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 성씨와 본관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1-03-15 18:00:00
김성회 :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中 고대 제후에 봉토·사성서 유래…통일신라 거쳐 고려초에 뿌리내려
286개 성씨 가운데 본관은 4179곳 김해 김 최다…밀양 박·전주 이씨 순
혈연의식 성씨보다 더 강하기도…동성동본 결혼금지 등이 대표적
# 한국 성씨제도의 특징, 본관
우리나라의 성씨와 관련하여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가 본관(本貫)제도이다. 본관제도는 처음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안동김씨 ○○이라고 하면 안동 출신의 김○○인 것이다. 그렇게 출신지를 나타내던 본관이 점차 집안 및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었다. 다시 말해 본관은 씨족의 발상지를 나타내는 역할뿐 아니라, 그 씨족(동본)의 집단적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같은 성씨가 너무 많고, 또 같은 성씨에서도 시조나 성씨의 탄생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성씨(金氏)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나 되고, 몇 개의 성씨(金, 李, 朴, 鄭, 崔 등)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다보니, 성씨를 가지고 신분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혈통관계와 신분질서의 징표로 성씨보다는 본관이나 족보의 중요성이 증대된 것이다.
사실 본관제도의 출발은 중국이었다. 주나라 시대 식읍을 제후들에게 하사하고, 사성정책을 쓰면서 ○○지역, ○○○이라는 표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지만, 그 사람이 태어난 곳에 따라 ○○지역 ○○○이라는 식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한자 성씨의 정착에 영향을 미친 당나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쓰면서 ○○지역 ○○○으로 쓰게 되었고, 점차 씨족의 발상지를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태어난 곳과 상관없이 안동김씨 ○○이라는 식으로 굳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출신지를 뜻하던 본관이 씨족의 발상지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정착된 본관제도는 어느 측면에서 보면, 성씨보다 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특히 하나의 성씨가 많은 인구를 형성하는 상황에서 성씨는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본관은 혈통과 신분를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김씨’라는 것보다 ‘어느 김씨’라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성씨를 보면서 외국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본관제도라고 한다.
# 본관제도의 성립
본관은 본적(本籍), 본(本), 관향(貫鄕)이라고도 한다. 보통 시조의 본적지를 본관으로 표기해왔다. 그런데, 시조의 본적지를 본관으로 표기하지 않는 성씨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외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성씨 대부분이 시조의 본적지보다는 씨족의 발상지를 본관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왕으로부터 사성을 받을 때 본관도 함께 받은 사례가 많아 시조의 본적지와 본관이 다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본관은 귀화 성씨든 사성이든, 시조의 탄생지라기보다는 씨족의 발상지로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이 파악되고 있다(통계청 2000년 인구센서스). 본관도 주요 성씨와 마찬가지로 거대 씨족으로 몰리는 경향이 뚜렷해서 김해 김씨가 9.0%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밀양 박씨 6.6%, 전주 이씨 5.7%를 차지한다. 반면 1000명 미만의 본관도 66%가 넘고, 1985년 이후 새로 만들어진 본관도 한양 강(姜)씨, 장지 김(金)씨 등 15개 성관(姓貫)이나 된다.
그럼 본관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일각에선 삼국유사의 신라 6부족을 예로 들며, 신라시대부터 본관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 씨족 시조의 태생(본적)을 거론하며 드는 예이고, 그 시대에 본관제도가 이뤄졌다고 보긴 힘들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본관제도가 시작된 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지방 호족들이 발흥을 하면서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즉, 통일신라 말에 중앙집권이 약화되면서 지방에 근거지를 둔 호족들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며 지배권을 확립하고, 그것이 성씨제도와 연결되면서 씨족의 발상지가 되었고, 그 발상지가 본관으로 굳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그런데, 본관제도가 정착된 것은 씨족의 발상지뿐 아니라 고려 초의 통치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기 위해 수많은 지방 호족들을 회유하고 연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태조 23년경에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군현제 개편과 토성분정(土姓分定) 사업을 시행하였고, 광종조에서 호족 정비책, 성종조에서 지방제도 정비책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본관제도가 정착된 것이다.
다시 말해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지방 유력 토성(土姓)의 수장에게 지방행정을 맡기거나 지방 지배를 위한 부세 징수권을 주는 등의 행정실무를 맡긴 것이다. 심지어 일부 군현은 중앙에서 관료가 파견되지 않고, 지방의 유력 토성이 ‘호장’직을 세습하며 징세와 지방행정 관리를 도맡아 처리할 정도였다. 이렇게 지방행정을 맡게 된 유력 토성은 이를 대대로 세습하면서 지방권력을 장악하였다. 중앙으로 진출한 상경귀족은 중앙정치의 변화에 따라 멸문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방 토성은 그와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어서 그 생명력이 강했다. 그리고 본관의 양민(백성)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고 거주지를 이전할 수 없었고, 이전했다가 발각되면 본관으로 되돌려졌다.
이렇게 한자식 성을 쓰는 과정과 씨족 발상지를 중심으로 하는 본관제도의 정착은 거의 동시기에 이뤄졌다. 즉,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건국 초기에 군현제가 정착되면서 본관제도가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본관제도는 고려의 지방행정 통치조직의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성씨의 본관은 신라와 고려의 국경(평양과 원산만) 이남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평양과 원산(영흥) 이북에 발상지를 둔 본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본관제도의 변화
이렇게 성씨의 발상지를 표시하는 본관제도는 고려의 지방행정 통치제도와 결합되면서 완전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중앙으로 진출한 상경귀족도 출신 지역과 연결되고, 또 출신 지역의 ‘토성’층은 중앙관료의 공급원 구실을 함으로써 거대 문벌귀족으로 지위를 굳혀갔다. 또한 중앙정치의 변화로 상경귀족이 몰락하더라도 토성은 그대로 유지되어 씨족의 생명력이 지속되었다. 심지어 조선 전기까지도 본관이나 문벌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족외혼보다는 족내혼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앞서 예로 든 선산김씨의 세계도(족도)에서도 김종직의 선대를 보면 같은 선산김씨끼리 혼인한 족내혼이 70%나 될 정도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같은 씨족끼리 결혼하는 족내혼과 다른 씨족과 결혼하는 족외혼이 병존했다. 예맥이나 고구려는 족외혼이 주종을 이뤘고, 신라는 족내혼이 대부분이었다.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가 이를 계승하게 됨으로써 족내혼이 일반화 되었고, 족외혼은 예외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에 주축 세력을 이룬 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고려의 문벌(족벌)체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으로 관습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듯 조선 초기까지 각 문벌은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경우(정략혼)를 제외하면 족내혼을 했다.
하지만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시대와 몽골 침략 이후로 본관제도의 변화는 불가피해졌다. 중앙정권의 변화가 무쌍하다보니 그로 인해 몰락하는 유력 토성들이 비일비재하게 생기고, 또 몽골 침략 이후 본관을 떠난 유민들이 급증하면서 문벌을 지탱하던 유력 토성의 기반이 약화되거나 무너진 것이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본관제도는 두 가지 문제로 인해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하나는 조선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며 지방 토성의 분정을 허락지 않거나 격하시킨 것이다. 즉, 지방 유력토성에서 호장을 세습하며 지방세를 징수하고 행정을 총괄하는 분정 정책이 폐기되고, 지방 유력토성의 지위와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다. 그에 따라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중인계급(6방)으로 격하되거나 몰락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이 강화되고, 또 거주지 이전이 손쉬워졌다. 즉, 지방 유력토성에 의해 세습적으로 관장되던 지방행정이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가 중심이 되는 행정체제로 재편되고, 족외혼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거주지 이전에 대한 통제도 약화된 것이다. 따라서 본관제도는 지방통치체제의 근간으로서 현실적 통치제도가 아닌 관념적인 혈연의식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족보의 발간으로 성관 통합이 이뤄지고, 또 군소 성관은 유력 본관을 따라 개관을 함으로써 집단적 신분질서로서의 본관제도가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본관은 다른 씨족과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그가 속한 부계친족 집단의 신분적 상징이 되었다. 특히 성씨만 가지고 신분을 구별할 수 없게 되면서 본관을 더욱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조선 후기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풍속이 문벌을 중시하여 사족(士族)들은 반드시 원조(遠祖)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손들이 흩어져 살면서 100대가 지나도 본관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 본관제도의 영향
이렇게 형성되고 발전한 본관제도는 성씨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람의 신분을 따질 때 성씨를 가지고 구분하는 경우가 있긴 하나, 통상 성씨를 따지기보다는 성씨의 ‘본관’을 따지게 되었다. 더 세밀하게 들어가 어느 ‘본’의 어느 ‘파’를 따지는 경우도 있긴 하나,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렇게 되다보니 우리나라에서 ‘본관’은 성씨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혈연의식의 뿌리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본관제도가 우리나라의 성씨제도와 관습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다. 대표적인 것이 호주제법 폐지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동성동본 금혼 제도이다. 성과 본이 같은 경우엔 혼인을 금지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철저한 부계친족 중심의 혈연의식에 입각하여, 모계의 근친혼은 허용하면서 부계의 근친혼은 금지한 것이다. 또한 부계친족 중심의 혈연의식은 제사나 상속에서 장자승계제도와 남존여비 풍조도 강화시켰다. 1909년 일제의 민적법 시행 이후 부분적인 변화를 거쳐 왔지만, 2008년 호주제법이 폐지될 때까지 본관제도가 우리의 관습과 의식에 미친 기본바탕과 뿌리는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성씨에 따른 제도적 신분질서뿐 아니라 관념적 신분질서까지 무너짐에 따라 유력 성관에 가계를 이어붙이는 행위가 줄어들고, 독자적인 성과 본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2008년 호주제법이 폐지됨으로써 모계성씨를 승계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부계만이 친족이라는 의식도 무너지고 있다. 물론 장자승계 원칙이나 남존여비 의식도 사라질 것이 예상되며, 점차 씨족적 신분질서와 혈연의식의 핵심을 이루는 본관제도도 변화가 불가피해질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