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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묵상글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 저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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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저 사람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당신 고향에 가셨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
몇몇 병자에게 밖에는 아무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하며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하는데
저는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주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인데
진정 주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에게는 주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이 없지만
인간에게만은 인간의 협력 없이 하실 수 없는 것이 있고,
인간의 협력 없이는 전능하신 하느님도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협력이란 믿는 것인데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전능하셔도 하실 수 없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아무리 명의일지라도
환자가 믿지 않으면 어떤 처방이나 진료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 그에게는 명의도 명의가 아니고 아무 치료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의심도 기적을 불가능하게 하는데
불신은 더더욱 기적을 불가능케 합니다.
의심이나 불신은 기적의 문을 걸어 잠그게 하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문을 잠그고
믿는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왜 주님을 믿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왜 주님을 못마땅해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자기들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똑같이 한 인간인데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자기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주님께는 있다는 사실이 화나고 시기 질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어디서 그런 능력이 왔을까
그런 것이나 따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입니다.
저분이 아니고,
스승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저 사람입니다.
주님을 저 사람이라고 하고,
주님께 인간적인 것을 들이대면
주님도 저 사람일 뿐 아무것도 내게 하실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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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면서,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실상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할 뿐입니다. 곧 자신들의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자기 생각이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문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오히려 ‘자신이 알지 못한 낯선 앎’에 개방되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이요 받아들임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주님,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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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잘못된 선입견은 나쁜 영향을 미친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선한 것이 보이고, 부족한 허물을 채워줄 방법이 보입니다. 미워하면 보입니다. 꼬투리 잡을 허물이 보입니다. 문제만이 보입니다. 편견과 불신, 선입견이 있으면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믿는 이들은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모든 것 안에서 선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 능력의 손길을 펴는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 판단력과 방향 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정성 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앎이 확고할수록 다른 앎에 대해 폐쇄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할수록 하느님을 모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완고함입니다.” 그래서 섣불리 알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의 직업이 엘리트가 아닌 목수라는 것, 요셉이 이미 세상을 떠서 어머니하고만 자랐다는 것, 즉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는 것, 자기들보다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 마음이 비딱하면 밖으로 나오는 것도 비딱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사람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구세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시기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잘못된 선입관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적은 지식이나 정보라도 긍정적으로 관리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아무 은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가 은총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기적만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주어진 결과물에 매이지 않고 은총을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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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사제평의회가 열리고 서울대교구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입니다. 인사이동의 대상이 되는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 궁금할 것입니다. 교구에서는 인사이동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출신 본당으로 임명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로 같은 곳에 두 번 보내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로 같은 신부님과 두 번 지내게 하지는 않습니다. 따뜻한 신부님, 사랑이 많은 신부님,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는 신부님, 미사시간 30분 전에 고백성사를 주는 신부님, 함께 사는 수도자와 신부님들과 잘 지내는 신부님, 성체조배를 자주하는 신부님, 합리적으로 본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신부님, 직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부님,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먼저 찾아가는 신부님이 떠나면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은 어디로 가셔도 사랑받는, 존경받는 신부님으로 지낼 것입니다. 그런 신부님들은 어디로 가도 그 자리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도연명은 歸去來辭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앞으로 다가올 일은 추구할 수 있음을 알았노라. 사실 길을 잘못 들기는 했으나 아직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금이 옳고 예전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에 할 일이 생기겠구나!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요, 천국은 기약할 수는 없는 것이거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얼 의심하랴!” 뉴욕에서 5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사제들이 소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덧 4명의 사제가 돌아갔습니다. 이제 저도 ‘귀거래사’할 날이 올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어디에 있느냐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계절은 이렇게 다시 바뀌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야 함을 늘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바람과 해님’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사나운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지만 따뜻한 햇볕은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는 동화입니다. 어릴 때, 이 동화를 읽으면서 감동을 했고, 늘 이 동화는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감시와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늘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정과 부패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방송과 언론’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를 해야 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 수행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감시와 비판의 기능이 약해지면 당장의 정책 수행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우리사회는 점점 병들게 되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비판과 비난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비판은 사상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을 했습니다. 비판은 공정하고 사심이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생각합니다. 비난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시 못합니다. 비난은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왕의 잘못에 대해서, 잘못한 일에 대해서 비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했고, 다윗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한 여인을 앞에 놓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모두 손에 돌을 들고, 유대인들의 법을 들어 돌로 쳐야 한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오늘 복음은 비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정하고 올바른 비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비난은 하지 않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개선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함을 청하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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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느 집에 아이가 뇌종양이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의 부모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지요. 부모는 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서 수술을 해 줄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이오. 그것이 한두 푼도 아니고, 기적이 생겼으면 좋겠소.’라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7살 난 첫째 아이가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동생을 위해 자신의 무거운 저금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약국으로 갔습니다.
약국에 들어간 아이는 저금통을 들고 잠시 서 있었습니다. 약사가 물었습니다. ‘꼬마야 무엇을 사러 왔니?’ 그러자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기적이요.’라고 했습니다. 약사는 다시 ‘어? 뭐라고?’라고 물었더니 꼬마는 조금 큰 소리로 ‘기적을 주세요. 제 동생이 많이 아픈데 기적이 필요하데요. 여기 돈이 있으니까 기적을 주세요.’라고 하며 저금통을 내 밀었습니다.
약사는 웃으면서 ‘기적은 약이 아니란다.’라고 말하며 꼬마를 이해 시키려 했습니다. 그때 약사의 친구가 약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약사의 친구는 꼬마에게 말했습니다. ‘꼬마야 기적을 내가 팔게 너의 집이 어디니?’라고 물으며 자신의 친구인 약사에게 웃음지으며 꼬마를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동생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건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꼬마와 같이 집에 온 남자가 바로 유명한 뇌 전문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 꼬마의 믿음이 기적을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놀라셨다고 합니다. 왜 놀라셨나요? 그들이 믿지 않는 모습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이유도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구세주로 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았던 어린이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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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가득한 방
언젠가 선물받은 향초
오늘에서야 방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갑니다.
빛이 퍼져나가듯이
향기도 퍼져나갑니다.
추운 겨울
우리가 품고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퍼져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지금 제 방이 향기로 가득하듯이
우리들의 공간도 그분의 향기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추운 겨울
따뜻한 향기 가득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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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갑곶성지에 살 때는 식복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준비를 비롯한 주방 일, 빨래, 청소 등을 모두 저 스스로 해야만 했습니다. 주방 일이나 빨래는 할 만했고, 또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매님들이 이런 말씀 종종 하시지요.
“치워도 티가 나지 않고, 치우지 않으면 금방 표시가 난다.”
저 역시 청소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청소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청소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실제로 바빠서 청소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 먼지가 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볼 정도로 지저분해집니다.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티가 팍팍 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이 사랑을 어리숙함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티가 많이 납니다. 사람들의 평가도 곧바로 나오지요. 이기적이고 욕심이 너무 많다면서 각종 비판이 쏟아집니다. 이 비판을 받는 사람은 억울합니다. 왜 자신이 실천한 사랑은 알아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앞서도 말했듯이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보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을 보고 계시고, 당신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티가 나지 않는다고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소도 티가 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랑도 티가 나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 영혼이 엉망진창으로 바뀌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도 머물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당신 몸으로 사랑을 직접 실천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특히 그래도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요. 또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 역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가 사랑을 보여 주시고, 또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더 낫다는 교만함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줍니다.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곳에서만 은총이 가득히 흘러넘치게 됩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은총도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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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슬픔은 혼자서 간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이 충분한 가치를 얻으려면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어 가져야 한다(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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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삶의 성경책 ‘렉시오 디비나’
-날로 썩어가는 부패인생이 아닌, 날로 익어가는 발효인생을 삽시다-
“끈임없는 기도와 회개, 배움의 겸손한 삶”
성경의 이야기는 하느님 중심으로 펼쳐지는 성인들 삶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성서와 교회에는 참 무수한 성인들이 나오고 이들의 삶이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성서책 같습니다. 이래서 제가 몇해전부터 심취해 읽는 위인들의 자서전이나 평전으로 성서를 렉시오 디비나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읽습니다.
누구나의 참 소중한 성경책같은 인생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뿐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 하나하나가 소중한 살아있는 성경책입니다. 하루하루 써내려 가는 아직 미완의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내 나이 곱하기 365하면 각자 고유한 삶의 성경책 쪽수가 나옵니다. 삶이 혼돈스럽고 앞이,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디비나”하면서 삶을 새로이 추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로서 1월은 끝나고 내일부터는 2월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하루하루 써내려 가야할 선물의 날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이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의 삶자체가 하나의 고유한 성경책이요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구원의 표지,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의 성경책을 부단히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부단히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똑같은 성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몰(生沒)연대도 다 다릅니다. 성인들 모두가 가르쳐주는 바 하느님 중심의 내 고유의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모방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성인들의 삶을 통해 늘 우선적으로 확인하는 사실이 생몰연대에 산 햇수요 여기에 견줘보는 제 나이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떠날 인생임을 확인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 성인은 약 100년전 성인으로 현대의 성인에 속합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73세로 선종했으니 저는 성인보다 3세를 더 많이 살고 있습니다. 산날보다 살날이 얼마 안남았음을 봅니다. 성 요한 보스코의 참 아름다운 성경책 같은 삶이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성인들의 배경에는 거의 틀림없이 성녀같은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부전자전이기 보다는 모전자전입니다.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16일 이탈리아 카스텔누오보 베키에서 출생합니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두 형과 함께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마르게리타 어머니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분이었고 요한이 신앙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합니다. 그녀는 기도를 생활화하였으며 힘든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자기집을 찾는 불우한 이들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 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아홉 살 때의 꿈을 계기로 사제 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26세 되던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됩니다. 성인을 돕던 젊은이들과 함께 살레시오 남자 수도회의 창립을 시작으로 성녀 마리아 도메니카 마자렐로와 함께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집니다.
19세기 산업화라는 격변기 속에서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빈곤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욱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몸소 실천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였고 동시에 2천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였습니다.또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 안에 심은 대 영성가로 살레시오 프란치스코 성인을 참으로 존경했기에 수도회 명칭도 “살레시오회”입니다.
돈 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 바로 오늘 선종합니다. 이때 성인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깁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성인이 남긴 어록 둘이 대표적입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요한 보스코는 1934년 부활절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고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성인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던 1988년 1월31일 교황 성 바오로 2세는 재차 그를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으로 선포합니다. 성인의 지칠줄 모르는 활동의 원천은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와 자신의 사업전체의 영감이자 후원자로 여겼던 도움이신 마리아 성모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였습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고유의 성인이 될 것을 촉구하는 성인축일입니다. 우리는 성 요한 보스코를 통해서만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다윗으로부터도 참 많이 배웁니다. 내일부터 제1독서는 열왕기상권 시작으로 다윗의 죽음이 소개되고 오늘로서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생애도 끝납니다. 그런데 말년에 다윗은 또 죄를 짓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리고 죄과를 기꺼이 받습니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잠시 유혹되어 무지와 불신으로 인구조사를 한 교만을 후회하여 즉시 뉘우치는 회개에 있습니다. 완전히 회개가 일상화된 회개의 여정에 충실했던 다윗이요, 마지막으로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기도하는 다윗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감동을 줍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치십시오.”
말그대로 회개의 달인인 다윗이요 겸손한 성인 다윗입니다.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비교하며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라는 교황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회개한 성인이 다윗이요 부패로 성인이 못된 솔로몬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썩어 악취를 발하는 부패인생을 막아주고 익어 향기를 발하는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부패인생이냐 발효인생이냐 수시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회개의 달인인 다윗이 발효인생의 모범이라면 솔로몬은 시작은 좋았지만 회개의 소홀로 부패인생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공동전례기도의 은총이 회개의 일상화와 더불어 참 좋은 영적 효소가 되어 발효인생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하루하루 내 고유의 성경책을 잘 써가도록 도와 줍니다.
오늘 다윗의 불신과 교만이 문제였다면 복음의 예수님 고향 사람들 역시 편견과 불신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놀라던 이들이 급변하여 편견과 질투, 불신에 사로잡히니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 존경받지 못한다.”
무지와 질투, 불신으로 인한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이 얼마나 고질적 영혼의 질병인지 우리가 체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고향 사람들의 불신에 놀랐고 별 기적도 행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진정 회개가 필요한 고향사람들입니다. 무지와 편견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의 은총뿐이기 때문입니다.
내 고유의 성경책을 써내려가고 렉시오디비나 하는데 기도와 회개, 배움의 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이고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 다니며 가르치셨다.”라는 대목에서 고향 사람들의 불신에 실망감을 즉시 떨쳐 버리고 본래의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한, 주님의 한결같은 초연한 모습이 큰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이요 동시에 끊임없는 배움의 여정입니다. 이런 여정과 더불어 점차 완성되어가는 내 삶의 성경책이요, 날로 익어 향기를 발하는 발효인생이 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썩어가는 부패인생이 아니라, 날로 익어가는 향기로운 발효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우리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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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놀람>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마르 6,2)
“그러면서 그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삶은
‘경탄’과 ‘당황’이라는
두 가지 놀람의 연속입니다.
경탄은
낯선 것을 품는
아름다운 용기입니다.
당황은
가진 것에 집착하는
가련한 두려움입니다.
경탄은
평범함 속에 담긴 비범함을
발견하는 지혜입니다.
당황은
비범함을 애써 평범함 속에
묻어버리는 무지입니다.
경탄은
새 세상에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진보입니다.
당황은
오늘의 나를 어제에 가두는
답보이며 퇴보입니다.
경탄과 당황!
그 가운데에서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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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
‘하실 수 없었다’라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가?
‘할 수 없었다’라는 말의 뜻 가운데 하나는 단순히 인간 의지의 한계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나자렛에서 어떠한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나다(참조: 마태 13,58; 마르 6,6). 치유를 위한 본질적인 것이 양쪽에게 요구되는데, 환자에게는 믿음이요 치유자에게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상대방 없이 일방적으로는 ‘하실 수 없었습니다’ 곧, 기적들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치료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런 일은 윤리적 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의지의 한계와 관련된 비슷한 본문으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는 없다”(요한 7,7)와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마태 12,34)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불가능’이라는 은유는 의지로 말미암은 자유로운 거부를 뜻합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가능하다고 말하는 대목들에도 똑같은 개념이 적용됩니다(참조: 마태 19,26; 마르 10,27). 사람이 두 번 태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요한 3,4 참조)과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참조: 마태 19,24; 마르 10,25; 루카 18,25 )고 말하는 대목도 눈여겨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친히 뜻하셨다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 말고도 우리가 지금 살펴보듯이 완전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악하실 수 있다거나 존재하실 수 없다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실재가 존재할 수 없다거나 이 곱하기 이가 십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께서 행하시지 않는 것을 아드님께서 행하시기란 불가능하며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것은 아드님의 것이고, 아드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것은 아버지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이러한 안의 신학과 이러한 가장 내밀한 곳의 하느님은, 엑카르트가 말한 대로.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액카르트는 겉사람과 속사람을 구별한다.
“겉사람은 옛사람, 지상의 사람, 이 세상 사람입니다. 그는 날마다 늙어갑니다. 그의 끝은 죽음입니다 ... 반면에 속사람은 새사람, 천상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서 빛을 발하십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말씀은 속사람에게만 발설된다. 그 말씀이 발설될 때, 일치가 일어난다. 자아와 시간, 경쟁과 이분법 등의 장벽은 표면이나 겉사람의 의식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속사람 안으로 시간이 틈입하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지가 전혀 이채를 발하지 못하는 곳에서, 하느님은 마음껏 뛰놀고, 상호 작용하고, 창조한다. 혹은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이드(ld) 안에는 시간 관념에 대웅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모든 창조가 일어난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이 우주 전체를 창조한다. 시간이 정지되고, 영원이 시작된다. 또한 여기서 아버지는 완벽한 말씀과, 하느님의 자녀이자 말씀인 우리 자신을 낳는다. 모든 시간이 정지된 이 가장 내밀한 절정의 단계에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111)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2절: 그레고리오 개혁과 성직 서임권 논쟁
성직 서임권 투쟁:
후에 서임권 논쟁은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이 원리적 대립을 결정지을 기회와 호기가 왔다. 젊은 왕 하인리히 4세는 밀라노의 주교 선거에 있어서(1072), 교황의 금지를 거슬러 왕으로서의 처리권을 행사하였다. 1075년 로마의 사순절 교회회의에서 그레고리오는 속인에 의한 성직 서임을 더욱 엄격히 금지하고, 교구를 점유하는 데 있어서의 모든 권리를 그에게서 빼앗을 것임을 파문의 위협하에 통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의 질서가 의거하고 있던 오토 제국교회 체제의 전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이 포고령에 개의치 않았다. 1076년 1월 보름스의 시노드 - 제국의회 - 에서 극적인 장면이 벌어졌다. 즉, 하인리히는 그레고리오의 혁명적인 요청에 분개한 제국 주교들을 선동하여 교황을 거스르게 할 수 있었다. 그레고리오 7세가 폐위를 선고받은 것이다.
즉시 그래고리오는 하인리히에게 파문으로써 응수하고, 그의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충성 선서 의무에서 면제시켜 주었다. 왕을 교회 공동체 밖에 두게 한 이 파문은 왕권의 비신성화를 공공연하게 만들었다. 세계는 (초조해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나 하인리히의 지지자들은 급속히 사라져 버렸다. 1076년 10월 트리부르에 모인 제후들은 1년 이내에 교황으로부터 파문 해제를 간청하여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왕위를 잃고 새 왕이 선출될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왕에게 내놓았다.
이리하여 하인리히는 1076/1077년 겨울에 카노사로 참회여행을 떠났다. 그는 처자와 소수의 수행원만을 데리고, 큰 위험을 무릅쓰고 알프스를 넘어 갔다. 그 사이 교황도 독일로 여행하기 위하여 로마를 떠나 있었다. 하인리히가 아펜니노 산맥의 북쪽 비탈에 있는 카노사에 나타나 참회복을 입고 성문 앞에서 3일 동안 입장 허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1077.1.26∼27), 교황은 변경백(邊境伯)인 마틸다의 견고한 성내에 체재하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영세 대부인 클뤼니의 수도원장 위고와 마틸다의 중재로, 독일 제후들과의 분쟁에서 교황의 중재적 판결에 따를 것이라는 조건하에 그레고리오로부터 사죄를 받았다.(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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