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정부가 화폐개혁을 조심스레 추진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부족한 세수를 채우기 위함일 것이란 추측이다. 소문의 진위여부를 떠나 전문가들은 화폐개혁 실시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다.
#마을 이장의 곳간이 텅 비었다. 이장이 되기 위해 여기저기 곡식을 나눠주겠노라 약속을 했지만 곡식은 물론 돈도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롱 밑 깊숙한 곳까지 뒤져야 하는 판국이다.
바로 박근혜 정부 이야기다. 현재 정부는 부족한 세수를 채우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내세운 공약이자 현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기 위해 임기 5년 동안 135조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증세를 통해 부족한 세수를 채우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대안이 필요하다. 이에 해결 방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지하경제 양성화 작업이다. 새누리당은 전체 지하경제 중 6%만 양성화에 성공해도 매년 1조6000억원의 세금을 더 걷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2월 22일에는 물밑작업으로 사금융 이용 실태 조사를 5년 만에 실시했다.
하지만 지하경제 양서화만으로 부족한 세수를 채울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증세없는 복지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급기야 박 대통령은 정부 출번 직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통해 증세 논의를 시작할 생각이라는 발언을 했다.
따라서 향후 박근혜정부가 증세를 실시할 공산이 크지만 박 대통령이 끝까지 공약을 지키고자 할 경우 지하경제 양성화는 어느 정도 이뤄져야 한다. 이에 화폐 개혁을 실시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화폐개혁 경제 부양 효과 미미
과거 우리나라는 대체로 경제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화폐개혁이 이뤄졌다. 1950부터 196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화패개혁이 실시됐는데, 이중 2차 화폐개혁은 1953년 2월 15일에 있었다.
올해가 2차 화폐개혁을 단행한지 60년이 되는 해다. 마지막 화폐개혁은 군사정부때 이뤄졌다. 1962년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긴급통화조치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0환을 1환으로 절하하고 환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한 것. 이렇게 화폐가치 변동 없이 화폐의 액면 단위만 바꾸는 것을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라고 한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화폐개혁도 리디노미네이션이다. 1000원을 1환으로 바꿔 달러화 가치와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려는 방안이다.
이미 리디노미네이션은 참여정부 시절에도 추진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과거 화폐개혁을 통해 실시 이후 물가상승으로 인한 불안을 경험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료들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됐다. 그리고 2013년 다시 수면위로 올라왔다. 화폐개혁에 대한 전문가들의 입장은 일단 회의적이다. 화폐개혁 실시 관련 인터뷰 요청에 오히려 “화폐개혁 실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느냐”고 되묻는 전문가도 있었다.
최문박 LG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화폐개혁대한 논의는 꾸준히 지속되어 왔으나 최근들어 그 논의가 활발해지지는 않았다”며 화폐개혁 실시 가능성에 대해 일축했다. 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수석연구원 또한 현재 국내 경제 상황을 고려할 경우 화폐개혁은 필요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어 “일본 엔화와 1:10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국제통화로 쓰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경제를 살리는데도 큰 효과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윤 수석연구원은 “경기 부양을 이유로 실시할 경우 실이 득보다 많을 것”이라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화폐개혁은 물가상승을 불러일으키며 이는 단기적으로 주가 상승을 이끈다. 이런 측면에서 당초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내세운 코스피지수 3000시대는 실현이 가능할 수도 있다. 다만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오히려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주식시장이 폭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한 대체로 리디노미네이션이 초인플레이션을 잡고 물가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실시되는 만큼 현재 국내 사정은 리디노미네션을 실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터기가 대표적인 리디노미네이션 성공 국가다. 터키는 1970년부터 2003년까지 소비자물가가 연평균 50%씩 상승했다. 정부는 1981년부터 20년간 평균 2년에 한 번씩 새 고액권을 발행하며 물가잡기에 적극 나섰다. 2009년에는 ‘터키리라’를 도입해 화폐단위를 100만분의 1로 줄였다. 이 덕분에 물가상승률이 한자리 수로 낮아졌다.
화폐개혁보다 원화 국제화가 더 시급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현재 원화 단위가 크다는 이유를 화폐개혁의 당위성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2009년 발행된 5만원권으로 그 문제는 일부 해소됐다고 말한다. 함께 발행이 논의됐던 10만원권이 출시가 시급하게 이뤄지지 않는 것도 앞서 5만원권 발행으로 필요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오히려 지금은 시기적으로 화폐개혁보다는 원화 국제화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윤덕룡 수석연구원은 “아베노믹스로 인해 원화강세가 이어지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마땅한 대응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이 미국처럼 유동성정책을 과감히 실시할 수 있는 건 엔화의 국제화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원화는 국제화가 미흡하다. 이는 실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학강사가 일본 대학에서 강의를 했을 경우 강의료를 엔화로 지급받는다. 반면 일본인 대학강사가 국내 대학에서 강의를 할 경우 달러로 강의료가 지급된다. 원화로 지급했을 경우 다른 나라에서 통용이 안된다. 일반적으로 자국의 통화가 국제적으로 계산단위나 교환수단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할 때 통화 국제화를 이뤄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화의 국제화는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이태희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원은 “한국은 통화국제화의 지위에 영향을 주는 선결조건들의 대부분에서 기존의 국제통화국들과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에 뒤지고 있다”고 말했다. 통화 국제화 정도는 수출입에서 자국통화의 결제 비중, 외환시장에서 자국통화의 거래 비중, 국제 채무증권 시장에서 비거주자의 자국통화표시 채무증권보유 비중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 비중들이 높을수록 자국통화는 더 국제화된다.
정혜선 swan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