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기억 속에 할머니는 언제나 덜컹거리는 차창 밖으로 미루나무가 줄지어 선 신작로를 그렇게 한참을 달려 차멀미에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질 즈음 동구 밖 방앗간 앞에 내가 탄 버스가 멈춰서고, 꼬리에 달고 온 뽀얀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고 나면 거짓말처럼 땀에 절은 베적삼에 약간 굽은 허리, 쪼글쪼글 주름진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가 반가이 두 팔을 벌리고 늘 그렇게 거기 서 있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홀짝이며 소화도 시킬 겸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는 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려댄다. 오랫동안 독립영화만을 고집해온 친구다. 대뜸 <집으로>란 영화를 봤느냐고 묻는다.
벌써 서너 달째 <벨레로폰의 편지>란 시나리오와 씨름 중이라 아직 보지 못했다고 하자 그 친구는 한번 빨리 가서 보라고 권한다. 이건 일종의 관객들에 대한 기만이고 사기라며 자신이 직접 영화촬영지(지통마)를 찾아가는 여정을 카메라로 담을 예정이란다.
물론 개봉 사흘만에 30만이 들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한번 보려던 참이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정향 감독과는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전에 씨네2000에서 그 친구가 <미술관 옆 동물원>을 한창 촬영하고 있을 때 난 바로 옆 부스에서 <마요네즈> 각색을 의뢰 받았던 관계로 몇 번 얼굴을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집으로>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은 죽 읽어 봤다. 하나 같이 "외할머니 생각이 나 눈물이 났다" "감동적이다" 등등 찬양일색이다. 다시 내가 요즘 주로 활동 중인 다음카페 <창작시나리오>에 들어가니 좀 전에 통화했던 친구의 글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제목부터 "산골 몬도가네"로 섬뜩하다.
일단 편견을 버리고 영화관을 찾았다. 평일(화요일) 오후 2시인데도 객석은 거의 다 차고 관객층도 10대부터 5,60대까지 다양함에 놀랬다. 잠시 후 객석에 불이 꺼지고 촤르르 영사기가 돌아가며 간간이 터지는 웃음과 어디선가 훌쩍훌쩍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드디어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며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는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써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어쩜 저렇게 나와 같으면서도 또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영화촬영지인 지통마를 찾아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다음 날 10시쯤 영동에 도착, 역 앞에서 먹을 것을 배낭에 꾸려 넣고 걸어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사람을 붙잡고 지통마로 가는 6번 승합버스를 어디서 타느냐고 물으니 모르겠다는 듯 다들 고개를 갸웃댄다.
상촌면에 가면 있을까 싶어 상촌행 버스에 올랐다. 임산리에 도착하니 때마침 장이 열렸다. 장 구경을 하고(장이라고 해봤자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일직선 도로를 따라 좌판이 100여 미터 남짓하다) 영화에서 장날 할머니가 손자에게 자장면을 사주던 기억이 떠올라 중국집에 문을 밀치고 들어가 자장면 곱빼기를 시켰다.
자장면을 먹으며 중국집 아주머니에게 영화 속의 마을버스와 지통마를 물으니 그런 버스는 없고 흥덕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궁촌1구에서 내려 수원지를 끼고 가파른 오르막을 십리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단다.
어라? 분명 영화 속에서는 장날 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손자 손에 초코파이를 들려 먼저 태워보내느라 처음에 9번 버스에 올랐다가 아니다 싶은 듯 다시 내려 다시 5번을 스쳐 경험적으로 지통마로 가는 6번 버스를 확인해 태워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이정향 감독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고안해 낸 장치였음을 알았다. 아니 달랑 승합버스가 한 대만 등장했다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번호를 단 똑같은 승합버스가 나란히 세 대가 서 있으니 속아넘어갈 수밖에....
중국집 아주머니가 알려준 대로 궁촌1리에서 버스를 내려 수원지를 끼고 가파른 비포장도로를 걸어 올라갔다. 수원지가 끝나는 갈림길에서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고 결국은 길을 잘못 들어 새막으로 빠졌다.
한참을 올라가다 이상해 동네할아버지에게 여기가 <집으로> 영화촬영지인 지통마냐고 묻자 길을 잘못 들었다며 지통마는 다시 오던 길로 내려가 골을 타고 안으로 죽 들어가다 보면 마을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점마)가 집으로 할머니가 사는 마을이고, 거기서 좀더 들어가면 영화촬영지인 지통마란다.
고맙다 인사하고 산 능선을 가로질러 곧장 내려가니 김을분 할머니가 사는 마을에 도착, 동네사람에게 할머니 댁을 물으니 서울 아들집 올라가 지금은 아무도 없단다. 김을분 할머니를 만나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둘러 숨이 턱까지 차 오르는 것을 애써 참아 가며 드디어 영화포스터 속의 굴피집을 발견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굴피집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먼저 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 잡지사에서 나왔냐고 물으니 그는 어제 영화 <집으로>를 보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갑자기 영화촬영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수업도 빼먹고 이렇게 무작정 달려왔단다.
그런데 우째 이런 일이??? 가만 세트를 살펴보니 부엌 한쪽 벽 일부가 허물어지고 아이가 롤러를 타고 놀던 마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지붕의 굴피도 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우리는 영화 <집으러>에서 유일한 롱테이크로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초코파이 가게와 초코파이 할머니를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다시 임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농협 옆에 위치한 가게(일성상회)를 찾아냈다.
조심스레 다가가 여기가 <집으로>에서 할머니가 초코파이 사던 가게냐고 묻자 바둑을 두시고 있던 가겟방 아저씨가 여기가 맞다고 한다. 그런데 분명 영화 속 장면에서는 초코파이 할머니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초코파이 하나를 더 덤으로 주던(실은 두세 개 더 담아주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가슴 찡한 정과 함박 웃음을 터트렸지만) 방향이 방문을 열면 바로 손닿는 왼쪽 선반이었는데 현실에는 초코파이가 놓였던 왼쪽 선반은 없었다.
또다시 영화 속 공간과 현실공간의 차이를 확인하며 초코파이 할머니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느냐 물어 가겟방 아저씨 알려준 물한계곡 쪽으로 달렸다. 한 시간을 헤면 끝에 저녁 무렵 어렵사리 초코파이 할머니가 사는 집을 찾았다.
집은 위태위태 약간 옆으로 기울어져 있고 젊은 사람 손을 탄 흔적이 없어 그런지 너저분한 하면서도 정겨운 것이 지통마 세트 보다 더 현실감을 주었다. 다가가 조심스레 할머니를 불러 보았다. 조용.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그러자 빼꼼 방문이 열리며 술을 한잔 걸쳤는지 볼이 발그스름하고 영화에서처럼 얼굴이 넙데데한 게 우리는 <집으로>에 나온 초코파이 할머니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동의를 구해 사진 몇 컷을 찍고 두툼한 이부자리 밑으로 손을 넣어보니 방바닥이 싸늘하다. 혼자 살다보니 귀찮고 해 오늘은 군불을 지피지 않았단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한 것이 그래 저녁을 드셨냐고 묻자 좀 전에 아랫마을에 마실갔다 술 한잔 걸쳐 별생각 없단다.
그러지 말고 우리도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며 극구 사양하는 할머니를 모시고 인근 식당으로 들어가 된장찌개를 시켰다. 저녁을 하며 할머니 이름을 묻자 할머니는 이동지월라며 해방되고 호적을 바꿀 때 그냥 올려 그렇단다.
내가 영화 찍을 때 카메라가 무섭지 않았냐고 묻자 할머니는 마치 프로처럼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며 한번에 끝냈다고 자랑하신다. 영화 찍을 때 얘기며 할머니의 살아온 얘기를 듣다보니 어느 새 밖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치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생각이나 할머니를 불러 세우고는 얼른 가게로 들어가 초코파이 한 상자와 과자 한 보따리를 손에 들려 드리며 앞으로 귀찮더라도 방에 군불은 꼭 지피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인사드렸다. 진심으로....
할머니는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집을 향해 어둠 속으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며 연신 뒤를 돌아보며 "어여, 가라!"고 손을 내저으신다. 우리는 다시 한번 건강하시라고 할머니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우연찮게 굴피집에서 만나 초코파이 할머니를 찾는 여정에 같이 동행했던 친구는 내일 수업이 있어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 친구가 지통마 입구까지 나를 태워다주는 바람에 그래도 수월하게 지통마 미술팀이 촬영기간 내내 묵었던 민박집을 찾을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민박집 할머니에게서 생생한 촬영 뒷이야기를 들었다. 칠십 평생 영화의 '영'자도 모르던 자신들이 영화에 나왔다는 것과 스탭들과의 끈끈한 유대관계, 특히 요즘 젊은 사람답지 않게 송 부장(제작부장)의 맘 씀씀이가 너무 고맙다는 말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정들었던 촬영팀이 떠나고 민박집 할머니는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내게 고백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오지마을에 자식들은 하나 같이 결혼해 도시로 나가고 늘 혼자 적적했던 참에 어느 날 갑자기 낮도깨비처럼 촬영팀들이 들이닥쳐 6개월 동안 북적대다 일순 썰물처럼 빠져나갔는데....
다음날 헤어질 때 영화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 앞으로 여길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이을텐데 세트(굴피집)가 훼손돼 없어진 것을 알면 여기까지 애써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실망만을 안고 돌아갈 것이라고 더 이상 훼손하지 말고 보존해 줄 것을 부탁드렸더니 민박집 할머니(세트장밭 주인)는 몰랐다고 꼭 그렇게 하겠다고 나와 굳게 약속했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다 인사드리고 서둘러 발길을 지통마에서 임산리까지 20여 리를 터덜터덜 걸어 나와 면사무소를 찾았다. 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제일 앞자리에 앉은 여직원에게 민원이 있어 왔다고 하니 일순 표정이 굳는다. 그도 그럴 것이 배낭을 둘러멘 외지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불쑥 들어서자마자 민원이 있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담당자를 만나 훼손된 세트장을 군 차원에서 보존해줄 것을 건의 드렸더니 담당자는 자신들도 여러 가지 방안을 구상 중이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지금 세트장이 서 있는 지통마로 들어서는 곳이 영동군 일대 주민들이 먹는 상수원 보호구역이고 산골소녀 영자사건에서처럼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우려하는 그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1박 2일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내가 여행하며 만났던 가슴 따뜻한 사람들과 남은 여생을 영화의 추억을 안고 살아갈 지통마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찡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