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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1년 2월 18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 8,34─9,1)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For whoever wishe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and that of the Gospel will save it.
말씀의 초대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자 한다.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는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인간의 교만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세상에는 인간의 교만으로 언어가 소통될 수 없는 분열과 혼란이 초래된다(제1독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힘과 이기적 욕구를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 역경과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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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바르나바’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갓난아이처럼 그의 어머니가 밥을 먹여 주고 대소변을 처리해 주어야 할 정도로 중증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잠시도 그를 떠나 있지 못하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볼 때마다 “‘애물단지’를 안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인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정작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애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에서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데, 왜 사람들이 애물단지로만 보는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어느새 그의 어머니는 신앙 안에서 자신이 안고 사는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지고 사는 십자가가 더 이상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은총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복음 나누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르나바가 너무 몸이 아파서 지난주에는 성당에 데리고 가지 못했습니다. 혼자 하는 미사가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갈 때, 바르나바와 함께만 있다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십자가가 없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운명처럼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의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그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며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기쁨과 행복은 이런 사람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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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느닷없이 3일 후에 죽는다면 ‘당장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라 했습니다. 학생들은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일단 부모님께 전화하고 애인이랑 여행 가고……. 아, 작년에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그러다 보면 사흘이 가겠지요.” “음, 저라면 부모님과 마지막 여행을 가고, 그다음엔 꼭 가 보고 싶었던 고급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먹겠습니다. 그러고는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일기를 써야죠.”
학생들의 소망은 뜻밖에도 평범했습니다. ‘여행을 간다. 친구를 만난다. 짝사랑했던 그녀에게 고백을 한다.’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교수님은 칠판에다 한마디를 썼습니다. ‘Do it now!’(지금 바로 하라!) 교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습니다. 어디선가 읽었던 만화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죽는다고 생각하면 ‘지지 못할 십자가’는 없습니다. ‘지금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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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유명한 여자 골프 선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승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가정의 행복”이라며 가정의 소중함을 전하였습니다. 그녀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소원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좋은 엄마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에게는 유명 인사가 누리는 명예나 재력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이 더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가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만큼 더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전삼용신부-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하는 것이 싫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해 주는데 왜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경말씀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든 에너지의 98%를 그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결국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썼었다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몇 더 들어왔는데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술 마시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보스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급이 낮은 사람들은 얼른 자신들의 술잔을 비웠습니다. 보스는 그냥 보지도 않고 아무 곳에 술을 부었습니다. 졸병들은 술을 따르는 곳에 재빨리 술잔을 갔다대어 술을 받았고 넘치기 전에 약간 잔을 들어 올려 따르는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보스는 다른 곳을 보며 본인이 원하는 곳에 술을 부었고 그 때마다 졸병들이 잔을 갔다대며 술을 한 방울도 바닥에 흘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스가 주는 술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도 웃어른이 따라준 술을 다른 곳에 붓거나 버린다면 큰 실례가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은총은 성령님의 선물이고 거룩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을 비운 사람에게 그 비운 만큼만 은총을 주십니다. 은총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사랑을 흘려버리거나 낭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주실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사랑을 왜 받아주지 않느냐며 그 한 사람에게 온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으십니다. 더 합당한 사람을 더 사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준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며 받아들이는 만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에너지는 나를 원하는 사람에게 더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을 위해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받아들이겠다면 언제든 사랑할 준비를 하되 그 사람에게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큼밖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양승국신부- <우리가 넘어진 바로 그 곳에서> 한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산중에 있는 아름답고 조용한 피정 집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오는 사람마다 다들 부러워했습니다. “이렇게 수려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사니 기도가 저절로 되겠군. 스트레스도 하나도 없을 것 아냐?” 그러나 정작 그 수도자는 늘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주 불안했습니다. 내적인 평화가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내면의 불안정이 바깥으로 표출되어 얼굴은 어둡기만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불행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가지 않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건, 이웃에 대해서건 지나친 완벽주의였습니다. 나는 매사에 완벽해야 해, 나는 아파서도 안 되, 나는 절대로 실수해서는 안 되지, 이번 행사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야 해... 틈만 나면 나름대로의 틀, 자기만의 잣대로 자신과 이웃에게 들이댔습니다. 단 하나라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무서운 얼굴로 돌변했습니다. 결국 그의 처신은 자신에게나 동료수도자들에게나 수많은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회복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죄책감, 우울증이 뒤따랐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심하게 해치는 완벽주의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추적해 봤더니 결국 자신의 무능함, 피해의식, 애정결핍에서 기인했습니다. 이런 영적 위기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첫 실마리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무능함, 자신의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 나의 결핍, 나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이토록 상처투성이뿐이며, 철저하게도 부족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다 던져버릴 때, 통째로 맡겨버릴 때, 그 순간부터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 순간부터 깊은 내면의 자유가 시작됩니다. 이런 쓰라린 작업이 진행된 이후에 하느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우리를 만나러 찾아오십니다. 우리 손을 잡고 일으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긋지긋하게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 때로 바라보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한계, 우리의 결핍, 우리의 죄, 우리의 실패, 우리의 방황과 실수, 과오... 참으로 묘하게도 이런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진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바로 그 곳에서, 우리 자신의 철저한 무능을 절절히 체험한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우리와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김찬선신부-
투덜거리지 않고 사랑하기 - 이재학 신부- 아마도 알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새벽을 열며 여러분은 계란을 세울 수 있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세울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콜럼버스가 세운 계란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즉, 탁자 위에 계란을 탁 쳐서 밑 부분이 깨지면서 세워집니다. 바로 이렇게 행동한 콜럼버스에 대해 사람들은 “누가 그걸 못하냐?”하면서 비웃었지요. 그때 콜럼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빠다킹신부
선택 -이정호신부- 가끔 밖에서 식사를 하게 될 때 동행한 분들이 무엇을 먹고 싶냐고 저의 의향을 나는 없다 -김홍일 신부- 재산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재산을 얻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지위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은 더 나은 지위를 획득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재산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고, 지위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고,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즐거움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고, 자녀나 부모나 형제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생명처럼 여기는 것들을 얻고 지키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연중 제6주간 금요일 - 김윤태 신부- 각자의 일터와 생활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아마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 희망이라도 없으면 살아가시기가 무척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기쁨을 주어 현실의 무게를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하루만 열심하면 안되고 매일매일 꾸준히 노력하고 준비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욕심스럽게 삽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초대에 맞지 않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들려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씀 “너희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잘 보게 해 주겠는데, 너희들이 잘 보인다고 하니 나도 어찌할 수 없다”는 주님의 깊은 탄식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시길 바랍니다. 같은 말 다른 말 -이회진신부-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언어가 발생하면서부터 인간은 서로 다른 언어를 하게 되었고. 서로 의사소통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로 아이들을 보면 놀랄 때가 있습니다. 한 번은 수도원에 부모님을 따라 3살, 5살짜리 일본 아이가 놀러 왔습니다. 하루를 묵는 동안 아이들은 참 골치 아팠습니다. 일본말을 하지 못하는 저희들로서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신부님과 면담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야 했으니까요. 아이들이야 수도원에서 뛰어 놀기는 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수사들은 뭔가 모르게 불안했습니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수도회에서 돌보는 어린이집 원장님과 그 집에 사는 같은 또래의 어린 아이들 둘이 수도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한국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을 같은 방에 집어넣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 두서너 시간을 거뜬히 같이 노는 것이었습니다. 신나게 뛰고 신나게 소리 지르고 무엇인가 서로 표현하면서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는 달랐지만 서로가 표현하는 마음은 같았던가 봅니다. 그 어린이집 아이들이 서너 시간을 놀아주고 돌아갈 때는 일본 아이들이 서운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서로 잘 가고, 잘 있으라고 포옹하고 서로의 말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의사소통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같은 말과 같은 낱말을 사용합니다. 문화를 형성하는 민족 간 지역 간의 언어가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때로 같은 말과 같은 낱말을 사용하는데도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같은 한국말을 하는데도 서로 대화가 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같은 집에 사는 공동체 회원들 간에, 또 한 지붕 아래 사는 부부 간에, 부모자식 간에도 일어나곤 합니다. 한국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이 다른 말과 다른 낱말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두서너 시간을 신나게 함께 할 수 있었음은 무엇보다 그들이 서로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 없이 한 감정 안에서 만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들이 같은 말과 같은 낱말을 쓰는 데도 대화가 잘 안 되는 것은 서로 간에 “나를 이해해줄까?”, “혹시 다른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경계하고 상대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같은 감정에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도 역시 사람들이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게 되면 사람들이 “하고자하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게 될 것”(창세 11,6)임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공동체이건, 사회의 다른 한 공동체이건, 수도회 공동체이건 공동체 각 구성원 간에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말을 알아듣게 되면 무엇이든 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 가정 공동체와 사회 공동체 그리고 수도회 공동체들 안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를 분열시키는 바벨탑은 너무나 분명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서로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어린 아이들조차 아무 거리낌 없이 신나게 놀 수 있었다면 서로 같은 말을 하는 우리들은 분명 더 멋지게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마음을,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한꺼풀만 접어도 우리는 많은 일을 서로가 기쁘고 멋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마음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바벨탑’을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 입으로는 당신을 찬양하면서 몸으로는 다른 짓을 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에 대한 고백이 몸짓, 마음 짓으로도 당신에 대한 찬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삶의 영성 -나영훈 신부- "생명과 구원의 길" -이수철신부- 저절로 뒤따르는 비움이요 버림이요, 떠남입니다. 생명과 구원, 자유에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 끊임없는 자기 비움의 여정이자, 떠남(엑스도스 Exodus)의 여정입니다. 하늘 높이 오르는 여정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아래로 흐름으로 하늘로 오르는 역설적 여정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떠나는 길뿐입니다. 그 반대의 현실이 펼쳐집니다. 안팎의 공간은 좁아지고 자유도 없어집니다. 죽음과 파멸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오늘의 문명 도시의 모습 같습니다. 허욕, 허영, 허명 가득한, 죽음의 파멸에 이르는 모습입니다. 어찌 보면 이런 인간의 과시욕이나 소유욕, 인간 깊이 내재한 두려움이나 불안, 외로움의 반영일 수 있습니다. 내적 빈곤의 반영입니다.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합니다.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문명 도시에 제동을 걸어 흩어 버리심으로 모두를 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오늘 날 거론되는 촌락 공동체의 복원으로 도시와 농촌, 문명과 자연의 균형잡힌 발전을 도모함이 인류 생존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지니게 됩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이 복된 미사 중에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말씀 안에서 사는 평화 -이철구 신부- 장례미사 강론을 할 때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양승국신부- <있는 힘을 다해 떨어트리려 했던 돌덩어리> 아프리카에 마음씨가 아주 고약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싱싱하거나 건강한 대상을 보면 괜히 화가 나고, 질투심이 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식물을 보면 줄기를 끊어버리거나 뿌리 채 뽑아 던져버리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지요. 그가 하루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먼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 중간에 한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아시스에는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던 싱싱한 종려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하필 심술궂은 그가 종려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길게 뻗쳐 나와 있던 나무 가지에 눈이 찔리고 말았습니다. 잔뜩 화가 난 그였지만, 종려나무가 워낙 커서 뿌리를 뽑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그가 아니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다가 엄청 무거운 바위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바위를 종려나무 줄기 한 가운데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종려나무는 갑자기 다가온 날벼락이자 감당하기 힘든 고통 앞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몸 전체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있는 힘을 다해 가지를 흔들어 돌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돌은 종려나무 몸통 한 가운데로 점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큰 바위의 무게를 지탱하기위해 땅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종려나무의 혼신을 다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과 최선을 다한 ‘뿌리내리기’ 작업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뿌리내리기 작업에 최선을 다했던 종려나무의 뿌리는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아시스의 깊은 수맥까지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맥 위에 견고한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그 종려나무는 다른 나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큰 나무로 성장했습니다. 풍부한 물과 영양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게 된 종려나무는 아주 당당하고 기품 있는 거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오아시스의 명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 종려나무가 오아시스의 거목이 되고, 그 지방의 자랑이자 명물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괴팍한 사람이 끼워 넣고 간 정녕 괴로웠던 바위 덩어리, 십자가처럼 여겨졌던 바위덩어리 때문이었습니다(요하네스 브란첸, ‘고통이라는 걸림돌’, 바오로 딸 참조). 우리에게 매일 매 순간 다가오는 십자가, 우리 삶을 억누르고, 우리를 힘겹게 하는 십자가는 사실 어떻게 보면 은총인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성장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지혜로워집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두 가지 조건으로 ‘자아 포기’와 ‘십자가 수락’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십자가는 ‘상징’이 아니라 ‘잔악한 현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주 십자가를 자기 몸에 친히 지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많은 사형수들을 봐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함부로 던질 수 있는 말도 아니었고, 선선히 수락할 있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수락은 목숨을 건 약속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적당한 예수님 추종이 아니라 목숨을 건 예수님 추종이 필요합니다. 적당 선에서의 예수님 추종, 적정선에서의 십자가 수락이 아니라 삶 전체를 건 자아포기와 생애전체를 통한 십자가 수락이 요청됩니다. 크게 포기할 때 묘하게도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전적인 추종, 목숨을 바친 투신을 하게 될 때 묘하게도 하느님은 당신 자비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참 평화와 참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생명의 길 -강영구신부 - 베드로가 0점을 회복할 수 있는 힌트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내가 도대체 누구냐?" 베드로가 나서 대답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채점은 없었지만 정답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정답의 내용을 밝히셨다. "사람의 아들이 수난과 죽음을 겪어야 하며,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이다." 베드로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펄쩍뛰며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예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베드로의 마음속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의 마음에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래서 베드로의 정답에 함구령을 붙이신 것이다. 베드로는 물론이고 제자들 모두가 예고의 말씀을 진정 깨닫지 못했다는 예수님의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베드로의 정답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진 답이었던 것이다. 결과는 0점이다. 오늘 복음에는 베드로가 0점을 회복할 수 있는 힌트가 들어있다. 그 힌트가 바로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시험에서 100점을 얻기 위해서는 정답을 써야하며, 그것이 실기시험이라면 정답이 될 수 있는 행동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제자들 또한 스승의 길을 그대로 따라오기를 원하시면서 추종의 기준을 제시하신다. 추종의 기준을 보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고,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살리려 하는 자는 오히려 잃고, 잃는 사람은 되려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자기를 버림과 잃음’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내어놓는 것이며, 이는 곧 하느님께서 죽어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결국은 예수께서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이 죽음을 이기도록 생명을 죽음에 부치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추종의 길이다. 생명은 귀중하다. 귀중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이웃에 생명을 바치라는 것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일방적인 자기비하나 겸손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 옆에 머물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삶을 내어놓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자가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의 부끄러움을 받게 된다.(38절)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 긍정과 사랑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론)과 모범(실천)에 질서 지워져 있어야 한다. ’예수추종의 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데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없다. 스승을 가장 잘 따르는 방법은 스승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베드로의 숙제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추종의 길은 나아가 우리의 교과서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8,34-9,1) -유 광수신부- 그러고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벌어들인다 해도 제 목숨에 손해를 본다면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실 사람이 제 목숨의 대가로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믿고 그분만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가시는 길은 순탄한 길이 아니라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시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지금과 같은 자세로는 안되고 새로운 결단 즉 나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뀐 사람이요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즉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님 없이 부유하게 살고 권력을 누리고 부유하게 사느니 차라리 예수님과 함께 가난하고 겸손하고 모욕을 받는 한이 있어도 그분과 함께 있기를 갈망하면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버림을 받고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위험은 예수님이 제시한 길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자기 생각을 갖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시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은 항상 어디에서나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주는 잣대가 되고 우리 안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기준이 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내려 주신 것으로서 내가 참된 신앙인인가 아닌가를 식별하게 하는 기준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수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예수가 아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기 멋대로 만들어 놓은 예수를 자기 방식대로 따르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식이 있고 조건이 있다. 예수님이 제시해주신 방식과 조건을 채우지 못할 때 그것은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시해주신 조건을 갖추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이고 특성이다.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완전히 실현시키는 것으로서 모든 악의 뿌리가 되는 거짓 자아를 벗어 던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파괴시키고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내가 입어야 할 옷이 아니라 입지 말아야 할 옷들이었다. 이제는 거짓 자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살리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입고 있었고 또 입고 있는 낡은(거짓) 옷을 버려야 한다. 마치 새살이 돋기 위해서는 곪아 썩어 들어가는 환부를 잘라내야 하듯이 버려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를 버리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는 역행하는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기"가 가장 커다란 방해이고 장애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의 모든 삶은 자기를 따른 삶이었다. 즉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싫으면 가지 않고, 나의 취향, 나의 성격, 나의 계획, 등 모든 것은 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자세로서는 도저히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계획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 그리스도의 계획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 즉 이제부터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가치전환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만난 이 후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필립 3,7-9) 결국 자기를 버리라는 것은 자기로 갇혀 있지 말고 자기보다는 더 크고 위대한 그리고 넓은 분에게로, 더 넓은 세계에로 투신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당연히 따라 오는 것은 자기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다. 그 동안 익숙했던 사람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동안 우리의 삶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었고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취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인 것이다. 그 십자가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면 좋겠다."라는 권고의 말씀이 아니라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강력한 명령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고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에 대한 기사가 연일 톱기사로 등장합니다. 김수환 신드롬이라는 것까지 생겼다고 하더군요. 지난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추모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김 추기경님의 각막 기증 소식이 전해진 후 장기기증 신청자가 예전보다 열 배 가까이 늘었다고 하지요. 또한 ‘선하게 살다 복되게 생을 마친다.'는 ‘선종’의 의미가 알려지면서, 사람들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잘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물질만능주의, 출세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더 중요한 것은 어렵고 힘든 사람 그리고 소외된 사람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추기경님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끝가지 좋은 모범을 보여 주신 추기경님을 오늘 주님께 맡겨드리며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두고 보자’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적당히 미루면서 살았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도 ‘두고 보자’, 자식을 장가보낼 일도 ‘두고 보자’, 울타리 고칠 일도 ‘두고 보자’라고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몹시 추워져 마을로 내려온 족제비가 울타리 구멍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닭장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는 잽싸게 뛰어나가서 족제비와 눈을 맞추고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이놈, 우리 집에 들오기만 해봐!”
족제비는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타리 구멍을 통과해 닭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했습니다.
“족제비 이놈, 닭장에 들어가기만 해봐라.”
족제비는 거리길 게 없다는 듯이 닭들을 잡기 위해 닭장 안을 뛰어다녔습니다.
“저런 겁 없는 놈을 봤나? 우리 닭을 물고 가기만 해봐라.”
그러나 족제비는 닭의 목을 물고 울타리 구멍을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족제비가 멀리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주인은 씩씩대며 소리를 질렀답니다.
“저런 나쁜 놈 같으니! 다시 나타나기만 하면 두고 보자.”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은 언제 이행해야 하는 것일까요? 나중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과거에 한 번 진 것으로 그만인 것도 아니지요. 바로 지금 당장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금 당장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지금 당장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항상 지금 당장 실천하며 살아갈 때, 우리 역시 주님 곁으로 갈 때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Key Words는
“주님을 따름”
“자신을 버림”
“제 십자가를 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행위는
주님을 따르는 행위,
자신을 버리는 행위,
제 십자가를 지는 행위,
세 가지로 얘기되고 있지만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기에
사실은 주님을 따름 하나이며
주님을 따름 안에 다른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주님을 따름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얘기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 주님은
“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주님을 따름”
“모든 것을 버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입니다.
그러니 부자 청년의 얘기에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소유물에 대한 가난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셨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모든 것 대신 자신을 버리는 자기 무화와
이웃 사랑 대신에 제 십자가를 사랑함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自己無化,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생명을 내 놓고 목숨을 잃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고 많은 순교자들이 보여주셨듯이
이것이 가장 완전하고 궁극적인 자기무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생의 마지막 한 번뿐입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자기를 버리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자기주장을 꺾는 것.
자기고집을 버리는 것.
자기 바람대로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
자기 좋을 대로 하지 않는 것.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그것이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꺾는 것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이고
자기고집을 버리는 것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이며
나의 바람대로 되지 않음이 나에게 십자가이며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이 나에게 십자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십자가를 하나씩 안겨주시며 말씀하셨다. “이 길 끝에 내가 서 있겠다. 십자가를 잘 가져오기를 바란다.” 말씀대로 제자들은 길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자 한 제자의 입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 예수님은 왜 굳이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시는가? 그러잖아도 힘든 세상살이인데!” 하지만 다른 제자는 아무 소리 없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힘내어 같이 가자는 말만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기 십자가가 더 커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만은 더 커졌다. 어찌어찌하여, 두 제자는 예수님이 서 있는 그 길의 끝에 당도했다. 예수님도 흐뭇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하셨다.
투덜거리던 제자가 기어코 한마디한다. “예수님, 아무래도 제 십자가가 저 친구 것보다 더 크고 무거운 것 같습니다. 왜 차별하십니까!” 정말로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게 아닌가.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본래 똑같은 것이었지. 하지만 십자가라는 것은 기꺼이 지려는 이에게는 점점 가벼워지지만, 억지로 지는 이에게는 점점 커지고 무거워지는 것이란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깨에 지고 낑낑거리며 가는 게 아니라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가는 것이란다.”
십자가 없는 삶이란 없다. 나름대로의 걱정과 고통, 삶의 무게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한다면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것을 짐으로 여기고, 고통으로 여기면서 산다면 한없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삶이란 이렇게 신비하다. 투덜거리고 불평하고 내려놓으려 해도 십자가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했다. 내 삶의 십자가를 더 사랑해 보자.
“처음으로 계란을 세운 사람은 천재지만 두 번째로 따라하는 것은 바보다.”
사실 알고 나면 쉬운 것이지만 몰라서 하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어린이 신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기사 내용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제일 재미가 있었던 것은 ‘숨은 그림 찾기’였습니다. 주변의 그림 사이에 숨어 있는 그림들을 찾는 것이지요. 친구들이 모두 그 신문 주위에 몰려서 찾아도 왜 이렇게 찾기가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을 찾은 뒤에는 이렇게 쉽게 숨겨져 있었던 것을 왜 못 찾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됩니다.
알고 나면 참으로 쉽지요. 그러나 첫 번째로 알고서 첫 행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행동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풍토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라면 첫 번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용기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간 다음에 나도 따르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이 세상의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십자가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온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침반을 떠올려 봅니다. 이 나침반은 아무리 흔들어도 똑같은 자리만을 가리킵니다. 혹시 자석을 갖다 대면 자석방향으로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겠지만, 그 외에는 무조건 북쪽만을 가리키는 것이 나침반입니다.
우리 역시 이 나침반처럼 한 방향만을, 즉 주님만을 향했으면 합니다. 물론 세상의 물질적인 유혹에 우리들의 마음이 움직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 그래서 얼른 주님께로 방향을 돌려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로 그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더욱 더 가까워진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어보실 때가 있습니다. 너무 비싼 건 부담스러워 안되겠고 같이 먹을 상대는
무엇을 좋아할까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면 무엇을 택해야 될지 몰라
언제서부턴가 된장찌개라고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된장찌개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보편적인 메뉴이기도 하고 제가 실제로도 좋아하니까요.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다보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을 한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과 사람됨을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택하는지 왜 택하는지는 결국 나의 됨됨이와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매일 제 목숨을 걸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선택은 결국 나를 드러내고 또 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희생하기를 늘 결심하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한 나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결심만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랑하기 위한 작은 선택, 선택에서 오는 고통과 번거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할 때 우리의 선택은 십자가의 선택을 닮아갑니다.
나는 무엇을 목숨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재산을 얻을 가능성도 없고 지킬 재산도 없으니 재산은 내게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위 또한 강력한 카리스마나 정치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 가능성도 없습니다. 자녀도 없으니 그도 아닌 것 같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 중에도 소유를 고집할 만큼 값진 것도 없으니 그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명예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부정할 자신이 없습니다. 내게 명예로운 사제가 되고 싶은 욕심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명예로운 사제가 되기 위한, 명예로운 사제처럼 보이기 위한 이러저러한 노력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쯤이야 한 사람의 사제로서 가질 수 있는 꿈이나 유혹이 아닐까 스스로 위로도 해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때문에 내가 당할 시험이 얼마나 클지 생각하면 아찔해집니다. 이미 그로 인하여 많은 죄를 지었고 앞으로도 그럴 위험이 크리라고 생각합니다. 십 년, 이십 년 후 명예로운 사제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고 있는 내가 도달할 모습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그조차도 버리고 하느님 사랑에 머무르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 내가 도달할 또 다른 모습을 상상할 때, 그 차이가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이 가슴과 머리를 칩니다.
나는 휴대전화에 남들 하듯이 내 이름을 새겨두었습니다. 한 동료 신부님은 이름 대신 ‘나는 없다’는 글자를 새겨놓은 것이 기억납니다. 목숨처럼 획득하고 지켜야 할 자신을 버릴 때만 채워지는 생명과 은총을 얻기를 빕니다.
만일에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욱더 우리 자신들과 가족을 곤궁에 처하게 만들거나 일시적 행복을 주고 파탄에로 이끈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취자 여러분! 그런 일에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들이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생명에로 이끄는 것입니까. 죽음에로 이끄는 것입니까?(잠시침묵) 혹시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그것이 죽음인지 독인지 모르고 눈앞의 일을 위해 걸어가거나 마신다면, 주님께서 생명에로 이끄시는 양식을 주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편에 생명의 길을 희망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소위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지기란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들의 욕망으로 이기심으로 십자가를 지기보다 어려움을 비겨가거나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설령 이웃의 유익과 하느님의 영광에 반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나아가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은 좀 여유 있고 성공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세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첫 번째 인간 아담 에덴동산의 유혹에서 두 번째 사람 예수님의 광야의 유혹이야기에서, 어떤 것이 성공의 길인지 알려주십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서 소위 돈, 명예, 권력 등으로 포장된 것들에 의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자신의 생명을 좀먹고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생활을 들어다 보면, 이런 내용을 금방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부럽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면, 이미 당신은 세상의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치료를 요하는 상태입니다. 바로 의사이신 주님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의사를 찾지 않고 어디로 가십니까?
세상의 모든 언어는 서로간의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전에 TV 드라마 중에 “상도”라는 프로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최인호 씨의 “상도”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입니다.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상도를 보면서 그 책도 사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상도(商道)”라는 말을 살펴보면 “상인으로써의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도둑에게도 만약에 이러한 “도”라는 호칭이 붙는다면, 의적 홍길동 정도 되겠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와 비슷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영성”이라고 합니다.
신학교를 6학년 때쯤입니다.
영성신학을 강의하시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점심 식사를 그 신부님과 함께 하면서 신부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신부님! 어떤 수도회든 각자 고유의 영성이 있는데
예를 들어, 프란치스꼬 수도회는 가난의 영성, 베네딕또 수도회는 기도와 일의 영성인데
그렇다면 우리 사제들의 영성은 무엇입니까?”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영성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들을 따르는 것인데
프란치스꼬 수도회는 예수님의 가난한 모습을 받아들여 그것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고
베네딕또 수도회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일하시는 모습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엄밀히 말하자면, 사제의 영성은 없다.
그 이유는 사제는 가는 곳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가는 곳,
그곳의 삶이 바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사제의 영성을 말하자면, 사제는 “직무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
사제 직무를 통해서 예를 들어 미사 집전, 성사 집전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지”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제 직무의 영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매일 바치는 일상적인 전례이지만
그것이 바로 사제 고유의 영성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중에서 공통 원리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첫째는 버림의 영성입니다.
어떤 영성이든지 따르고자 결심했을 때 가장 우선적인 것은 먼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비우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어떤 부분조차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라는 요소가 필수적인 것이지요.
가난한 모습이든, 기도와 일의 모습이든
그것이 내 몸에 완전히 익기까지는 노력과 인내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아빌라의 대 데레사 같은 영성가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그 일을 하면서 나를 비우고 힘들어도 참아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품에 안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삶의 대 영성가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 우리 삶의 영성은 어떤 것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 영성을 살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움이나 버림, 떠남도 능력입니다.
“주 하느님은 나의 힘
그분께서는 내 발을 사슴 같게 하시며
내가 높은 곳을 치닫게 해 주신다.”(하바3,19).
이런 하느님을 만날 때, 체험할 때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이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예외 없이,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때, 체험하지 못할 때,
끊임없이 모으고, 쌓고, 채우고, 커지고, 높아지려는 삶 중에
바로 오늘 창세기의 독서가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끊임없이 바벨탑과 같은 고층 건물들이 경쟁적으로 세워지는
마침내 주님은 그 현장에 개입하셔서
오늘도 주님을 따라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기 위함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 돈이라도 많았던 사람이라면 “그 많은 재산이 있으면 뭐해. 버느라고
죽기 살기로 고생만 했지. 자식들만 좋겠네…”라고 안타까운 마음도 갖습니다.
죽음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세상 안에서 이루었던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세상과의 단절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얻게 되는 평화를
빼앗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평화는 주님과 함께 누리는 평화입니다.
또한 죽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위로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면 우리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과 주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어둠 속에 떨어지는 것도,
관계 상실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안에 영원히 들어서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 저희들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제자인 저희들은 스승이신 당신의 삶을 본받고 당신이 걸었던 길을 걸어야 마땅합니다. 당신이 걸었던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되시던 전날 밤, 당신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13,13-15)
당신이 노예처럼 자신을 낮추어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신 것도,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을 오르신 것도,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것도 제자인 저희들에게 참 삶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조롱과 야유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며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그러나 당신은 그들의 조롱소리를 못 들은 척, 무력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 죽음 뒤에 있는 부활과 생명 그리고 승리를 똑똑히 보셨고,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만 보았습니다. 자기 慾望을 따르면 눈 앞의 현실만 보게 되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숨은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걸었던 길이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었으며, 모두를 살리는 길이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쉽게 그 길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소리보다 慾望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당신을 닮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령으로 비추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오늘도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기를 버리는 하루가 되도록 축복하소서.(一明)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작아진다는 것을 바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려고 하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위대해지는 것은 하느님의 눈에 귀중한 존재이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만이 실현된다. 누구를 눈치보고 또 누가 이야기를 하니까,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에게 손해가 되고 불이익이 돌아오니까, 체면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고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와 가난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실현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