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피리를 불고, 나는 노를 젓는다
산이 물가까지 내려와 앉아 있었다. 눈을 이고 선 봉우리와 짙은 숲, 그 사이를 채운 호수는 오래전부터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거울처럼 고요했다. 작은 배 한 척이 그 고요 속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나는 노를 잡았다. 당신은 내 곁에 앉아 피리를 입술에 댔다.
첫 음이 물 위로 흘렀다. 맑고 조금은 쓸쓸한 소리였다. 높은 산에서 태어난 바람이 먼 길을 돌아 사람의 숨을 빌려 노래하는 것 같았다. 피리 소리는 물 위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말없이 노를 저었다. 당신은 피리를 불고, 나는 노를 젓는다. 생각해 보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모습인지도 모른다. 반드시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것도,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은 노를 젓고 다른 사람은 노래한다. 서로의 역할이 달라도 배는 앞으로 간다.
젊은 날에는 동행을 다르게 생각했다. 사랑한다면 같은 것을 좋아해야 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하며, 마음까지 닮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부분을 발견하면 서운했고, 침묵이 길어지면 마음이 멀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세월을 지나고 보니 사람은 끝내 다른 사람으로 남는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대신 아파 줄 수 없고, 대신 꿈꿀 수도 없다. 같은 저녁을 바라보면서도 한 사람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오래전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난 뒤에야 동행은 조금 편안해진다. 나는 물길을 본다. 당신은 산을 바라본다. 나는 배가 바위에 닿지 않도록 노의 방향을 바꾸고, 당신은 다시 피리를 분다.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된다. 침묵 사이를 음악이 건너오고, 노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작은 박자를 만든다.
찰랑.
한 번.
찰랑.
또 한 번.
노를 저을 때마다 물 위에 둥근 파문이 번진다. 피리 소리도 그 파문을 따라 멀어진다. 문득 인생에서 만난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잠시 같은 배를 탔다가 먼저 내렸다. 어떤 사람은 먼 길을 함께했지만 어느 갈림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떠났다. 다시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고, 이름만 떠올려도 아직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 사람도 있다. 그때는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싶었다. 왜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든 동행이 목적지까지 이어져야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한 계절을 함께 걸어 준 사람도 고맙고, 힘겨운 강 하나를 건널 때 곁에 있어 준 사람도 귀하다.
사람은 서로의 인생 전체가 되어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 구간의 풍경이 되어 주는 것인지 모른다. 당신의 피리 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나는 노를 천천히 저으며 귀를 기울인다. 음악에는 길이 없다. 그런데도 어디론가 간다. 물 위를 지나 산허리를 타고 오르고, 보이지 않는 골짜기 너머까지 흘러갈 것 같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다.
힘들었느냐고 묻지 않아도 건네는 차 한 잔에서 위로를 느끼고, 오래 만나지 못했어도 “잘 지내지?”라는 짧은 한마디에서 지난 시간이 한꺼번에 돌아온다.
좋은 동행은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내 침묵까지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내가 노를 젓는 동안 조용히 자신의 피리를 불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내가 지쳐 노를 내려놓는 날에는 굳이 재촉하지 않고 함께 물 위에 떠 있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삶은 꽤 괜찮은 여행일 것이다. 호수 가운데쯤 왔을 때 나는 잠시 노를 멈춘다. 배는 곧 멈추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저어 온 힘으로 한동안 앞으로 미끄러진다. 우리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매 순간 애써 붙잡지 않아도 함께 쌓아 온 시간이 사람 사이를 이어 준다. 오래 나눈 마음이 있다면 잠시 연락이 뜸해도,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좋은 관계에는 여백이 있다. 그 여백 때문에 숨을 쉴 수 있고,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다시 노를 잡는다. 당신은 여전히 피리를 불고 있다. 산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산으로 가는 것인지, 산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굳이 알 필요도 없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보다 지금 누구와 이 물길을 지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있으니까. 인생의 후반으로 갈수록 사람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한 사람이 귀하다.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성공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를 감추지 않아도 되는 사람. 서로의 흰머리와 느려진 걸음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런 동행이라면 굳이 앞서갈 필요도 뒤따라갈 필요도 없다. 나란히 가면 된다. 한 사람은 노를 젓고 한 사람은 피리를 불면서. 어쩌다 역할이 바뀌어도 좋다. 어느 날 내가 지치면 당신이 노를 잡고, 당신의 숨이 가쁜 날에는 내가 노래를 대신하면 된다. 동행이란 결국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배를 지켜 주는 일일 테니까. 저녁빛이 산의 어깨를 타고 내려온다.
호수도 조금씩 금빛으로 물든다. 당신의 피리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가 천천히 사라진다. 나는 노를 물속에 담근 채 잠시 그대로 있는다. 고요하다. 그러나 외롭지는 않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없애 주는 일이 아니다. 다만 외로운 순간에도 혼자 건너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일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물길이 남아 있는지 모른다. 잔잔한 호수를 만날 수도 있고, 거센 바람을 만날 수도 있다. 언젠가는 이 배에서 내려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의 물빛은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당신의 피리 소리와 내 노 끝에서 떨어지던 물방울, 말없이 나란히 바라보던 설산,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작은 배 한 척. 삶은 어쩌면 거창한 약속으로 함께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당신이 당신의 노래를 잃지 않도록 내가 배를 저어 주고,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당신이 곁에서 한 곡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 그렇게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 주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길이 조금 덜 외롭도록 곁을 내어 주는 것. 나는 다시 노를 젓는다. 당신은 다시 피리를 분다. 그리고 작은 배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리듬을 싣고 고요한 호수 너머로 천천히 나아간다.
당신은 당신의 노래를 불어라. 나는 오래도록, 그 노래가 건너갈 물길을 저어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