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 柳 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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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 극서 剋恕 (1340~1388) 시조 濕의 차남으로 고려 문과 보문각 직제학 정순대부 연안부사 역임. 묘 : 안동시 범바위 配 : 숙부인 진주 河씨-조선 개국공신 영의정 河崙의 姉씨 (묘 : 진주) 配 : 숙부인 수원 李씨 (묘 : 범바위 고위 묘하)
장자 克剛 (고려 문과 - 判事) 3 자 克修 (이조판서,예문관제학- 이조판서) 4 자 克濟 (한림원 판관, 이조정랑 병조정랑 성균관 대사성- 이하 5대 관직) 5 자 克渠 (예조참판을 거쳐 자헌대부 호조판서) 壻 沈孝生 개국공신 3등, 따님이 조선 태조의 6자 이방번(세자)과 혼인 세자빈이 되었으나 왕자의 난 때 희생됨. 예문관 대제학. 富城君으로 봉해짐. 1차 왕자의 란으로 세자 방번과 심효생은 사사되었다.)
3대 : 장자 汀 (오위도총부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차자 濱 (1367~1448)(完原君 영흥대도호부사) -1388년 16세 소년으로 이방원(태종대왕)함께 동방진사.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헌하였다.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를 역임했다. 돌아가신 후 세종대왕께서는 임금의 예절에 준하는 장례(葬禮)를 치르라는 어명(御命)을 내렸다. 관군을 동원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에 명당을 잡아, 8각형 능(陵)을 조성하였다. 이 능을 종릉(鍾陵) 또는 류릉(柳陵)이라 부른다. 영천(영주)군에서 제향토록 명함. (陵 : 영주시 문수면 종릉산 ) <서울에서 관군이 운구할 때 쓰던 상여가 최근까지 보관되었으나 집이 퇴락하여 철거하고 현재는 영주시청에 상여의 彫刻 장식품 십여 점이 보관되고 있음> 配 : 정부인 수원 李씨 配 ; 정부인 단양 禹씨 아래 사진은 종릉의 현재 모습인데, 8각형이며 둘레석은 높이가 45cm 길이는 200cm 의 큰 돌이 8개로 장 8각형 이며 아래 위에 8개의 장대석으로 8각형을 만들고 8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직 6면체의 큰돌을 끼워서 릉의 형태를 만들고 내부는 회단석을 견고하게 하여 도굴이 불가능하게 조성하였다. 위에는 흙을 덮고 잔듸를 심었다. 정면에 구 비석과 상석이 있고 좌 우에 문관석 무관석이 있고 왼쪽에 새비석이 세워졌다
위의 사진은 조선 세종 때 관군이 영흥공 시신을 운구했는데 그때 사용한 상여가 2000년까지 상여각에 보관되었으나 너무 오래된지라 손상이 심하여 상여는 폐기하고 상여의 장식품은 영주시청 현관의 전시용 유리장 속에 보관 전시된 모습이다.
종릉 신도비 # 2008년 종릉 정비 성역화 사업(종회장 류석근)때 본인도 금 1,000,000원을 협조하여 비석에 새겨졌다.
영흥공과 범바위 산소 이야기 영흥공<濱>께서 친상을 당하여 산소 터를 구하는 중에 뒷간에 가셨는데 범이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리는지라 공께서 꾸짖어 가로대 “아무리 짐승이기로 서니 부모상을 당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의리에 부당하다. 너도 부자간의 은의를 아는 짐승이니 썩 다른 곳으로 가거라.” 하니, 범이 마치 무엇을 구하는 듯 입을 벌리는 지라 “네가 나를 잡아먹을 테냐?” 하니, 범이 고개를 흔드는지라 “그러면 입에 무엇이 있느냐?” 하니 입을 손에 대고 답답해하는지라 그제야 손을 입에 넣으니 목에 비녀가 걸려있거늘 곧 집어내니, 범이 감사하단 뜻으로 등을 대고 곧 타라는 모양을 보이거늘 그제야 잡아타니 하룻밤 사이에 송도에서 경상도 예안<녹전면 호암리>까지 와서 범 바위 산소 터를 잡았 나니라. 영흥공이 그 터에 장사를 지내고 근처에서 거려(居廬)<여막을 짓고 생활 함> 하시니 그곳을 효자 암이라 이르고 산소가 있는 곳을 류빈(柳濱) 골이라 하니 이것은 영흥공의 성휘(姓諱)를 잇거려 지명이 되었느니라. <『류빈골』은 2004년 중앙일보가 발행한 전국 상세 지도에도 있고, 2005년 안동시에서 설치한 버스정류장에도 『류빈골』이라 썼음> 4대 : 장자 敬孫 (號 쌍樂亭 시강원 설서) 차자 義孫 (1396~1449)(號 檜軒 참판 겸 집현전 직제학)-- 남수문 권채동과 함께 집현전 3선생이란 칭호를 받음. 단종조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의 전주곡으로 김종서를 타살하는 사건을 보고는 직위를 사직하고 낙향하여 황방산에 笑臥亭 을 짓고 소일하다가 세조가 등극하여 이조판서의 교지를 내렸으나 부임하지않고 당신의 이력에 기록하지 못하게 하였다. 문장력이 출중하여 강목서, 계주문 ,풍월루기 등이 東文選에 등재되었음. 기양 추원사에서 제향 묘 : 고양시 원당. 配 : 정부인 하음 奉씨 配 : 정부인 파평 尹씨 3자 信孫 (참판)
4자 末孫 (사헌부 감찰.집의) 5대 : 係子季潼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을 거쳐 인천부사를 지냈으며, 증 이조참판이다. (생부 伯兄 季潘(이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仲兄 季장(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6대 : 軾 (號 西溪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을 거쳐 인천부사를 지냈으며, 증 이조참판이다. 이처럼 대대로 벼슬하면서 한양 묵사동<현 서울 충무로 필동 근처>에서 살았다. 묘 : 원당 도승지공 墓左 配 : 정부인 파평尹씨 配 : 정부인 남양 洪씨 轅(증 참판) 輳(진사) 곡(목사 내첨사 판관) 7대 : 潤德(號 南川 한성우윤) 윤선(潤善) : 관직이 통례원 인의(引儀)에 올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일찍 사임하고, 영주시 평은면 오천리로 낙남하여 영남(嶺南)에 터를 잡게 되었다. 영남낙향 중시조 이후는 카테고리를 별도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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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reenfield 원문보기 글쓴이: 녹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