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18
9월19일[연중 제2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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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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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4e4qvBzNTA?si=xV7y7SLRUXSvdkuM
(서울대교구 이현철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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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타볼산을 만나게 되고 에스드렐론 평야로 접어듭니다.
좀 더 내려가다보면 사마리아 지방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 길가에 나인(Nain)이라는 작은 성(城)이 있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40Km, 나자렛에서는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거리에 있으니,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오늘날까지도 네인(Nein)이란 이름의 작은 마을로 남아있습니다.
‘나인’(Nain)이란 말의 의미는 원래 ‘기쁨’ ‘환희’ ‘즐거움’이었습니다. 결국 나인성은 ‘기쁨의 고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카파르나움을 거쳐 나인성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날은 고을 전체가 기쁨, 환희, 즐거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울적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나인성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직 갈 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외아들이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유족이라고는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요절했고, 동시에 외아들마저 요절했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인생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해도 해도 너무한 통념이 하나 있었는데, 요절을 죄에 따른 벌로 간주한 것입니다. 안그래도 남편과 아들을 잃고 슬픔이 하늘을 찌르는데, 중죄인 취급까지 당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사실 남편이 요절한 이후 어머니에게 외아들은 삶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 삶 전체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냉랭하고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저 아들만 바라보며 견뎌왔습니다. 그런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인생 역시 끝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인성을 들어설 때 마주쳤던 상황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기쁨의 고을이란 이름의 나인성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름이 지닌 바처럼 환희로 가득 차있어야 할 나인성은 한 인간 존재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죽은 외아들의 관을 메고 걸어오던 사람들의 얼굴 역시 비통함과 상실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절묘하게도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에서 ‘딱’ 마주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언행을 유심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혹독한 현실 앞에, 그 누구도 입 하나 뻥긋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 과부를 위로해 달란다거나, 외아들을 되살려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나서신 것입니다.
그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는 한 인간 존재 앞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을 느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다거나 도움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당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행동하십니다. 관으로 다가서선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복음 7장 14절)
예수님에 의한 죽었던 외아들의 소생 사건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조차 지배하고 주관하시는 참 메시아시며, 참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 안에 이미 죽은지 오래 된 사람 조차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입증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은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이심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음보다 더한 큰 슬픔에 잠긴 한 인간을 향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다가오시고, 어떻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시는 가를 세밀하게 보여준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니신 모든 능력을 오로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자비로운 소생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나인성의 과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다양한 슬픔과 시련, 작은 죽음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한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거듭 부서지고 허물어져, 한없이 비참해진다 할지라도, 그 비참함을 묵묵히 견디다 보면, 또 다시 새벽이 밝아오고, 또 다시 작은 희망의 문이 살짝 열릴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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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USOKg2w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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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재료를 주며 좋은 물건으로 돌려받기를 바란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복음만 읽어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 과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살려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왜 불쌍하게 죽는 이들은 모두 살려주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도 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마음이 없는데 선물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어머니의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이 말에 어머니의 큰 믿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돌려주셨다”라는 말 안에는 어머니가 예수님께 먼저 “맡겨드렸다”, 혹은 “봉헌하였다”라는 말이 전제됩니다. 맡겨드렸다는 말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인의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맡긴다는 말은 ‘죽여서 봉헌한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자기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죽여서 맡기지 않고 살려서 맡기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고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요즘 선생님 신자들에게 엄마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학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연도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선생님에게 보낸 문자입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곰곰이 생각 좀 하다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 내내 서 있게 한다.’라고 아이가 말하더라고요. ‘엄마 근데 나 도덕책을 잃어버렸어.’ 그날 밤 아이는 경기를 일으켰는데, 경찰서에 문의해보니 아동학대라고 하는데, 편법으로 아이들을 조지시면 편법으로 선생님을 조질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겠어요 ^^”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오늘 아이들에게 확인해 보았는데요. 제가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엄마들은 아이들이 이상해지는 것을 선생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맡기지 않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20대 교사가 안타까운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구타당해도 선생님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편이 없어? 교사가 죽었는데!”라고 울부짖는 동료 교사의 말은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일까?’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동료 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프로필 사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들 어린데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큰 영향을 준다는 거 아시죠? 아직 사실관계도 판명 나지 않은 일로 이렇게 추모한다는 걸 드러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으니 언급 자제 부탁드려요.”
이 댓글 때문에 파문이 일자 또 이러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선생님 제 문자를 여기서 볼 줄 몰랐어요. 너무 당황스럽네요. 개인적인 문자 내용을 유포하셨으니 각오는 되신 거죠? 학부모 회의안건으로 올릴게요. 너무 치욕스럽네요.”
어머니들이 이렇게 교육을 잘할 줄 안다면 왜 학교에 보내는 걸까요? 본인이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애 아빠가 지금 참고 있어요. 내가 말렸어요!”라는 등으로 협박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선생님들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들에 대해 어머니와 선생님들을 위한 솔루션에서 “실제의 실천적인 변화가 오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에 어느 유명 교육 전문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세요.”
예를 들어 놀이터에서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타려다가 다치면 엄마는 왜 자기 아이가 줄을 서지 않게 키웠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선생님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애 마음 얼마나 읽어주셨어요?”
교육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변화시키게 만들려면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말은 봉헌한다는 말입니다. 봉헌한다는 말은 죽인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다시 스마트폰도 빼앗을 수 있고 아이를 돌려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정상적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믿지 못하면서 자녀를 맡긴다는 말은 학교 교육으로 내 자녀가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변화시키고 싶다면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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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을 주면서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맡기려면 완전히 맡기십시오. 완전히 맡겼다는 말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제에게 성당을 맡겼는데 교구가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목소리에 휘둘리면 어떨까요? 사제는 그 성당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사제가 봉사자를 뽑았다면 그 봉사자가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도록 해야 합니다. 책임은 그 봉사자를 뽑은 사제에게 있습니다.
물론 사고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맡기려면 제대로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봉헌하여 좋은 것으로 돌려받으려면 죽은 제물을 바쳐야 함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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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11-17: 젊은이여, 일어나라
예수께서는 나인이라는 곳에 가시다가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다.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슬픈 상황이다. 백인대장의 경우에는 병을 고쳐달라는 청을 받으시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부탁드리지 않았는데 주검 가까이 가신다. 예수님은 과부에게는 눈물을 빨아들이는 해면이 되셨고, 아들에게는 생명이 되셨다. 죽은 사람을 땅에 묻으러 가고 있었다. 이 상여 길에서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분은 죽음과 부패를 이기신 분이시다. 그분은 과부의 눈물이 그치도록 자비를 베푸신다. “울지 마라.”(13절) 여인을 울게 했던 원인이 그 말씀과 함께 사라졌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기쁨에 함께하시며, 결국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시고 상여를 멈추셨다(14절). 그리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 명령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 젊은이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기게 되었다(15절). 예수께서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소외당하는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심을 알 수 있다. 구원은 우리 인간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려지지만,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들의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로 바뀐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16절) 한다.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살아났으며, 그 기적은 온 유다와 그 주변 온 지방에 퍼졌고 모두가 감탄했다. 놀라운 기적 앞에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항상 조그만 일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변할 수 없다. 나 자신의 진정한 변화의 기적을 청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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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1984년 103위 시성식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례로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시성식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을 하면 교회는 가경자라는 이름으로 조사를 시작합니다. 교회는 면밀한 검토와 표징을 토대로 ‘가경자’를 복자품에 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복자품에 오른 분들에 대해서도 시간을 두고 기도한 후에 비로소 ‘성인품’에 올리게 됩니다. 교회의 시성식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특별한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한번 시성된 성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 않고 공경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시성식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하고, 증언을 들어야 하고,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2014년에 124위 시복식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례로 광화문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황 방한 준비 위원회에서 일하였습니다. 124위의 복자가 성인품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한 치의 오차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해방이 되기 전인 1943년 먼 타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은 그분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려하였지만 북한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였고, 대한민국 공군이 우리의 영공으로 돌아오는 유해를 호위하였습니다. 그분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그분의 흉상은 다른 독립투사들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설치되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던 독립군들의 정신을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따르자는 취지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부는 홍범도 장군이 과거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흉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합니다. 그분이 공산당에 가입했던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인 러시아와 민주주의인 미국은 연합국으로 같은 편이었습니다. 제국주의인 일본,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대한민국이 아직 해방되기 전이었고, 이념으로 세계가 양분되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훈장을 바란 적도 없었고, 흉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같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권에 따라서 훈장을 주었다가 취소한다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흉상을 만들었다가 철거한다면 이 또한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역사 앞에서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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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9.18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신문 홍보를 위해서 LA 성 아그네스 성당에 다녀왔습니다. 신문 홍보를 다닐 때면 늘 막막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걱정도 되고, 신문 신청은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됩니다. 감사할 일은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그냥 돌아온 적은 없었습니다. 많을 때는 50명이 넘었고, 적어도 20명은 넘었습니다. 신부님들께서 신문을 구독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문을 이미 보시는 분 중에는 ‘후원금’을 내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비행기로 왕복 12시간이 걸리는 LA 신문 홍보지만 신청서를 들고 돌아오는 마음은 넉넉합니다. 신문 홍보를 하고 있는데 샌프란치스코에서 온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9시간을 운전해서 왔다고 합니다. 매일 올리는 묵상 글을 보았다고 합니다. LA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기쁜 마음으로 먼 길을 달려왔다고 합니다. 미사가 있고, 홍보로 바쁜 중이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저를 위해서 먼 길을 오셨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저는 10분 정도 만나기 위해서 9시간 넘게 운전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2005년 겨울입니다. 토론토에서 연수할 때입니다. 방을 새롭게 구하면서 짐을 옮겨줄 봉사자를 기다렸습니다. 약속 시간은 8시였습니다. 30분을 기다리다가 택시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봉사자는 오는 길에 사고가 있어서 늦었다고 합니다. 제가 성격이 급하기도 하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기에 출발했지만 나중에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안했습니다. 이왕 기다리는 것 조금 더 기다려도 될 것인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였습니다. 저를 믿어준 고마운 일도 있었습니다. 1988년 겨울입니다. 제게 예비자 교리를 배웠던 학생이 취직했습니다. 첫 월급을 탄다고 제게 음식을 대접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대학다방에서 5시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천마산엘 가면서 그만 약속 시간을 잊어버렸습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약속이 생각났고,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다방 한 구석에서 저를 기다리던 학생을 보았습니다. 선한 눈망울에 웃으면서 제가 올 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고맙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능력이나 업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기도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열심히 하였지만 더러는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을 칭찬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은 간절함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삶은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병든 종을 내치지 않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은 피부색, 신분, 학식에 따라서 커지는 것’이 아님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시로페니키아 여인, 백인대장’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분들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 해도, 교만과 욕심에 사로잡혀있으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야단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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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일어나라>
“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루카 7,11-17)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또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은 죽음의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신(희망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들은, 죽은 그 사람만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적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그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군중을 위한 기적이기도 하고, 지금 복음서를 읽고 있는 우리를 위한 기적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흔히 무심코 지나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루카 8,54)
“예수님께서 ......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나인’이라는 고을에서도 죽은 젊은이에게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직접 명령하신 것은, 죽은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대로 움직일 수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은 당사자의 응답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음은 ‘긴 잠’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울지들 마라.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루카 8,52)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무생물’처럼 되어버린다는 생각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어도 ‘무생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살아 있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우리가 바치는 기도도 들을 수 있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연도’는 죽은 사람의 안식과 구원을 주님께 부탁드리는 기도이고, 동시에 유가족을 위로하는 기도이고, 그리고 죽은 사람 들으라고 바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을 때,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의 심정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히 예수님이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떤 심정일지, 살아난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증언하고 고백할 수 있는 첫 번째 증인은 바로 그 당사자들입니다. <복음서에는 당사자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을 한 당사자의 증언과 고백은 목격자들의 말보다 더 생생한 증언과 고백이 되었을 것입니다.>
라자로는 살아난 뒤에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과 ‘나인’ 고을의 젊은이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살아난 뒤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울지 마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ㄹ-4ㄴ)
“일어나라.”라는 말씀은, 이야기 속에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말씀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서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서 생명을 향해 나아가라.” 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죄입니다. 정말로 사는 것이 힘들더라도, 죽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겨우 살고 있더라도,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일수록 더욱더 주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살아난 그 젊은이는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 ‘진짜’라고 증언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라는 말은, “죽은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고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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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 이야기는 엘리야 이야기(1열왕 17,8-24 참조)와 많이 유사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라는 성읍에 들어서며 과부 한 사람을 만났듯이(1열왕 17,10 참조), 예수님께서도 나인이라는 고을의 성문에서 어떤 과부를 만나십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었듯이(1열왕 17,22 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만나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십니다. 특히 다시 살아난 아이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공통된 장면에서, 두 이야기의 표현이 꽤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사함에서 예수님을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하려는 루카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엘리야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 엘리야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아이를 살리려고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세 번에 걸쳐 자기 몸을 아이 몸 위에 펼친 다음, 다시 주님께 부르짖는 등 조금은 복잡한 치유 과정을 거치는데(1열왕 17,20-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 한마디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아이를 일으키십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요청(1열왕 17,18 참조)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점은, 과부도, 고을 사람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 기적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닌 이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곧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애처로이 울고 있는 과부에게 느끼신 그 연민의 정이 죽었던 이를 살아나게 한 유일한 동기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어떤 슬픔에 잠겨 울고 있습니까? 이미 그 딱한 사정을 굽어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울지 마라.” 주님의 위로 속에 깊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참 부족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의 연민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는 이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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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
오늘 복음[루카 7:11-17]에서 우리는 나임이라는 곳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을 예수께서 살려 주셨다 하는 기적을 말씀을 들었다.
나임이라는 곳은 열왕기 하권 4:18-37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언자 엘리아가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곳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들렸을 때 상여에 매어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만나게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뼈아픈 슬픔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편을 여윈 과부의 슬픈 생애, 그리고 거기에다 세상에서 의지하고 마음 둘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뼈 아픈 슬픔" 이것은 인간의 삶속에 뼈아픈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그대로 지나치실 수 없으셨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인간의 비애를 그토록 마음 아파하실 줄 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얼마나 인정어린 예수님의 모습인가? 그토록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같이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여, 일어나라!" 명하신다.죽음에서 생명을 되찾아 주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 속에 우리는 무엇을 또 볼 수 있는가? 바로, 사람의 생명을 주시고 걷우시는 주체자이시며, 생명의 주인, 즉 우리의 생명을 살리실 수도 걷우실 수도 있는 생명의 주 되심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내 생명 주인이 되시기에 요한복음 14:19에서 볼 수 있듯이 그분은 무덤에서 승리하시어 친히 스스로 살으셨기에 우리도 또한 살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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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4년 전, 저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여름, 장례미사를 준비하던 중 저의 외할머니 또한 쓰러지셨습니다. 저의 외할머니께서는 어려서부터 연년생인 저의 누나와 쌍둥이 형제를 어머니와 함께 돌봐주신 더 없이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할머니의 병상에 찾아가 병자성사를 직접 집전하였습니다. 힘없이 누워계신 할머니의 모습—그런데도 손자인 저에게 성실히 고해성사를 보시던 할머니의 눈빛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병자성사를 곁에서 지켜보신 일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병자성사의 기도문을 읊는 일은 사제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는 가족 당사자가 직접 기도문을 읽기에는 다소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특별히 병자성유를 도유할 때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의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 교우에게 거룩한 기름을 바르오니, 당신의 능력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위로해 주시어, 이 교우로 하여금 힘을 다시 얻어 악을 쳐이기고 희망을 가지게 하소서”.
이 병자성사의 모습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유학길에 올라 멀리서 할머니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찾아 뵈었을 때, 묻혀 계신 할머니의 자리를 보며 얼마나 아쉽고 허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순간까지 내 손자가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는 할머니의 소식을 들으며 그분께 위로가 되었음에 안도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인간의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하여 있음을, 언젠가는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자,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 삶을 지탱해준 많은 도움과 하느님의 위로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곳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나인이라는 곳은 열왕기 4장 18-37절에서, 예언자 엘리사가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들렀을 때 상여에 실려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과부와 그의 죽은 외아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슬픔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을 여읜 과부의 비극적인 삶,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이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이 그대로 지나치실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따뜻한 음성으로 “울지 말라!”라고 위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마음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우리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예수님은, 결국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하심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 자체만을 바라보고 기대하게 됩니다. 현재의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죽음과 질병이라는 고통과 슬픔을 당장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죽음이라는 한계는 결코 바로바로 극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다른 종교인들과 무신론자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닫고 명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과부의 슬픔을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그 어려움을 주님께서 당장 해결해주시길 바라지만, 인간의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대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그 와중에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며 손을 꼬옥 잡아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때로 우리의 삶은 슬프고 잔인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함께 해 주시는 예수님의 위로와 따뜻한 손길 또한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 사제인 손자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숨결의 그 순간 제가 느꼈던 안도감과 하느님의 은총이,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더불어,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은총과 축복을 전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말씀하시는 대상은 죽은 이가 아닙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우리가 그 대상입니다.
오늘 묵상 중에 이러한 주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바라며 하느님의 뜻에 순명할 것을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일어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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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명현 미카엘 신부님]
<무한한 연민의 사랑>
예수님이 나인 고을에서 과부의 아들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아들만이 과부의 법적 · 정신적 · 물질적 삶을 지탱해주는 원천이었습니다.
따라서 외아들의 죽음으로 과부는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 세상에 외톨이로 버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과부의 아들을 부활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아들을 살리신 것은 과부의 선행이나 믿음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 곧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젊은이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다시 살아난 젊은이를 그 어머니한테 돌려주었습니다. 이로써 과부는 아들의 죽음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죽은 이를 되살리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부와 아들의 삶을 제자리로 돌려주시는 데까지 미칩니다.
나인 고을에서의 사건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가 전한, 과부와 고아 그리고 이방인을 돌보라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 사랑의 마음, 인간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떤 선행과 믿음 때문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신 분으로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우리와 하느님, 우리와 이웃의 관계를 원래대로 돌려주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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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승훈 루카 신부님]
<과부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이미 죽어 장례를 치루고자 사람들이 메고나온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시는 사건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인이라는 곳은 예수님의 고향 땅 나자렛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나라렛에서 걸어서 두어 시간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함께 나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장례행렬의 사연을 알게 된 예수님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복음은 그 이유를 ‘과부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서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이 말씀 속에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아들 하나 밖에 없던, 가난하고 힘없는 여인인 과부의 처지를 가슴아파하시며, 그 여인에게 아들을 돌려주시려 작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살아난 젊은이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목격하게 될 때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너무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될 때,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때, 사람들은 감격을 넘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인의 젊은이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예수님은 절망 속에 울고 있는 과부에게 희망을 주셨듯이, 인생의 여정 속에 죽음과 같은 절망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희망의 손길을 내어 뻗어십니다.
우리는 때대로 우리의 삶이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체험하게 될 때, 고통스러워하며 절망하게 됩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한걸음 물러서 보면 인간의 삶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나 이겨내어야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불완전함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절망하게 될 때, 나인의 젊은이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주님께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자비하신 주님은 죽음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우리를 구해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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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때때로 하느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그와 반대로 오히려 두려움을 가질까?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먼저 청원한 것도 아닌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면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3,7)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집중하길 바랍니다. 은총의 결과물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영원한 하느님...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28.31)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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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제가 된 후, 다른 나라에 참 많이 다녔습니다. 해외 성지순례도 꽤 많이 다녔고, 한인교회에 강의를 위해 다녀온 적도 많습니다. 또 친구와 가족과 여행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다닌 것을 아는 어떤 분이 제게 가장 기억나는 나라는 어디였냐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도 좋았고, 성모 발현지 순례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곳보다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1등은 안식년 때 신부들과 함께했던 유럽 여행인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에 허리를 삐끗했는데, 함께하는 열흘 동안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간 신부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진통제 먹으면서 버텼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잊지 못할 여행이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파도 꾹 참으면서 계획했던 곳을 빠지지 않고 다 다녔고, 그래서인지 그 장소들도 더 기억에 선명하게 남습니다.
사실 우리는 쉽고 편한 것만을 찾습니다. 또 별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지내길 원합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까요? 오히려 강한 인상이 남았던 때는 어렵고 힘들 때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날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지금 더 힘을 내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편하고 쉬운 것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너무나 힘든 고통과 시련도 자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때 주님께 불평불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 내게 잊지 못할 시간을 또 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굳은 믿음을 갖는다면, 포기와 좌절이 아닌 희망을 좇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가 장례 일행을 만나게 됩니다. 특히 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어머니를 보시게 되지요. 이때 “울지 마라.”면서 직접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어서 관 속에 있는 이에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시자, 죽은 이가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과부라고 표현된 것을 보면, 이미 남편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이 슬픔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 상태에 계속 머무르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의 손길을 느끼면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마음 깊이 간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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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곳>
루카 7,11-17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그곳>
홀로라도 쉼 없이
가야할 길 걷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아도
내가 멈춰야할
그곳 있으니
거기에 가엾은 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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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혜 빌려주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빠지는 것도 있지만 좋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복잡한 것이 별로 없고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중요한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비슷하게라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중요하지만 돈과 사람. 돈과 사랑, 일과 사랑을 선택해야 할 경우 헷갈림이나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사람과 사랑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 건강이 많이 나빠지면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여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사랑하기에 제일 좋은 황금기이고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황금기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에 딱 좋은 이 시기를 허비하거나 낭비하면 안 되는데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낼 것인가? 오늘은 이 점을 독서와 복음에 비춰 나눠볼까 합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것은 오늘 주님께서 하시듯 젊은이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죽은 과부의 외아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육체의 힘으로 치면 젊은이가 저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기가 더 많이 꺾여 있습니다.
나이로 치면 젊은이들이 더 팔팔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더 많이 지쳐 있습니다.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곧 방황하다가 지친 것입니다. 성숙한 인간의 첫 번째 요건이 인생의 확고한 목표를 갖는 것인데 젊은이의 특징 중 하나가 아직 목표가 뚜렷하지 않고 확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인가 하고 가고 저 길인가 하고 가다 보니 지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헤맸는데도 아직 길이 보이지 않아 주저앉은 거지요.
그러므로 이런 그들에게 저도 그 나이에 그랬던 경험을, 그러다가 마침내 길을 찾은 경험을 들려주고, 더 나아가 가야 할 곳을 찾도록 도와줘 일어나 길을 가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젊은이는 방황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실패하는 것이 젊은이이고,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좌절하는 존재가 또한 젊은입니다.
이렇게 좌절감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다가가 한 번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 인생 실패가 진짜 실패이고, 넘어진 것이 실패가 아니라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진짜 인생 실패임을 일깨우며 다시 일어나도록 손잡아 일으켜 세워주며 걸림돌을 디딤돌 삼도록 도와야겠지요.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제자요 아들인 디모테오에게 주는 가르침들입니다. 이제 제가 참으로 해야 할 것도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형제들이 하도록 디모테오에게 사도 바오로가 하듯이 지혜를 빌려주는 것임을 묵상하는 접니다.
그런데 지혜 빌려주는 것은 저 뿐 아니라 여러분도 그러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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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간미(人間味) 넘치는 예수님 닮기>
- 인간미 넘치는 사람 -
오늘도 밤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나서며 하늘의 별들을 보고 불암산 정상을 확인한후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만세육창”후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맨먼저 찾는 어머니요, 어머니 앞에서 이런저런일을 털어 놓던 일이 생각납니다. 끝기도후는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면 어머니 앞에 털어 놓는 아이처럼 어제 하루 있었던 모든 일을 하느님께 털어 놓으며 시작하는 하루요,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쓰는 강론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밤마다 외딴곳에서의 시간도 이런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戰士)’이다.”
요즘 새롭게 정의한 제 신원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예수님 닮기”
-인간미 넘치는 사람-,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사람, 매력 만점입니다. 사전에서 찾아 봤습니다.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답고 따뜻한 느낌” 이런 이들이 진짜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신적일수록 인간적이고 인간적일수록 신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자 인간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된다는 역설의 진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평지설교 끝날 무렵 복음이 두 소주제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와 “내 말을 실행하여라”였습니다. 참으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듯이 표정이나 언행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비로소 좋은나무에 좋은열매의 사람들임을 말해 주는 복음입니다.
요즘 자주 보는 유투버에서 무수한 공직자들의 표정이나 언행을 보면서 너무 실망하게 됩니다.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그 무슨 직위든 “사람이 먼저 되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지식공부는 뛰어나고 권모술수나 처세술이 뛰어나 높은 직위에 올랐을지 몰라도 사람되는 공부는 정말 엉망진창 수준이하들인 경우 너무 많습니다. 인성이나 품성이 말이 아닙니다. 지성, 감성, 영성도 전무하고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 존중심도 없고 상식이하인 경우 너무 많습니다.
새삼 사람되는 공부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주 하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괴물이나 폐인도 많다고 말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비정非情의 야만시대, 사람이라 하지만 괴물, 악마, 폐인같은 사람도 세상 도처에 널려 있고 영육이 아픈 병든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영육의 건강을 위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살아야 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지옥은 텅비어 있고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반면 평지설교후 예수님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얼마나 멋집니까! 어제 예수님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백인대장의 노예를 치유하시며 그의 믿음에 감탄하셨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불쌍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간미에 매혹된 사람들은 세상 역사상 얼마나 많았는지요!
교회는 싫어도 예수님은 좋아했다는 간디, 복음의 산상설교와 참행복 선언은 종파를 초월해 대부분 영성가들이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 찬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 전 불교학의 석학碩學이라 할 수 있는 심도학사를 이끌던 개신교 신자인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지병으로 9월8일 80세에 선종했습니다. 신문에서 읽은 일부 기사를 인용합니다.
-“선생님은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시면서 왜 그리스도교를 떠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너무 좋아.”
어느 햇살 따사로운 오후의 대화였다. 길희성 선생님은 경계없이 종교를 연구하고 불교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셨지만, 당신의 영적 뿌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였다. 종교학자로서 이웃 종교를 탐구하시면서 당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깊고 풍요롭게 하셨다고 해도 좋겠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이웃 종교와 벽없이 소통하셨다고 해도 좋겠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얼마나 아름답고 극적인지요! 그대로 파스카 신비가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일행과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일행 행렬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조우遭遇합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의 대조입니다. 예수님의 개입으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외아들을 잃고 울며 가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이르시고는 관에 손을 대시며 죽은 젊은이에게 명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죽비소리와도 같이 은혜롭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화두로 삼아 사시기 바랍니다. 여기 “일어나라.”는 부활을 뜻하는 말마디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군중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외치는 다음 고백이 진리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둘의 고백 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을 만나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인 우리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수님을 닮은 교회지도자의 자격과 봉사자의 자격을 갖출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요. 비단 교회뿐 아니라 정치, 사회지도자도 이런 자질을 갖추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하고,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대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사람들입니다. 비단 교회지도자의 자질일뿐 아니라 이런 정치, 사회지도자의 자질이자 우리 인간이 갖춰야 할 자질이요 품성이겠습니다. 이어지는 봉사작의 자격도 우리 자신의 됨됨이를 살펴보게 합니다.
“봉사자들도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되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역시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훈련되고 습득된 좋은 인품과 자질의 사람들이 경제, 사회, 교육, 정치 등 모든 각 분야에 배치되어 업무를 수행한다면 얼마나 멋진 사회요 국가가 되겠나 생각해 봅니다. 새삼 가정교육, 교회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의 총체적 난국이자 위기의 시대를 개탄하며 지니는 생각입니다. 그나마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은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하시니 위로와 힘을 받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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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울지 마라."(루카7,13)
<예수님의 낮은 사랑!>
오늘 복음(루카7,11-17)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을 때, 어느 과부의 죽은 외아들의 장례행렬과 마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7,14) 그러자 죽었던 이가 다시 살아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낮은 사랑, 곧 불쌍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울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남편과 외아들을 잃은 불쌍한 과부에게 늘 낮은 곳으로 향해 있었던 당신의 낮은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첫째는 어제 복음에서 드러난 백인대장의 믿음처럼 '나의 믿음'이고, 둘째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이나 백인대장의 믿음을 예수님께 전했던 유다의 원로들이나 친구들처럼 누군가의 '기도(전구)'이고, 셋째는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문제는 '내가 정말 죽지 않고 살고 싶은가?' '내가 정말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싶은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와 영원한 구원에 대한 믿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내 안에 있다면, 너를 살리는 나의 전구기도는 저절로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은 사랑!'
'예수님의 측은지심!'
그러니 나의 일이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크게 실망하거나 너무 투덜대거나 일을 포기하지 말고, 고통과 시련 앞에서 너무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영성체 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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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UmDE_kFm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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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 14)
젊은이도
예수님도
죽음을 체험합니다.
죽음을 통해
성숙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모든 것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외아들을 향한
사랑의 가치는
훼손되지 않습니다.
삶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죽음을 치유하시는 분께서
자비로운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죽음 가운데서도
사랑과 신뢰를
보여주십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로 젊은이를
일어나게 하십니다.
삶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듯
죽음도 예수님과 함께
관계를 맺습니다.
승리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일어나는
새로운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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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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