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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없는 자유여행 |
1. 여행 일시 : 2011년 10월 1~3일 |
2. 여행지 : 경남 진주, 전남 순천, 전북 고창, 전북 전주, 경남 사천 |
3. 참석자 : 일월부부, 쌀바위부부, 아이스부부, 도토리 부부(계 8명) |
4. 여행기 |
당초 서해안으로 스케쥴을 잡았으나~ |
이번 여행은 목적없는 여행으로 발길 닿는대로의 여행이 시작되었고, 운전대를 잡지 |
않아도 되는 편안한 여행이라 더욱 마음이 설랜다. |
10월 1일(토요일) |
18:00시 울산 출발 |
울산에서 저녁 6시경 출발 울산톨게이트를 통과하였고, 저녁은 준비해오신 약밥으로 |
대신하고 대동톨게이트에 도착하니 앞쪽에 브레이크등이 나열해 있어 부산신항 |
방향으로 차를 돌리고 다시 서김해IC로 진입하여 마산으로 진입할 즈음 진주로 향하는 |
우회도로는 이미 꽉찬 차들을 피해서 마산으로 진입하고, 진동에서 진주로 향하는 |
국도로 들어선다. |
이도로도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문산으로 지나자 다시 꽉막혀 있다. |
진주시내를 진입하는데 1시간 정도 소요되어 골목길을 돌아 돌아서 촉석루 인근 |
갓길에 겨우 차를 주차 시킨다. |
22:00시 진주 촉석루(제61회 개천예술제 및 유등축제) |
제61회 개천예술제와 유등축제를 알리는 아치와 현수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촉석루 |
일대는 온통 등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으며 남강에도 많은 유등이 떠 있다. |
원래는 개천예술제속의 유등축제이지만 이젠 유등축제가 더 많이 알려져 있으니 |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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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예술제와 유등축제를 간략히 요약해 보면~ |
해방 이듬해인 1949년 1회예술제를 시작하였고 50년 6.25동란과 1979년 박정희 |
대통령 서거(국상)로 열리지 못해 실시한 횟수가 현재 61회로 환갑을 맞이했으니 |
대단한 예술제이며, 예전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여한 예술제이기도 하단다. |
유등축제의 유래는 김시민 장군이 3,800명의 병력으로 왜군 2만대군과 맞서 싸운 |
진주대첩때 의병 등 지원군과 교신 수단으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고, 횃불과 함께 |
남강에 등불을 띄워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전술로 사용된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
개천예술제에 포함된 행사로 진행되어 오다가 2002년부터 남강 유등축제로 발전하여 |
왔다고 하였으며 우리와 함께 여행한 쌀바위님의 말에 의하면 개천예술제가 열리면 |
모든일을 접고 개천예술제에 참여하였다고 하는 진주에서 가장 큰 행사였단다. |
△ 진주성의 주출입문인 공북문 △ 문안으로 들어가자 천년을 산다는 학의 군무가 시작되고~ △ 가까이서 봐도 날개짓이 활기차다 △ 남강의 유등과 다리의 조명이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 촉석루에서 내려다 본 남강으로 맞은편 둔치에는 조명 터널을 만든 듯~ △ 유등으로 민속 놀이를 재현한 곳~
△ 위에 사진들은 촉석루 안에 설치된 것으로 민속놀이를 재현했다. △ 분수대도 오색 붉빛으로 주변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인다 △ 강변으로 내려서서 찍은 유등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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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예술제 취지문 |
하늘과 땅이 있는 곳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이 인류의 역사가 있는 곳에 문화의 꽃이 |
피는 것은 아름다운 우주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
예술은 문화의 또 한겹 그윽한 꽃이요, 예술이 없는 세기에는 향기와 참다운 인간 |
정신의 결실이 없는 것이다. |
한 때 예술이란 권력자를 위하여 궁정속의 비원에 피는 꽃인 줄만 알았으나 온전한 |
예술이란 사람의 목숨과 같이 영원히 자유롭고 대중적인 것이다. |
기름지고 오오랜 땅 위에 커다란 꽃송이가 피어나듯이 힘차고 참다운 마음 위에서만 |
위대한 예술은 꽃피는 것이다. 포학의 모진 겨울에서 해방된 우리 겨레의 목숨위에 그 |
깊숙한 서라벌의 예술적 피는 바야흐로 꿈틀거리며 새로운 백화난만을 설계하고 있다. |
여기 독립된 1주년을 기리 아로 새기고 엄연하게 되살아난 겨레의 아우성과 마음의 |
노래와 그 꽃의 일대 성전을 사도 진주에 이룩하여 젊은 전 영남의 정신으로 개천의 |
제단앞에 삼가히 받들기를 뜻하는 바이다<<개천예술제 홈피에서 인용>> |
24:00시경 진주출발 |
11시반에 공식 축제는 끝이나고 불이 하나하나 꺼지기 시작하자 구경하던 많은 인파가 |
한꺼번에 빠져나오다보니 나오는 길도 만만찮다. |
그곳에 숙소를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축제인파로 숙소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
진주를 벗어나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다음목적지 갈대밭이 가까운 순천으로 이동한다. |
10월 2일(일요일) |
02:00시 순천 찜질방 |
찜질방에서 자보기는 오랜만이다. |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소주 몇잔을 미리 마시고 그런데로 곤한 잠이 들었나 했지만 |
두어시간 자고 잠을 깨니 다섯시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찜질방을 전전하면서 아침이 |
밝아오기를 기다린다. |
08:00시 찜질방 출발 및 아침식사 |
찜질방을 나와서 아침식사 할 곳을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고 차를 타고 출발하여 |
순천만으로 가는 도중 어느 부페식 기사식당(맛집에 나오는 집)에 들렀는데 가격이 |
싸서인지 생각처럼 반찬도 호감이 가지 않고 후식으로 마실 차도 보이지 않아 조금 섭섭했다. |
바깥에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일반 휴게소와 똑같은 금액으로 판매되고 있었고~ |
09:30분 순천만 자연생태공원(갈대밭) |
순천만은 보호습지로 등록되어 순천만 갯벌의 생태적 가치를 전세계에 알렸으며 |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10경이란다. 그중 일몰시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며 |
10월 하순경 갈대축제도 열린단다. |
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연휴라서인지 이미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고 관광열차와 |
배를 타려고 하였으나 이미 표가 매진이 되어 오후시간대 밖에 없단다. |
이곳은 몇번 다녀갔지만 가을에 오기는 처음이라 기대를하고 왔는데 실상은 갈대가 |
억새에 비해 아름답지를 못하다. |
전망대로 오르는 데크통로를 따라 가면 끝나는 지점에 억새가 조금 있는데 갈대와 |
확연히 비교가 되는데, 백발을 풀어 헤치고 가는 허리선으로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가을 햇살에 은빛을 맘껏 뽐내고 있다. |
울산 태화강 하구의 갈대밭도 이곳처럼 명승지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
억새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없는데 하구쪽에 보기 싫지 않도록 전망대를 |
세워서 갈대밭 억새와 철새들을 조망할수 있도록 하였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
잠시 잠겨본다. |
전망대로 오르는 길가에는 보수했던 흔적들이 잔디의 자람과 함께 자연스럽게 |
변해가고 있었고 그곳에 피어난 구절초가 아름답다. |
아마 공사할때 잔디 사이로 구절초 씨앗을 함께 뿌렸었나 보다. |
△ 순천만 자연만 생태공원 입구 - 전에는 입장료가 없었는데 이제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이곳을 통과할 수 있다. △ 순천만 입구에서~ △ 순천만 갈대밭 △ 갈대 △ 억새 △ 오름길 양지녁에 피어난 천리향 - 천리향 꽃이 지금 피는것이 맞는지? △ 흐드러지게 피어난 구절초 △ 전망대 오름길에서 내려다 본 갈대밭 △ 여수엑스포와 순천 정원박람회를 알리는 들녘 △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 하구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지렁이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물길이 이채롭다 △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순천만 하구 좌측편 풍경으로 칠면초가 색의 조화를 더해준다. △ 진흙속에서도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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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분 용산전망대 |
순천만의 갈대밭과 S자형 수로도 인기가 있지만 이곳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는 |
자라면서 일곱번의 색깔이 변한다는 칠면초(七面草)의 전망이 여기 용산전망대를 찾는 즐거움일 것이다. |
칠면초는 바닷가에 군생하는 한해살이 풀로 높이 15~50Cm로 자라며, 처음에는 녹색 |
이다가 차츰 자색으로 변하고 꽃은 8~9월에 피고 10월에 익는데 어린잎은 나물로 |
먹는단다. |
12:00시 순천갈대밭 출발 |
갈대밭을 출발하여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주암휴게소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
맛난 점심을 해결한다. |
어제 올때 약밥과 더불어 맛있는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심에 이 글을 통해 감사를 드린다. |
호남고속도로는 광주를 벗어난 외곽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으며 장성분기점에서 |
고창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로 곧장 오르게 되며 남고창IC에서 내려 학원농장으로 |
향하는데 시골 냄새가 정겨웠고 길가에 도열해 있는 코스모스가 가을 햇살을 받아 |
그의 청초한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
14:50분 학원농장 도착 |
학원농장은 10만평 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60년대에는 뽕나무, 70년대에는 목초를 |
재배하여 한우를 키웠고, 80년대에는 보리, 수박, 땅콩 등을 재배하다 90년대에 현재 |
주인인 진영호씨가 귀농하면서 보리와 콩을 재배하고 장미, 카네이션 등 화훼 농업을 |
병행하면서 관광 농업을 시작하였고 2000년대 들어 증가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경관 |
농업을 시작하여 2004년말에 전국 최초로 경관농업특구로 지정되어 봄이면 청보리를 |
심고 가을이면 메밀을 심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단다. |
△ 학원농장 - 이곳은 원래 청보리밭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 코스모스 꽃길 사이로 사랑도 영글고~ 가을도 영글어 간다. △ 사진으로 봐도 색깔이 너무나 곱다 △ 꽃마차가 관광객을 태우고 있다 △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하다는 메밀밭속의 아름다운 여인 △ 하트와 두손을 들어 아름다움을 함께한다 △ 메밀밭 사이로 길이 열려 있고 저멀리 관리동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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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시 학원농장 출발 |
학원농장을 출발하려니 일방통행으로 되어 있는 도로인데도 합류지점이 많고 |
관람객들이 함께 쓰는 도로이다보니 많이 지체가 되었고 합류지점에서 한대씩 |
교행을 시키면서 통행을 도와주는데 한대씩 교행중 앞차와의 일행이라는 시그널이 |
있는 차는 함께 대열이 되도록 하였는데 그동안을 참지 못하고 불만을 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나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는 생각을 해보면서 나름대로 |
위안을 삼아보지만 모두의 성급한 마음들에 아쉬운 생각이 든다. |
16:50분 선운사 도착 |
선운사에 도착하니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햇살을 확인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
도솔암까지 왕복하자고 제의하고 서둘러서 진행을 한다. |
올라가는 길에는 붉디붉은 빛을 밝히던 꽃무릇(상사화)이 이글거리던 꽃망울을 살포시 |
내려 놓고 한시름을 달래고 있었다. |
이미 늦은 시간이라 선운사 경내는 포기하고 곧장 도솔암을 오르기로 한다. |
가는 길은 찻길과 등산로가 구분되어 있었으며 아름드리 고목들과 냇물이 어우러져 |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선운사 조금 지난 지점의 차밭과 뒤로 동백나무는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한적한 |
곳이라서 인지 잡초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
이곳은 봄이면 많은 인파로 붐비던 곳인데 좋은 시절을 지나고 나니 괄시를 당하는 |
것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세상사 이치를 느끼게 한다. |
△ 선운사 입구로 꽃무릇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 마지막 붉은 정열을 토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꽃무릇 △ 이곳도 제법 넓은 꽃무릇 밭이다 △ 가까이서 본 꽃무릇 - 잎이 지고 나면 꽃이 피어난다고 하여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한다"고 상사화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 선운사 앞의 고목 - 줄기가 합쳐져서 하나의 나무가 된 것일까? △ 봄이면 많은 인파가 찾는 동백꽃밭 - 아래에는 녹차밭이 차지하고 있다 △ 저수지에 드리운 단풍나무 - 아직은 단풍이 이른 계절이다. △ 취나물꽃 △ 도솔암 도착전에 위치한 도솔암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으로 일명 진흥송이라고도 부르며 600년정도 된 소나무(반송)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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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유래 |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
이루기도 하였다. |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 |
들여지고 있다. |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기하게 |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선운사 홈피에서 발췌> |
선운사 |
송창식 작사, 작곡, 노래 |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
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
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맘처럼 하도 슬퍼서 |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거예요 |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 |
서정주 |
선운사 고랑으로 |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 조금 난해한 시이나 미당 서정주 시인이 선운사에 갔을때 어느 주막에 이쁜 주모가 |
한사람 있었다고 한다. |
6.25전쟁이 끝나고 어느해 그곳을 다시 가봤는데 주막은 불에타 없어지고 그자리에 |
나비한마리가 날아다니며 반기더라는 것이다. |
이시에서 동백꽃과의 만남은 실제의 만남이 아니라 영적인 만남이라는 평이다. |
18:00시 선운사 도솔암 도착 |
거대한 바위속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지만 주위에 나무들로 인해 아늑한 느낌이 |
드는 도솔암! 그중에 거대한 마애불을 쳐다보고 있자니 종교를 믿지 않는 나지만 왠지 |
마음이 맑아지고 경건해지는 것 같음을 느낀다. |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떻게 저 높은곳에 조각을 하였으며, 상부에 지붕이 씌웠던 |
것으로 보이는 홈을 보고 있자니 예전 이 깊은 산속에 무슨 장비로 어떻게 이런 |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구심만이 더 증폭되어질 뿐이다. |
△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 가까이서 잡아본 마애불 △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겨두고~~ △ 내원궁의 모습으로 조그마한 암자가 벼랑끝에 걸려 있는데 이곳에 모셔진 지장보살 좌상이 보물 제280호라고~ △ 내원궁 뜰에서 담아본 풍경 - 날이 어두워 달빛모드로 찍었는데 그런데로 잘 나왔다 △ 이름없는 조그마한 석탑 △ 내려오는 길에 진흥왕이 수도하였다는 진흥굴에 들러서 한컷~! △ 올라갈때 들리지 못한 선운사의 대문은 이미 굳게 잠겨져 고요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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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거대한 |
마애불상이다. |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黔丹禪師)에게 부탁하여 |
암벽에 불상(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 |
불상은 낮은 부조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며, 머리에는 뾰쪽한 육계가 있다. |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적인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
우뚝 솟은 코에 앞으로 내민 일자형의 두툼한 입술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
것처럼 보인다<<중략~>> |
마애불좌상에는 "이 책을 꺼내는 자는 민중의 지도자가 되어 왕도 정치를 타파하고 |
민중이 되는 시대를 열 것이다" 라는 비록이 들어 있다는 소문으로 동학농민전쟁 |
무렵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현세를 구원해줄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
책에 의하면 1890년 전라 감사인 이서구가 배꼽을 열어 보니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고 |
그런데 갑자기 뇌성병력이 치자 두려워 책을 도로 넣고 봉해 버렸다 한다. |
또, 1892년 동학교도 손화중이 이 비결을 꺼냈다는 얘기도 있으며 이 일로 많은 |
동학도들이 옥에 갖히고, 그 중 세명은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
<선운사 도솔암 홈피 등에서 발췌> |
지상보살좌상(보물 제280호) |
선운사 도솔암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 |
보살좌상으로 높이는 96.9㎝이다. |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상체가 |
늘씬하고 당당하여 고려 후기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나 문수사 |
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중략>> |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그래로 반영하고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
최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
마애불과 뒤로 지장보살좌상이 모셔진 곳(내원궁)까지 둘러보는데 이미 사방이 |
어두워져 보이질 않는다. |
전등도 준비되지 않았고 깜깜한 초순의 어둠속에 찻길을 따라 고즈넉히 내려오는데 |
또다른 맛이 있다. |
19:30분 선운사 주차장 출발 |
선운사 주차장을 출발 정읍까지 국도로 나온뒤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전주시내로 들어 |
가는데 당초 전주의 한식집을 예약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
몇집을 연락해 보았지만 전화가 되질 않는다. |
이곳 한식집은 대부분 9시에서 9시반 정도에 문을 닫는다고 하니 미리 예약은 물론 |
저녁 7시 반까지는 도착해야 할 듯하다. |
20:30분 전주 도착 저녁식사 |
전주에 도착하여 숙소(찜질방) 먼저 잡아두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낙지뽁음집에서 |
저녁식사를 한다. |
22:40분 전주 막걸리집 |
저녁식사하고 나니 배는 이미 불러 있었지만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막걸리 집을 찾기로 |
하고 쌀쌀한 날씨속 거리를 걸어서 그곳에 도착한다. |
늦은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몇팀이 바깥에서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풍경이 이채롭다. |
본점이 아닌 분점으로 안내를 받고 들어가 막걸리 두주전자를 부른 배 위에 힘겹게 |
채워 나간다. |
많은 안주가 있었지만 거의 손도 대지 못하였는데 막걸리 첫주전자는 만팔천원, |
추가는 만오천원이며 안주는 계속 다른 것으로 조달해 준단다. |
이곳에 가려면 식사를 하지말고 곧장가야 좋을 듯하였다. |
△ 우리가 찾은 막걸리집 - 바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 메뉴판 옆으로 수많은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 먹다가 찍은 사진이라 그렇긴 하지만~ - 처음에 부추전, 두부김치, 족발, 닭백숙이 나오고 추가시 여러가지를 더준다고 했지만 배가 불러 더 먹을 수 없어 낙지회만 추가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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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시 찜질방에서 취침 |
10월 3일(월요일) |
08:00시 찜질방 출발 및 아침식사 |
아침은 전주에서 유명한 콩나물 해장국으로 결정하고 맛집을 찾았다. |
식사전에 계란과 구운김을 먼저 먹고 콩나물국물 맛을 보는데 담백하고 |
시원하였으며, 콩나물 특유의 비릿내가 전혀 나지 않아서 좋았다. |
△ 별반 다른것 같지는 않은 콩나물 해장국인데 시원하고 맛있었다 - 육수 내는 비결이 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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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분 전주 한옥마을 도착 |
한옥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공용주차장은 꽉 들어차 있었고 겨우 도로변 한자리를 잡고 |
주차를 시키는데 주위에 학생들의 판소리 소리가 들려와 그곳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
잠시 경연대회하는 모습을 둘러보고 마을 여기저기를 다녀보는데 왠지 몸에 맞지 않은 |
옷을 입은 듯한 모습이 보여서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
첫째. 한옥마을 주위에 현대식 건물이 많았고(현재 짓고 있는 건물도 있었다) |
둘째. 주위에 일부 일본식 건물도 눈에 띄었고 |
셋째. 현대식으로 만든다고 했지만 담장 등을 만들때 고증을 거쳐서 예전의 모습을 |
되살려서 복원을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
넷째. 전기시설, 가스시설 등이 지하로 매설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벽체 바깥으로 여기 |
저기 튀어나와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
돌아본 한옥마을과 이성계의 위폐가 모셔져 있는 경기전도 좋았지만 1908~14년에 |
걸쳐서 지었다는 성당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더 반했던 하루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
△ 전주한옥마을 표지석 앞에서~ △ 한옥마을 안내도 △ 세계 소리축제가 열리고 있는 한옥생활체험관 △ 이리오너라~ 안아보자~! 소리 한마당 진행중~~~~~~~~~!! △ 영글어가는 가을과 한옥집 △ 돌과 어우러지는 토담 사이에 기와장으로 무늬도 만들고~ △ 소박한 장독대의 모습으로 가식없는 시골의 모습이라 사진에 담아 봤다 △ 해바라기와 한옥집 △ 대가집?의 장독대 △ 경기전 입구에 있는 나무로 경기전 일대에는 고목들이 무수하게 많이 서 있다 △ 경기전으로 어전으로 향하는 문 △ 태조 이성계의 어전 △ 경기전 너머로 서양식 건물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 줌으로 당겨봤는데 한옥과도 조화가 이루어 지는듯하다. △ 궁금증에 그곳을 찾아가보니 '전동성당'으로 1908~14년까지 6년에 걸쳐 지은 건물이라고~ △ 성당 내부의 모습으로 크지는 않으나 웅장한 모습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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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유래 |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
자취는 사라졌다. |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전주 한옥마을 홈피에서 발췌>> |
12:00시 한옥마을 출발 |
12:30분 전주 비빕밥으로 점심식사 |
전주비빔밥집도 만원이다. 대기표를 받고 20여분을 기다린 후에야 식사를 할 수 |
있었는데 그런데로 먹을만한 음식의 하나였다. |
식사후 사천으로 단감을 따러 가기로 하고 곧장 출발을 한다. |
△ 전주비빕밥집인 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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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분 사천 단감농장 |
단감농장은 쌀바우님 동생분이 직장생활 하시면서 틈틈히 농사를 짓고 있으며 |
가족들과 나눠먹기 위해 짓는다고 하였다. |
벌써 빨갛게 익은 단감들이 많이 보였고 하나를 따서 입에 넣어보니 홍시도 무척 |
달고 맛이 있다. |
그러나 막상 단감을 따려니 꼭지가 모두 물러 있었고 손을 대자 곧장 떨어지는 |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병을 앓고 있음이라 아쉬운 마음이다. |
그래도 얼마씩 따서 차에 싣는다. |
16:50분 삼천포 수산시장 |
이번 여행의 마무리는 삼천포 수산시장의 맛있는 회를 먹기로 한다. |
다른곳보다 유난히 싼 삼천포 수산시장이라 생각되며 일인당 만원이면 배불리 실컷 |
먹을 수 있는 곳이 이곳이란다. |
회를 써는 사이 와이프는 피데기 생선을 한무더기를 산다. |
△ 삼천포항 △ 참장어 또는 갯장어(하모)의 모습으로 주둥이가 상당히 뾰족하며 잇빨이 날카롭다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나고(바다장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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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분 전망대에서 저녁식사 |
수산시장에서 회를 썰어 삼천포대교가 보이는 팔각정에서 회를 먹는데 아름다운 |
석양과 어우러진 멋진 장관속에서 귀하다는 하모(참장어)회와 전어회를 배불리 |
먹어본다. |
△ 거가대교 개통과 함께 잊혀져가는 창선대교 - 거가대교는 바닷속 침매터널로 유명하지만 실상 이곳이 조용하고 경치도 더 아름답다. △ 아름다운 석양속으로~ △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태양과 코스모스 △ 이젠 가을 태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 어슴푸레 노을속에 어둠속으로 빠져든다.
△ 이런 어촌의 풍경도 아름다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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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분 삼천포 출발 |
삼천포를 출발하여 진주를 거쳐 막히는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를 통해 울산으로 |
돌아오는데 길이 전혀 막히지 않았고 오는중 피로가 몰려와 차에서 잠깐 |
눈을 붙인사이 울산에 도착한 것 같다. |
21:50분 울산 도착 |
함께해준 일행 모든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
언제해도 즐거운 여행~ 목적이 없으면 어떠하리~ 우리나라 금수강산 어느 곳인들 |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리오~~!! |
모든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니 피곤함이 엄습해 온다. |
이번 여행의 아름다움을 정리해보면서 또다른 여행을 꿈꾸며 깊은잠에 빠져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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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은 남도가 좋더군요~~~행복 했겠네요~~~
남도 여행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