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
<수상작> : 박완서의 - 그리움을 위하여
<최종 후보작>
* 김영하 - 크리스마스 캐럴 * 김원일 - 나는 두려워요 * 박범신 -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 성석제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윤후명 - 달의 향기 * 이혜경 - 일식
* 전성태 - 퇴역 레슬러 * 최일남 - 명필 한덕봉
황순원 문학상은 소설집 한 권 이상을 펴낸 소설가가 지난 1년간 새로 발표한 중,단편소설 중 한 작품을 선정하여 주어진다. 심사 대상에 오른 소설가 230명의 작품 371편 중 소설가, 문학 평론가 50명의 추천, 5명의 예심, 5명의 본심 등 3심을 통해 수상작이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은 김윤식, 이문구, 김치수, 전상국, 최원식이다.
무슨 무슨 ‘문학상’하면 일단 권위가 선다. 명망 있는 심사위원들에 의해 선별된 작품들이기에 소위 ‘문학성’이니 ‘예술성’이니 하는 것들이 보장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읽고도 후회는 적으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반대로 뻗치고픈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권위에 끌려 읽어본 작품들에서 일종의 거리감이나 내 읽기의 부족함이 많이 느껴져 열등감 비슷한 것들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거리감이나 열등감(?)에서 좀 자유로워져서 편하게 책을 읽고 싶다. 그냥 편하게, 자유롭게...일단 단편들이어서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한 편씩 읽을 수 있겠다 싶어 골랐다.
작품들을 순수하게 삶의 조각들로 보고 내 삶의 조각들에 투영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비록 허구이나마 조용히 곁눈질할 수 있는 있는 게 소설이다. 소설은 어쩌면 역사보다도 더 사실적이다. 그 속에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나온다. 조금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 엮어내는 숱한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다가온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놀란다. 우리의 삶이 이처럼 다양한 빛깔과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니까. 그리고 조금은 겸손해진다. 내가 빚어내는 삶의 형상에 그 소리와 빛깔을 시나브로 옮겨놓으며 어렴풋이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나’와 ‘삶’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현재가 완전한 사람은 없다. 늘 부족하고, 늘 채워야 한다. 책읽기는 살아가며 나를 채우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이리라. 9편 중 몇 작품만 소개한다.
<그리움을 위하여> 자식들도 다 커버리고 혼자 지내는 노년의 삶. 남편은 죽어 혼자 사는 ‘나’에겐 8살 연하의 사촌 동생이 있다. ‘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지만 사촌 동생은 ‘나’의 집에 거의 파출부나 다름없이 일하고 돈을 얻어 힘겹게 살고 있다. 아랫것 부리듯 하던 그 동생이 우연히 남쪽 섬에 가서 늙은 어부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질투에 몸서리를 치지만 결국 사촌 동생의 결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정든 사람들과의 이별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주변에서 사라져가고 기쁨이나 기대보다는 아쉬움이나 삭막함이 자리잡게 된다. 이 소설은 ‘그리움’이 없는 삶은 삭막하며 ‘그리움’의 회복이야말로 삶에 활력을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해역에서 낚아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섬. 그런 섬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그리움이 샘물처럼 고인다.
<크리스마스 캐럴> 네 명의 친구.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이들은 대학 동아리 회원들이었다. 남자 셋은 육체적으로 여자 한 명을 공유한다. 여자의 자유분방함을 빌미로 셋은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며 서로 모른 척한다. 10년 뒤 외국에 가서 살던 여자는 환경운동가가 되어 귀국하고 그날 밤 넷은 다시 만난다. 다음날 여자는 살해된 채 여관에서 발견되고 남자 셋은 용의자가 되어 불안해한다. 결국 범인은 남자 셋 중 하나로 밝혀진다.
진정한 사랑으로서의 관계가 아닌 그저 성적 도구로서 대했던 한 여인이 갑자기 일상의 현실 앞으로 걸어들어 온다. 졸업과 동시에 그들의 곁을 고맙게도 떠나 주었고 눈 앞에서 사라져주었던 여인. 자신들의 추한 과거가 들통날까 노심초사하는 남자들. 그들은 모두 살의를 느낀다.
나는 한국에 돌아오면 너희들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변했을까, 잘 적응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어. 그런데 와보니까 내가 제일 많이 변했더라. 니들은 그대로였어. 기분 나쁘지 않지? 그녀가 자신의 십 년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을 때, 영수의 머리 속엔 사실, 이제 이 여자와 잠을 자기는 틀려먹었다는 생각만 떠오르고 있었다. 그 생각은 이런 말이 되어 나왔다. 너 되게 똑똑해졌구나. 진숙은 고개를 저었다. 니들은, 내가 바보였다고 생각하지. 그래 난 바보였어. 그렇지만 난 니들이 조금은 측은했어. 20대 초반의 너희들은,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어차피 지나간 얘기잖아, 그래, 음, 똥 마려운 강아지들 같았어. 너희들은 날 측은하게 여길 여유 같은 건 없었어. 욕망에 허덕대는 자신에 대한 혐오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 대해 동정 따위는 베풀 여력도 없었지. 개폼을 잡고 내 자취방에 기어들어와 10분 만에 사정하고 도둑놈들처럼 기어나가면서 자기들이 무슨 게릴라나 된 줄 알고 있었지.
-크리스마트 트리로 상징되는 안온한 일상의 그늘에 온통 허위와 위선으로 둘러싸인 비루한 욕망의 넝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그 허위와 욕망에 대한 천착이 고루한 도덕 교과서보다 인간사를 한층 예리하게 해부할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나는 두려워요> 평생을 교육과 선교,사회 봉사를 위해 헌신한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는 죽음에 임박해서 과거의 삶을 회상한다. 어려서 언청이로 놀림을 받다가 수술을 해 준다는 말에 선교사네 집으로 들어가 학교에 다니며 초등학교 교사가 된 윤선생은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교육과 선교,봉사를 하며 산다. 그 회상 속에는 어린 시절의 불우함과 전쟁의 상처 첫사랑 이야기, 그리고 학창시절 자신 때문에 죽은 남학생에 대한 죄의식 등이 들어 있다. 개인의 삶에 아픈 역사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교사로서, 신앙인으로서, 한 여인으로서 살아온 삶이 아프게 녹아 있다. 신 앞에 마지막으로 절규하듯, 참회하듯 자신의 삶을 토해내는 부분에서 인간적인 나약함이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윤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 저,저,는,,주,님,을,,만,나,기,가 두,려,워,요.......”
이런 저런 인간의 허울에 씌워진 명패를 떼내고 순수한 한 인간으로서의 절규가 쟁쟁하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황만근’이라는 사람이 실종됐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모두 그를 찾는다. 일주일 뒤 그의 시체가 돌아온다. 그는 ‘반근’이다. 혀짧은 소리에 지능이 좀 모자란 듯보여 아이들에게도 놀림을 당한다. 한마디로 그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 그를 반푼이 취급을 하며 그를 부려먹는다. 그러나 황만근은 마을의 모든 궂은 일에 앞장서며 극진히 아들을 키우고 어머니를 봉양한다. 농민궐기대회에 혼자만이 낡은 경운기를 타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논에 처박힌다. 그리고는 길가에서 죽는다.
그는 바보같은 인물이지만 그를 비웃고 농락하는 잘난 사람들과 비교되며 거의 성자처럼 보인다. 이 소설은 잘난 사람들의 시대에 치이고 농락당하는 바보 성자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