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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4월과 5월 - 장미
44회l권소혜 추천 0 조회 222 14.04.07 19:1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
당신을 부를 땐, 당신을 부를 땐
장미라고 할래요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 못 이룬 나를 재우고 가네요
어여쁜 꽃송이 가슴에 꽂으면
동화 속 왕자가 부럽지 않아요

당신의 모습이 장미꽃 같아
당신을 부를 땐, 당신을 부를 땐
장미라고 할래요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열아홉 남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무조건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나. 가진 게 없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음악이 있었다. 여인에게 헌정하는 노래를, 이왕이면 그녀의 이름을 따 만들기로 했다. 문제는 별의별 애를 써봤지만 이상하게 곡이 안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다가 꿈속에서 멜로디가 흘렀다.벌떡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악보를 적었다. 악보를 봉투에 접어 넣고, 구리반지 하나를 사서 여자를 찾아갔다. “내가 이 곡을 꼭 히트시킬 테니 두고 봐라”했다. 여자는 픽 웃더니 고맙다며 받았다. 그로부터 2년 뒤.

두 사람은 대천해수욕장에 갔다. 대천 온 바다에 노래가 넘실댔다. 캠프마다 청춘남녀들이 통기타를 끼고 앉아 ‘너와 맹세한 반지 보며 오늘도 젖은 짚단 태우듯 또 하루를 보냈다. 화가 이 세상 끝에 있다면 끝까지 따르리’를 불러댔다.

여자가 “와!”하고 감격했다. 남자도 가슴 한 구석이 울컥했다. 대한민국 포크 전성시대의 간판듀엣 4월과5월의 대표곡이자 불멸의 히트곡 ‘화(和)’는 이렇게 탄생했다.

4월과5월은 1972년에 결성돼 1975년까지 3년 남짓 활동하며 4장의 음반을 남겼다.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활동기간이었지만 이들은 어니언스(이수영·임창제)와 함께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아이콘으로 군림했다.

종로구 서린동 사무실에서 만난 4월과5월의 멤버 백순진(59) 씨는 “요즘으로 치면 SG워너비 정도가 아니었을까”하며 웃었다.

백순진 씨는 현재 노스웨스트 등 외국항공 국내 총대리점이라 할 수 있는 주식회사 샤프의 부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15년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2년 전에 귀국했다. 사업가로 전향했지만 음악에 대한 갈증은 삭일 수 없었다. 때마침 이 땅을 강타한 7080붐이 4월과5월의 복귀를 강요하다시피 했다.

백순진, 김태풍(영창파트너즈 대표)의 4월과5월은 결국 재결합했다. 7080무대 같은 곳은 가급적 자제하고 교회, 고아원 등을 돌며 자선공연을 갖는다. 백순진 씨는 한국싱어송라이터협의회 회장을 맡아 ‘자작자창’하는 싱어송라이터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고 있기도 하다.

백순진 씨는 4월과5월의 주옥같은 대부분의 곡들을 직접 작곡한 싱어송라이터이자 리더이다. 음악을 하게 된 동기를 물으니 흐흐흐 웃는다.

“어렸을 때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이모가 계셨는데, 집에 오시면 늘 ‘볼기 보여주면 100원 주지’하셨죠. 그래서 엉덩이 까 보여드리고 100원씩을 탁탁 받았어요. 조금 크니까 이번엔 ‘노래 부르면 100원 주지’로 바뀌는 거예요. 이모만 오시면 100원 받는 맛에 노래를 불렀죠.”

전학 첫날 부른 동요에 처녀교사 ‘울컥’

백순진이 노래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건이 국민학교 2학년 때에 일어났다. 남산국민학교에서 서대문국민학교로 전학을 가니 급우들이 ‘새로 전학오면 노래해야 한다’며 교탁 앞으로 내몰았다.

잔뜩 감정을 잡고 ‘소라껍질’이란 동요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처녀 선생님이 와락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미묘한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쨌든 백순진 씨는 그때부터 ‘내가 노래를 잘 하는구나’하고 (본인 말로) 착각을 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당시의 ‘김모 선생님’을 찾고 있다.

사촌형이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홀딱 반해 부모님을 졸라댔다. 음악을 잘 모르는 부모님은 고1 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기타(그것도 전기기타!)를 사주었다. “사달란다고 멋모르고 사주셨다가 아들놈이 완전히 거기에 미쳐버리니 난리가 난 거죠. 학창시절에 부모님 손에 부서져나간 기타만 6대인가 될 거예요.”



휘문고 2학년 시절에는 오승근, 홍순백(두 사람은 훗날 투에이스라는 듀엣으로 활동한다) 등과 함께 연합 그룹사운드 ‘엔젤스’를 결성해 옛 서울예식장에서 리사이틀씩이나 가졌다. 당대 여고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크리스마스 때면 여기저기 미팅에 불려 다니기도 했다(물론 걸리면 정학이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의 열렬한 팬이었던 백순진은 사이먼&가펑클을 만나면서 포크음악에 눈을 떴다.

이수만 녹음후 하차…김태풍과 활동

“사실 난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작곡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노래 잘 하는 놈 하나 잡아서 가자’했던 거죠.”

그래서 소개를 받은 것이 현재 SM엔터테인먼트 이사인 이수만이었다. 이수만과 4월과5월을 만들어 1972년 5월 ‘화’, ‘절망하지 마라’, ‘욕심없는 마음’이 수록된 데뷔음반을 냈다. 그런데 이수만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중도 하차했다.

“그 때 마침 김태풍이 우리 집에 와 있었어요. 나름대로 자기도 듀엣을 만들어서 연습을 했죠. 이수만의 빈 자리를 채워야 하니까 김태풍보고 ‘같이 4월과5월을 하자’고 꼬셨죠.”

그래서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1집은 백순진과 이수만이 녹음을 했지만, 음반표지에는 백순진과 김태풍의 사진이 실렸다. 물론 음반 트랙에는 김태풍의 음성이 한 곡도 들어있지 않았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이다.

당시 4월과5월이란 듀엣명이 화제가 됐다. ‘트윈폴리오’, ‘트리플’, ‘쉐그린’, ‘뚜아에무아’, ‘라나에로스포’, ‘어니언스’, ‘투에이스’ 등 외국어 이름이 판을 치던 시대에 4월과5월은 유일한 우리말 듀엣, 아니 이중창단이었다.

“미국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죠.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본을 따라갈 수 없다고도 했죠. 스스로 ‘엽전’이라며 비하하던 때였어요. 전 그게 열 받더라고요.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말인 4월과5월이라 한 거죠.”

4월과5월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화’에 얽힌 비화가 하나 더 있다. 이 노래는 LP로 녹음되기 전부터 라디오방송에서 릴테이프 녹음을 주야장창 틀어대 입소문이 나 있었다.

당연히 LP는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아 금지곡 판정이 났다. 표절곡이라는 것이었다. 정말일까?

“표절은 무슨. 그때는 젊은이들이 나와서 ‘안 된다’, ‘떠나지마’ 뭐 이런 분위기면 다 금지였어요. 우리 노래 중에 ‘머리 깎고 명동에 나갔는데 경찰에게 걸려 싹둑’ 하는 가사가 들어있는 곡이 있었어요. 당연히 바로 금지곡이 됐죠.”

‘화’가 청와대 직속 모 기관과 당시 연예계 빅파워였던 DJ 이종환 사이에 벌어진 알력싸움의 희생양이 됐다는 설도 유력하다. 정보부 출신이던 기관 담당자는 이종환이 관련된 음반이 출시되면 무조건 금지를 시키고 봤다. 4월과5월의 음반 역시 이종환이 뒤에 있었다.

김태풍 음악대신 사랑 선택 ‘해체’

1975년 1월, 종로1가 쉘부르무대를 끝으로 4월과5월은 해체됐다. 해체 이유에 대해 연예계에서는 ‘김태풍의 군 입대’, ‘김태풍의 개인적 사정’, 심지어는 1975년 연예계를 초토화시킨 대마초사건 연루설 등이 떠돌았다. 당시 두 사람은 해체 이유에 대해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김태풍과 내가 생각이 달랐어요. 나는 쇼비즈니스, 요즘으로 치면 기획사를 꿈꾸고 있었고, 김태풍은 가수생활에 희망이 없다고 봤죠. 김태풍에게는 여자가 있었어요. 외교관의 딸이었는데 김태풍의 여동생 친구였죠. 김태풍이 낙심하고 있으니 여자가 차라리 유학을 가자고 종용한 거예요.”

결국 김태풍이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4월과5월은 해체의 운명을 맞았다. 그런데 김태풍이 떠나고도 4월과5월은 조금 더 생명을 이어갔다. 김태풍의 빈 자리를 메운 새로운 멤버는 김정호였다. 동생의 친구였던 김정호를 보자마자 백순진은 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봤다. 작곡, 노래, 기타솜씨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유명한 소리꾼이었고, 모친은 창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혈통부터가 남달랐던 사람이다.



‘가객’ 김정호 대타 영입 화음 맞춰

“사실 저는 김정호를 가수가 아니라 작곡가로 키우고 싶었어요. ‘이름모를 소녀’, ‘저 별과 달을’ 같은 곡들은 나와 공동작업을 한 거죠. 그런데 당장 명동의 쉘부르니 오비스캐빈이니 공연을 나가야 하는데 김태풍은 없고, 급한 김에 김정호를 데리고 간 거죠.”

김정호와의 4월과5월은 몇 개월 가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얀나비’의 김정호를 기억하면서도 그가 4월과5월 출신이었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시. 해체 후 몇 년이 지나 4월과5월은 ‘당신에게선 ∼ 꽃내음이 나네요’하는 ‘장미’란 히트곡을 낸다. 지금까지도 ‘장미’는 4월과5월의 대표작 중 앞 선에 꼽힌다. 그런데 이 ‘장미’를 부른 4월과5월은 백순진-김태풍의 오리지널 멤버가 아니다.

30년만의 재결성 “세상의 빛이 되고파”

김태풍의 유학으로 인해 4월과5월을 해체한 백순진은 자신의 계획대로 기획사를 차리고는 가수 오정식, 이영식 등과 함께 듀엣 하야로비를 영입했다. 이 하야로비로 구성한 것이 후기 4월과5월이다.

물론 이들의 노래 ‘장미’는 백순진이 만들었다.

“우리가 나이가 많이 들게 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우리 두 사람은 저 험한 세상의 등불이 되리. 그래서 만든 곡이 ‘등불’이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시대의 등불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두운 세상의 작은 등불이 되고 싶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4월’ 백순진과의 인터뷰가 끝났다. 12월의 오후 사무실에 봄의 햇살이 가득했던 것은, 장미의 내음을 맡았던 것은 분명 기자의 환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7080만이 누릴 수 있는 달착지근한 환상의 수혜였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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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선 꽃 내음이 나네요/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

 

인터뷰를 하러 가는길에 자꾸 콧노래가 나왔다. 1970년대 듀오 ‘4월과5월’의 대표곡으로 알려져 있는 노래 ‘장미’다. 아직 장미가 꽃을 피울 시기는 아니지만, 노래를 부르니 봄날의 훈풍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공안과 건물 9층 사무실에서 만난 중견기업인이 ‘장미’를 작사·작곡한 주인공이다. 항공 운수(항공권 판매대행), 항공 지상조업(주유), 렌터카, 와인 수입 등을 하는 여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주식회사 샤프의 부회장 백순진씨. 그는 올해 61세이지만, 1970년대 포크음악을 주도한 듀오 ‘4월과5월’의 리더답게 아주 젊어보였다.

 

그가 처음 이야기를 꺼낸 내용은 사업에 대한 것도, 음악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2010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선전하는 한국 선수들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는 1970년대 스케이트장의 청춘을 소재로 한 노래 ‘영화를 만나’를 히트시켰던 기억 때문에 특별히 스케이팅경기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영화/ 선녀처럼 스케이트 타던 영화와/ 부딪치고 나서 미안하다 말하자/ 무표정했던 영화….’

 

―서울 태생이시죠? 1970년대에 서울에선 젊은이들이 스케이트장에서 데이트를 많이 했습니까.

“낭만이 있던 시절이라 젊은 연인들이 스케이트장에서 만나 수줍게 데이트를 했죠. 스케이트가 없으면 철사 같은 것으로 비슷하게 만들어 탔어요. 그 시대엔 김연아와 같은 선수가 우리나라에서 나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저도 김연아 팬이에요. 팬카페 모임에서 노래 부를 때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영화’를 ‘연아’로 바꿔 부르기도 하죠, 하하.”


―인터넷에‘4월과5월’팬카페가 있던데 언제 만들어졌습니까.

“2년반쯤 됐을까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팬이었다는 50대 초반의 남자분이 주도해 만들었는데, 현재 회원이 2000명 정도 됩니다. ‘4월과5월’의 멤버인 김태풍(현재 펀드매니저)과 함께 팬들 모임에 가서 가끔 노래도 부르고 봉사활동도 함께 합니다. 가수와 팬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공감대를 나누며, 장애인시설 등에서 좋은 일을 함께 하니 너무 즐겁습니다. 최근엔 아이티를 돕기 위한 성금도 모았지요.”

 

―음악 활동을 접고 노스웨스트항공 총대리점 직원이 된 게 언제입니까.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요.

“1978년쯤 될 거예요. 현재 샤프 회장으로 계시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간 것이지요. 1989년부터 외국 지사장 격으로 해외에 왔다갔다 하다가 1998년부터 미국 뉴욕에서 지점을 맡아 운영했어요. 10여년 있다가 2008년에 귀국했지요.”

 

―50대를 몽땅 이국땅인 뉴욕에서 보낸셈인데,그시절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편안하게 좋아하는 음악 공연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업면에선 먼저 자리를 잡은 중국계 등의 텃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에요.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물자가 너무 풍부해서 우리의 주무기였던 근면성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어요.”


―‘4월과5월’1집의 명곡인‘화’는 화(和)’자를쓰는데, 당시 정권에 의해 금지곡이 되는‘화(禍)’를 당했지요.

“가사가 당시 군사정권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죠. 젊은이들에게 주저앉지 말고 떨치고 일어나자는 내용을 담고 있거든요. 군사정권 시절이라서 젊은이들은 비관주의에 짓눌려 있었는데, 그러지 말고 일어서자고 했으니…. 저는 누가 누르면 눌리지 않고 튀는 성격이었던 듯싶어요. 저는 당시 퍼져 있던 ‘엽전들은 안돼’라는 사고방식을 무척 싫어했어요. 미국 팝송과 트로트가 지배적인 음악 유행에도 비판적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말 이름으로 ‘4월과5월’을 만들어 우리만의 정서를 담으려고 했지요.”

 

―작사·작곡한 노래중에 어떤것에 특별히 애착이 있나요

“많은 사랑을 받은‘화’'옛사랑’‘바다의 연인’등에 애착이 있지요. 그런 노래들은 대중과의 소통을 겨냥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앨범의 앞에 배치했어요. 제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은 앨범 끝에 있는 ‘꽃한송이’ ‘필요한 것’ 등인데, 음악 형식에서 당시 유행을 앞서는 것들이었어요. 그것들은 대중적으로 히트하지 못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팬카페 회원 중에 그 노래의 진가를 알아주는 분들이 있어서 놀랐어요.”

 

―듀오 멤버였던 김태풍씨와 결별한 것은 음악 사업 부문에서 의견 대립이 있어서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태풍과 저는 3년간 늘 붙어 다녔지요. 저는 장차 음악 분야의 비즈니스가 커져서 돈벌이를 할 수 있다는 시각이었는데, 태풍은 그럴 수가 없다고 봤지요. 그가 유학을 가게 돼서 새 멤버로 김정호를 영입했어요. 노래에 한국적 정서를 담고 싶었던 저는 김정호의 목소리에 배어있는 한(恨)이 참 좋았어요.”

 

―1975년에 프로덕션 ‘오토’를 만드셨는데, 요즘의 기획사와 같은 성격이었나요. 널리 알려진 노래 ‘장미’는 직접 만들어 후배들에게 준 것이라는데.

“오토는 가수도 키우고 음반 제작도 하는 프로덕션이니 기획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유의 회사로는 국내 처음일 듯싶어요. ‘장미’는 ‘4월과5월’의 새로운 멤버인 이지민-오영진이 불러 크게 히트시켰지요. 근데 ‘장미’가 들어있는 앨범을 낸 후 제 프로덕션이 부도를 맞았어요. 제가 제작과 홍보를 맡고 레코드 유통은 다른 업자를 시켰는데, 그 사람이 저를 속인 것이지요. 그때 스트레스로 폐가 터져서 병원에 3개월이나 입원했어요. 그 후로 음악계를 떠나버린 것이지요.”

 

―친구인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이사는 음악기획 사업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수만이 1970년대 말에 미국에 다녀온 후 그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요. 저는 그 사업을 하고 싶지 않아요.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인 줄 아니까. SM을 둘러싼 계약상의 논란이 많던데 저는 정말로 (이수만의 스트레스를) 이해합니다. 요즘도 두 사람이 자주 만나는데, 사업가로서 미래에 관한 전망을 주로 이야기하면서 서로 자신의 말이 옳다며 떠들어대지요.(웃음)”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를 주도적으로 발족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네, 저는 사업가로 살면서도 음악인으로서 후배들을 위해 뭔가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요. 한국 음악의 발전을 위해서는 실력 있는 싱어송라이터가 많이 배출되고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봐요. 한대수, 김도향, 최백호, 박학기, 소리새(신성철), 강은철씨 등과 함께 2009년에 싱어송라이터협회를 만들자고 결의했고, 이제 곧 사단법인으로 발족할 겁니다. 연내에 싱어송라이터 선발대회를 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3월23, 24일엔 싱어송라이터협회 주관의 뮤지컬 콘서트 ‘무교동 꽃잎’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립니다.”

 

그가 언급한 콘서트는 1970년대 음악의 메카인 (서울 중구)무교동 시절의 추억을 뮤지컬 형식에 담은 것으로 ‘4월과5월’을 비롯해 송창식, 최백호, 최이철(사랑과평화)씨, 소리새 등이 참여한다. 전유성, 김학래씨 등의 개그맨들도 DJ 등으로 동참할 예정이다.

 

―기성세대들은 대중가요의 변방에 머물러 있는듯한 느낌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요즘 인기 가수중에 좋아하는 후배가 있나요.

“요즘 대중가요는 댄스 장르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 유행이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봅니다. 음악 장르가 고루 발전하려면 방송 관계자들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후배 그룹은 자우림입니다. 음악 실력도 탄탄하고, 사회의식도 있기 때문에.”

 

―요즘도 작사·작곡을 하시는지.

“사업에 바빠서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지 못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틈틈이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이게 쌓이고, 언젠가 좋은 가수를 만나면 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원래 가수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했다. 자신이 만든 곡을 발표하기 위해 가수를 찾다가 듀오를 하게 됐다는 것. 자신의 곡이 좋은 가수에 의해 불려지는 것을 정말로 보람있는 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등불’을 발표하시며 나이 들어서 등불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하셨던데

“저는 정말로 이제부터 인생이 시작이다 라고 생각하며 더 열심히 살려고 해요. 그런데 60이 넘으면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필요하다고 봐요. 저는 크게 소리내어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것을 혐오하지만, 조용히 봉사를 지속하려 해요.”

 

그는 비즈니스 측면에선 특허문제에 신경을 쓰겠다는 뜻밖의 말을 했다. 세계에 내로라 할 수 있는 기술 특허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자기만의 곡을 만들어내는 장치를 제작해 특허를 내고 싶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붙잡았다.

 

“제가 요즘 통기타를 치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이게 중노년의 건강에 아주 좋다는 것입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안정감 같은 것이 중노년의 우울증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믿어요. 통기타는 다른 악기에 비해 싸기 때문에 구입하기 좋고, 요즘엔 줄 맞추는 기계도 있으니 배우기도 편합니다. 자전거 타기가 육체적 운동이라면, 기타 치기는 정신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범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줬으면 합니다.”

 

백순진은 :

 

'번안곡 판칠때 창작 포크송 개척…‘원조 싱어송라이터’

 

197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백순진이란 이름이 낯설더라도 남성 듀오 '4월과5월’은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중앙대 예술대에 재학하고 있던 백순진씨는 ‘4월과5월’의 리더로서 김태풍(한국외대 불문과)씨와 함께 포크송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1971년에 결성된‘4월과5월’의 1기멤버가 김태풍씨가 아니라 이수만씨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않았다.백순진씨는 다방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했던 당시 서울대생 이수만씨에게 듀오를 제안,‘4월과5월’을 만든후 앨범 작업을 했다.

 

“그런데 이수만이 갑자기 몸이 많이 아파서 (듀오를) 그만두는 바람에 김태풍이 들어왔어요. 제작비 문제로 앨범의 재녹음을 못하고, 재킷엔 김태풍의 얼굴이 나가게 됐어요.”

 

노래는 이수만씨가 불렀는데, 표지는 김태풍씨가 장식하는 기이한 앨범이 나온 것. 백순진씨는 이렇게 어설프게 가요계에 발을 디뎠지만, 전문가들로부터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번안곡이 판치던 1970년대에 창작 포크송 열풍을 주도했다는 것, 노래를 작사·작곡·편곡해서 부르는 싱어송라이터의 원조라는 것 등의 이유에서다.

 

휘문고 재학시절에 고교연합 록그룹을 만들었던 백순진씨는 중앙대 작곡과에 들어갔다가 순수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연극영화과로 쫓겨났을 정도로 대중가요에 대한 열정이 컸다. 그는 많은 노래를 만들어서 직접 불렀을 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 줘서 히트시켰다.‘화(和)’‘바다의 여인’‘등불’‘옛사랑’‘겨울 바람’‘님의 노래’‘장미’등이 ‘4월과5월’의 이름으로 불려진 노래다. 임희숙, 김세환, 이수미, 서수남·하청일, 오정선, 윤연선, 이영식씨 등이 그의 곡으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백순진씨는 음악 유행을 앞서가는 파격적인 실험도 많이 했는데, 송창식씨의 ‘딩동댕 지난 여름’을 가야금을 동원한 국악포크로 편곡해 부른 것이 대표적이다.

 

“김정호도 ‘4월과5월’의 3기 멤버로 활동했어요. (요절한) 그 친구만 생각하면 참 많이아쉽지요.음악적재능이 참뛰어났는데….”백순진씨는 듀오를 유지하며 록그룹‘들개들’(이수만, 김태풍, 민병진, 김찬이)을 결성하기도 했다.

 

“저는 대중음악에 외국 곡과 차별되는 한국적 정서를 넣으려고 애썼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듀오나 그룹 이름을 당시 유행하던 외국어로 하지 않고 ‘4월과5월’‘들개들’처럼 우리말 이름을 고집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료출처 : 문화일보(대담/장재선.문화부차장)>

 

출처 : http://badoc.egloos.com/tb/5099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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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04.07 19:19

    첫댓글 요기는 들릴가요/ 소리는 덜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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