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찾아 나들이길 남녁땅으로 나섰다. 경주시에서 동해안 쪽으로 약 20K에 골굴사(骨窟寺)
가 있었다. 해발고도로 보면 그리 높지 않은 그 곳은 아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과거의
시간 속에 바닷밑이 융기되어 솟아올라 그 당시 바닷물에서 살았 던 삼엽패이거나 조개류들이
바위에 옹졸종골 붙어서 군집하면서 패여있는 바위산의 모양새로 보였다. 그러길레 우선 신
기스러움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마치 사람이나 짐승의 관절이나 뼈처럼 느껴져 사찰이
름을 바위굴이 많은 뼤모양을 생각케하는 골굴사라 명명했는 가 보다.
경주시 골굴사 및 기림사 탐방기
이 골굴사가 위치한 지형이 험준하면서 경사가 사뭇 심한 곳에 12개의 조그마한 법당들을
마련하고 있는 모양새가 사뭇 신비스럽게 세인들에게 보이는 만큼이나 이 가람을 최근
까지 더욱 관심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한국의 선무도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유한 무예 선무도를 개발하여 많은 스님이나 사람들이 동 무예를 하루같이 연
마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동방 한국의 소림사라 일컫어지는 사실이 당연할 것이다 .우리나
라 사람들 보다 오히려 외국인이나 서구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입구에
적지않은 숫자의 선무도 각 동작들을 조각하여 세워 놓았으니 이곳이 과연 선무도의 고향
이라는 점을 새삼 느기게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선 힘과 절도와 그리고 수련이 공존하나니 나약한 현대인에겐 그냥 불로초인가 !
사뭇 험한 경사길을 올랐다. 때에 따라서는 밧줄에 의지하면서 좁고 아슬아슬한 길을 지나고 나면
드디어 골굴사의 마애불을 만나게 된다. 돈황 석굴처럼 굴들을 품고있는 석산 꼭대기에 마애불은
으례
잔잔한 미소를 보이면서 찾아온 세인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대한민국
보물 제 581호로 지정되어 있는 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전에 인도에서 그 당시 신라를 찾아온
광유(光有)스님이 동 사찰 골굴사를 창건하면서 동시에 조각상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심하세요! 아차하면1 떨어집니다 ?
불상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그당시 불교가 융성발전하면서 국세가 크게 뻐어나면서 건립한 토함
산 기슭의 신라 대표적 사찰인 불국사의 불상처럼 웅장하고 힘있는 자태와 맥을 같이하는 듯하게
필자에게는 보였다.
바위속 석굴에 안치된 불상은 세속의 경계를 이미 벗어난 듯하다. 그리고 세간의 뭇 중생들이
세파속에 살면서 힘들고 어려워하는 모습들에게 큰 연민의 정을 보이는 듯하다. 아하 알것 같도다.
얼마나 세상사 숨차하고있는가를 어루만져 줄것 만 같다. 그래서 관세음이고 부처님께서 이 가련
한 중생들은 자꾸 부처님께 교에 의지하는 것을 이미 아는 가 보다. 주변 바위로 된 그 곳은 얼마
나 인간적인가 ? 라는 상념을 해본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불자들은 개달음이라는 의미를 점차 알게 돨지니 마치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얻느니라" 라고 말이다.
우리 엣적부터 내려오는 바위에 대한 토속적 정령신앙을 엿 볼 수 있는 지경이다. 남근과 여궁
모습을 바위나 자연속에서 찾아내 그대로 오복신앙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특히 후
대의 자손을 많이 남기려는 다산(多産)이라는 인간의 모태적 믿음은 곧 농사에서의 풍요요 그것은
곧 재생이나 생식의 의미인 리푸로덕션 (Reproduction)이니 이는 동서양을 관통하고도 남는 인
간의 원초적 본능에 가까운 것 일리라 . 원시상태는기실 인간 삶에 근본을 가리키나니 .. 무엇을
더 바라고 기대하리오 ~~~~~
산 속의 山神은 석굴속에서 함박 웃음을 그려보이고 있는 상태이다. 곁에 호랑이도 아마도
즐거움을 나타내고 있는 성 싶다. 우리의 고유신앙속에서 부터 현재까지 역력히 살아있는
자연 속 산속에서의 보호신인 산신은 언제보아도 정겹다. 그리고 자연의 여러 샐명체들과
언제나 가족의 개념으로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양태의 사념들은 항상 줄거움이 그 속에 내
재하고 있는 성 싶다.깊은 산 속의 대표적 호랑이와 산신은 어째서 정겨운 관계일까? 라
는 의문이 이미 자연히 풀리고 만다.
골굴사의 비로불은 으례 법신불로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오늘 만 하소서 ~~~~~~ ~~~~~
그리고 내일만 하소서 ~~~~~~ ~~~~~
한국의 불교학을 공부 할 수록 끝에가서는 신라의 원효대사의 공부에 흠뻑 빠지게
마련일 것이다.. 그 수행이나 학문의 정녕 깊이나 나아가 자재의 큰 의미는 어쩔 도
리가 없을 것이다.
일본 불교학에서는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받고있으니 .....
골굴암의 흰 꽃들은 언제냐 듯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구경....
그러나 꽃은 벌써 집 뜰악에도숨은 듯이 그 자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법당 구석에 있는 포대화상상을 발견했다. 자꾸 만지면서 기원하면
복이 온다고.... 중궁에서 전파되었기에 중국식 기원방식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만한 ......
참 어디 부위를 만지면서? 넌지시 묻고 있는 중이다..
그 법당에 내려오는 실화가 있었다. 진도개인가 범회가 열리면 으례 법당안에 들어와
법문을 들었던 견공은 지금은 초입에 기념조각상으로 남아 있었다. 누구나 견공이 법당
안에서의 참석을 당연시 했던 사실은 과거사나 현재의 인연설을 자꾸 생각나게 한다.
필자가 정녕 오래전 괴거시절 동 암자에 들렸을 당시 법당에서 같이 법회를 했던 기억
이 어제같은데 많은 세월이 꿈결같이 지나갔으니 .....
촌음이 쌓여 劫이 되나니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것은 아닐 듯 하다.
경주시 토함산 넘어 동해를 바라보면서 골굴암과 멀지 않은 곳에 기림사가 위치하고
있다. 조계종 제 11교구불국사 말사로서 643년 (선덕여왕12년)에 인도스님 광유스
님이 창건한 후, 임정사(林井寺)로 불리워지다가 원효스님이 확장· 중수하면서 인
도 석가모니 시절 유명한 기원정사의 '祈'자와 임정사의 '林'을 따서 기림사로 개칭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골굴암과 더불어 인도에서 신라에 온 광유스님과 원효스님과
연줄이 닿아 있는 정녕 오래된 고색이 남아있는 고찰이다
대적광전애에 모셔져 있는 웅장한 비로불 모습이다. 건장한 신체를 지닌 비로자나불상을
보면서 그당시 신라인들은 아니면 인도인들은 조금씩 수염을 기르고 있었나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면서 혼자 씨익 웃어 보았다.
구도 순례차 경주 외곽 기림사 대적광전을 찾았던 그 날짜가 2018년 3월 31일 이었다.
개강식보다 시간반 차이가 나는 시각이었다. 참그 날은 열반절 이었다, 그리고 그 날
밤은 보름달이 휘어청 밝은 날이었다. 그저 우연은 우연이지만 ....
세상 속엔 우리의 삶 속엔 우연같은 필연도 많을 진데..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지나는
것 인지 모르는 것 뿐 일줄이야 ....
기림사엘 가시거들 삼천 불전을 빼놓지 말고 들리세요 그리고 거기서 여러 불상 중
첫 눈에 화악 들어오는불상을 눈여겨 보십시요 아마도 당신의 전생에 어떤 생을 살
아왔는 지 어슴프레 일러 줄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한 불상과 딱 눈이 그야말로 맞았습니다. 원효상이 아니면 어떻랴 ..
그저 필자의 생을 걸어가는 길이니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탓하랴 ...
가람의 요사채 건물에서 나무의(목재의)향이 배어나오는 듯 싶다. 시멘트의 차거움은 그리고
비인간적인 그 건설재와는 구별하고 싶다, 어느 청신녀(善女)는 그 건물 녘에서 자꾸 카메
라 샷터를 누르는 모습이 괜히 정겹게 보여진다.
이곳에서도 돌담 을 빼놓지 않고 포착했다. 경계와 경계를 넘어 구분하지 못하는 경지까지를 불교에서는
사뭇 강조하고 있으니 ~~~~~~
" 눈의 경게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無明도 무명의 다 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
함 까지도 없고 苦 集 滅 道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리 "라 고 말이다.
禪師 고승의 이 사랍문 집
하루넘어 불도를 닦으면 욕심도 성냄도 그리고 어리석음도
삭혀서 녹아버리고 마니~~~~ 그대는 집에서 행함이 어쩌
겠는 가 ? 어제가 오늘이 아니던가?
불이 밝이진 던 날 ....... 눈 수술을 받았나 ? 이 밝음이
동시에 통하니 .... 山河大地 眞 光明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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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 경내에서 뜻밖에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영당을 발견하였다.
그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에 불교에 귀의 하였으며 경주 남산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 역사에 빛나는 금오신화를 저술하였다. 불교사에 우뚝 선
석학 김시습의 영정을 향하여 고개 숙여 참배하였다.
돌아나오면서 사천왕 문을 다시 쳐다 보았다. 속간을 나누면서
티없이 살라고 부탁하는 사천왕들이 보여지는 듯 했다.
기림사 계곡에는아름다운 아취식 돌문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다. 현실에서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야 된다고 여겨진다. 행복지수가 실생활을 바꾸는 지표로 사용되
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학자는 손에 잡히는 급격한 변화를 기대하기보다 는 꾸준하고 장기적
인 개선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기대감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과’보다는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감시하고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한 내용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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