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니가타 7 - 니가타 시내에서 강을 건너 하쿠산코엔을 찾아 고풍스러운 신사를 보다!
7월 1일 새벽 6시에 동해 니가타 의 호텔에서 일어나 니가타역에서 기차를 타고 25분을 달려서 니가타
교외에 있는 시바타시 에 도착해 걸어서 시바타성 新發田城(신발전성) 과 청수원 靑水園 을 구경합니다.
16세기 센고쿠 (戰國 전국) 시대에 시바타 시게이에 씨의 본거지 시바타성 은 니가타의
에치고국 에 속했는데.... 훗날 반란을 일으키니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함락 당합니다.
시바타역에서 기차를 타고 니가타시 로 오면서 생각하노라니 니가타 는 개화기에 요코하마,
하코다테, 나가사키 와 더불어 4대 개항장 으로 1869년 3월 9일 개항했으니 메이지유신
무진전쟁 시에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이 니가타항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기 를 구입 합니다.
막부는 프랑스 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슈번등 신정부군은 영국 으로 부터 무기를 구매했는데
7월 25일 나가오카성 을 함락한 신정부군 이 8월에는 군함으로 니가타에 상륙 해서
에치고번을 장악하니 막부측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무기 구입항을 잃고는 항복하게 됩니다.
니가타역 에 내리자말자 급히 호텔로 달려 가서는 간신히 늦은 아침을 먹는데
일본에서 제일이라는 "고시히카리 쌀" 로 지은 밥은 그 자체로 맛이
있으니...... 그러니까 아무 반찬 없이 쌀밥만 먹어도 고소한게 잘 넘어갑니다.
여기 니가타산 고시히카리 コシヒカリ 는 越光(월광) 이란 뜻으로 "고시 국의 빛"
이니..... 1956년에 후쿠이현 농업 시험장 에서 농림 1호와 농림 22호 를
결합해서 만들었다는데, 반찬이 없어도 먹을수 있을 정도로 밥맛 이 아주 좋습니다.
쌀은 인디카 와 자포니카 그리고 자바 로 나뉘는데.....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동북삼성과
캘리포니아 에서 생산되는 자포니카 Japanica 는 10% 로 "일본종" 이라고 부릅니다!
쌀은 BC 3세기 부터 한반도 남부에서 도래인들이 볍씨를 규슈에 가져가 쌀농사를 전했고
야요이문명 을 일으켰으니 한반도에서 일본에 전해졌는데 "한국종이 아니고 "일본종" 이라?
일본인들이 자포니카 품종 쌀 에 대해 학술적 성과 를 이루고는 세계학회에 등록 한 때문인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김치" 를 공식메뉴로 올리고 납품계약을 따낸게 일본 이라?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사회가 뒤집히니.... 정부는 대사관을 통해 외교적으로 미국에
읍소해 우여곡절 끝에 농협이 김치를 납품해 국민정서를 달랬는데 납품가는 공짜 였다지요?
하기사..... 2002년 한일 월드컵 도 일본이 1989년에 유치 선언을 하자 아벨랑제
FIFA 회장이 이번엔 아시아 차례라고 화답해서 기정사실화 되었는 데...
관심 조차 없던 한국은 1993년 10월 28일 카타르 도하에서 북한을 이기고
1994년 미국월드컵 본선 에 진출하자 즉흥적으로 2시간후에 바로 유치 를 선언합니다.
이후 정몽준 은 옛날 88 올림픽에 부친 정주영 씨가 했던 것 처럼 그의 장기를 발휘해...
요한슨 유럽연맹 회장 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한일 공동개최로 결정되었는데
한국은 "한일월드컵" 이라는 명칭으로 "명분" 을 택한 반면에, 일본은
"결승전" 을 일본에서 연다는 "실리" 를 챙기고 "도쿄 대신에 요코하마" 를 선택합니다!
밥을 먹고는 체크아웃을 한후에 호텔에 배낭을 맡기고 니가타 시내 구경에
나서는데 비가 내리는데다가.... 우린 아이즈 와카마쓰 를 거쳐
멀리 야마가타 까지 가야하니 시간이 없는지라 역 광장에서 택시 를 탑니다.
택시는 역을 빠져나가 복잡한 시내를 달려서는 드디어 강을 건너 조금 더 가서는
세우는데.... 바로 하쿠산코엔 白山公園 (백산공원) 입니다. 산이 아니고
사무실에서 걸어 10분이내 도심속 평지에 이런 대자연이 있다는건 좋은 일입니다!
하쿠산진자 白山神社(백산신사) 는 400년전 창건되었다는데 고풍스러운 모습이 볼만하며
니가타 新潟(신석) 는 시나노강 信濃川 양안에 발달했는데.....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강요로 1869년 요코하마, 하코다테, 고베, 나가사키 와 함께 5개 개항장 중에 하나 입니다.
이 도시 니가타 는 운하와 버드나무 및 미인 으로 유명하다는데.... 1955년 대화재 및 1964년
대지진의 피해를 입은후 재건되었으며 우리에게는 북송선 만경봉호 가 출항한 항구 입니다.
1959년 12월 14일 975명 의 재일교포 북송 제1진이 니가타항을 출발한 이래 1967년
까지 약 8만 8000명의 재일교포 들이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은 외국인을 내보내고 싶었고, 북한은 6.25로 젊은이들이 많이 죽었으니 경제를
재건할 노동력 이 필요한지라 이런걸 누이좋고 내부좋고 라고 말하나 봅니다?
당시 우리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이 북송선 앞에서 집단적
으로 북송 반대 시위 를 벌여.... 남북간의 대결을 격화시킨게 떠오릅니다.
달콤한 선전과는 달리 일본인 가족까지 포함해 북한땅에서 엄청 고생 을 하게되지요?
그런데 제2 만경봉호 는 1992년 4월 김일성 주석의 80회 생일 을 맞아
조총련계 상공인 들이 40억엔 거금을 모아 만든 9700t 급 선박 입니다.
제2 만경봉호 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에 저 유명한 북한 미녀 응원단 288명 을 싣고와 부산 다대포항
에 정박해 응원단의 숙소로 이용되었는데..... 그 자리는 지금은 통일 아시아드 공원 이 되었습니다.
제2 만경봉호가 부산 다대항으로 들어올때 어선 40척이 한반도기를 달고 마중했는데.... 응원단 단원
들은 만수대 예술단 과 평양교예단 등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많아 뛰어난 가무 를 자랑했습니다.
골라 뽑았겠지만 미녀응원단을 보고 사람들은 "남남북녀" 를 떠올리기도 했었는데, 응원단에는 훗날
김정은 위원장의 부인인 리설주 도 이때 응원단에 포함됐던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물경 70만이랬지만 지금 재일동포 수는 50만 가량되는데.... 예전에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계는 세력이 강해 자체 신용조합 과 조선학교 를 운영했으니 한국말 도 잘했습니다.
여학생들은 검은 치마에 흰저고리 를 입고 조선인 학교에 등교했고 집에서도 한국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은 세력도 약하고 일본 학교를 다니니 한국말 을 할줄 모르는 데....
롯데 그룹 신격호 씨의 장남 신동주씨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더라는? 그룹 후계자로 오가 마나미와
결혼한 신동빈(시게미쓰 아키오) 씨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지라 좀 배워서 떠듬떠듬 한국말 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북한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조총련 은 차별이라는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조선인 학교에
다니면서 한국인 임을 떳떳하게 드러내는 반면에.....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 은 차별이 두려워
애써 한국인임을 숨기는 바람에..... 한국말을 할줄 모르며 점차 일본으로 귀화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민단의 부모들은 차별 당하지 않도록 집에서도 한국말을 쓰지 않고 자식에게 한국인임을 숨기니
일본 이름으로 성장한 자식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등본 을 떼고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님을
알고는 경악 하는 사례도 많았다는데, 이제는 한류등 한국의 위상 이 높아졌으니 좀 나아졌습니다.
북한은 6.25 때 미공군 폭격으로 평양 시내에 성한 건물이 집 3채(?) 뿐이라고 할 정도로 파괴되었지만,
이후 경제를 재건해 1960년경에는 GNP 가 한국 보다 엄청 높았고, 재일동포들에게 조선인 학교
설립과 교과서 제공에 조선인 금고 를 세워 대출도 많이 해준 반면에, 한국은 농업국가에 머물면서
보릿고개로 너무나 가난하니 1965년 국교정상화 전까지는 재일동포에 1도 신경 을 쓰지 못한 결과 입니다.
민단보다 훨씬 세력이 강했던 조총련은 9만명을 여기 니가타항 에서 북한으로 북송한데다가
1965년에 "한일국교 정상화" 로 동포들에게이 협정 영주권 신청을 받으니, 재일동포
60만 가운데 무려 36만명이 한국 국적 을 신청하면서...... 세력이 정반대로 역전 되었습니다.
그후 민단 이 "추석 고향 성묘" 사업 을 벌이는데, 재일동포의 90% 는 출생지가 경상도 라?
이 사업을 통해 조총련은 몰락의 길 을 걷게되었으며 소수인 민단은 다수가 되었지만
그 수가 늘지않는 것은, 민단에서는 일본으로 귀화하는 동포 가 늘고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고대에 혼슈 서북부 니가타 는 도야마 현, 이시카와 현, 후쿠이 현을 포함한 고시국 (越国 월국) 으로
불렸으나.... 이후 교토에서 가까운 순으로 에치젠국, 엣추국, 에치고국 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에치젠은 현재의 후쿠이현 중· 북부, 엣추는 현재의 도야마현이며 현재의 이시카와 현 은
원래 에치젠국에 속했으나 떨어져 나와 다시 가가국과 노토국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여기 니가타 는 교토에서 가장 멀기 때문에 에치고국 (越後国 월후국) 으로 불리었으며 당시 도읍은
현의 서남쪽 끝인 조에쓰시 上越市 의 "가스가야마산성" 에 있었는데.... 도읍이 외지고
변두리며 깊은 깊은 산속에 있는 것은 이웃나라와 전쟁으로 날을 지새니 방어 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그 가스가야마산성 을 보느라 늦게 니가타에 도착하는 바람에 강변에 영국 국회 를
모방해서 지었다는 현의회 縣政 記念館 와 鄕土資料館 (구세관) 를 못보네요! 일본은
암스테르담 중앙역 을 모방해 도쿄역을 지었고, 도쿄역을 본떠 경성역(구 서울역) 을 지었습니다.
이 도시 니가타는 니가타역 반다이구치 에서 500엔 시티버스 도카벤호나 이누야샤호를 타면
하쿠샨공원 - 북방문화박물관앞 사이토 별장 - 니가타진구 - 미나토 이나리 신사에
만화정보관을 보고 컨벤션센타 도키멧세 朱露 メッセ 31층 무료전망대를 볼수 있다고 합니다.
또는 니가타 신문 빌딩 미디어쉽 무료전망대 에서 시내를 볼수 있다고 하며...
앞 바다 사도섬 佐渡(좌도) 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이름났다는데, 일찌기
니치렌 이 유배되었던 섬으로 그는 느티나무 밑에서 법화경을 읊었다고 합니다.
해서 일련종 혼교사 가 세워지고 니치렌이 머문 곳에는 곤폰사 절 이 세워졌으니
일련종의 성지 인데... 그중에 묘쇼사는 일련종 세본산 중의 하나 라고 합니다.
이후에도 고다이고 일왕(천황) 등 교토에서 사도섬 으로 유배 오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중에 가면극
“노” 의 대가 제아미가 입도하니...... 노를 공연하는 무대 수 는 전국에서 가장 많다고 합니다.
또 신란 도 불법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가마쿠라 막부로 부터 에치고국 니가타에 유배 되었는데
그는 유배 중임에도 니가타와 조에쓰에서 불법 을 전하니..... 불가사의 라고 말해진답니다
고지마의 벚꽃 은 신란 이 나무에 염주 를 걸었더니 꽃이 염주 처럼 이어져 피고, 도야노
에서는 죽장 을 땅에 꽂으니 줄기와 잎이 거꾸로난 대나무 가 숲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고교 야구팀이 80여개교라면 일본은 4,000개교가 있는데 2024년 제106회 고시엔 야구
대회 예선에 3441개 팀이 참가해 49개교가 본선에 올랐으니... 한국계인 재학생 160명 의
교토국제고 는 재학생 2,500명의 도쿄 간토다이이치고와 결승에서 우승했는데, 이상훈
도쿄 특파원은 동아일보에 “한국어 교가에 손뼉 쳐준 스포츠맨쉽” 이란 기사를 올렸습니다.
서로 얼싸안으며 환호하던 교토국제고 선수들은 홈플레이트에 정렬해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한국어 교가를
불렀다. 그 순간, 상대 팀 간토다이이치고교 1루 응원석 에서는 한국어 교가 박자를 맞추는
‘손 박자’ 가 울려 퍼졌다. 상대팀 응원단은 왜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에 맞춰 손뼉을 쳤을까?
8강전에 시마네현 다이샤고교 와 가고시마현 가미무라가쿠엔고교가 맞붙었다. 다이샤고는 교토국제고
가 우승기를 거머쥐기 전까지 이번 대회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은 팀 이었다. ‘세기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왕정치) 를 배출한 와세다실업고 등 야구 명문고를 줄줄이 격파하고 준준결승까지 올랐다.
93년만의 8강 진출에 재학생, 동창, 주민등 수천명 이 다이샤고를 응원하러 고시엔 구장에 몰렸다. 구장이 떠나
갈 듯한 매머드급 응원전 은 올해 고시엔 최고 명물이었다. 결과는 2-8 다이샤고 패. 경기가 끝나고 상대 팀
교가가 경기장에 울려 퍼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이샤고 응원단이 상대 교가에 맞춰 손 박자 를
쳐줬다. 상대 팀 감독은 “손뼉 소리를 들었을 때 다이샤 몫까지 책임 져야 한다고 느꼈다” 며 승리를 다짐했다.
가미무라가쿠엔고는 준결승전에서 간토다이이치고교에 1-2로 패하자 이번엔 가미무라가쿠엔고 응원단에서
손뼉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막대풍선까지 치면서 상대 팀 교가에 보내는 박자 소리에 경기장이 울릴 정도
였다. 이틀 뒤, 결승에서 이긴 교토국제고가 마지막 주인공으로 간토다이이치고 응원단의 손 박자 를 받았다!
한일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온라인에는 비방과 악성 댓글이 쏟아진다.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를 두고도
일본에서는 “저 학교를 제명해야 한다”는 글이, 한국에서는 “혐한을 내버려둬야 하냐” 는 글이 달렸다.
이럴 때 팀은 움츠러든다. 교토국제고 안에서도 교가를 바꾸자는 제안이 많다고 한다. 이달 중순
한국에서는 광복절 프로야구 경기에 일본인 선수를 내보내야 하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비방과 논란은 야구장밖 얘기였다. 그라운드 안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시커멓게 그을린 선수들의 굵은
땀방울, 정정당당한 승부, 승리 팀에 경의를 보내고 상대 팀을 존중하는 스포츠 정신만 있었다.
8강전에서 시작된 상대 팀 교가를 향한 손 박자는 토너먼트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선 교토국제고
에 까지 전해졌다. 인터넷에서 상대를 공격하느라 손가락만 바쁜 ‘키보드 워리어’ 는 알지 못할 세계다.
*** 북일고 선수들이 목동구장에서 열린 제52회 봉황대기에서 승리가 확정된 뒤 마운드로 뛰쳐 나가고 있다. ***
일본 고시엔은 4만여석 입장권이 매진 되는데 한국 고시엔은 하루 평균 관중이 100여명 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선수 가족들과 학교 관계자,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이 대부분이다. 봉황대기, 대통령기,
청룡기, 황금사자기등 국내 고교야구 대회는 결승전을 제외하면 관중 200명을 채우기도 버겁다.
방송 시청률은 고작 0.2% 수준이다. 한국 야구의 미래들은 무관심 속에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다.
우리 고교 야구도 고시엔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시절 이 있었다. 1970~1980년대 암울했던 시절
스포츠는 유일한 해방구였고, 동문들이 모여 모교를 응원할 수 있는 고교야구는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환희를 선사했다. 하지만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급격하게 쇠락의 길 을 걸었다.
그러고는 택시를 타고는 니가타역 으로 돌아와서 호텔에서 배낭을 찾아 기차를 타고
옛 아이즈번의 치소 아이즈 와카마쓰 를 구경하고는 다시 야마가타 로 북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