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본문 주해)
표제어에 나오는 ‘알라못’은 무슨 뜻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여러 곡조 중의 하나로 본다.
1~3절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이 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내뿜고 산들이 노하여서 뒤흔들려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셀라)”(새번역)
시인은 어려움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어려움이 질병이나 가난이나 괴로운 사고들 정도가 아니라, 대지진의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바닷물이 솟아나고 산에 바닷물이 덮치는 상황은 시인이 상상하는 가장 큰 재앙의 상황인 것이다.
고라 자손이 쓴 이 시편의 역사적 배경은 히스기야 통치 14년에 당시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했을 때로서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피난처이신 하나님이 계시니 그분을 신뢰함으로 대지진과 같은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4~7절 : “오, 강이여! 그대의 줄기들이 하나님의 성을 즐겁게 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하는구나.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니, 그 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동틀녘에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민족들이 으르렁거리고 왕국들이 흔들리는데, 주님이 한 번 호령하시면 땅이 녹는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셀라)”(새번역)
세상이 요란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성은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것을 시냇물(강)이 흐르는 것으로 묘사한다. 강은 생명을 말한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의 보호가 동틀 녘의 구원으로 묘사된다. 동이 튼다는 것은 지난밤의 어둠이 물러가고 밝은 새날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소리를 발하시니 땅이 녹았고 뭇 나라가 떠들고 왕국이 흔들렸다. 땅이 녹았다는 것은 그들이 겪는 공포를 의미한다. 앞서 1~3절에서 시인이 느꼈던 바로 그런 어려움을 뭇 나라, 즉 이스라엘 어렵게 했던 앗수르로 상징되는 뭇 나라가 우왕좌왕하며 시끄럽게 소동한다는 것이다.
천지가 다 녹아내려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데 왜 ‘야곱의 하나님’일까?
시편이라 축약하여 ‘야곱의 하나님’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야곱과 같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쉽게 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그런 야곱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하나님이란 무궁한 사랑의 하나님이며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양육하시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과 같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이다.
야곱이 자격이 있어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이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한 것처럼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이다.
8~11절 :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와서 보아라.
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활을 부러뜨리고 창을 꺾고 방패를 불사르신다.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아라. 내가 뭇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 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셀라)”(새번역)
하나님께서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다.
여기서 땅은 흙으로 이루어진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전쟁을 쉬게 하고,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신 것이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초청하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한다.
이렇게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바로 야곱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고백한다.
(나의 묵상)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
야곱의 하나님이란 어떤 의미일까?
태어나기도 전, 태중에 있을 때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 하나님이시다.(롬9:13)
온갖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기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속임수를 쓰는 그런 야곱을 끊임없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셔서, ‘속이는 자 야곱’에서 ‘하나님이 투쟁하신다’를 뜻하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 주신 하나님이시다.
창세전에 나를 택하신 하나님, 그리고 온갖 세상적인 방법으로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그런 나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니 야곱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신 것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 되시니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나도 고백한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내가 한 고백과는 달리 인간적인 두려움과 근심이 날마다 올라오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볼 때, 미묘한 인간관계 속에서 영적으로 시달릴 때, 대번에 척 감당하고픈 일이 있지만 경제적 능력이 되지 않을 때.....그렇다.
그러나 이런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으니 바로 본문에 나오는 환란과 같은 것이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리든지’
이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를 생각나게 한다. 바로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즉 세상 끝날의 그림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간절히 사모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주를 탄 자로서 나의 영원한 피난처이신 예수님의 품속에 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환란이 두렵지 않은 자가 눈앞에 벌어지는 세상의 상황 때문에 요동한다는 것은 참으로 모순이다.
세상의 상황 때문에 두려운 이유는 육신으로 이 땅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안 남겨진 고난을 십자가로 채워가며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매일 주님이 진정한 나의 피난처이심을 말씀을 통해 듣고, 말씀 속에서 확인하고, 말씀으로 고백하는 삶이 바로 이기는 삶인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지게 하실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생명의 물길을 터 주셨고, 애굽인들에게는 넘치는 물로 그들을 다 덮어버리신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숨죽이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기만 할 뿐이다.
현재 내 눈앞에 일어나는 일에 놀라고 멈칫거리지만, 주님께서 과연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숨죽이며 가만히 서서 보는 연습을 한다.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주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며 나의 피난처이신 주님을 찬양할 뿐이다.
장차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그 큰일도 그렇게 보면서 완전한 피난처이신 주님 품속으로 달려가 안길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만국이 떠들고, 만인이 떠드는 이 시대에
주님을 알고,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할 일은 ‘가만히 서서 보는 것’ 뿐입니다.
이 땅에서 놀랄 만한 모든 일에도 가만히 서서 봄으로 주님만을 찬양하게 하시고
장차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천지가 개벽이 되는 그 일에도
그 완전한 피난처인 주님 품속에서 안전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남은 생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