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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수로꾸리아
 
 
 
카페 게시글
오늘의말씀 ♣ 복음묵상 스크랩 2008년 5월 7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대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11 08.05.07 09: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11ㄷ-19)

 

 "Holy Father,

 keep them in your name
that you have given me,
so that they may be one   

 just as we are one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교회에 닥칠 박해를 내다본다. 원로들이 불목과 분열로 교회를 어지럽힐 것도 예감하고 있다. 에페소 교회는 삼 년 동안 그가 정성으로 이끌어 왔던 공동체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이끄심을 믿고 에페소를 떠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기도인가! 훗날 제자들은 많은 분쟁에 말려들지만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다. 스승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차츰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복음).

★★★

 

 어떻게 살아야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이 될는지요? 바른 정신과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부모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사는 것입니다. 온몸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겠지요.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결코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 곁에 있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것이지요. 사람을 떠나 홀로 있는 것을 어찌 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매일 아침 다정한 눈빛으로 얘기해 주는 그 말씀을 진리라고 하신 겁니다. ‘잘 살아라. 기쁘게 살아라.’ 그런 말들이 아버지의 말씀이 아닐는지요?
부모는 자녀들이 잘 살기를 바랍니다. 똑똑한 자식이든 못난 자식이든 다 같이 잘 살기를 바랍니다. 몸이 성치 못한 자녀가 있다면 애정을 더하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뛰어난 이에게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에게도 똑같이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자녀답게 신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 입니다.

 

 

천국행 차표    

백남해 신부-

 

초등부 주일학교 아이들을 모아놓고 신부님이 천국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설명 끝에 천국에 가고 싶은 친구들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모두들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저요! 저요!”를 외쳐댔습니다. 신부님은 흐뭇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만치 앉은 요한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평소 주일학교도 열심이고 착하기로 소문난 녀석이
그렇게 있으니 신부님이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후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요한이는 친구들과 함께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아요?”
요한이는 머뭇거리면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도 가고 싶어요. 신부님, 근데 엄마가 주일학교 마치면 바로 집으로 오라고 했어요.” 옛말에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국을 보장하더라도 지금 생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칫 광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그릇된 신앙을 통해서 천국을 찬양하며, 신도들을 집단 자살로 내모는 사건이 국내외에서 드물게 터지곤 합니다. 천국은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충실히
산 다음 받는 보상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라는 주님 말씀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시간을 성실히 살며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기도드립시다.

 

 

  베로니카, 하느님이 주신 사랑

 -서영남(인천 민들레 국숫집)-

 

민들레 국숫집은 느슨하게 연결된 하나의 살아 있는 공동체를 꿈꾸고 있습니다. 기초 공동체로 ‘베베모임’이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베드로와 아내인 베로니카와 딸 모니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입니다.
하느님이 보내주신 VIP 손님들과 교도소 형제들이 민들레 국숫집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풂이 아니라 섬김을 실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시는 봉사자들과 후원 은인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거들어 드리면 혼자서 일어설 수 있는 ‘민들레의 집’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공부방인 ‘민들레의 꿈’ 아이들도 있습니다.
느슨한 민들레 국숫집이 하나 되게 해주는 일치점은 베로니카입니다. 지하상가에서 조그만 옷가게를 하면서 수입의 대부분을 민들레 국숫집에 내놓습니다. 사형수와 무기수 형제 아홉 명을 동생 삼아 친누나처럼 옥바라지를 해줍니다. 얼마나 정성껏 돌보아 주는지, 어떤 가족이 이처럼 옥바라지를 할 수 있을까 감탄합니다. 노숙을 하면서 힘겹게 살아왔던 ‘민들레의 집’ 식구들도 가족처럼 따뜻하게 보살펴 줍니다. 어느새 스무 명이 넘은 식구들을 정성껏 챙겨줍니다. 옷이 허름하면 새옷으로 갈아입히고 용돈도 슬쩍 나눠줍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마음을 다해 간호해 줍니다. 머리도 감겨주고 얼굴도 씻겨주면 민들레 식구들이 아기처럼 좋아합니다. ‘민들레의 꿈’ 아이들도 잘 보살펴 줍니다. 베로니카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선물로 주신 사랑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사랑의 결실, 일치>


오래 전 한 특별한 임종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르신 자식농사를 참 잘 지으셨더군요. 당신의 친 아들 딸들만 해도 거의 축구팀 한 팀이었습니다. 5남 5녀. 다들 보기만 해도 흐뭇할 정도로 잘 장성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잘 기반을 잡았고, 이젠 시집장가들을 가서 각 집에 딸린 자녀들까지 모두 합하니 4-50명이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수를 누리셨고, 자식들도 다 잘 자랐고, 그래서 아무런 아쉬움 없이 홀가분하게 떠나셔도 될 만한데, 그래도 뭔가 하실 말씀이 남아있었습니다. 임종 직전 힘겹게 내뱉으셨던 마지막 유언의 한 마디는 이랬습니다.


“형제간에 화목하게...”


형제간에 일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자식들을 두고 떠나가는 부모의 심정, 대체로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여러 품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하나는 일치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치란 이런 것이다, 하며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시는데, 그것은 바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일치는 이 세상 모든 일치의 전형(典型)이자 모범입니다.


이런 일치의 모범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도 일치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시기 전에 유언처럼 남겨주신 말씀이 일치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세상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좁디좁은 나라인데도 이 지역, 저 지역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 학교 출신, 저 학교 출신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당(黨), 저 당 갈라져 피터지게 싸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합니다.


이런 세상 앞에 우리 교회 공동체가 지니는 사명은 막중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제대로 한번 일치된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일치할 때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먼저 체험해야겠습니다.


분열과 반목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신앙공동체의 일치된 모습을 보고, 무릎을 ‘탁’ 치면서 ‘아 바로 저것이로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하고 외칠 수 있도록 삶을 통한 증거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결실은 일치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면, 간절히 그와의 일치를 갈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출신지역이나 출신학교를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나이니, 직급이니, 서열이니, 경제적 능력 같은 것을 따질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간 높은 장벽으로 남아있었던 높낮이가 사라집니다. 나와 다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한 존재 자체만 남게 됩니다. 한 존재 자체만 소중하게 됩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아무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일치가 가져다주는 선물입니다.

 

   

   공통분모     

-김동하 신부-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가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함께 지내셨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누리시던 기쁨을 제자들이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공통분모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거룩해지는 길은 진리를 걸을 때입니다.
우리에게 공통분모가 되시고 진리가 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바탕으로 하나가 되고 하느님을 거쳐서 거룩해집니다.?
하나가 되고 거룩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대로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르 10,45 참조)
모욕을 견디는 사람이 되는(마르 15,16-20 참조) 것입니다.
섬기면서 모욕을 견디는 것은 마음을 버겁게도 하지만
마음을 넓고 깊게 만들어 서로 기쁘게 합니다.
아이들 목말 태우듯 사람들을 내 머리 위에 세우면
하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김민수 신부(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세상·육신·마귀'를 삼구로 여겨 멀리해 왔다. 삼구 중의 하나가 세상인데,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혹덩어리다. 연일 매스컴은 노후대책으로 10억 원 이상은 가져야 한다며 노후보장을 위해 보험을 들라 하고, 아니면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돈만 있으면 미래는 보장된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억, 억' 하면서 근심 걱정에 빠진다.
세상은 오락과 재미로 우리를 중독시키고 있다. 각종 소비문화·도박·알코올·마약·성에 빠져 '죽도록 즐기기'로 치닫다 보면 마치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언젠가는 비실비실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 것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상에 끌려가고 있다.
세상 유혹에 빠지는 사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마르 4,1­9)에서 가시밭에 뿌려진 씨와 같다. 싹이 나 자라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영생을 청하러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그분 곁을 떠나고 만 부자 청년(마르 10,17-­27)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세상 것에 집착한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기도하신다.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표징은 이웃과 나눔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신동원 신부-


  예수님의 부활을 맞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이 순간을 기뻐하며 흥에 겨워   노래 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듯한데 어느덧 부활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의 새로운 신비를 다시금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기 위한 새로운 모습으로 하느님 오른편으로 승천하심을 기억하며 예수님과의 또 다른 이별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혹시나 예수님께서 떠나셨다는 이유로 작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칫 부활의 기쁨과 믿음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우리의 모습을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로 올라가신 승천사건으로 또 다시 예수님과의 이별을 체험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주간의 복음을 통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용기를 내고, 부활의 믿음을 굳건히 하라고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또한 다시금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되새기며, 이제 곧 사랑하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이별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하느님과 당신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 모두도 예수님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게 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해 주시며,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냅니다.”라고 기도하시며, 죽음을 눈 앞에 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하느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우리도, 제자들도 예수님과 하느님안에서 서로 하나인 모습으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거룩하게 전하는 제자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까지도 당신을 믿으며 한 생을 받쳤던 제자들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시며, 끝까지 제자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된 사랑의 모습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기에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 맞이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처럼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의 모습으로 서로 하나된 사랑의 삶을 통해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부활의 신비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독서> : 에페소교회를 주님과 그 말씀에 맡기는 바울로
-
경규봉 신부-


에페소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한 바울로는 이제 원로들에게 부탁한다. 원로들은 바울로가 에페소 교회에서 보여준 모범에 따라 자신을 살피며 교회의 양떼들을 돌볼 중대한 임무를 갖고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하고 고귀한 임무이다.

앞으로 거짓된 교의를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의 양떼들을 해치려 흉악한 이리처럼 달려들 것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도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서 신도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2디모 1,15; 2,17; 묵시 2,1-7참조).

그러므로 방심하지 말고 언제나 깨어 있어라. 바울로 자신이 3년 동안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겸손과 인내로서 주님을 섬기고 신도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여 그 본을 받아라.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의 말씀을 그들에게 맡긴다. 그 말씀이 그들을 올바르고 완전하도록 하실 것이며, 교회를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신도들과 함께 유산을 차지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실하도록 해라. 나아가 교회 지도자들은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 은, 금, 의복은 고대의 중요한 재산이었다(2열왕 5,22).

바울로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탐하지 않고(1고린 9,4-18; 2고린 11,7-12; 12,14-18; 1테살 3,8-9) 노동을 통하여 스스로 장만했다(18,3; 1고린 4,12; 1테살 2,9). 그러므로 원로들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권고한다. 영적으로 믿음이 약한 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 병들고 신체적으로 약점을 가진 가난한 이들을 도우라고 권고한다.

마침내 바울로 자신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였음을 말함으로써 결론을 맺는다.

그리고 모든 말씀을 기도로 마감한다. 바울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과 축복만이 그들을 악에서 지켜주시고 하느님 나라의 유산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을 향하여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사도 바울로는 앞으로 교회가 당할 환란과 박해를 미리 알고 있었다. 교회 밖의 공격도 거셀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도 이단자들이 생겨 교회를 분열시킬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풍전등화와 같은 에페소 교회를 바라보며 바울로는 자신의 모범에 따라 원로들에게 양떼들을 잘 보살피도록 간절하게 당부한다.

그러나 바울로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은 바울로 자신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실함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일 뿐 근본적으로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위험 속에서 교회를 지켜주실 분은 오직 주님과 주님의 말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며(1고린 11,3; 에페 1,10.22; 4,16),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친히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과 주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하신다.

그래서 바울로는 하느님과 그 은총의 말씀을 원로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시며, 교회가 어떻게 거룩해지고,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주님의 교회이다. 그분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따르고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근본으로 삼아야만 한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있어야만 한다. 오늘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고 말씀에 충만한 하루가 되자............◆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나궁렬신부-


사업을 하는 친척이 찾아와 대출을 받는데 보증을 서 달라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어 만져보지도 못한 거금을 갚느라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친구는 헐레벌떡 찾아와 죽는 소리를 하면서 며칠만 쓰고 돌려줄 것이니 돈을 빌려 달라고 애걸복걸하여 빌려주었다가 사기를 당한 경우도 많다.

이런 분들이 생활고에 찌들리면서 빚을 갚아 나가면서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는가.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한다. 친구들이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할 때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나는 왜 이렇게 매정하지 못할까? 보증은 절대로 서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막상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친구를 만나면 그냥 돌려 보낼 수가 없어 들어준 것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하늘에서 살던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살다 보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만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고, 하늘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하늘에서 살던 방식대로 살아간다. 내가 당하는 이런 고통도 하늘나라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순교자들의 삶이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나는 거기에 비하면 하늘에서 온 거지 축에나 들 수 있을까?

날마다 억울함에 힘겨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여 내가 조금씩 그분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을 느끼며 위로를 받는다. 용광로 속에서 순금이 나오듯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나의 거룩함도 고통의 용광로에서 달구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욱현신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1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 같이 제자들도 일치된 공동체를 이루게 해 달라고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아들이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생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이제 십자가를 향해 마지막 아버지께 대한 사랑을 표하고 계시는 순간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모두 바치고 계시다. 그것으로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된 삶을 사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게 사람이라는 관계, 즉 성령안에서 완전히 하나이시다. 이러한 일치를 제자들도 보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신다.

이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주님 안에, 성령 안에 하나가 되어있을 때에는 진정으로 자유와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선물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야하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성령안에 하나가 되는 것,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언제나 현존하시는, 사시는 모습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고 참으로 복된 삶이 된다.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될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14절), 이 세상이 거절하는 사람이 된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그 세상을 거슬러 가기 때문이다. 신앙인으로서 아마 여러 가지 고뇌와 어려움을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사람도 하느님 편에 속한 사람으로서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17절)이 될 것이다. 이는 하느님 안에 행복을 체험한 사람은 더 큰 일에도 기쁘게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제자들은 파견을 받은 것이다(18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19절)이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 그래서 그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구체적으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며, 그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 참 기쁨을 누리며,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삶을 통하여 우리가 일치하고, 진정한 기쁨을 가지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그 만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은총을 구하자.

 

 대사제의 기도 : 제2부

-박상대신부-

어제 복음으로 봉독되었던 제1부 대사제의 기도를 한 단락으로 요약한다면, “아버지, 이제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세상이 있기 전에 아들이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소서. 이는 아들이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며,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제1부 기도의 주제가 아들 자신의 영광을 간구하는 기도라고 했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영광과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영광과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은 무엇보다도 아들이 자신의 파견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저술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20,31)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명을 아버지로부터 받아 이 세상에 파견되었으며, 이제 이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심으로써 우선 제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오늘 복음은 대사제의 기도 제2부라고 볼 수 있다. 그 첫 부분(9-10절)은 어제 복음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다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9-10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두 번째 기도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지 세상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세상이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은 그 자체로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들을 제대로 알게 되기 전까지는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미움과 증오와 박해의 주체이다. 그래서 스승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하기 때문에(16,28) 세상에 남게 되는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시고(11-12절), 세상의 악으로부터 제자들을 지켜주실 것을 기도하시며(13-16절),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17절). 진리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은 우선 진리를 통하여 거룩해짐을 의미하며, 거룩해진 제자들을 예수님은 세상에 파견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제자들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표지(sign)가 된다. 제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써 이 표지를 증거(證據)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원(原) 표지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바치심으로써 누리시는 그 기쁨을 제자들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13절)
머지않아 제자들은 세상에 파견된다. 그들이 살고 또 살아야만 하는 세상에 파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세상에 아무 쓸데없다거나 세상과 아무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더 이상 그 이전의 세상과는 다르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상, 이전의 사람들이 아니다. 제자들은 이제 스스로가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며, 새로운 창조의 시금석(試金石)이 되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선별되어 따로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로 흩어진다. 즉 세상 안으로 파견된다. 세상은 제자들이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작업장이다. 그 씨앗이 싹을 패고 자라나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제자들의 책임이다. 오직 열매를 맺는 자만이 알 것이다. 열매를 맺음이 얼마나 벅찬 기쁨으로 다가오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되도록 바라시면서 자기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장현우신부-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가 되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직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그 믿음 또한 너무나 미약한 제자들을 보시며, 이제 이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 하십니다.

너무나 사랑하던 제자들이었기에, 이들이 스승을 잃고 방황하게 될 모습을 미리 보시며 측은한 마음을 가지십니다. 또한 세상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당하게 될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걱정스럽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며 가르치고 생활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아버지께 이들을 맡깁니다.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지금까지 당신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왔던 이들을, 이제는 아버지께서 친히 지켜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당신의 수난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릴 이들이, 새로운 희망으로 당신 안에서 다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십니다. 또한 당신의 부활을 체험하고 세상으로 나아갈 제자들을 세상의 반대로부터 지켜 달라고 청하십니다. 진리를 위해 몸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십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단순히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있는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말씀 안에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 특히 지금 이 순간 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각자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두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주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두고 살아가곤 합니다. 주님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재로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종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무수한 기도를 드리면서도, 주님과 흥정을 합니다. 내가 내 삶의 중심에 있기에, 그 자리에는 주님도, 내 이웃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내가 깨어지기를 거부함으로써, 이웃을 내 안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또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라고 고백하며, 그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 세속적 계산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벗어나 살아갈 수는 없기에, 곧잘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 진리가 세상의 논리와 부딪히면, 그 고통을 피하려 합니다. 주변의 시선에 눈치를 보며, 세상의 흐름에 안주하고, 마찰을 피하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외면합니다. 불의를 행하면서도, 그것이 합법적이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안에서 서로 하나 되려 하고 있는지, 그분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 안에서, 진리가 주는 자유를 마음껏 누려 보십시오. 아멘.

 


 

진리로 거룩하게 하십시오(17, 11-19)

 -유 광수신부 -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창세기 첫 장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라고 적었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을 비롯한 세상 모든 만물은 하느님께 속해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시면서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던 것이다. 본래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존재로서 세상 모든 것들을 잘 다스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만들어졌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인간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고 뱀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에게 영광을 드리려고 하다가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그 때부터 인간은 세상에 방황하고 있고 오히려 세상을 다스려야할 인간이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즉 자기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자기의 소속감을 잃어 버린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늘 외롭고 불안하고 방황하게 된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잃어버렸던 자기의 소속감을 회복시켜야 한다.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있어야할 자리에로 돌아와야 한다. 마치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가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던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아들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고 아버지 집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잃어버렸던 우리의 신분을 다시 회복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기도하신다.
인간의 불행이 진리인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데에서 시작되었다면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다시 진리인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사탄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행복한 에덴 동산(아버지의 집, 나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다. 본래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모습은 거룩한 모습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룩한 모습으로 회복되려면 진리인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살 때만이 가능하다.

성 바오로는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덕적인 감각을 잃고 제멋대로 방탕에 빠져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인데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에페 4, 17-24)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결코 우리가 속해 있을 곳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 것은 일시적이고 사라지는 것들이다. 
세상 것에 속해 있을 때 얼마나 우리는 많은 실망을 하게 되었는가? 믿었던 사람이 자고 나면 죽고, 믿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파산되고, 믿었던 권력이 하루 아침에 내려치는 것이 세상이다. 화재로 수 십년간 모았던 재산이 다 날라 가고, 믿었던 증권이 하루 아침에 종이 조각으로 둔갑하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은 절대로 우리가 속해 있을 곳이 되지 못한다. 세상에 속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실망하게 될 것이고 우리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한 낱 이슬 같은 것이 세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에 속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속해서 살아간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결정된다. 회사에 속해 있으면 회사 사람으로 살아갈 거이며 성직자에 속하면 성직자로서 살아갈 것이고 수도자에 속하면 수도자로서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은 곧 나의 삶의 방법과 방향을 결정해 주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어떤 집단에 소속할 때에 마음의 안정과 기쁨을 느낀다. 세상에 고아처럼 비참한 것이 없고 망국민처럼 불쌍한 것이 없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아침에 집을 나와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가정의 보금자리가 필요하듯이 늘상 떠도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돌아가면 쉴 수 있는 아늑한 보금자리가 필요하다. 그곳이 곧 아버지의 집이다. 이세상의 그 어느 곳도 일시적이지 영원한 곳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 이해 득실을 따져 가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소속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하느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길을 잃고 헤메고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소속감을 모르기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늘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처럼 길에서 방황하고 있고 편안히 쉴 곳이 없기 때문에 여기 저기 방랑자들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보라, 오늘도 밤늦게까지 술집이나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새는 이들을 길거리에서나 자동차로 질주하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는 이들을. 무질서함,  소란함, 고함소리, 폭력이 난무하는 오늘의 현실은 모두 자기가 속해 있어야할 곳에 속해 있지 않은 불안과 방황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인은 세상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해야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존재이라는 것을 그래서 아무렇게나 사는 삶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진리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예수님의 마지막 공적기도(전체 묵상) †

주님승천 주일(부활 제7주간)을 지내면서, 하늘로 오르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을 어제 묵상했었습니다. 무척 허탈해 했을 것 같기도 하고, 불안과 두려움도 여전했을 것 같고, 한편으론 기다림의 희망도 컸으리라고 묵상 중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세상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인가 봅니다. 주부는 남편의 월급날을 기다리고, 학생들은 시험날을 기다리고, 임산부는 출산일을 기다리고, 로또 복권구매자는 당첨일을 기다리고, 님을 떠나 보낸 자는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등등 인생은 기다림 속에 또 다른 삶의 가능성,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가 봅니다. 한편으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도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의 신앙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 자체가 오천 년 기다림의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 나는 신비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기다림이란 곧 우리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사람들은 조금의 시간도 인내하지 못하고 '빨리, 빨리, 또는 바쁘다, 바뻐'라는 서두름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테크 시대에 빠름의 문화를 쫓아가는 것도 필겠지만, 때로는 느림의 문화, 기다림의 생태 속에서 살아가는 지혜도 필요할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시간(세월)은 하느님께서 주신 케노시스적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라고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요한17,1) 일생을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사신 후에 때가 되었음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때"에 다른 것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때"에 하는 것입니다. 때는 시(시)입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교통을 해야할 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하고, 하느님께 감사함을 드려야 할 모든 일의 때에, 항상 기도를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의 주님의 아버지께 대한 기도 방법은 우리의 기도생활에서의 표준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일명 '대사제의 기도 1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아버지, 어머니, 사랑...등일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말을 자주 등장시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전통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우리말로는 단순히 ‘아버지’로 이해하면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다는 말은 곧 ‘아버지’를 그들에게 알게 하였다는 말인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ha shem(그 이름)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생활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근거는 아마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에서 비롯된 관습인 것 같습니다.

오늘복음은 제자들과의 고별, 이 새상과의 고별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대사제로서 이버지에게 기도를 올리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묵상하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신 후에 그들과 함께 공적으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여기서 공적 기도라는 의미는 대사제 직분으로서의 기도로 보면 됩니다. 공동체의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기도와 같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기드온 골짜기로 내려가셔서, 거기에 있는 게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개인적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시기 직전의 일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항해 기도드리는 첫번째 내용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주십시오.”

이상 기록한 기도의 첫 부분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소상하게 말씀하실 기도 내용의 전체를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당신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고 또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드러나게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고 또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도 영광을 받으시라고 말씀드린 기도 내용입니다.

아들이 받은 첫째 영광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은 사실 자체입니다. 다음으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에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신 말씀은 먼저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심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셨고 다음에 십자가의 고난으로 인류를 구원하심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에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당신께 능력을 주시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셨고,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을 알고 또 그분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희랍어 사본에서 ‘안다’는 말로 ginosko를 사용하였는데 이 말은 ‘안다’는 뜻을 가진 또 하나의 희랍어 oida라는 말에 비하여 ‘깊이 안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며,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면 ‘영원한 생명’까지도 받게 된다. 곧 구원을 받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아버지께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야 하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에야 이루어질 일임을 예수님께서도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에 당신께서 땅에서 하실 일을 모두 다 마치셨다고 말씀드리면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에게 앞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어 세상이 있기 전에 당신께서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을 그들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라고 다음과 같이 청하신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내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1-5절에서 기도의 내용 전체를 요약하여 말씀하신 다음에, 그 내용을 되풀이하여 더 자세하게 풀어서 기도를 드리신다. 이 과정에서 6절부터 23절까지에는 그들의 구원, 그리고 그후에 그들이 성장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일과 또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 등 제자들이 지상에 남아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기도하시고 나머지 부분인 24절부터 26절까지에는 그들의 구원의 결과에 대하여 기도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공적생활 마지막 기도(제1부) : (요한 17,1-11ㄱ)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하신 말씀 중에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내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주십시오”라고 하신 부분을 부연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6-10절에 먼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저는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서 불러내시어 저에게 맡기신 그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증거하여 알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원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이들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간직하고 지켰습니다. 이들은 이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저는 이들에게 주었고 이들은 그 말씀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으며 또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저는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모두 저의 것이며 또 저는 이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증거하여 알게 하는 일이며 또 아버지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과 당신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믿게 하는 일이며, 그리고 또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믿고 지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또 당신께 맡기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로 말미암아 당신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앞으로 당신께서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받으신 후에 그들이 성령을 받아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구원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상은 어제복음 요한 17,1-11ㄱ의 묵상내용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공적생활 마지막 기도(제2부)(요한 17,11ㄴ-19)

그러면 대사제의 기도, 즉 예수님의 공적생활 마지막 기도인 제2부를(요한 17,11ㄴ-19)를 묵상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11-1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주님은 이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지만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보호해주실 것과 그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해주실 것에 대하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과정에서 사탄의 집중적인 공격에 직면하게 될 것을 예수님께는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해주실 것을 아버지께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그들을 위해 당신께서 직접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께서는 이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계속하여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또 그들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며 또 성령을 받아서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알면 그분을 사랑하게 되며,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또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며,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되며,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의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9-1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그것으로 너희 기쁨도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성장하여 서로 사랑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며 또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이어가십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주시는 일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불행하게도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성별)된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은 진리 안에 성별되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영 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하느님의 영 안에 속해 있는 것은 또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 성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은 또 그들을 진리 안에 성별하시기 위하여 당신께서 당신 자신을 성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과연 당신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성별하실 필요가 있으시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을 성별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성별한다’는 말은 ‘따로 구별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성별하신다는 말씀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성별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성별하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하신다는 말씀이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이 선택을 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의 죄를 모두 없애 주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성별해 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5,8-10절에 “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록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사주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여, 에덴동산의 아담과 같이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았듯이 십자가의 고난을 겪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의 죄를 보속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으로 완성될 수 없으셨다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성별하시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아 성별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에 20-21절에 예수님께서는 그때 당신을 믿는 사람들만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이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장차 저를 믿을 사람들을 위하여도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또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이들도 모두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이리하여 세상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주십시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20-21절에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그들이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이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는 것은 이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어 온전하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하나가 되도록 해주시는 영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17,18절에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따르는 영광도 주시고 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박해를 받아가며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지게도 하시고 또 마지막 날에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의 영광도 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영광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들은 하느님 안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그것을 보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를 믿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서 4,12-13절에 “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 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한 말씀이나, 또 요한 사도가 첫째 편지인 요한일서 4,17절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랑에 있어 온전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있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또 그들이 하느님께 무엇을 구하던지 다 받을 수 있게 됩니다.

3. 구원의 결과(요한 17,24-26)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요약하여 하신 말씀 중의 마지막 말씀, “아버지, 이제는 아버지께서 제가 당신과 함께 영화를 누리게 해주십시오. 이 세상이 있기 전에 제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을 말입니다”라고 하신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구원의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기도를 마감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사람들, 곧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도 장차 아들이 있는 곳에 있게 해주시고, 또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아들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보고 또 함께 누리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또 그들의 말을 듣고 장차 당신을 믿을 사람들에게도 계속하여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도 있어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구원해주시며 또 당신께서도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 안에 계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야흐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는 목적과 그 결과가 이 마지막 말씀에 요약하여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세상이 있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시던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누리시던 그 영광을, 우리는 하늘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와 같이 이땅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묵시록 21장에 보면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지상의 '하느님의 나라'에 내려오며, 우리는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의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아버지께 드리는 심각하고도 비장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러기에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꼭 찾아 알아야 하고 얻어야 하는가를 문제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보다 심각한 내용입니다. 즉, 현재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기에 웃기도하고, 울기도, 애태우기도, 헤메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며, 감정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에게 이미 인연이 끊겼으며, 모든 기회도 끝났습니다. 살아있기에 세상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면, 살아 있는 이 생명이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만족과 불안을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래도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은 불안이 없는 슬픔과 죽음이 없는 삶을 사람이면 누구나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나의 이 생명이 내 스스로 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다른 어느 것이나 다른 누구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을 주신 아버지신 하느님만이 나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이 생명을 주시고, 이 순간 이 삶을 주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바로 그 문제점을 힘있게 또 분명히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즉,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것만이 "나에게 영원한 삶이 되며,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구약 사상의 특징이었습니다.
잠언 3, 18 : "하느님을 아는 지혜를 얻는 것은 생명의 나무이다" ; 지혜 5, 3 : "당신의 능력을 아는 것은 불멸의 근원이다" ; 잠언 11, 9 : "의인은 하느님을 아는 그 지식으로 인해 구원을 얻는다" ; 호세 4, 6: "내 백성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 아모 5, 4 :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

이와같이 하느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내가 "사느냐? 죽느냐?"
내 생명이 직결된 문제도 그들은 생활 속에 알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을, 우리도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내자신 진정 어떠한 모습의 하느님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것이 단지 지식만으로서의 하느님이냐? 또한 진실한 모습의 하느님이 아니라, 삐뚤어지고 절름발이 하느님의 모습은 아닌지? 참된 하느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자기식대로의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점입니다.

참되고 진실된 하느님의 모습을 그 분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만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그 분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에 힘써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좀 더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모든 이의 구원과 영원한 삶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음을 생활에 옮기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사신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쫓아 그대로 살고 싶고, 또 복음전파를 하려 다니지만, 물질문명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있는 사람들의 생활 행태로 인해, 그리 쉽지만은 않기에 주님의 성령께 의탁하고 외쳐봅니다.

주여! 용기를 주십시오!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들의 마음을 열어주시어
이들이 주님을 온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소서. 아멘 .........◆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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