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자신의 연약함으로
변명하거나 화를 내거나 실망하는 자가 아니라,
더욱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토요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의 일정 위에 함께 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2.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3.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본문 주해)
1~4절 : “만민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
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귀를 기울여라.
내 입은 지혜를 말하고, 내 마음은 명철을 생각한다.
내가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을 타면서 내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새번역)
이 시편도 고라 자손의 시편이다. 인도자를 따라 불렀던 노래이기 때문에 회중 찬송으로 불렀을 것이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사람 곧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들으라고 초청한다. 모든 사람에게 지혜와 명철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비유에 내 귀를 기울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로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5~6절 : “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나를 에워싸는 그 재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과 돈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새번역)
시인은 재물을 의지하고 재물이 많다고 자랑하는 자들에게 에워싸여 환난을 겪는다.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고백은 두려움의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지 내 말을 잘 들어보라고 초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서 재물이 궁극적인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9절 : “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하여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하는 법,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비싼 것이어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다.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도 하지 말아라.”(새번역)
재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이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돈으로 자기 목숨을 연장하거나,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님께 아무리 많은 돈을 바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는 없다. 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자는 없는 것이다.
시인은 돈으로 생명을, 돈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10~12절 : “누구나 볼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나 우둔한 자도 모두 다 죽는 것을! 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새번역)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마치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명이 떠나는 날, 그토록 의지했던 재물은 남들에게 남겨 두고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일생은 잠깐 살다 멸망하는 짐승과도 같은 것이다. ‘멸망하는 짐승’은 문자적으로 ‘도축이 예정된 가축’이다.
그러므로 많은 재물을 얻고 영화를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은, 도축하기 위한 살진 가축과도 같다.
(나의 묵상)
시편 49편은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인생의 가치 판단 기준으로 삼는 인생들의 어리석음과 그렇게 사는 삶은 멸망하는 짐승(도축되기 위해 준비된 살진 가축)과도 같음을 교훈한다.
왜냐하면 재물은 영원하지 않고, 그 재물로 영원한 생명은 물론이고, 육체의 생명조차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돈으로 육체의 생명을 연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인간이 부와 재물을 이토록 원하는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의 것을 원하고 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건한 시인은 재물이 많다고 자랑하는 자들 속에 싸여 살아가는 것을 환난이라고 표현하고, 그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한다.(5절)
이것은 그에게도 재물과 관련된 부러움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는 자로서 그 허망한 것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또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얼마나 대단했던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실 만큼 재물이 하나님과 나란히 등장하는가 말이다.
나는 때때로 돈으로 척척 되는 일을 볼 때, ‘주님, 이러니 어찌 돈이 좋지 않을까요?’ 하며 혼자서 중얼거릴 때가 많다.
그러나 돈으로 다 되는 그 일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것은 대개 주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과 열망과 소원에 관계되는 것이다.
복음을 알고 생명으로 살아가는 이즈음 재물에 엮이는 성도의 마음이 바로 ‘환난’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내게 환난이 되는 그 상황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산다.
나는 재물을 얻기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모시고 살기를 원하는 자임을 매일 선포함으로 내게 있는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주님 주시는 영생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알수록, 내 마음을 차지하는 돈의 위력이 힘을 잃어간다.
그것은 내가 다짐하고 결단해서가 아니라, 주님 보내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주관하심으로 이루신 일이다. 이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
시인이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자신의 오묘한 말을 풀고자 하는 것은(4절), 내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매일 묵상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의 고백을 나도 하는 것이다.
“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나를 에워싸는 그 재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과 돈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새번역)
멸망하는 짐승처럼 태어나서 멸망하는 짐승처럼 죽을 뿐인 인생을 주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구원하여 주시고 또 영생을 주셨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 더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오늘 나의 이 고백과 선포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부실하고 연약할 뿐인 나는 오직 성령님만을 의지한다.
(묵상 기도)
주님,
멸망하는 짐승의 생을 살았을 자를
구원하여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난날 나를 구원하지도 못한 재물을 그토록 섬기고 의지하였던 것을 회개합니다.
오늘날도 때때로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재물에 목을 길게 빼는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 것에 대한 탐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주님 주신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재물도, 명예도....다른 그 어떤 것도 다 그 현란한 빛을 잃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 더이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 고백을 하게 하시는 성령님,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