가 영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 <기도로 돌리기>입니다. 우리는 신선처럼 이슬만 먹고 살 수 없고, 티브 프로그램에 많이 나오는 자연인처럼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도사처럼 동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비비며 살다보니 자주 판단하고, 비판하고, 욕하며 살고, 특히 정치가들에 대해서 더 많이 판단하고, 비판하고, 욕하며 사는데 그때마다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제가 괴롭고, 수도자라는 자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한심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면에서 괴롭기도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 특히 욕하는 것은 그들을 초월치 못하고 그들과 같은 수준에서 뒹구는 것이기에 그런 제가 한심하고 그런 저에 대해 화가 나는 겁니다.
그러니 판단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 비판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 더욱이 욕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내가 기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같은 수준의 한심하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기도로 돌리기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것, 곧 기도하고 사랑하는 내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는데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기도하는 나는 그들과 같이 똥구덩에서 뒹굴지 않아 품위 있고, 인간적으로만 상대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향하니 신심 깊으며, 욕하고 화를 내지 않으니 마음이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기도로 돌리기>를 하기로 했지만 아직은 열 번에 한두 번밖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에 실망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이런 나에 겸손하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저의 전 삶이 의식화와 성사화가 될 것입니다.
한 술에 배부르려는 또 다른 욕심쟁이가 아닌 삶의 의식화와 성사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겸손한 노력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다잡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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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7,9)
<백인대장의 믿음!>
오늘 복음(루카7,1-10)은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병들어 죽게 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간곡히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백인대장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이렇게 아뢰게 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7,6-7)
백인대장의 이 말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 크게 감탄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백인대장의 노예가 살아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7,9)
오늘 독서(1티모2,1-8)는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2,4-6)
진리이신 예수님!
당신의 전부를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 나의 작은 믿음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 오늘 백인대장의 믿음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담아서 주님께 아룁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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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Ma4T127hzl4?si=blT55niodWFfTk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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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 9)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요.
서로를
살리는 것이
가장 소중한
믿음입니다.
소중한 믿음은
언제나
소중한 사람을
향합니다.
소중한
사람을 향하는
믿음은 모든
관계의
살아있는
깨끗한
생명입니다.
믿음 속에
살고있는
소중한 인격을
다시
만납니다.
삶을 가꾸고
믿음을 키우는
소중한
인격입니다.
소중한 인격
소중한 믿음은
주님 앞에서
정직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직한 존중이
믿음입니다.
백인 대장의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을 만납니다.
그것은 믿음의
체온을 나누는
마음의
관계입니다.
간절한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기도가
하나 되는
체험이며
대체할 수 없는
인격을
다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은총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겐
주님과
마주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
우리의
치유이며
회복입니다.
지켜야 할
긍정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자격과
신분마저
벗어놓고
은총에 맡기는
믿음을 만납니다.
믿음의 일부인
우리들입니다.
가장 좋은
은총의 시작은
간절한
믿음입니다.
커다란 인격의
힘은 다름 아닌
주님을 찾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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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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