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금) 에스라 2:1-35 찬송 190장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3.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4.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5. 아라 자손이 칠백칠십오 명이요
6.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이 명이요
7.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8. 삿두 자손이 구백사십오 명이요
9.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10. 바니 자손이 육백사십이 명이요
11.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삼 명이요
12.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13.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이요
14. 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15. 아딘 자손이 사백오십사 명이요
16.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17. 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삼 명이요
18. 요라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19. 하숨 자손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0. 깁발 자손이 구십오 명이요
21. 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22. 느도바 사람이 오십육 명이요
23. 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4. 아스마웻 자손이 사십이 명이요
25.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26. 라마와 게바 자손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27. 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28.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9. 느보 자손이 오십이 명이요
30. 막비스 자손이 백오십육 명이요
31. 다른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32. 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33.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오 명이요
34. 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5. 스나아 자손이 삼천육백삼십 명이었더라 (개역 개정)
2장에서는 고레스 왕의 조서에 따라 예루살렘과 팔레스틴 지방으로
귀환한 유대 백성들의 명단과 숫자가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제 1차 귀환자의 명단과 숫자는 느7:6-7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자들이 반복해서 이와 같은 내용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은
70년에 걸친 바벨론 포로 생활에도 불구하고 유대 백성들의
민족적·종교적 정통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소개되는 귀환자들의 명단과 숫자는
가급적 가계(家系)와 출신 거주지별로 분류되고 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10지파는 거의 민족적 존재를 상실했으므로
지파별로 분류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가문 또는 출신지를 기억했다는 것은 후에 다시 본토로 돌아갈 것을
믿었음을 의미하기에 가계별, 출신 거주지별로 분류했다.
한편 제 1차 귀환자들의 가계와 출신 거주지별 명단과 숫자가 언급되는
본문을 통해서 ‘스룹바벨’의 지도적 역할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세스바살이 죽고 난 후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의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던
예수아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그리하여 마1:12과 눅3:27은 스룹바벨을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2,500여년 전에 이루어진 택한 민족의 재집결 사건은
우리들이 비록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함을 교훈한다.
본문에 언급되는 귀환자들의 대부분이 바벨론에서 출생한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가계와 출신 거주지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은
유대 백성들의 마음속에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식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들 역시 각자가 처해 있는 현실적 여건과 신분이 어떠하든지
항상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 인식하며(빌3:20)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딤후2:15)
또한 본문은 하난미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보여 준다.
비록 시드기야 왕을 마지막으로 유다 왕국이 멸망됨으로써(왕하25:1-7)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삼하7:12-16)이 파기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스룹바벨이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유대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심을 입증하셨다.
특히 바로 이 스룹바벨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언약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셨다.
이렇듯 때때로 하나님의 약속이 어긋나거나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하나도 남김없이 성취되고야 만다.(합2:3, 마 5:18, 벧후3:9-10)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
오직 ‘아멘’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후1:20)
7-15절)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삿두 자손이 구백사십오 명이요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바니 자손이 육백사십이 명이요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삼 명이요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이요 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아딘 자손이 사백오십사 명이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가문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포로 생활을 어떻게 참고 견뎠는지를 암시해 준다.
‘엘람’ (7절)의 뜻은 ‘높은 장소’ 이다.
또한 ‘삿두’ (8절)는 ‘사랑스럽다’ 라는 뜻이며
‘삭개’(9절)는 ‘순결하다’ 혹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라는 뜻이다.
‘바니’(10절)는 ‘세움받다’ 라는 뜻이며
‘브배’(11절)는 ‘자애롭다’ 라는 뜻이고
‘아스갓’은 ‘갓은 강하다’라는 뜻이다.
또 ‘아도니감’은 ‘하나님이 일어나신다’라는 뜻이요
‘비그왜’는 ‘행복하다’ 라는 뜻이며
‘아딘’(15절)은 ‘여호와께서 영화롭게 하심’이란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이 이름들을 포로로 잡혀가 고난받은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들임을 느낄 수 있다.
즉 그들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높일 것이며,
기억할 것이요, 또 자비를 베푸시고 든든한 곳에 세우실 것을 소망하고 산 것이다.
더 나아가 행복하고 즐거운 심령으로 징계를 달게 받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반드시 귀환하게 해주리라고 하신
언약을 확신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가문들은 자신들 가문의 이름처럼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고국 땅으로 귀환하고자 하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소망은 신앙의 다른 얼굴이다.(롬8:24).
우리는 현재 소망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영생 천국의 언약을 붙들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소망은 반드시 현실화된다.
헛된 소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를 걸고 하신 약속이다.
물론 자신의 탐심에 근거한 소망, 사망의 권세를 의지하는 소망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의지하여 품은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게 된다’라고 말씀한다. (잠10:28)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 소망으로 오늘의 고달픔과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
고난은 잠깐이요 하늘의 영광은 영원하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