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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에페소 4,1-7.11-13 마태오 9,9-13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이 될 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신가요?
십자가에 달려 팔을 벌리신 예수님만큼 예수님의 본성을 잘 표현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예수님이기보다는 자비의 예수님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으신 이유는 무언가 보여주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주님의 식탁에는 죄인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의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로 가시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비’입니다.
그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은 그래서 그분과 한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정말이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일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한 말기 간암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가셨습니다.
그 환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 있었고 친척들이 신부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어 신부님이 일어설 때 그가 신부님의 등 뒤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나 죄 없어.”
이 말은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죄인인데 그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죄를 잊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죄인들을 심판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도 판단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지옥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이 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죄인만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항상 죄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행위가 아니라 본성을 보신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는 것을 보시지 않고 음란한 마음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살인하는 모습을 보시지 않고 그 사람 안에서 화가 솟아나는지를 보십니다.
화가 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사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히 후회할 죄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 불효인 것과 같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본성이 자신이라는 것만 알면 우리는 결코 자비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야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누구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기도나 제물이나 봉사가 아니라 바로 ‘자비’ 하나뿐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리에서부터 사도가 되었기에 자신이 부르심 받은 이 은총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만이 결코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9,9-13: “나를 따라라.” 그는 예수를 따라나섰다.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하였던 것 같다.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신다.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응답에 달렸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러운 인간임을 느끼지만,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첫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셨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예전에 유명했던 건배가 있었습니다. 이 건배사를 술집만 가면 쉽게 들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였습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는 남이 아닐까요? 아무리 같은 직장, 같은 성당, 같은 단체에 있다고 해도 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나 외에는 모두 ‘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이 아니니, 뜻을 같이하고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라는 생각은 독선적인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나와 네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 안에는 ‘다름’이라는 것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함께하지 못할 사람으로, 나의 적 또는 원수로 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종종 이상한 항의를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다름을 왜 인정할 수 없는지, 여기에 자기 말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면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서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모습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반성합니다.
‘나도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구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보다 ‘우리는~ 남이다!’라는 구호를 외쳐보면 어떨까요?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나 뜻을 조금 낮추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모범을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로 당시의 모든 유다인은 세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마태오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기 집에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그 역시 어떤 판단 없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인 곁에 예수님도 함께 계실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간주한 죄인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삶의 끝에 남는 질문은 두 개다. 누구를 도왔나? 얼마나 배웠나?(찰스 핸디)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에페 4,7)
은총은
우리 믿음의 크기도 아니고
우리의 공로의 크기도 아니라네.
우리가 받는
은혜의 양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각자에게
꼭 필요한 은총을 주시어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머물게 하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자비는 인간의 비참함을 마음과 맞닿게 해 줍니다.
자비가 있으면 바로 행동이 뒤따릅니다.
하지만 자비가 없으면
삶의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자비는 내 마음과 정신,
전 존재로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행동 안에서 드러나기에
우리는 행동 안에서 자비를 관상할 수 있습니다.
자비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유는
머리로 이해타산을 따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실리를 먼저 따져 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관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에서 지적으로 따져 묻는 것은
그래서 도움이 안되고 걸림돌이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하루도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제가 되어 병든 이와 죄인을 먼저 찾고
그들을 위한 영적인 의사가 되어야 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