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려 했으나 천사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신 주님은 그 영으로 오늘도 지금 이곳에 계심을 믿습니다.
어리석고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주를 알지 못하였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사 주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도록 나의 영을 깨워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날 공동체로 모여 함께 주의 부활하심과 아버지의 영광을 높이 찬양합니다.
우리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시 49:13-20
제목 : 양 같이 죽음 앞에 두기로 작정된 자, 예수 그리스도.
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셀라).
14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셀라).
16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 나의 묵상
시 49:1-12절은 49편 전체의 1, 2연에 해당한다.
어제 본 본문인 1, 2연은 만민을 향하여 시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하신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재물을 많이 내준다 한들 그것으로는 자기의 목숨을 구원할 수 없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기 생각에는 자기들의 거하는 집이 영원할 것 같아서 그 집을 자기 이름으로 등록을 한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무덤 한 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역시도 자기의 소유가 아니다.
이런 인간은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는 가장 존귀한 자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축적하고 탐욕에 온 마음이 빼앗기는 인간은 이성이 없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을 뿐이다.
한편 오늘 본문은 49편의 3, 4연에 해당한다.
3연인 13-15절, 세상 부귀를 좇는 자와 의인의 상반된 종말론적 운명에 대하여 언급한다.
4연인 16-20절, 세상 부귀의 헛됨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교훈한다.
1, 2연에서 말한 일들은 자신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그들의 말을 따르는 사람들이 치르는 대가이다.
그들은 양 같이 죽음 앞에 엎드릴 것이며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아침 곧 내세(來世)가 오면 적직한 사람들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무덤에 묻혀 썩어질 것이다.
따라서 무덤이 그들에게 저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을 무덤에서 건지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된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말 것이다.
어떤 집이 번성한다고 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을 때 자기 소유를 가져가지 못하며 그가 쌓은 영광이 그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육신으로 살아 있을 때만 자기가 복 받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또한 주변의 사람들은 모든 일들이 잘 될 때에 그를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그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을 뿐이다.
13절 말씀을 한글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한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이 말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인하여 자긍하는 자들의 행위가 그들 자신의 우매함을 보여준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문의 뜻을 살피면 어리석은 자들은 12절과 20절에서 언급하는 대로 멸망한 짐승과 같으며, 또한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기의 재물로 자기 생명을 구원하지 못하고 망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가진 재물조차 다른 사람이 취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후세 사람들 중에 이러한 자들의 말을 칭찬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후세 사람이란 혈통적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추종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리석은 부자들은 죽음이 모든 인간들을 덮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부에 집착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거만하게 과시하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추종자들은 그 말에 깊은 공감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돈과 권력이면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추종자들은 부한 자들 이상으로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자들이 누리는 부의 직접적인 혜택을 누리는 것도 아니면서 한 평생 부(富)를 최고의 삶의 가치와 덕목으로 삼고 추종하다가 결국 헛되이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4절에서는 ‘사망이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와 그들의 말을 칭찬하고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의 운명이다.
따라서 ‘사망이 그들의 목자’라는 말은 탁월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도살을 당할 것을 알지 못한 채 풀을 뜯고 있는 양 떼와 다르지 않다.
죽음이 갑자기 닥치기 전까지 그들의 삶은 무척이나 여유롭고 안락하며 그 자리에 있는 풍족한 풀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허망함 그 자체이다.
우리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아 말씀으로 나셨다(요 5:26; 1:1).
그리고 말씀으로 나신 아들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보내시기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작정하셨다(벧전 1:20).
그리고 때가 되어 아들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갈 4:4).
말씀이신 아들이 육신을 입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그들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기 위함이다(갈 4:5).
여기서 속량이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목숨값을 주고 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이렇게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그 이유는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언약 당사자가 되어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은 결코 거짓이 없으신 분이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 언약에 근거하여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약속에 아들은 죽기까지 복종하신다.
십자가에 죽는 복종을 표현하는 것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도살당할 양처럼 지극히 어리석게 행동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도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자기의 갈 길로 간 자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당신의 아들 곧 양과 같이 어리석게 행하는 아들에게 담당시키신 것이다(사 53:6).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는 양과 같은 어리석음이 필요하다.
그 어리석음은 자신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대로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것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그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것이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런데 나는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나의 잔꾀를 내세우며 지혜로운 척 하던 자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재물을 얻어 그것으로 나의 목숨을 사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얻은 재물로 나의 목숨을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돈과 재물로 삶의 편의를 얻고 재미를 누리는 삶을 얻으려 한 것 역시 나의 목숨을 사려는 것과 같다.
그 일이 나의 목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교회를 크게 확장시키고 교인들 숫자를 늘려서 재정 또한 크게 늘리는 일에 매진하였다.
사실 이 일들은 복음과 생명에는 전혀 관계도 없는 나의 유익과 탐욕을 위한 사익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나는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그 심판 안에서 주님은 나에게 생명의 복음을 들려주셨다.
그 복음이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첩경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는 날마다 말씀을 양식으로 먹는 자가 되었다.
그 생명의 양식은 날마다 주님과 복음인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께서 어린 양이 되어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나도 어리석은 양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자리가 나를 인도한 십자가와 무덤의 자리이다.
오늘도 나는 연약하여 넘어질지라도 어리석은 양이 되어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간다.
거기에 하늘 소망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이 땅에서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께 칭찬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자로 살기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셨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이 되어 그저 죽음의 십자가로 오르셨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가장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행동이 나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첩경이었음을 나는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의 그 어리석음이 나의 지혜와 명철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의 지혜와 꼼수 그리고 잔꾀로 행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는 진짜 지혜로운 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 오늘이 주님의 어리석음이 참 지혜가 된 날임을 확증하는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는 귀한 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