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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작가님 글을 보니 정말 그때 그시절이 아련합니다.
전 작가님이 좀 연상이신줄 알았는데 제가 7-8년 앞서지 않나 싶네요.
갑오생 동짓달 보름이라, 55년생으로
저는 서울 인근의 부천인데도, 일제를 피해 인천 외곽의 지주이셨던
할아버님 형제분들이 재산을 버리고 숨어든 산골이어서 읍내보다 한참
뒤에야 전기가 들어 왔죠.
부천(소사)가 복숭아 산지로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햇지만
우리 마을은 아버님이 포도를 도입해 특작물로 장려해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산골마을로 여름이면 매주 용산청과물 시장에서 두세번씩 트럭들이 내려와
우리 어린 애들에게는 난리가 아니였죠.
나이든 형님들이 용산시장에 가서 현금결제하여 남대문 시장에 가서
희한 것들을 사와 재미있던 기억들이 삼삼합니다.
등너머 저수지에 뛰어 들어도 별탈없는 나일론 반바지와 반발 남방을 그시절
입을 수 있었으니...
할아버님 드린다고 라디오를 사왔는데 저희도 너무 몰랐는데
중학교에 들어 가니 기술 선생님이 일본에서 배워 청계천에서 라디오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 선생을 한다고 해서 매일 질문을 해댔고 결국 전기과를 갓죠.
진해의 해병대 계신 형님이 일제 샤프 TV를 보내와서
아폴로 달착륙, 알리 권투, 대연각 호텔 화재때는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보았지요.
다들 비슷했을 겁니다.
저희 뒷산을 넘어 가면 대한민국 아파트와 공장문화의 시원이 된
10만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신앙촌이 있어서 거기는
자체의 초중고등학교 까지 있어 별세계 였지요. 지금 캐나다의 몰이나
플라자 같은 상가까지 있고, 평수가 다 다른 아파트에서 살았죠
시골에 10만명이 몰려 사니 각 정당들이 난리였죠. 목사님만 잡으면
국회의원 당선은 100%니....
일부 국가에서 이스라엘 교민들이 그런 전략을 활용한다고 합니다.
국가에 한 지역을 할애해달가고 해서 학교, 공장, 공원, 언론사 모두를
기획해서 건설해 집단으로 거주를 한답니다. 거의 이스라엘 국민들뿐이니
국회의원 시장등 선출직은 당연히...각 정당들도 서로 도와주고 표심을 얻으려
나서서 노력하는 주민 주권 지상주의를 구현하는...
어머님 성화에 용산 시장 보내고 남은 중, 하품들을 지게에 지고
어머님은 다라이에 이고 소비자가 넘치는 신앙촌으로 팔러 다녔죠.
가끔 같은 버스를 타고 서울로 중학교를 가는 신앙촌 여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멋적기는 햇지만, 읍내의 부천 시장보다 세일이 빨라
얼른 따라 가 다 팔고는 문방구에 들러 사고 싶은 것 사라고 하시는
어머님 배려에 군말없이 따라 다녀 형들을 동원하지 않았죠.
집안의 큰 재산이며 일군인 황소 한마리 소꼴 담당에
제 앞으로 토끼를 50 마리나 따로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워크홀릭...
73년 서울로 도망 가 별천지 같은 세상을 보고, 공부를 다시 했고
수천-수만개의 공장이 지어지는데 안전 관리가 감당이 안된다고
박대통령의 지시로 한전에서 전액을 출자해 안전공사를 차릴때
창립사원으로 들어 가보니 정말로 눈코 뜰새가 없었어요.
경부 고속도로와 경인 지구를 중심으로 공장들이 들어 서다보니
인천지점을 맡은 저희는 미처 포장도 안된 공단을 걸어 다니며
준공검사를 하느라 저녁이면 얼굴에 누런 황토소금이 서걱댔죠.
인천 목재공단에서 동료와 둘이 무려 15개 공장을 새벽부터 저녁까지
준공검사를 해주고 황토길을 겨우 걸어 나오는데 대형 통나무 트럭 기사들이
경적을 울리며 가길래 물어보니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했다고 하더군요.
영부인이라는 것보다는 국가 기간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저희 회사를 대통령 명령으로 만들어 한전보다 보수도 훨씬 많아
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대통령의 의지와 결단에 감사를 했었거든요.
나이 스물인데 3급 사무관이신 형님보다 봉급이 많고, 육군 소장 출신 사장님이
공부해야 한다고 매일 불려 가는 회식에서 1차만 참석하고 귀가를 했지만
수시로 업무상 요정까지 드나들 정도였죠.
예의상 부득이 늦게까지 있어야 해도 통금전에는 지역 파출소장님 짚차 불러
부천에서도 십리나 산속으로 들어 가는 집까지 보내주는 것이 당시 어른들의
경제와 교육관이었읍니다. 대기업 술상무 초빙해 두달간 특별 교육도 시켜주고...
결국은 대학을 들어 가 다시 돌아 오라는 권고를 뒤로 전혀 다른 세상을
살다가 캐나다까지...
제천도 시골이지만, 전라도 지역의 산업화가 좀 늦었고
강원도 횡성이 동학란때 가장 늦게 관군, 일본군과 싸워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고
그바람에 조정의 눈에 나서 1980년대 후반까지 면소재지애도 도로포장조차 안해 주었죠.
뒤늦게 방송사 들어가 향토문화 취재다니다 알게 되엇죠
제천서 한참 더 들어가는 영월, 그쪽은 워낙 오지라 더...
80년대 중반까지도 아마 송전탑은 지나가는데 가정 전기는 ...
세상은 살기 나름이랄까, 영월 촌사람들이 오기로 전기의 기초를 터득해
군화밑에 진짜 애자를 밖아 신고, 고압 전주에 올라 가 도전을 하기도...ㅋㅋ ㅎㅎ
짬짬이 밧줄을 물에 적셔 한쪽은 강물에 담가 놓고, 다른 쪽에 돌을 매서 빙빙 돌리다
고압 송전 선위로 던지고 달아나면 밧줄은 거의 순간에 타버리고
강물엔 고기가 하얗게 떠서 포식을 했다고...
200볼트 전주에 새 잡으러 올라갔다가 감전되어 떨어지는 바람에 살아난
국민학교 동창은 지금도 얼굴이 백지장인데, 고압선엘 도전하는 ...
90년대 초인가 영월에 황쏘가리 잡는다고 전문스쿠버까지 동원되었는데
술 안주감 고기 한 마리도 못잡아 돼지고기를 조달 받을려는데
열월 어신이란 중년 할머님이 지랄들을 하고 다닌다고 꾸짖더니
대낚(정황학 용어?)을 외국영화에서 처럼 멋지게 휘두르면 팔뚝만한
고기들이 잡혀 올라 와 황쏘가리 포기하고 팀원들이 술독에 빠져 해매기도...
70년대 중반까지도 인천제철 용광로를 가동하려면 인천시 거의 반을
일부러 정전을 시키지 않음 안 되었어요.
지금 같으면 냉장고등 피해 보상해달라고 난리겠지만 그때는
국가 산업이 먼저라 강제로 정전을 시켜도 항의를한다는 것조차 상상을
못했읍니다. 다시 전기 들어 올때까지 촛불켜고 기다렸죠.
저도 초등학교까지 방에선 참기름을 종지에 넣어 불을 켜고,
부억등에서는 관솔을 따다 가 촛불 대용으로 켰지요.
일학년때는 솜바지 저고리 입었던 기억도...거기에 가방은 거의 책보였는데
학교 전교생죽에 저만 호랑이가 양각된 주황색 가죽 가방에 축구공 하나...
홍역을 앓고 죽다 살아 일년 늦게 간다고, 서울 애들도 넘보기 힘든 것을
형님이 남대문에서 포도 몇 상자값을 덤벅...
너무 티난다고 아버님이 공차라느고 늦게 온다는 핑게로 가방과 공을 압류하고
책보자기로 바꿔 일년간...
한 건축용 철근을 만드는 공장은 지금 제 손바닥보다 굵은 동판 스위치들이
과열로 불꽃이 30 센티는 훨훨 일어나도 교체작업을 할수가 없어 매달 와서
불량 딱지를 떼어 주라고 자청을 했지요. 혹시라도 건물에 불이나더라도
검사관님 다치게는 안겠다고...강제 정지를 시켜야 하는데 정말 공장이 24시간
불이나도록 바빠...
용광로 한번 세우면 얼마나 많은 손해와 생산물량을 못맞추는지
상상이 될까요.
제가 잠시 형님 공장을 도울 때도 밤낮으로 돌려도 물량을 맞추기가 어려워
100 명이나 되는 공원들 매일 밤낮으로 공장에서 먹고 재우고
일요일엔 목사님 모셔다 공장에서 예배를 보았지요. 시간이 돈보다 귀했으니...
제가 충무로에서 독일의 최점단 전자 전화교환 기계를 다루다 준공 검사관으로
인천으로 갔는데도, 부천의 저희 시골에도 전화가 이장님 댁에만 나라에서 지급한 것이 있어제가 비상 연락을 그 댁을 통해서만 받아야 했지요.
할 수가 없다고 해서, 마지막 선로에서 저희 집까지 3킬로를 제가 비용을 대서
전화를 끌었지요.
다음 사람들이 전화를 놓을 때 마다 분담금을 받아 주겠다더니
국가 공사 기획을 아주 크게 잡아 별도의 선로가 설계되어
저희 선로는 사라지게 되어, 새 선로 공사가 끝날 동안 지역 봉사를 하고 말았죠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을 들어 가니 제일 먼저 모 여대 학생회 간부라고 찾아 와
저희 대학 데모를 주도해 달라고 하더군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 동생 대학비까지
벌어야 해서 몇개 회사의 자문 역을 아르바이트로 하는 조건으로 두 사람 학비를
받기로 하고 대학을 간 것이라 사절을 했지요.
대신 선배가 나섰다가 정경대쪽 간부들이 모두 도망가 혼자 잡혀가 제적까지 당해
여자친구 아버님이 붙들어다 자기네 공장을 주겠다고 일을 시켰지만 그 나이에
그게 될리가 없죠. 결혼은 그 집과 해서 먹고 사니 건달이 되어, 술마시고 화나면
총장실 뛰어 들어 가 복적시켜 놓으라고 ...
얼마 후 전 한 방송사 노조 신문 편집을 맏고 있다가, 요즘 저 유명한 조국이 함께 한
사노맹의 한 노동 시인의 시 한수를 국정원 몰래 입수했는데,
내용이 노동이 아니라 공산 사상시라 고민하다가 제 시(? 엉겁결에 휘갈긴)를 써서
그자리에 넣어 인쇄를 넘기고 안기부가 아니라 노조를 피해 달아 났죠.
저는 쟁의 부장을 겸햇지만 많은 기자, 피디 노조원들이 천신만고 끝에 구해 온 시인데
공산 찬양시니 그대로 게재를 했다간, 그렇지 않아도 경찰에 의해 90% 가까운 노조원의
방송국이 빨갱이라고 음해를 받던 시절이라 방송국 문닫게 되고, 간부 노조원들은 모두
구속이뻔했기 때문에....그때 철퇴를 면한 녀석들, 지금 거의 국장,임원....
다행이 얼마 후 다른 사건으로 관심밖으로 벗어나 돌아왔고, 노조를 정치화 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아예 탈퇴를 했지요. 노조는 배신자라 몰고, 경찰은 노조 쟁의부장에 편집장 출신이라고
감시와 도청을...
공산권의 종구국 소련이 망하자 갑방에 있던 사노맹들에게는 감형과 석방이 이어졌고
사형언도를 받았던 그 시인은 좌파정권에서 보상까지 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아프리카로 방랑을 떠나 저도 관심을 끊었는데
사노맹 재대로 된 서열에 끼지도 못하던 조국이 저 난리를 치니 그들이 스멀스멀 색갈을 다시
내려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조국의 워낙 추한 꼴들이 드러나니 사퇴를 종용한 듯합니다.
전후의 어린 시절, 그때를 회상하다가 보니 고구마 줄기마냥 연줄연줄 나왔네요.
국가와 민족의 밝은 미래만 걱정하고, 지난 날들은 추억으로 아름답게 회상할 수 있었으면 싶네요.
지난 주말 뉴욕타임지 특판에 중국의 토지 국유화의 현실과 전망등을 보다가
소련에 발해 유적, 유물을 찾아 보겠다고 의료 봉사단에 끼어 들어 갔다가
단원 모두가 죄도 없이 잡혀 가 무소불위의 권력에 당한 분노가 치솟아 며칠 방황했군요.
엊그제는 월드컵, 올립픽등 스포츠만을 전문으로 방송하던 제가 또 쓰러질뻔했읍니다.
전쟁을 하다가도 올림픽을 위해 휴전을 하고 동참을 한것이 올림픽인데
월드컵을 무관중, 무중계라니...
96년 아틀란타 중계기획을 마치고 출발을 하려는데 정부에서 갑자기 중단을 하라고 해서
골프채 사들고 회사근처 드라이빙 래인지에서 죽쳤는데 갑자기 열흘 남겨 놓고 중계를 하라고...
국내 시스템을 부랴부랴 하느라 미국엔 비상팀만 내보내고 시차가 반대라 준비부터 마감까지
무려 40일을 밤낮으로 생방과 녹화...뼈만 남아 유황오리 몇달 먹고 회복...
북한까지 올라 갔을 중계팀들 분통이 터져 병이 안났다면 이상한 짓이죠.
2002년에 FIFA에 내는 중계권료가 200억대 엿으니 지금은 거의 1,000억대 일텐데
거기다가 북한의 앵벌이 까지 있었을가요?
전 어쩌면 북한이 남한과 결별하겠다는 의지는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아름다운 추억만 회상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첫댓글 지금은 많이 달라진 세상이지만 잊을 수 없는 우리의 발자욱이 촘촘하죠. 제가 쓴 글보다 더 길게 쓰시고 인기가 더 좋은 듯 합니다.
애고애고 결례가 됏네요. 고3에 가출하고,공장에서도 달아나 어려울때, 우리 역사를 다 잃었다 듣고 다시 공부를 하고 오로지 사상, 종교 떠나 역사찾기만 하다보니 여기 채이고 저기 채이더군요. 여러 나라 다니며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겪게되니 더... 그나저나 건강은 많이 좋아 지고 있으신거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고, 희망을 가지면 건강은 회복이 빨라 집니다. 적절한 운동은 덤이고...힘 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