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예루살렘 중건령 | 명령을 내린왕 | 연대 | 성경 근거 | 적용 여부 |
1차 | 고 레 스 | 주전 537 | 에스라1:1~4; 5:13; 6:3 대하 36:22,23 | 사마리아와 주변 나라들의 방해로 실패함 |
2차 | 다리우스1세 | 주전 520 | 에스라 6:1,8~11 | 성전만 중건됨 |
3차 | 아닥사스다 7년 | 주전 457 | 에스라 7:7~26 | 예루살렘 성 전체가 중건됨 |
4차 | 아닥사스다 20년 | 주전 444 | 느1:1-3; 2:8-9 | 무너진 성벽과 성문을 재건 |
[ 기원 전 457년과 444년[성서 주석가들 중에는 예루살렘 중건령이 B. C. 458년과 4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일 강의 엘레판틴(Elephantine) 섬에 있는 한 유대 수비대 촌에서 연대가 기록된 파피루스들, 그 중에서도 “크라일링 6”(Kraeling 6)이라고 알려진 연대가 이중으로 표시된 파피루스가 발견됨으로써 B.C. 457년과 444년 설의 정확성이 확인되었다(Horn과 Wood의 “The Chronology of Ezra 7”을 보라]
(Maxwell, C. Mervyn, God Cares, vol. 1(Ontario, Canada : 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 1981), pp. 245-247).
◆ 1차: 고레스 BC537년 - 성전 건축 중단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스 1:2)
그러나 사마리아와 주변 나라들의 방해로 전을 건축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학개와 스가랴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워서 다시 건축하기 시작을 한다.
(스 5:1-3, 킹흠정) 『[1] 그때에 대언자들 곧 대언자 학개와 잇도의 아들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에게 대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대언자들이 그들과 함께하여 그들을 돕더라. [3] 바로 그때에 강 이편의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료들이 나아와 그들에게 이같이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집을 건축하고 이 성벽을 보수하게 하였느냐? 하고』
이리하여 대적자들은 다리오(다리우스1세)에게 글을 올렸고 답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대적들의 말을 보면 성전뿐만 아니라 성벽을 쌓기 위하여 기초작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 강 서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이 이러하니라”(스 5:5-6)
◆ 2차: 다리우스1세 BC520년 - 성전 건축과 봉헌식
“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게 하노니 왕의 재산 곧 강 서편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스 6:8)
그리하여 다리오왕의 2차 중건령이 내리고 성전이 준공되어 봉헌식을 했다.
“다리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전 봉헌식을 행하니”(스 6:15-16)
2차에서 이미 성읍을 건축하기 위하여 성전은 건축되었고, 성곽(성벽)도 건축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와 주변 나라들의 방해로 실패한다.
◆ 3차: 아닥사스다 7년 BC457년 - 예루살렘 성 전체가 중건됨
“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하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스 7:12-25)
아닥사스다 7년에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에는 성읍의 건축과는 관계가 없는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백성들을 재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가르치라고 하였다.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기 전의 남방 유다는 백성들의 재판을 어디에서 하였을까?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산지의 성읍들과 평지의 성읍들과 남방의 성읍들에 있는 밭을 은으로 사고 증서를 기록하여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포로로 돌아오게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2:44).
“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거하더니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순행하며 저희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유다 온 나라 견고한 성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마다 있게 하고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대하 19:4-6)
유대 온 나라의 견고한 성마다 재판관을 세웠다. 성읍이 건축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을 재판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닥사스다 7년에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는 성읍의 건축과 하나님의 율법으로 유다 백성들의 재판을 가능하게 하는 조서이다.
또 재판은 각 성읍의 성문에서 행하였다.
“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압살롬이 일찌기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삼하 15:2)
따라서 아닥사스다 7년에 내린 조서는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다. 왜냐하면 재판관은 각 성읍마다 두었고 재판은 각 성문에서 베풀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성경말씀은 이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말씀이다.
(스 9:9, 킹흠정) 『이는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속박 가운데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페르시아의 왕들의 눈앞에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사 소생하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의 집(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또 그 황폐하게 된 것을 보수하게 하시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성벽을 주셨음이니이다.」
2차에서 성전은 이미 중건되었고, 3차 중건령에서 모든 성문과 성벽이 중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성벽을 주셨다"는 말씀에서 성문과 성벽이 거의 중건되었을 알 수가 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것은 남방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이 조서가 언제 내렸는가? 아닥사스다 7년 BC457년이다.
◆ 4차: 아닥사스다 20년 BC444년 - 다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 재건
“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느 1:1-3)
(느 1:3, 킹흠정) 『그들이 내게 이르되, 포로로 사로잡힘을 면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에서 큰 고통을 당하고 능욕(凌辱)을 받으며 또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탔나이다, 하니라.』
“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 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느 2:1-5)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얼굴에 근심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이 불타고부터 얼굴에 근심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니와 다른 유대인들이 고국으로부터 도착하기 전에 느헤미야가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한 사건과 그들이 최근에 재건한 성벽 일부를 파괴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대로부터 받은 믿을 만한 소식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더 상세한 소식을 알고자 열망했을 것이다. 그의 형제와 다른 유대인들이 도착함으로, 바사와 유대 사이에 연락이 두절된 기간에 발생했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목격한 자들의 보고도 함께 이르게 되었다.
어떤 주석자들은 하나니의 이 말이 BC 586년에 느부갓네살 군대가 예루살렘 성읍을 파괴한 사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근심하기 시작한 시기를 보라 또 느3장에서 볼 수 있는 성벽 건축에 대한 그 다음의 설명을 감안해 보면, 성벽과 성문 전체가 파괴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한 제3차 때에 『 우리 하나님의 집(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또 그 황폐하게 된 것을 보수하게 하시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성벽을 주셨음이니이다.』(스 9:9, 킹흠정)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이 파괴한 상태로 있었다면, 아무리 좋은 조건에 있었을지라도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성문을 포함하여 성벽 전체를 재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느헤미아가 이전에는 얼굴에 수색이 없었다는 왕의 말을 보라 3차 때에 성읍을 건축하였는데 다시 일부가 파괴되자 근심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느헤미아가 이전에도 계속 근심을 하고 있어야 정상이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내용에는 무너진 성전뿐만 아니라 폐허가 된 성읍(城邑)의 복구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일을 수행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리는 자치권의 부여는 필수적이다.
이 일을 위한 세 명의 페르시아 왕들의 조서는 고레스 원년(537년 BC), 다리우스 1세 제2년(520년 BC), 아닥사스다 제7년(457년 BC), 아닥사스다 제20년의 추가 조서(444년 BC) 등이 있었으나, 다니엘서 9장 25절에 예언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조서는 기원전 457년에 내린 아닥사스다 왕 제7년의 조서였다(스7:7~26).
★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원래 한 권의 책이었다.
히브리 성경 원전에는, 사무엘서나 열왕기, 또는 역대서와 마찬가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책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1448년 불가타역이 두 책으로 나눈 것이 처음으로 히브리 원전에 소개될 때까지였다. 원래 두 합본은 “에스라”라고 불리웠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역대서의 역사적, 문학적 연속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문체와 언어의 연구는 이 책들이 아마 같은 저자에 의해서 씌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 예루살렘과 새 예루살렘
| 예루살렘 | 새 예루살렘 |
제1차 조서 | 첫째 천사 (계14:6-7) |
제2차 조서 | 둘째 천사 (계14:8) |
제3차 조서 | 셋째 천사 (계14:9-12) |
제4차 조서(3차 조서와 혐력) | 힘센 천사 (계18:1-3)(셋째 천사와 협력) |
★ 페르시아 왕과 그 당시의 상황
우선 아닥사스다왕이 다소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두 연대 중에 어느 것을 70이레의 시작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그는 언젠가 사나운 사자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구출해 준 재치있는 친구를 상 주는 대신 추방했다.
또 한번은 그의 대리인이며 매부이기도 한 메가비주스(Megabyzus)가 이집트의 반란군 지휘자 이나루스(Inarus)에게, 항복하기만 한다면 목숨은 보장한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아닥사스다는 이나루스를 처형해 버렸다.
바사(페르시아)의 조서는 다시 뒤집을 수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단 6:8; 에 8:8). 아닥사스다 1세의 줏대 없음과 변덕스러움은 메가비주스를 크게 실망시켰고, 결국 그와 그의 동료 페르시아인들이 아닥사스다에 대해 공개적인 반역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로서 바사 제국은 중대 파국에 직면했었다.
바사 법에서는 한 번의 조서로서도 충분한데 아닥사스다가 예루살렘 중건을 허가하는 두 번째 조서까지 발행하게 된 것은 왕의 변덕과 메가비주스의 반란의 결과였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대규모의 반란을 지도할 당시 메가비주스가 강(江) 서편 지역의 총독이었다는 것이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그의 관할 구역이었고, 예루살렘도 그 구역에 포함되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유대인이 성전과 예루살렘을 중건하며 겪은 고생들이 잘 나타나 있다. 에스라 4장 4-6절에는 고레스(539-530 B.C.), 다리오(522-486), 아하수에로(486-465)의 재위 기간이 겪었던 어려움들이 소개되었다.
에스라 4장 7-23절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아닥사스다왕(465-423)의 예루살렘 중건 허가에 대해 불평했던 일들과 아닥사스다가 기원전 457년의 조서를 번복하여 성전 중건을 중지시켰던 사정을 보고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이 항의 상소는 지방 관리들이 아닥사스다왕에게 직접 올린 상소였고, 왕은 이 상소를 받고 그 지방 관리들에게 직접 칙답을 보냈다(스 4:7, 8, 17).
왕과 지방 관리들 모두 지방 총독을 통해 문서를 전달하는 관례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례적 현상은 당시 그 지역 총독이 국왕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항하고 있었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 당시의 사건 전말을 알기 쉽게 재구성해 보자.
538/537년에 고레스 왕이 성전 재건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스 1장).
520/519년 경, 강 서편 총독 닷드네(Tattenai : 이 이름이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되었다)가 당시 16년째 계속되어 온 성전 중건 공사 현황을 직접 답사한 후 다리오(다리우스)왕에게 유대인들에 대한 고레스왕의 성소 중건 조서의 사실 유무를 확인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다(스 5:3-17).
다리오가 고레스의 조서를 확인하는 새 칙령을 반포했다(스 4:1-12). 예루살렘 성의 중건에 대한 고레스, 다리오, 닷드네의 언급은 없고 성전 중건에 대한 그들의 언급만이 있다.
457년에 아닥사스다 1세가 세 번째 조서를 내렸는데, 이것은 수도로서의 예루살렘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칙령이었다. 그는 동시에 유대 법과 바사 법을 시행할 행정관과 재판관들에 대한 임명권까지 부여했다(스 7:12-26). 물론, 이 칙령은 행정부 관리들의 주택, 관청 및 재판소, 성벽, 군인들을 수용할 성채의 건설을 허가하였다. 이러한 건물들과 방비 시설이 없이는 행정관과 사법관의 임명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에스라는 팔레스틴으로 직행하여 예루살렘을 중건하는 긴 역사(役事)를 지휘한다(스 7:1-10).
메가비주스가 10여 년 후인 기원 전 448년에 반역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정은 사마리아인들이 아닥사스다왕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성을 견고히 쌓아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고 오해하도록 유도하기에 좋은 배경을 제공했다. 아닥사스다왕은 이같은 상황에 영향을 받아 사마리아인들은 공사를 중단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쌓아올린 성을 허물고 성문과 성전 문을 불살랐다.
한편, 바사 제국의 여러 수도들의 하나였던 수사 성(1세기 전 다니엘일 다니엘 8장의 묵시를 볼 때 살았던)에서는 느헤미야가 또 고국의 재건 사업을 걱정하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사람이었다(느 1:11). 그는 팔레스타인에 큰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사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왕이 예루살렘 중건을 중지시킨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태의 추이를 대단히 걱정하였다.
느헤미야에게는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한 동생(에스라 7장 2절에 의하면 친동생)이 있었다. 만약, 하나니가 바사(페르시아)로 오기라도 한다면 그를 통해 그 곳 사정을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느헤미야의 동생인 하나니가 수사에 찾아왔다. 느헤미야는 이것저것 예루살렘에 대해 궁금한 사정을 물어보게 되었고, 그를 통해 들은 소식은 하나같이 낙담스러운 것뿐이었다.
하나니에 의하면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는 것이다(느 1:3).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여러 날 동안 슬퍼하였다”(느 1:4). 느헤미야는 동생을 통해 들은 소식으로 너무나 마음에 충격을 받아 3, 4개월 동안 얼굴에 화색을 잃고 지냈다(느 1:1; 2:1을 비교). 왕 아닥사스다는 그때 업무 관계로 제국의 다른 지역을 순찰 중이었다. 왕이 얼마 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왕의 술잔을 받드는 사람인 느헤미야는 얼굴에 희색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요행히 그 때 심기가 나쁘지 않았던 아닥사스다가 그에게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느헤미야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들은 왕은 즉각 일련의 효과적인 행정 지시를 문서화하고 느헤미야를 시켜 이 문서를 새로 부임한 강 서편 총독 산발랏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 중건 경비를 국고에서 지출케 하고 느헤미야로 직접 중건 공사를 지휘 감독케 하였다.
일부 주석가들은 느헤미야가 동생 하나니로부터 근래 재건된 성전 이외의 전체 도시가 142년 전 즉 기원 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의 손에 파괴된 그대로 남아 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곤란한 주장이다. 느헤미야는 이미 어릴 때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를 익히 알고 있었다. 만약, 느헤미야가 이전에 그 동안 예루살렘 성의 중건 공사가 상당히 진척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기원 전 444년에 그의 동생이 전한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었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놀랄 까닭이 없는 것이다.
444년 전까지는 예루살렘 성 중건 허가가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여러 자료들을 간과했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70 (69)이레의 연결하는 고리
'and'
저는 '마지막 한 이레를 '따로 생각하는'
우리 개신교 연구자들의 논리가 맞다는 전제아래
틀림없이
이 접속사 and 에
이 예언을 풀어내는 핵심적인 'Key'가 숨어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70 (69)이레를 해석하는 성경연구자들은
보통 7이레와 62이레에 사용된"와" 라는 접속사를 '+' 개념으로 생각하여
7이레와 62이레를 합산하여 69이레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 부분에서부터 기존 70이레 해석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일곱이레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났던 고레스 원년으로부터 먼저 계산하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해를 기준으로 뒤로 62이레를 계산해가면서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들을 살펴야 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