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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시조부터 직계 계보 및 관련 자료
이장희 추천 0 조회 236 15.08.03 23: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조 :  柳  濕

 

시조고 고려국 완산백         휘 濕   묘소         전주시 고산면 율곡리 산   10번지    해좌 원

                                                         묘소 옮김 : 율곡리 개발계획에 의거 시조비 묘소에 합폄 2010년

 

 

시조 :

  柳  濕 

고려 충숙왕 시대

(1310~20)탄생 

 고려 完山伯 

 

 5子 1壻가 모두 등과하여 고려

조정으로부터  

完山伯작위를 받고 전주류씨 시조로 추앙받음. 

 

 

 

 

                  시조고 묘비                                       신도비                                     묘하  하마비  

    묘소 이전으로 모든 비석을 잔주시 인후동 시조비 묘소 근처로 옮김  2010년 

 좌 : 시조고

      묘비

 

 중 : 신도비

 에는 공의 업적과 후세의 자손들이 활동한 기록이 있다

 

 

우 :   묘하

     하마비

 

 

2010년 재사도 옮김 

 

시조고

완산백 

묘하의 재사 

  時思齋

 

 

 시사재

  정문

 

 촛불을 클릭하여 음악을 들으시오


 

 

시조비 삼한국대부인 묘소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안골  축좌원 

2010년  개발계획에 의거 시조 완산백 묘소를 아곳으로 합폄 하였다.

 시조비

 

 

三韓

國大夫人

(부녀자 최고의 작위)

 全州崔씨

 

 

 묘소 :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안골 축좌원

 

 

 

좌 : 묘비

 

 

 

우 : 신도비

 

   時思齋 :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안골

 

 始祖妃

  三韓

國大夫人

齋舍 

 

時思齋

 

 

 

柳一女子高等學校 전경

 

 宗立 학교법인

時思學園

류일여자고등학교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전주류씨 회관

 전주류씨 회관

 

(1991년 준공)

 

전주시 인후동

 

 

 時思池

 

 

 

류일여자

고등학교 내

 

2009년 완산백 묘소가 공업용지로 수용되어 건지산 국대부인 묘소와 합장했다

장방형으로 큰 돌을 쌓고 묘역을 넓게 조성했다.

 

 

 

2대  : 

     극서   剋恕  (1340~1388) 시조 濕의 차남으로 고려 문과 보문각 직제학 정순대부 연안부사 역임.    묘 : 안동시 범바위

                             配 : 숙부인 진주 河씨-조선 개국공신 영의정 河崙의 姉씨  (묘 : 진주)  

                             配 : 숙부인 수원 李씨 (묘 : 범바위 고위 묘하)

 

 

 고려국

 보문각 직제학

정순대부  연안부사

 휘 克恕

 

 

묘소 :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호암동(류 빈 골)  을좌

묘하에 신도비와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호암재사는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었디.

 

 
   
   
   
   

장자  克剛 (고려 문과 -  判事) 

3 자   克修  (이조판서,예문관제학- 이조판서)   

4  자    克濟 (한림원 판관, 이조정랑 병조정랑 성균관 대사성- 이하 5대 관직)   

5  자  克渠 (예조참판을 거쳐 자헌대부 호조판서)   

壻       沈孝生 개국공신 3등, 따님이 조선 태조의 6자   이방번(세자)과 혼인 세자빈이 되었으나 왕자의 난 때 희생됨.

예문관 대제학. 富城君으로 봉해짐.    1차 왕자의 란으로 세자 방번과 심효생은  사사되었다.)

 

3대  : 장자   (오위도총부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차자  濱 (1367~1448)(完原君  영흥대도호부사) -1388년 16세 소년으로 이방원(태종대왕)함께 동방진사.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헌하였다.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를 역임했다.

돌아가신 후 세종대왕께서는 임금의 예절에 준하는 장례(葬禮)를 치르라는 어명(御命)을 내렸다.

관군을 동원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승문리에 명당을 잡아, 8각형 능()을 조성하였다. 이 능을 종릉(鍾陵) 또는 류릉(柳陵)이라 부른다. 영천(영주)군에서 제향토록 명함. (陵 : 영주시 문수면 종릉산 ) 

 <서울에서 관군이 운구할 때 쓰던 상여가 최근까지 보관되었으나 집이 퇴락하여 철거하고 현재는  영주시청에 상여의 彫刻 장식품 십여 점이 보관되고 있음>

                                        配 : 정부인 수원 李씨        配 ; 정부인 단양 禹

아래 사진은 종릉의 현재 모습인데,  8각형이며 둘레석은 높이가 45cm 길이는 200cm 의 큰 돌이 8개로 장 8각형 이며 아래 위에 8개의 장대석으로 8각형을 만들고 8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직 6면체의 큰돌을 끼워서 릉의 형태를 만들고 내부는 회단석을 견고하게 하여 도굴이 불가능하게 조성하였다. 위에는 흙을 덮고 잔듸를 심었다.  정면에 구 비석과 상석이 있고 좌 우에 문관석 무관석이 있고 왼쪽에 새비석이 세워졌다 

 

 

 

 

 

 

위의 사진은 조선 세종 때 관군이 영흥공 시신을 운구했는데 그때 사용한 상여가 2000년까지 상여각에 보관되었으나 너무 오래된지라  손상이 심하여 상여는 폐기하고 상여의 장식품은 영주시청 현관의 전시용 유리장 속에 보관 전시된 모습이다. 

 

 

 

종릉 신도비

  # 2008년 종릉 정비 성역화 사업(종회장 류석근)때 본인도 금 1,000,000원을 협조하여 비석에 새겨졌다.

 

 

영흥공과 범바위 산소 이야기

 영흥공<濱>께서 친상을 당하여 산소 터를 구하는 중에 뒷간에 가셨는데 범이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리는지라 공께서 꾸짖어 가로대

 “아무리 짐승이기로 서니 부모상을 당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의리에 부당하다. 너도 부자간의 은의를 아는 짐승이니 썩 다른 곳으로   가거라.” 하니, 범이 마치 무엇을 구하는 듯 입을 벌리는 지라

 “네가 나를 잡아먹을 테냐?” 하니, 범이 고개를 흔드는지라

 “그러면 입에 무엇이 있느냐?” 하니 입을 손에 대고 답답해하는지라

그제야 손을 입에 넣으니 목에 비녀가 걸려있거늘 곧 집어내니, 범이 감사하단 뜻으로 등을 대고 곧 타라는 모양을 보이거늘 그제야 잡아타니 하룻밤 사이에 송도에서 경상도 예안<녹전면 호암리>까지 와서  범 바위 산소 터를 잡았 나니라.

 영흥공이 그 터에 장사를 지내고 근처에서 거려(居廬)<여막을 짓고 생활 함> 하시니 그곳을 효자 암이라 이르고 산소가 있는 곳을 류빈(柳濱) 골이라 하니 이것은 영흥공의 성휘(姓諱)를 잇거려 지명이 되었느니라. <『류빈골』은 2004년 중앙일보가 발행한 전국 상세 지도에도  있고, 2005년 안동시에서 설치한 버스정류장에도 『류빈골』이라 썼음>


4대  : 장자  敬孫 (號 쌍樂亭  시강원 설서) 

 차자  義孫 (1396~1449)(號 檜軒  참판 겸 집현전 직제학)-- 남수문 권채동과 함께 집현전   3선생이란  칭호를 받음. 단종조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의 전주곡으로 김종서를 타살하는 사건을 보고는 직위를 사직하고 낙향하여 황방산에 笑臥亭 을 짓고 소일하다가 세조가 등극하여 이조판서의 교지를 내렸으나 부임하지않고 당신의 이력에 기록하지 못하게 하였다. 문장력이 출중하여  강목서, 계주문 ,풍월루기 등이 東文選에 등재되었음.   기양 추원사에서 제향   묘 : 고양시 원당.        配 : 정부인 하음 奉씨   配 : 정부인 파평 尹씨

       3자   信孫 (참판)    

       4자  末孫 (사헌부 감찰.집의)

5대  : 係子季潼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을 거쳐 인천부사를 지냈으며, 증 이조참판이다.

 (생부 末孫)  묘 : 선산 좌록   配 : 숙부인 초계 鄭씨

    伯兄 季潘(이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仲兄 季장(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6대  : 軾 (號 西溪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을 거쳐 인천부사를 지냈으며, 증 이조참판이다.

이처럼 대대로 벼슬하면서 한양 묵사동<현 서울 충무로 필동 근처>에서 살았다.

   묘 : 원당 도승지공 墓左  

       配 : 정부인 파평尹씨  配 : 정부인 남양 洪씨

  轅(증 참판)   輳(진사)   곡(목사 내첨사 판관)   

7대  : 潤德(號 南川 한성우윤) 

   윤선(潤) : 관직이 통례원 인의(引儀)에 올랐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일찍 사임하고, 영주시 평은면 오천리로 낙남하여 영남(嶺南)에 터를 잡게 되었다.

영남낙향 중시조 이후는 카테고리를 별도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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