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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555~1600)
고니시 유키나가(일본어: 小西 行長 こにし ゆきなが)
고니시 유키나가(일본어: 小西 行長 こにし ゆきなが,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555년 ~ 1600년 음력 10월 1일)는 일본 상인(商人) 출신의 무장(武將) 겸 정치가(政治家)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끼던 장수였다. 유키나가는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쓰시마 국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었고 가토 기요마사와 앙숙 관계였다. 그의 종교는 기독교(현 로마 가톨릭교회)였으며, 그의 부장이자 사위인 요시토시를 비롯한 그의 휘하 책사를 포함, 병사들 역시 기리시탄으로 구성되었다.
군에서의 출세
본래 사카이(堺)출신의 약재 무역상(藥材貿易商)인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아들로 그 자신도 상인이었다. 본명은 고니시 야구로(彌九郎)였으며 1559년생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가신이 되어, 주로 외교 사자로 일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가 하시바 히데요시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할 때에도 히데요시와 교섭했다고 한다. 나오이에 사후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의 후나부교로 임명되어 수군을 통솔했다. 규슈 정벌과 히고 고쿠진 잇키에서 전공을 세워, 히고 국주 삿사 나리마사 할복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히고 남부우토, 야시로, 마시키 3군 20만석을 받았고, 우토(宇土) 성을 새로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성을 쌓을 때 동원한 아마쿠사 제도의 다섯 고쿠진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을 받아 토벌해 아마쿠사 4만 석도 고니시의 영지가 되었다. 한편 삿사 나리마사 할복 후 같은 시기에 히고 북부 25만 석을 받아 다이묘가 된 가토 기요마사와는 이후 사이가 갈수록 나빠졌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도인 고니시는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그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기리시탄이었다. 그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었고, 밤마다 미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 봉기의 진원지가 된다. 한편 고니시의 영지와 인접한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에서는 열렬한 니치렌 종 신자인 가토 기요마사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를 탄압하였는데, 이를 피해 고니시의 영지로 달아난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들을 고니시가 보호해주면서, 종교로 인해 서로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감지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宗 義智), 나가사키 반도의 작은 다이묘들인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와 승려 겐소(玄蘇)를 이끌고,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란 듯이 18,700명으로 구성된 조선 침공 선봉대 제1군의 지휘관으로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하였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격하여 국경인 등의 반란 덕분에 임해군 등을 생포하며, 커다란 야전을 치루지 않은 것에 비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 동래성을 함락하고, 한양을 가장 먼저 점령하여 참전 무장 가운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기요마사는 보급을 무시한 채 함경도로 계속 진격하여 정문부에게 각개격파 당하였고, 여진족에게 완패 당한 것에 비해, 유키나가는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보급 문제와 명나라 원군에 대한 부담을 걱정하는등 가토 기요마사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유키나가의 걱정대로 명나라의 개입과 이순신의 남해 제해권 장악, 그리고 각지에서의 의병의 활약으로 인한 보급문제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지체하던 중 조명연합군에 패해 쫓겨났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힘썼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이를 두고 '고니시가 조선에서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불만을 터트렸다고도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애용하던 무기는 거대한 검이었는데, 그것을 들고 있으면 적병들이 공포에 질려 감히 나서질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
고니시 유키나가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제2군 사령관으로 다시 참전. 유키나가가 제1진으로 참전했던 임진년과는 달리, 앙숙인 가토 기요마사가 제1진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군의 도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적군이 보내준 정보라 믿지 않아 공격하지 않았고, 조정에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다시 거부했다. 그러자 조정은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원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았고, 보다 못한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태형을 가해 원균을 출전시켰다. 이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은 대패하였다.
이후 5만 8천 군사를 이끌고 순천으로 해서 남원에 진입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그 해 8월 중순 남원성에 포위된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해안가로 내려간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에게 구명을 요청하였다. 이복남과 산성별장 신호, 접반사 정기원이 행군부기하자 그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준다. 남원성 남문으로 잠입한 이복남 군과 성 주민 1만이 힘을 합쳐 그를 대적하였으나 패전하고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그는 남원성에서 사살당한 백성들의 코와 귀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낸다. 남원성을 쓰러트렸으나 고니시 군은 전주전투에서 꺾이게 된다.
1598년 음력 8월 18일에 히데요시가 죽자 후퇴하였다. 전라도 순천 왜성에 갇혀 버린 그는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던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간신히 탈출하였고, 퇴로를 열기 위한 노량 해전에서 원군으로 온 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함께 참패했으나, 본국으로 후퇴하는 것은 성공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히데요시 사후 벌어진 문치파와 무단파 사이의 대립에서는 문치파의 거두인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친교로 인해 문치파에 가담. 문치파와 무단파의 대립이 깊어지는 가운데, 유키나가의 라이벌이자 무단파의 수장격인 가토 기요마사는 미쓰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1600년 10월, 도요토미 가문의 수호를 내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타도를 위해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유키나가는 미쓰나리에 호응해 서군의 주요 다이묘로서 참전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야전에 강한 이에야스를 의식하여 농성하는 쪽을 제안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간토의 대 다이묘인 이에야스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야전에서 크게 승리해야 한다며 제안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나 이시다 미쓰나리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은 동군이 진을 갖추기 전에 야습할 것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도 한다.
세키가하라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고니시 군은 오다 유라쿠, 후루타 시게카쓰 군을 맞아 격전을 치루지만, 서군 측 장수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고작 몇시간 만에 서군의 패배로 끝났고, 여기서 패한 고니시는 자결을 금지하는 기리시탄의 가르침에 따라 할복을 거부하여, 1600년 교토 로쿠조(六條)의 강변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와 함께 참수되었다. 처형된 이후 그의 가문은 완전히 멸문되었으며, 자신이 소유하던 영토도 가토 기요마사가 가로챘다. 고니시가 할복을 거부한 이유가 기리시탄 때문라는 것을 이에야스가 인식하면서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기리시탄 탄압이 실시되었다.
줄리아 오타아
고니시는 조선에서 고아 소녀를 데려와 양녀로 삼고 기리시탄에 입교시켜 세례명을 '줄리아'라 하였다. 그의 사후 줄리아는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으며, 그녀 역시 막부의 기리시탄 탄압으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낸다.
가톨릭 다이묘(大名)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멀리 사사오산(笹尾山)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무척 거칠었다. 필자는 강풍 속에서 워 랜드(War Land)를 돌아보다가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임진왜란 시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가톨릭 신자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왜장은 왜장이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그를 치켜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가 조선인과 맺은 특별한 인연과 종교적인 측면을 짚어 보려는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전국(戰國)과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를 살았던 무장이다.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누스'인 크리스천(천주교) 다이묘(大名)이기도 하다. 한 때 우키타가(宇喜多家)의 록을 먹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발탁됐다. 그에 대한 이해를 위해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神秀吉) 시절로 돌아가 본다.
대대로 가톨릭 신자이자 국제 약재상
그는 1558년 국제무역항 사카이(堺)의 상인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차남으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오카야마 상인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기도 했으나, 우키타(宇喜多)의 집을 방문했을 당시 그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져 무사가 됐다. 히데요시(秀吉)로부터도 재능을 인정받아 그의 신하에 이르렀다.
1565년 8월 초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부부가 히데요시를 찾았다. 히데요시는 시종이 내민 은(銀)으로 된 십자가와 검은 표시가 되어있는 나무 표찰을 보고 사카이에서 약재상을 하고 있는 고니시(小西) 부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통해 그 당시 상황에 돌아가 본다.
"그 자는 고니시라고 하는 약재상 부부가 아니더냐?"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시절을 떠올리며 고니시 부부를 반갑게 맞았다. 부부 옆에는 열 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래 전에 부인이 했던 '오늘의 비겁함이 내일의 명장을 만든다'는 말을 연상하며 마음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부인께서는 글씨도 잘 쓰셨지만 조선이나 남만(南蠻: 스페인, 포르투갈)의 말을 잘하신다지요?"
"네. 지금도 이 아이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모님의 소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난 고니시는 후일 그를 지극정성 섬겼다. 히데요시(秀吉)의 신임을 얻어 1588년 히고노쿠니(肥後國) 우토성(宇土城)의 영주가 됐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함께 1만 8000명의 병력(제1진)을 이끌고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단숨에 대동강까지 진격했고, 6월 15일 평양성을 함락했다. 몇 차례의 밀고 당기는 전투 끝에 1593년 1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원군과 조선군에게 패해 평양성을 불 지르고 한양으로 퇴각했다.
오다 줄리아를 양녀(養女)로 길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포로 중에서 세 살배기 한 여자 아이를 발견했고, 그 아이를 양녀(養女)로 길렀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 아이에게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명이 주어졌다.
'오다(오타아) 줄리아-‘
줄리아는 고니시의 어머니 즉, 양(養)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약재상을 하면서 '오늘의 비겁함이 내일의 명장을 만든다?'는 등 히데요시를 감동시킨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공문서를 대필해주던 여인이다. 줄리아는 할머니가 조선말을 구사 할 수 있었기에 교감이 더욱 잘 됐을 것이다. 실제로 줄리아는 할머니로부터 조선어와 일본어를 배웠고, 춤과 노래를 익혔다. 나라를 잃고 부모의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는 전쟁 고아였으나 양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양 할머니는 신앙심이 깊었다. 줄리아는 할머니의 유언(遺言)을 가슴 속 깊이 새겼다.
"얘야! 천주님의 사랑을 배워라. 항상 기도하면서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죽음은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삶은 더 어려운 것이다.“
줄리아는 후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수청을 거부하고 절해고도 고즈시마(神津島)에 유배됐고, 거기에서 생을 마쳤다(필자 칼럼 오다 줄리아/ 2014. 11.4 참조).
고니시 유키나가와 관련한 간단한 내용이다. 고니시 역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신앙심이 깊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는 부대의 깃발에도 항상 십자가를 새겼다. 세키가하라 전투 진영을 모형으로 재현한 조형물에도 고니시 부대에는 십자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아무튼,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에 동조해 7천 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서군의 주력부대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예상보다 빨리 전의를 상실했던 것이다.
결국 동군의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이에야스는 무표정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법대로 처리하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600년 11월16일(양력). 교토의 6조 가와하라(六條河原)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할복(割腹)을 거부하다가 번뜩이는 칼날에 의해 목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의 저승길을 동행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1600)',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 1539-1600)'.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는 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여기에서 세스페데스(Grogorio de Cespedes, 1551-1611) 신부 이야기를 덧붙여본다. 그는 1551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1577년 천주교의 불모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종군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그가 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서양인 신부 1호다. 그는 왜병들에게 잔학한 행위를 못하게 하고 조선의 고아들을 돌보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에서 끌려간 전쟁포로들 중 노예로 팔려가는 2천여 명을 구출해 가톨릭 신자로 만들기도 했다. 가톨릭 박해가 가장 심했던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시대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스페데스 신부는 목숨을 걸고 선교 활동을 하다가 1611년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본 사(史)학자가 본 ‘오다 줄리아’의 진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조사연구를 토대로
“나는 저 아이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구나. 예쁘게 생긴 데다 어미를 닮아 정(情)이 깊고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기질이 있어서...이대로 이국땅으로 끌려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고인(故人)이 된 일본 작가 모리 레이코(森禮子)의 소설 ‘삼채(三彩)의 여자’에 들어 있는 한 대목이다. 이 소설은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생(生)을 마친 실존 인물 ‘오다 줄리아’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혼재돼 있다.
소설 속의 또 다른 가슴 저미는 상황이다.
“며칠 후의 이른 새벽. 포로들과 그들의 가족은 작은 배에 실려 바다 위에 떠 있는 큰 군선으로 옮겨졌다. 배에는 이미 많은 포로들이 잡혀 와 있었고, 배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의 몸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민초들의 ‘통곡’이 들리는 듯하다. 적게는 5만, 많게는 15만 명의 포로가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았던가.
역사적 진실을 찾아서
필자는 얼마 전 규슈(九州)에 갔다.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다시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목적지는 구마모토(熊本)현에 있는 야쓰시로(八代) 박물관이었다. 도리쓰 료지(鳥津亮二·39)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월요일이어서 박물관이 휴관인데도 그는 필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대해서 아무도 정확하게 연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2002년 야쓰시로(八代) 박물관에 근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니시(小西)’와 ‘오다 줄리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도학 연구 제35호> ‘유럽의 사료(史料)에 의한 고니시 유키나가·줄리아 오다(아)의 특집호’ 논문의 저자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고니시(小西)가 처형당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크리스천에 대해서 다소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했었죠. 그런데, 1612년 이에야스 측근들의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불신이 폭발, 금교령(禁敎令)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크리스천 다이묘(大名) 고니시(세례명: 아우쿠스티누스)에 대한 연구를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에 의해서 기록되는 것일까. 패장 고니시의 흔적은 일본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수면아래 가라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영주로 있었던 우도시(宇土市) 교육위원회에서 도리쓰 료지(鳥津亮二)씨에게 연구를 의뢰한 것이다.
“이 연구 논문은 1588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히고(肥後)국에 입국해서 우도(宇土)를 거점으로 마시키(益城)·아마쿠사(天草)·야쓰시로(八代)를 다스렸기 때문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그의 활동상황을 정리했습니다. 물론, 유럽의 자료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오다 줄리아의 연구에 대하여
“조선에서 태어난 줄리아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에 의해 포로가 되어 히고(肥後)에 온 조선인 포로 중의 한 명입니다. 그 당시 많은 포로 중에서 여인의 몸으로 크리스천으로 생을 마감한 여성이기에 더욱 돋보인 것입니다.”
도리쓰 죠우(鳥津亮二)씨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연구함과 동시에 오다 줄리아의 생애(生涯)를 조명해서 논문의 부록으로 실었다. 필자가 그의 논문을 나름 열심히 읽었기에 대화가 훨씬 수월하게 진행됐다. 오히려 그의 반문이 있었다.
“이 논문을 어디서 구하셨나요?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 저의 논문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지난 2014년 10월 24일 쓰시마(對馬)에서 극단 와라비좌(座)가 줄리아에 대한 뮤지컬 공연을 했었죠. 그 때 선생의 논문과 저서 <小西行長>을 구입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 뮤지컬은 그해 10월 1일 우도(宇土)에서 첫 공연을 한 후로 오이타(大分)·나가사키(長崎) 등 규슈지역을 순회했었죠.”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많은 책들이 발간되고 뮤지컬 등이 등장했으나, 검증이 안된 부분이 많아서 저는 '루이스 데 메디나' 신부의 예수회 기록을 근거로 했다’라고 말했다. 역사 전문가의 입장에서 밝힌 것이다.
줄리아의 이름에 대하여
“줄리아에 대해서 ‘오다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줄리아에 대한 일본 측 자료로 유일한 사료(史料)가 있습니다. 일본의 부코우잣키(武功雜記)입니다. 여기에는 ‘御다아’로 기록돼 있습니다. '메디나' 신부의 기록에는 로마자 표기가 ‘Ota’ ‘Vota’이었으나 50음의 적용으로 ‘오-다’가 적용된 듯 합니다. 그 후 한자로 ‘大田’ 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다의 이름은 이 외에도 ‘조선에서 오다’, ‘얻어온 아이’ 등 여러 가지 설(說)이 있으나 도리쓰(鳥津)씨는 ‘줄리아’라는 세례명이 '가장 정확하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다아 일까, 오다 일까, 이름일까, 성(姓)일까. 확정히 하고 싶습니다만 어떠한 근거 자료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회의 기록은 일관되게 그녀에 대해 '줄리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서 '줄리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논문을 읽어보셨겠지만, 저 역시 오다아를 빼고 ‘줄리아’로 통일했습니다.”
고즈시마에서 나와 나가사키, 오사카에서 활동해
“하신토 살바네스(H. Salvanez) 신부가 1620년 사람들에게 나가시키(長崎) 발신으로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그 편지에는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본토에서 생활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리쓰(鳥津)씨는 자신의 논문 91쪽을 펼치면서 '줄리아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나가사키 등에서 활동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고려에서 태어난 줄리아는 로자리오를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녀는 성 콘프라디아(Confradia)를 위해 항상 일하고 있었기에 몇 번인가 자신의 집에서 추방되어 이제는 집도 없이 이집 저집 옮겨 다니고 있다.>
성 콘프라디아(Confradia)는 로자리오 기도를 장려하기 위해 도미니코회 수사들에 의해 창립된 '심신회'이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줄리아는 이 단체를 도우면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가를 부르게 한 이유로 봉행소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안효진 씨의 논문 <오다 줄리아의 생애와 영생>에도 나와 있다.
도리쓰(鳥津)씨는 ‘이 후의 줄리아의 행방은 프란시스코 파제코(Francisco Pacheco) 신부의 서간문에 기술돼있다’고 했다. 파제코 신부는 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 나가사키·오사카·교토에서 포교 활동을 한 인물로 편지를 쓰기 전에 일본 관구장이 됐다. 그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앙을 위해 추방된 고려인 줄리아는 지금 오사카(大阪)에 있다. 나는 이미 도움을 주었고 할 수 있는 한 그녀를 돕고 있다.>
“줄리아에 대한 기록은 현 단계에서 이것이 최후의 것입니다. 이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서 나가사키·오사카 등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리스(鳥津) 씨는 줄리아 제(祭)을 해마다 열고 있는 고즈시마에서 ‘심포지엄의 연사로 초청했다’는 것을 언급했다. 필자의 질문이다.
“저도 2008년 고즈시마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심포지엄에 참석하셨나요?”
“아니요.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나가사키·오사카 등에서 활동했다고 발언해도 됩니까?' 라는 한마디에 초청 연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신사참배
일본의 고유신앙인 신도(神道)의 종교의식임과 동시에 제국주의 일본의 국민의례의 일종으로 일본의 신도와 관련된다. 일본신도에는 신사신도(神社神道)와 교파신도(敎派神道)가 있다. 신사신도는 원래 농경의 수호신, 부락의 수호신을 숭배하던 것이었으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국가권력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종사(宗社)로 변모되었고, 신사에 대한 참배는 국민의례의 일종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교파신도는 종파(宗派)신도라고도 하는 바, 종교성이 약한 신사신도에 대비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여기에는 유불선합일(儒佛仙合一)과 샤머니즘의 경향이 농후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일종의 자연종교로 파악된다. 신도가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이중적 성격 때문에 신사참배를 단순한 국민의례인가 아니면 교파신도의 종교의식인가를 구분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신사참배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이후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을 반포하여 서울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비롯해서 각 지방에 신사를 세우고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 중 하나로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시행한 사상통제 정책이었다. 그러나 신사참배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 성격 때문에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숭배만이 허락된 그리스도교와 충돌이 야기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도 1917년 나가사끼(長崎)교구의 가톨릭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체포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신사에서 거행되는 의식이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거부해야 한다고 단안을 내렸다. 한국 천주교회는 실제로 1925년 교리교사를 위한 <교리교수지침서>를 통해 신사참배는 확실히 이단행위이므로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일제당국은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강경(江景)에서 공립학교에 다니던 천주교 학생이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이에 교회 당국은 신사참배의 참석거부를 재천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 천주교회가 점차 신사참배를 수락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1932년 마침내 일본 천주교회는 동경 대주교로 하여금 신사참배가 애국심과 충성을 드러내는 시민적 예식인지에 관해 아니면 신도의 종교의례인지 문부대신에게 정식 회답을 요구하게 하였다. 문부대신은 차관을 통해 신사참배는 시민적 예식 외에 별다른 것이 아님을 통고하였고, 일본 주교들은 이에 근거하여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를 허락하였다. 일본 주교들의 결정을 근거로 로마 교황청은 1936년 5월 18일 천주교 신자들은 신사 참배를 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고, 그 사실을 주일(駐日)로마 교황 대사관에 통고하였다.
이에 교황사절 마렐라(Marella)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국체명징(國體明徵)에 관한 감상(感想)>이라는 서한을 통해 교황청의 통고를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거의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신사참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성직자와 수녀들 중에는 신사참배 거부를 위해 학교나 병원을 그만 두어야 하였고, 생계의 위협을 무릅쓰고 직장을 떠나야 했던 평신도들도 다수 있었다. 또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투옥된 성직자와 평신도들도 많았다. 신사참배의 문제는 교황청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먼저 신사참배 때 이뤄지는 예식이 일본 당국의 주장대로 순수한 시민적인 예식으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일제의 천황 신격화(神格化)가 점차 노골적으로 표출될 때, 하급관리들은 신자들 앞에서 "그리스도가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라는 말조차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 원칙론에서 보더라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신사참배를 허용함으로써 제국주의의 민족말살 정책에 간접적 동조의 형식을 취했다는 것은 한국 천주교사에서 하나의 오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