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서울대동문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택만(서울)
열정으로 살아 온 인본주의 경영인
이건산업주식회사 박 영 주 회장
합판수출 I 위국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단단한 의지를 불태우는 박영주 회장은 전문경영인에서 오너로 성공한 25 년 관록의 합판전문인이다. 80 년대 이후 사양산업으로 추락한 국내 합판업계에서 첨단제품을 개발,불황을 모르는 한국목재업계의 거상이다. 그는 또한 회사를 사회의 교육기관으로 전제하는 ‘인본주의 경영인’이기도 하다. 박회장은 모기업언 이건산업을 비롯해 이건창호,이건자원개발,이건산림제품 등 4 개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기업가이다. 이건산업은 72 년 설립돼 원목을 산지국에서 직수입 ,각종 합판과 제재를 생산,시판 또는 수출하는 종합무역상사이다. 특히 선박용 페놀코팅 합판,건축용 태고 합판,자동차용 합판,피아노용 합판 등 고부가가치의 특수합판 제조업체로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컨테이너용 합판은 세계시장의 ’ 절반 이상을 석권하고 있다. 필자가 박회장을 찾아갔을 때 그는 방금 해외에서 돌아와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고 아침 일찍부터 마라톤 회외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건산업의 공장이나 길 건너편에 있는 직원 전용 기숙사인 ‘햇맞이집’(박두진 시언이 작명) 등에서 만난 이건맨들이 갖는 한결같은 애사심은 진정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섬흔(心塊)의 합창이었다. ‘되는 회사는 가지나무에서도 수박이 열린다’는 세상말을 실감케 했다.
솔로몬군도의 추장 중의 추장을 방불케 한 그의 구리 벚피부는 서울의 공해에 찌든 보통사람들에게는 부러운 것이었다. 박회장은 요즘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박회장은 한가지도 아닌 4 가지나 되는 해외 사업을 한꺼번에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3년전 하노버 박람회에서 찾은 프로젝트를 매룹 짓는 일이다. 이 프로젝트는 목재 찌꺼기로 신규 제품인 공업용 팔레트를 만드는 기술이다.
보람 있는 일로 쳐도 첫손가락을 꼽을 수 있을 만큼 기분좋은 이 프로젝트의 이면에는 천신만고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박회장이 직접 나선 이 프로젝트는 시장조사를 끝내고 착수하기 위해 독일 회사를 방문,의논하는 도중 포기해야 했던 것이였다.이유는 91 년 12 월 독일회사의 기계를 사들인다고 할 때 기계값이 워·낙 비싸 이자, 감가상각비 계상이 안될 만큼 수지가 맞지 않았다. 기계의 본체만 l 천 200 만 달러를 호가했다. 그리고 이 기계를 생산하는 업체도 독일 캐나다 미국 네멀란드 등에 불과했다. 아깝긴 했어도 두눈을 딱 감고 포기해야했다.
지난 연말 박회장은 마지막으로 포기하기 직전에 독일 미국 캐나다 등의 순방길에 올랐다. 독일을 둘러 보고 미국과 캐나다 공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캐나다 공장이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해 회사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캐나다로 달려갔다. 회장과 사장의 화려한 경력도 아랑곳하지 않고 캐나다 공장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회장은 스탠포드 MBA 출신으로
캐나다 정부기관과 금융기관에도 근무한 바 있는 사람으로서 매니지먼트 카운셀링 회사에서 사장과 만난 사이이다.
사장은 토론토대 OR 박사학위를 가진 사장은 모교 교수를 지낸 인물로 카운셀링을 전문으로 하는 경영인이었다. 그 회사는 캐나다 동북부 뉴브런즈혁에 위치하고 있었다. 뉴브런즈혁은 외진 콧이긴 해도 나무가 울창해 목재상들에게는 매력적인 콧이다. 캐나다 정부도 이 회사에 4천만 달러를 지원했지만 끝내 기사회생시키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했다. 그 회사는 제품 판로는 고려하지 않고 공장 규모만 세계 최고로 지였던 것이다. 공장 가동 2 개월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 회사는 회계법언의 청산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러나 공장시설만은 탑이 났다. 모든 기계가 새 것이었다. 박회장은 이건산업 미국 현지법인 사장을 중심으로 인수팀을 썼다. 그리고 인수작업을 조용히 진행했다. 92 년 5월에 공개업찰이 있었다. 미국 회사들만 달려 들지 않으면 공개업찰을 거들떠 볼 회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언수팀은 가동 2개월만에 문을 닫은 캐나다 공장을 최소 가격언 340 만 달러에 낙찰 받을 수 있었다.
캐나다 공장의 모든 시설물들은 한국인 기술자 14 명,현지인 38 명 등이 동원돼 공장 전부를 해체,배에 싣고 한국으로 수송했다. 시설물들은 40 톤 컨테이너 55 칸에 가득 실려 태명양을 건너왔다. 이는 캐나다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캐나다 TV 에 이사실이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다. 그동안 캐나다측의 저지가 대단했다. 법정투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원래 캐나다에서 제품을 생산해 생산량의 절반은 한국 시장에,절반은 미국시장에 팔 예정이었습니다. 캐나다 정부측에 뉴브런즈윅의 주요림을 싼가격으로 양보해 줄 것과 캐나다 은행돈 800 만 달러를 저금리로 벌려주면 캐나다에 서 사업을 하겠다고 조건을 제시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상도덕을 지키는데 최션을 다했습니다"
기계문제가 해결되자 독일 회사의 기술지원이 문제였다. 독일측은 '이건의 목'을 도마 위에 얹어 놓고 언제든지 칠 수 있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러한 독일 회사와 1 년 동안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이러한 문제도 해결하는데 성공했다. 93년 12 월부터 제품출하가 시작되었다.
“요즘처럼 원목값이 계속적으로 올라 갈 경우 목재 찌꺼기를 이용한 팔레트는 상당히 인기 품목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박회장의 승리는 한국기업가가 다국적 법률관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승리한 쾌거이다. 그에게서 위대한 한국인의 긍지를 엿볼 수 있었다. 독일 회사와의 기술계약은 그에게 인간척인 굴욕감을 느낄 정도로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박 회장의 수완에 독일도 두 손을 들어야 했다. 막판에는 독일 사람들을 한국으로 불러 들여 계약할 정도로 뛰어난 외교 솜씨를 보였다. 박 회장은 거만한 독일 기업인을 설득할 때 원칙론을 고수했다. 있는 사실 그대로 공개하고 정면 대결했다. 독일사람
들에게 인간적인 설득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법률 상식을 정확히 아는 것만이 숭리의 요건이였다.
박 회장은 일을 성사시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형이다. 하냐의 사업을 벌일 때마다 많은 시간과 정열을 투자한다.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참고 견디어 낸다. 이것이 그를 오늘날 세계 목재 거상이 되게 한 것이다.
국제 함판통
박 회장은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근황을 설명하다 말고‘ 난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고 한마디 하며 그의 일대기 설명을 계속했다. 그는 목재사업의 국제화에 신바람이 나있다. 박회장은 펼리핀 ,파푸아 뉴기니,솔로몬 군도 등 지구촌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한 목재산업을 꿈꾸고 었다. 국제 합판통이다. 최근에는 칠레 라우타로에 있는 합판공장을 인수,사업영역을 대폭 확장했다. 이건이 80 %, 원 소유자가 20 % 의 지분을 갖는 합작회사이다. 또한 뉴질랜드 산렴에 대해 서 도 관심이 높았다.
“지금 세계의 나무시장은 남양 열대렴 만으로는 태부족한 실정업니다. 침엽수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
해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사업을 벌이는 박 회장은 우정도 지구촌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그가 칠레를 처음 가본 것은 1980년이다. 칠레를 쭉 한바퀴 돌 때 발디비아에서 목재공장을 운영하는 독일계 칠레인을 만났다. 발디비아는 산티아고에서
700Km 남쪽에 위 치 하고 있다. 박 회장은 그와 초변 인사이면서도 밤이 새는 줄 모르고 나무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박 회장은 금방 그와 오래 만난 친구처럼 다정하게 되었다.
독일계 칠레인은 박회 장이 돌아갈 때 며칠 뒤 결혼할 아들이 시승할 자동차를 선뭇듯내주었다. 극구 사양했다. 막무가내로 베푼 칠레인의 친절을 뿌리철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칠레인이 내준 새 자동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있던 때이다. 달라는 자동차에 길옆에서 말이 불쑥 튀어 나와 자동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얼어났다. 운전자는 중상을 입고 차가 크게 부서지는 불행한 사건이 얼어났다. 박 회장은 무사했다. 다행이었다. 이 사건이 인연이 돼 칠레인 목재상과는 더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박 회장은 한국에 돌아온 뒤 그를 감동시 킨 목재상의 아들 부부에게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냈다. 그들 부부는 신혼여행
을 한국에서 보내다 돌아갔다. 그 뒤 그들은 집안끼리 국적을 념어 한 식구처럼 지내고 있다. 그러한 인맥으로 칠레는 그에게 항상 다정다감한 나라이다. 칠레에는 1929 년 세계 대공황 때 실업 구제용으로 식목한 소나무과의 래디에터 파언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이 목재들을 다루기 위한 공장을 칠레 목재상의 아들과 합작운영하고 있다. 벌채가 중심이지만 식목,삼림관리 ,가공 등을 예상하고 있다. 여기에는 1 차로 150만 달러가 투자되었다. 앞으로 1 천만 달러를 투자해 산판도 확보할 예정이다.
솔로몬 군도의 추장
박 회장이 솔로몬 군도에 진출한 이야기는 그의 세계적 기업관을 조명해 준다. 그는 8년여의 노력 끝에 남태평양 솔로몬군도에 자원내국화(資源內國化)의 발판을 마련,89 초 현지법인으로 이건자원개발을 출범시키고 11억평 규모의 삼립개발을 서두른 장본인이다. 또한 그는 신제품 개발과 함께 새로운 나무의 실용화도 지속적으로 추진, 100 여 종의 원목을 찾아내 원가절감에 개가를올렸다.
박회장은 70 년대 말 이후 남양재가 부족할 것을 예상하고 산렴자원이 풍부한 파푸아뉴기니로 진출했다. 파푸아뉴기니 전국을 여행하는데 꼬박 16일이 결혔다. 산속에서 파푸아뉴기니 산림대학을 발견했다. 자동차를 돌려 산럼대로 들어가 임학전공 교수를 만났다. 교수진 및 강의 내용이 상상밖으로 좋았다. 무릎을 쳤다. 그는 그자리에서 직원 두 사람을 추천할테니 수종분류법 등 실무 중심 교육을 시켜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뱃가로 파퓨아뉴기니 인 두사람에게 장학금을 지불해 한국에 초청하겠다고 제의했다.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80 년 ,서울대 농대 출신 사원 두명을 선발해 파퓨아뉴기니로 보냈다. 이건산업으로서는 첫 역사이다. 그들은 l 년 뒤에 파퓨아뉴기니 일대 남태명양에서 산렴자원을 확보하는 일을 시작할 정도로 안목을 높였다. 나아가 원자재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자원개발에 나선 그는 남태형양의 수많은 섬가운데 솔로몬 군도의 초이슬성을 적지로 선정 ,37만 천 ha(l l 억명)에 달하는 거대한 삼렴에대해 20 년간 벌채권을 획득했다. 2007 년까지 벌채권을 확보한 것이다. 솔로몬 군도 초이슬섬 전체가 이건의 산판이다.
솔로몬 초이슬섬의 원주민과 정부를 설득하는데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박 회장이 솔로몬 정부와 섬주민의 요구를 100% 들어주는데 8 이 걸렸다. 솔로몬 군도의 삼렴 벌채는 88년부터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솔로몬은 원시렴 그대로 였다. 솔로몬은 그의 미래의 고향이었다. 박 회장은 원시시대를 연상케 하는 솔로몬 군도에서 도로를 내고 타운건설을 먼저 시작했다. 이건 직원 13명이 주축이 돼 필리핀인,솔로몬인,파푸아뉴기니인 등 300 명이 한데 어울려 건설했다.
박 회장은 솔로몬 군도를 개발하기에 앞서 두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장기발전계획으로 추진할 것이다. 그가 20대 때 벌채권자들의 손에 의해 울창한 강산이 하루 아침에 초토화된 비정의 현장을 목격하고 그러한 비양심적인 사업가는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둘째 영구보존 산판 벌채 생산방법을 채택하기로 했다. 직경 50Cm 이하의 나무는 절대로 손을 안댄다는 원칙론 아래 솔로몬 군도의 벌채를 추진하기로 못박았다. 자연훼손을 막자는 신념이다.
과거에 선진국들이 그랬듯이 후진국의 산판에서 나무의 씨도 남기지 않고 베어 버려 원주민에게 자연파괴로 인한 인재와 폐허만 남기고 가는 짓을 반복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는 이처럼 선진국들이 저지른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벌채를 시작하기 전에 솔로몬 현지에 이건재단을 설립했다. 벌채권자인 이건산업이 솔로몬 군도를 떠나도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도록 전문가들을 배출한다는 구상이다. 솔로몬 군도의 경제 사회 문화발전을 계숭시킬 참이다. 인구 l만 5천명인 초이슬섬에 100 명의 엘리트를 양성해 놓기로 결정했다. 현재 솔로몬 군도 원주민 30 명을 선발,전액 장학금으로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뉴질랜드에 유학했다.
솔로몬 군도의 명예영사이기도 한 박회장이 이룬 가장 큰 엽적은 의료기관의 설립이다. 이건산업이 처음 들어 갔을 때 초이슬섬에는 의료기관이 하나도 없었다 .2 년 전 큰아들 을 잃는 슬픔을 견뎌내야 했던 그에게 의료기관이 없는 원주민들의 삶이 안타까웠다. 솔로몬 군도에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 ‘숭민기념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병원을 지어놓고 보니 근무할 의사가 문제였다. 한국 의사 가운데 지원자가 한명도 없어 필리핀인 의사를 채용했다. 병원에는 병리사 간호사 등 4명이 종사하고 있다. 이 병원은 개원한지 l 년 남짓 됐건만 벌써 l만 3천 명의 환자가 다녀갔다.
이밖에 초이슬섬 현지 주민들에게 기술전수를 시키기 위해 코코아 재배,채소 재배 등 기술지도를 하고 있다. 한편 원주민을 한국 이건산업 공장으로 데려와 교육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6 명의 솔로몬 군도언을 한국에서 교육한 바 있다. 솔로몬 군도에는 300 명의 추장이 있다. 한국의 명예영사 박 회장이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손수 마련한 선물들 을 준비해 들고 모인다. 추장들은 한국인 영사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솔로몬의 개척은 말이 쉽지 이건 전직원이 목숨을 내걸고 일한 피와 땀의 댓가였습니다. 솔로몬에 파견된 전 직원 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구의 마지막 남은 원시럼지대 솔로몬 방문을 I 년에 두차례씩 한다. 그 곳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몰리국민학교를 지였다 몰려국교는 솔로몬 최고의 명문이 되었다. 몰려는 초이슬섬에 있는 이건산업 캠프 근처에 있는 지역명이다. 그에게는 세계인의 정신이 살아 있다. “선진국 후진국을 구별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을 존중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건축가의 꿈
한 때 그의 꿈은 건축가가 되는 것이였다. 비록 건축가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집을 3 채나 지었다. 박 회장은 3 채의 집을 지으면서 우리나라 돈으로 해결 안된 부분이 창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해외 출장 때마다 창문만 보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창문연구에 몰두했다. 덴마크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을 둘러 보았다. 그 가운데 독일이 가장 우수했다. 독일 슈코사의 제품이 마음에 들였다. 1985 년에 독일 슈코사를 방문해 합작투자의 뜻을 비추었다. 그러나 조건이 우리나라 수준에 맞지 않았다. 미국의 3대 창문회사로 시야를 바꿨다. 그들은 하나같이 50대 50 의 합작투자 조건을 내 세웠다.
이러한 조건이나마 추진할 생각으로 고문변호사를 만나 는 등 일을 처리하는 도중 한국의 부동산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아파트 한 채값이 수억대를 호가하는 시대가 왔다. 한국에서 고급 창문을 만들어 일부는 한국 시장에 ,일부는 일본 시장에 판매할 생각이었는데 그의 구상이 딱 들어 맞는 시대가 닥친 것이다. 그에게는 항상 운도 적당히 따라 주었다. 다시 독일 슈코사로 눈을 돌려 슈코사의 기술을 사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젊은 시절 꿈꾼 건축가의 길은 가지 못했어도 건축의 주요부품인 창문을 만드는 이건창호가 탄생했다.
“경영인이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미소를 보낼 정도가 돼야합니다. 자기관리부터 성공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육체적으
로 모두 건강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창문을 만들려는 것이 그의 야심이다. 야심을 성취하는 과정에는 사연도 많다. 독일 슈코사에 기술 전수를 받기 위해 이건산업의 사원 10 명을 현지로 보냈는데 이들이 아침 6 시에 일어나 부근 고등학교까지 달려가 축구를 끝낸 뒤 돌아오면서 길을 따라 청소를 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날마다 했다. 그 소문이 온 통네에 파다하게 퍼졌다. 독일 시골사람들이 한국인을 우습게 보았다가 길 청소까지 하는 그들을 보고 한국인을 다시 명가한 것이다. 독일 슈코사의 회장과 사장의 태도도 돌변했다. 맨처음 기술제휴를 계약할 때만 해도 콧대 높던 그들이 박 회장에게 오히려 허리를굽혔다.
이건창호는 87 년 노사분규가 한창 심할 때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고급창문을 만들어 보자고 전직원이 다짐했다. 목재기술을 접합시켜 세계 일등 창문을 만들어 보자고 작심한 것이다. 사무직의 70%가 건축과 출신들이었다. 첫 1년 동안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고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나 끝내 성공했다.
“현재 이건창호는 매년 60 % 의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도 가능한 일이지만 품질이나 서버스가 따라가지 못
할 것을 우려해 철저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일본 시장에서는 최고 마켓인 박물관 미술관 개인 클럽의 주문만 받고 있다. 모든 주문은 철저한 시공을 철칙으로 삼을 만큼 시종일관 완벽하게 처리한다. 일본에서 주문한 창문도 이건창호 본사 직원들이 직접 출장나가 장치한다. “이건창호의 무기는 신용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일본은 물론 세계의 최고급 창문 수요자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대전 엑스포의 재생관 쌍용관 대우관 등에 이건창호의 창문이 설치돼 세계 최고의 창문이 함께 전시되는 기회를 갖게 됐다. 박 회장은 창문이 주택 뿐만 아니라 빌딩에도 많이 설비되고 있는 추세를 감안,유행감각에 맞게 소음방지 ,에너지 절약 등에 맞는 특수창문을 개발했다. 또한 일반 아파트에 좋은 창문 시제품을 개발했다. 둥근창을 비롯해 각종 모양의 창문을 고안해냈다. 창문을 통해 우리나라 건축업계에 획기적인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건창호의 우수성은 문을 연 지 1 년 반만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반면에 이건창호의 판매실적도 눈부시게 신장돼 나갔다. 이건창호의 창문 가격은 일반창문보다 평균 1.5 -4배까지 비싼 편이다. 창 밖을 알루미늄으로 처리하고 내부에 나무를 댄 보온창문은 보통창문보다 수십배 비싼 것도 있다. 그러나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회장의 교육 프로그램
박 회장은 연구하는 회장 학생(?)이다. 이건산업 회장실에 들어서면 맨먼저 눈에 띄는 것이 책상 배치이다. 박회장의 책상은 권위를 상정한 채 방문객을 향해 쳐다보고 있지 않다 . 그와는 정반대로 벽면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서 박 회장의 평소 연구하는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실지 박회 장은 기업이 성장하려면 오너의 자세가 가장 중 요하다고 믿고 매년 사원 교육프로그램을 쩔 때 회장의 프로그램을 맨먼저 설정한다.
“대부분의 회사 교육 프로그램이 사원들의 의식구조 또는 작업공정 개선 내용이 주인데 오너 사장과 회장의 교육이 우선 이뤄져야 그 기업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오너의 의식 개혁이 없으면 그 기업의 수명은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오너의 기업은 수명이 걸어보아야 10년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박 회장은 I 년에 두, 세번 약 I 주일간의 해외 교육 기회를 갖는다. 그의 경영 수업에 필수이기 때문이다.
회장부터 공부하는 이건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수종을 상업적으로 가공하고 있는 목재종합상사로 유명하다. 이건은 공업용 합판 생산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로 손꼽히고 있다. 합판생산 기술 특허도 많이 가지고 있다. 전세계에서 남양재 가공 회사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선두주자이다. 박 회장의 경영철학은 인간 중심의 경영관이다. 돈이 목적이라면 기업의 존립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기업을 사회 의 공기 (公器)로 본다. 그는 회사를 구성원들이 행복감과 보람을 느끼는 공기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인지 그와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10년이고 20년이고 함께 길을 걷는다.
특히 경기고 동기동창생으로 대성목재에 근무하고 있던 장문영은 박회장의 권유로 65 광명목재에서 박회장과 같이 근무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28 년간 팀원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이건산업의 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동기생들 사이에서도 무척 자랑스러운 일로 평가 받고 있다. 또 한 그는 사원들의 질적 향상에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Give and Take’정신으로서 사용자측이 먼저 주어야 한다는 경영원칙을 실천하고 있다. 노사합의에 나가기 전 사용자측의 대표에게 항상 부탁하는 것은 ‘어떡하면 덜 줄까 생각 말고 어디까지 더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고 당부한다.
박 회장의 노사협의는 기본구조부터 다르다. 이러한 그의 경영원칙은 한건의 노사분규가 없는 모범회사로 성장시켰다. 그 대가로 대통령표창(88 년),제 I 회 인천시 산업평화대상 (91 년) ,91 년도 생산성향상 우수기업 지정 (상공부장관), 두
차례의 노사화합 관련표창(81 년 보사부장관, 86 년 노동부 87장관)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초창기부터 점심시간에 사장 이하 사무실 직원들이 공장에 내려가 공장의 일을 도와준다. 이런 제도가 노사 일체감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회장은 사원들과 똑같이 줄을 서서 구내식당을 이용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절대 외식을 하는 일이 없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짧은 시간에 판단을 내려 하는 예가 없다. 미국 현지법인 사무실도 2년동안 연구한 뒤 문을 열었다. 솔로몬 군도는 8 년 ,창문 연구도 6 년 ,팔레트도 이럭저럭 4 이상이 걸렸다. 그의 경영 스타일은 완벽추구형이다. 그리고 박 회장은 신제품 개발에 회사의 모든 장래를 건다. 그는 새로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신제품 개발팀을 따로 두었다. 개발팀에는 모든 행동에 자유를 준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할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출되기 때문이다. 출퇴근은 물론 예산 지출과 해외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회사의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계획을 수립하는 장기개발팀은 이사 과장 대리 직원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팀은 박 회장이 직접 운영한다.
박 회장은 회사의 조직은 베스트가 없다는 하버드 학풍을 인정하고 환경에 맞게 조직을 바꾸는 것만이 베스트라고 주장한다. 전세계가 불황의 깊은 수렁에 빠져든 3년 동안 소회사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박회장은 지금까지 전표에 사인 한 적이 없는 소신파 오너이다. 아랫사람에게 철저하게 권한을 이양해주고 운영예산 안에서 돌아가는 것은 전혀 간섭을 하지 않는다. 다만 코디네이트의 역 할을 자처 한다. 합판협회 회장직 , Asia-Pacific Tropical Timber Organization(A TTO) 부회 장, Wor1d Forestry Center 이사 등을 겸직하고 있어 하루 24 시간이 짧다.
“선도하면서 세계적인 흐름을 빨리 빨리 알아 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보다 정보가 2 년 이상은 빨라야 합니
다"
박 회장의 정보전략 중시에 의해 이건맨들은 김포공항 출업이 엄청나게 잦다. 박회장의 해외 출장일도 연간 110 일 에 이를 정도이다. 김포공항 출입국 관리인들에게 이건맨의 낯이 익을 정도로 해외출업이 많다.
인본주의 경영
주변의 사람들은 박회장을 ‘ 인본주의 경영인 ’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박회장은 겸허하게 자신을 말했다. “상당히 열심히 사는 타업입니다만 욕심이 많습니다. 뭐든지 잘하고 싶습니다. 타고 난 장점이란 매우 낙관적이고 긍정적이어서 좌절하지 않고 어려움이 닥치면 도전으로 인식하고 처리할 뿐입니다 "
그의 가정은 부모대에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 집안이다. 철만 되면 어머니가 병원 또는 양로원 ,고아원 등에 선물 등을 보내는 것을 보고 자랐다. 결혼 초에 어머니는 박 회장 부부를 데라고 문퉁병 환자 수용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난 한참 뒤에야 어머니가 심어준 무언의 교육을 피부로 느꼈다. 남에게 베풀라는 지도였다. 인본주의 경영인 박 회장의 대학 다닐 때 꿈은 외국 유학을 다녀와서 경제정책가가 되는 것이였다. 대학 2-3학년무렵 경영학에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후 ROTC 출신 장교로 군대를 제대했다. 해방후 그의 집안은 부친이 인천조선기계 다음으로 큰 기계공업인 부산진철공소를 경영할 정도로 부유했다. 3녀 2남의 맏이로서 위로는 누나 세명이 있고 남동생이 한명 있다. 미국 하버드와 시카고대학에서 일본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고 있는 박영재 교수가 그의 동생이다. 박영주는 군대 제대 후 연애반 중매반으로 만난 아내와 함께 미국 유학의 꿈을 꾸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나기로 하고 결흔했다. 수속하는 동안에 부친이 운영하던 기계공업에 취미가 없어 공장문을 닫아버리고 기계를 모두 팔아버리는 용감한 처사를 보였다. 기계공업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 박영주는 신문에 처분공고를 내 부친이 운영하던 부산진철공소의 모든 기계를 헐값으로 팔아 버렸다. 그리고 미국 유학길에 오를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운명의 전환기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그의 장인은 광명목재 사장이였다. 그는 온정적인 사업가인 장인에게서 많은 것을 다시 배우는 기회를 얻었다. 하루는 장인과 함께 시보레를 타고 가는 도중의 일이다. 울산에 산이 많아 둘러 보러 가는 중이었다. 그의 장인 은 길을 가다가 아기를 등에 업고 짐까지 머리에 이고 가는 부인을 보더니만 그녀가 가는 목적지까지 실어다 준 뒤 볼일을 보러 갔다. 장인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박영주에게 필리핀의 원목 생산지 구경을 제의했다. 장인이 운영하고 있는 광명목재는 그 당시 필리핀에 주재원을 파견하지 않고 일본 종 합상사와 교포가 운영하는 상사를 이용하여 원목을 구입하 고 있었다. 필리핀 풍물구경을 하다가 목재 거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물어 보았다. 광명목재는 다른 회사들이 거절한 제품을 2-3 달러씩 웃돈을 얹어 주고 매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를 본 그는 당장 풍물구경을 중단했다. 화가 치밀어 올라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6개월 동안 필리핀을 일주하며 거기서 광명목재의 원목을 구업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가 구입한 원목을 2척의 배에 싣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는 필리핀에 6개월 있는 동안 ‘장인에게 10 장의 장편 서사시조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의 장문의 편지 속에는 외국 주재원의 구비조건 등을 강조했다. 6개월 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의 장인은 편지 내용에 맞춰 사람을 뽑아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신혼의 단꿈을 맛볼 사이도 없이 주재원을 데리고 다시 펼리핀으로 떠나 5 개월 동안 체류해야 했다 . 이 때 그는 난생 처음 나무장사가 재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무장사는 이렇게 시작이 됐다.
67 년 그의 장인은 영겁결에 그를 광명목재 전무로 발령냈다. 약관의 나이에 전문경영언이 된 그는 2년 뒤 장인이 세상을 뜨고 냐서도 73년까지 광명목재에 근무했다. 곧바로 그는 광명물산이란 목재 무역회사를 설립해 독립했다. 오너가 되었다. 광명목재 시절 그의 경영기법은 독특한스타일이었다. 75 년 광명목재 운영이 어렵게 되었을 때 관리은행측의 주문을 받고 사장으로 다시 취임했다. 그 기간은 약 3년 가량진행되었다.
“부실해진 회사를 다시 제대로 세우기란 팩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좋아져 비교적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출사표를 내고 광명목재 재건에 소매를 걷어붙일 때 소유 주식을 몽땅 가지고 나갔다. 회사운영이 본궤도에 진업했을 때 주식을 모두 돌려주고 서울로 떠났다. 경영인으로서 인간적인 괴로움을 겪었다. 광명목재를 기사희생시켜 놓고 떠날 때는 손해 본 기분이었다. 그러나 인간사 공짜가 없었다. 그로 인해 얻은 것도 많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성장했다. 무작정 서울에 온 그는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은행쪽에 서는 광명목재의 난관을 념겨준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마침 이건산업의 운영이 어려워 사주가 다른 데 념기려고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은행측으로부터 들었다. 70 년대 중반부터 중동 지역에 건설 붐이 일자 건축 자재 수출 호황도 예상돼 과감히 인수했다. 인수는 박 회장이 50 %, 두산산업이 50% 의 자본출자를 했다. 그러고 나서 광명물산과 합병했다. 78 년 3 월이었다.
80 년대 극심한 경기침체로 경영 여건이 매우 어려웠을 때 두산산업은 ‘투자한 모든 기업에서 출자자본을 모두 회수한다’는 두산그룹의 방침에 따라 이건산업에 투자한 모든 투자지분을 회수키로 결정했다. 두산의 은행담보 등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한 때 큰 고통을 받았으나,한편으로 독자경영의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지금도 두산과는 형제와 같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동업할 기회를 가졌던 것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고 있다.
그는 80 년부터 85 년까지 매우 어려운 경영수업을 쌓아야만 했다. 70 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수출산업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던 합판업계가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원자재인 원목을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해야만 하는 국내 합판산업은 85 년 제조원가 상승에 따른 수출경쟁력 악화로 최대의 시련기에 봉착했다. 국내 합판업계는 도산과 폐업이 속출하는 등 전반적으로 침체의 갚은 수렁에 빠져 들었다. 세계 최대 합판회사였던 동명목재가 80 년 5 월 몰락했고,같은 해 6 월 고려목재,9 월에는 경동목재,81 년 2월과 12 월에는 삼신목재,신신목재 등이 연달아 문을 닫는 사태로 치달았다. 국내 목재업계의 60% 이상이 문을 닫는 사투의 기간이었다. 그는 이 도태기간 동안 공업용 합판과 기타 수종개발로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데 성공했다. 그 당시 이건산업은 연 매상고가 50 억원에 달하는 조그마한 회사였다. 지난 10 년 동안 외형이 10 배 늘어나 l 천 800 억원의 매출실적을 올린다.
세계 속의 한국인
틈만 나면 좋은 원목을 찾아 세계 나무시장을 누비는 박회장에게는 국경을 넘어 정이 통하는 외국 친구들이 그의 사업의 후원자들이다.69 년 말레이시아 사바에서 처음 만나 지금까지 친구로 지낸 c.K. Lau경은 박회장이 73 년 독립할 때 외상으로 나무를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는 무제한급 신용을 주었다. 박 회장은 그가 베풀어준 무제한급 신용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의 친절을 잊지 않는다. 말레이시아 최고 갑부가 된 라우 경과 박 회장이 이룬 우청은 한권의 소설감이다.
그리고 러셀 한이 있다 .67 년 처음 만나 지금까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법학박사이자 미국 현지법인 사장을 맡고 있다. 러젤 한은 조지아 퍼시픽 일반사원 때 알게되었다. 그 회사는 미국 최고의 합판가공 회사였다. 오리건주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하는 라이튼 씨. 그와는 1971 년부터 15 년간 거래를 하였고,그 아들이 3 개월 동안 이건산업에 와 인턴십 기간을 보낸바 있다. 또한 칠레 목재공장을 경영한 사람으로 신혼여행 갈 자동차를 사고낸 오스차미카옐리스 그리고 동방유량 신명수 회장의 부친인 신덕균 회장도 그에게는 고마운 은인이다. 신회장은 가끔 찾아 뵐 때마다 따뜻한 충고를 잊지 않는 분이었다. 수출붐이 한창일 때 그는 수출을 얼마나 하느냐고 물었다.8 5% 를 수출한다고 대답한 박회 장에게 구조를 조정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지금도 신회장의 말소리는 귀에 쟁쟁하다.
“이 사람아 자네 힘은 국내에 있네. 국내 시창에 뿌리를 못 내리면 어렵네 그 교훈은 그의 평생의 길을 이끌어 주었다. 신회장의 조언을 듣고 일찍이 사업 방향을 국내와 국외의 비중을 7 대 3 으로 뒤집어 놓아 나중에 큰 힘이 되었다. 이밖에 박회장에게 영향을 미친 많은 외국인 친구 가운데 는 해리 A. 멜로 회장이 있다. 그와 함께한 알래스카 여행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는 철저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는 장사꾼 철학을 가지고 있다. 남들이 버린 것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전문가이다. 쓸모가 없는 나무를 이용해 제품을 만들고 신문 고지로 제품을 만들어 돈벌이를 하는 별난 기업가이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거물급 인사이다.
박 회장이 세계의 산들을 무대로 삼는 국제 목재상이 되기까지는 사션을 뛰어넘는 어려움도 있었다. 1965 년 필리핀에서 권총 위협을 받은 적도 있다 . 광명목재 일로 해외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약속대로 이행을 하지 않는 필리핀인에게 버럭 화를 내자 오히려 권총으로 위협 했 다. 기가 막혔다. 그리고 칠레의 발디비아와 포르트문드 사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었다.
환희에 찬 기쁨도 많다. 칠레의 인포데마사의 마르코스윈드 씨가 경영하는 산판을 견학한 것은 오래 오래 기억된다. 젊은이가 700ha(210 만평)에 이르는 큰 목장에서 소를 키워 거기서 나온 돈으로 나무를 재배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새로운 속성수종을 가꾸는 젊은이는 마르코스란 36 세의 청년이었다.
덕이 있으면 이웃이 있다
박회장의 고향은 남쪽나라 부산산이다. 박영주는 부산 남일국교와 경남중을 거쳤다. 그의 유년시절 성적표는 2 등으로 못박
혀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부동의 위치였다. 이러한 데에는 하나의 음모(?)가 있었다. 남일국교 시절 박영주와 강
수민( 금정의원 원장 의학박사)은 한반이었다. 단짝처럼 지냈다. 강수민에게 번번이 l 등을 내놓았다. 담엄을 맡은 김형곤 선생님(전 해운대국교 교장)의 충정어린 성적조작극 때문이었다.
김 선생님은 사친회 회장을 맡고 있는 집의 아들이 공부도 1 등이라는 것을 알면 오만해질까봐 2 등 이상 주지 않았다. 김 선생님 흔자만 알고 지내다가 얼마전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박 회장은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마음 쓴 은사의 내심을 읽고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중학교 때도 2등이었다. 이는 순전히 실력에 의해서였다. 강적은 서울대 공대 교수로 재직중인 정창현 박사였다. 정창현은 머리가 좋아 MIT 공대에서 박사학위를 최단기에 마친 수재로 유명하다. 박 회장은 이 두사람을 지금도 가장 절친한친구로 손꼽는다.
박영주는 경기고 입학과 더붙어 서울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산 박영주의 서울 유학 1 년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보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은,이용구(한비 산업 대표이사) ,박용성 (두산그룹 부회 장) 등과 함께 어울리면서 급기야 활기를 되찾았다. 박 회장은 여행을 좋아하고 등산,음악감상,미술감상 등도 좋아하는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독서도 즐긴다. 그러나 술만은 끊었다. 28 살에 정글을 다니다가 걸린 간염 때문에 8 개월 정도 누워서 꼼짝 못했고 31 세 때 또 재발,7 개월 동안 꼼짝 못한 적이 있어 그 이후 절제된 생활인으로 탈바꿈했다. 박회장은 자기 자신의 경영을 우선으로 치는 기업가이다.
“경영인이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미소를 보낼 정도가 돼야 합니다. 자기 관리부터 성공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육체적으로 모두 건강해야 합니다"
박 회장은 학창시절 동기 가운데 그만큼 건강한 사람이 없다고 자랑했다. 1주일에 5일은 수영을 하는 등 건강관리에 최우선이다. 그는 부모님에게서 ‘향상 감사하게 살자. 최선을 다하고 매사에 감사하자’란 가훈을 받았다. 실천하며 산다. 그의 좌우명은 ‘덕유린(德有憐)’이다. 설명하자면 덕이 있으면 이웃이 있다는 뜻이다. 서울 구기터널 옆으로 올라가는 연화사 근처 빌라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룬 그의 가족으로는 연애 반 중매 반으로 결흔한 박인자 여사와 승준, 은정 두 자녀가 있다.
이건음악회
박 회장은 눈앞의 이익 추구에만 급급한 요즘의 살별한 기업 풍토에서 외국의 유명 실내악단을 자비로 초청,일선 교
사들을 위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는 기업언이라고 주위의 칭찬이 자자한 경영인이다. 박 회장이 처음 음악회를 개최한 것은 90 년 10 월 26 -29 일 사흘 동안이다. 체코가 자랑하는 세계적 실내악단인 ‘아카데미아 목관 5 중주단’을 초청, 서울 예술의 전당과 인천 시민회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박회장이 인천에서 이건음악회를 갖게된 계기가 었다. 우연히 아카데미아 목관 5 중주단이 한국에 올 때 스폰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음악회 스폰서가 된 것이 좋은 계기가 돼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초청한 음악클럽이 부산 등에는 가서 연주를 해도 인천에는 오지 않는 실정이 안타까웠다.
“처음에는 목재회사에서 음악회를 주최한다고 반대도 많았지만 막 밀어 붙였습니다. 인천공장에서 사은회 음악회를 열었는데 클래식 음악회를 감상한 후 공장 사람들의 반응이 특히 좋아 의외의 효과를 얻었을 때 기쨌습니다. 음악회를 감상한 뒤 직원들의 표정이 너무 밝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 비싼 입장료 때문에 음악감상 기회를 갖지 못한 인천의 일선 음악교사 500 명과 음악전공 대학생,거래처 고객들을 무료로 초청했다.
'이건' 30년 결산
이건산업은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는 최고의 기업”이라는 비전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이건산업이 90년대초 합판사업을 하고 있을 당시 국내 합판산업은 중국시장의 개방과 여러 외부요인들로 인해 시장환경이 악화되었다. 대부분의 합판회사들이 값싼 노동력을 앞세운 동남아 등지의 합판 때문에 도산했을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만 이건산업은 끝까지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뿐만 아니라 1997년 IMF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에도 이건산업은 각고의 노력으로 기존사업의 혁신과 신사업의 발굴을 이끌어내 꾸준히 사업을 성장시켰다. 시 신사업으로 시작했던 이건창호는 24년이 지난 오늘 명실공히 국내 시스템창호 1위 업계로 입지를 굳혔고 매출규모로만 보더라도 약 20배가 성장했다. 사업분야도 시스템 창호뿐만 아니라 커튼월과 태양광 창호 및 신재생 에너지 사업으로 확장, 에너지 고효율 시스템창호 전문 기업으로 우뚝 섰다.
또한 이건창호는 인천공항의 성공적인 공사를 통해 국제적 대형공사의 수행능력도 인정받았다. 2000년대 이후로는 해외시장에까지 진출해 최근 CNN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에 선정된 베트남의 BITEXCO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아름답고 공사난이도가 높은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건산업은 남태평양 솔로몬 군도에 진출하여 대규모 조림사업을 시작한 이래, 뉴조지아섬의 정부림(여의도의 90배)을 확보하였다. 장기적으로 온대림의 수급이 어려워 질 것으로 판단한 이건산업은 1993년 3월, 칠레 중남부에 위치한 라우타로에 현지법인을 설립했고, 당시 월 400m3의 베니어를 생산했던 칠레법인은 대규모 투자를 통해 2015년부터는 60,000m3의 베니어를 공급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건산업은 칠레에 진출한 한국기업 중 FTA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성공한 사례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통상 조림사업과 신사업은 위험부담이 수반돼 매출로 이어지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조림사업은 굴지의 대기업도 섣불리 도전하지 못하는 분야인데, 이건산업은 20년간 멈추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는 사업적 원동력을 마련했다.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했고, 산림을 조성하는 것부터 시작해 베니어를 생산해서 합판으로 가공하고 마루바닥재를 만들고, 폐목재를 활용해 이건에너지 열병합 발전설비를 통해 전력을 생산하는 자원의 선순환과 목재의 수직계열화를 이룩하기까지, 지난 30년동안 이건산업이 업계에 세운 기록은 실로 놀랍다,
삼성이 자랑하는 조직관리의 귀재
이필곤 전 회장
이필곤,그는 삼성이 자랑하는 조직관리의 귀재다. 그는 국내기업으로서 최초로 회사조직이 통상 부와 과로 이루어졌던 시절에 그 직을 한데 묶은 '팀제를 도입, 결제라인을 단축시킨 전문 경영인(CEO)다. 그같은 조직개편과 경영혁신의 결실로 삼성물산은 1985년 비제조업체로서 처음으로 품질관리 대상을 대상을 받았고, 1987년에는 매출 6조8천억원을 달성했다. 그 뒤 사무생산성 운동은 국내기업으로 삽시간에 확산되었다.
과묵한 성격
1992년 세모의 어느 날이다. 이용만 재부부 장관,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 그리고 이 사장이을 비롯한 한국을 대표하는 CEO들이 오찬을 같이했다. 데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여서 오찬 둥에 대선에 관한 화제가 많았다. 이날 모음은 1시간 30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사장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수가 아주 적을 사람을 과묵하다고 한다. 그는 과묵하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천성적으로 과묵하느냐은 질문에 미소로 대답할 정도다. 계속 한국 CEO로서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을 득고 싶가고 하자 무겁게 입을 열었다. 회견은 1993년에 일우어졌다.
“우리 경제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요. 가치관이냐 판단 기준의 변화에 산업구조가 적응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임금이 오르면 이에 맞춰 부가가치가 높은산업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술선진국인 양 우쭐댔고,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항상 대립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식의 잘못된 현실진단 속에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우리 경제의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그러면서 나라 경제의 문제가 바로 기업의 문제라고 역설했다.
분위기를 쇄신해야 합니다 그는 회사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삼성물산은 3 개년계획으로 ‘자세 가다듬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 자세업니다. 경쟁국에 대해서 막연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는 경쟁력은 영원히 뒤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위치를 알려면 개발도상국이 우리를 어떻게 추격해 오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고, 위기를 극복하려면 행동 지침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그룹은 국제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인재 양성, 인력의 국제화 등 ‘사람의 국제화’ 에 힘쓰고 있습니다. 독신사원 해외 파견제도를 그룹의 모든 계열사에서실시했습니다.독신사원 해외 파견제도는 이 회장이 창안해 낸 제도이다.
“세계 경제는 소량다품종의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위치를 파악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우선해 경쟁력을 제고해야 합니다. 단순수출 비중을 줄이고 3국간 거래,구상무역 등으로 해외영엽을 고도화하고 내수 등의 영업을 더욱 강화시키는 한편,정부·기업 ·근“어떻게 하면 헤쳐 나가나 하는 중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는 선진국에 뒤떨어지고 후진국에 추격 당하고 있습니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나라나 기업 전체의 로자 모두가 하나가 될 때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그룹 차원에서 각 분야별로 국제경쟁력을강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섬유 기계 조선 반도체 전자 가전 등 기술적으로 선진국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죠"
이 전회장은 당시 한국의 방향탐지의 조타수로 일본을 꼽았다.그는 1년에 적어도 한번 이상은 일본의 현장 경제를 시찰하
는 것을 잊지 않았던 국내 경제계의 새로운 일본통이다. 이 전 회장은 이 때마다 일본 종합상사의 사장들을 만나 경영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업무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 우리 경제에 대한 처방으로 화제를 다시 돌리자,그는 억양을 약간 높였다. “잃어버린 국제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제품구조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고도화하면서 의식구조의 혁신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각 산업별로 소비자 의 요구를 바탕으로한 소량다품종 생 산 구조에 적응하도록 노력하고 과거 조화를 중시하던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이던 기업의 조직을 도전과 창조를 우대하는 조직으로 바꿔야합니다. 이 회장은 우리가 경제 전쟁에 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술 개발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우리 기술 수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펼요해요.우선 과학기술 투자규모를 봅시다. 우리나라 전체를 합쳐봐야 미국 자동차 회사인 GM 한 회사의 투자액만도 못해요."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2등은 낙오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외국의 기술수준에 90% 만큼 따라갔다는 얘기도 하나마나한 말업니다. 이제는 사고의 기준을 국제적인 시각에 맞춰 상품이라면 세계 일류,사람이라면 국제인이 되어야 해요"
비상경영 체제 선포
그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언어 사고 행동 모두에서 ‘역시나’를 연발하게 한다. 조직의 탁월한 마술사 이 부사장은 많은 걸작품들을 연출했다. 지난 84년 6월 삼성 물산의 대표 이사로 선엄된 이펼곤 부사장은 취임식에서 ‘비상 경영체제’를 선포했다. 당시 삼성물산을 비롯해 국내 종합상사들이 80년대 초반의 2 차 오일쇼크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출은 어려워지고 본격적으로 손댄 수업은 누적된 재고로 부실의 갚은 수렁에 빠져있었다.
이 부사장은 ‘조직의 동맥경화증’ 치료로 경영혁신 바람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증세를 치유하기 위해 비상 경영체제를 선포한 것이다. 그는 비상 경영체제의 기초작업으로 서두른 운동은 사무품질 향상 운동이었다. 당시만 해도 제조업 생산 현장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던 TQC(전사품질관리)가 종합상사에서 실시된 것이다. 이 부사장은 조직의 동맥경화증 치료 1단계로 중간관리자들을 일선 영업현장으로 유도했다. 현장에 투하된 중간관리자들은 매주간 단위로 직접 거래선을 방문해 스스호 펼친 영업활동을 보고하도록 했다. 그리고 실무직원들의 영업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개인사업부제를 도입했다.
12 명이 l 조언 이 제도는 개별 영업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팀제’를 도입해 회사 조직이 부(部) 과(課)로 이루어진 시대에 부와 과를 한데 묶어 팅을 만들어 결재라인과 중간간부까지 영업 일선에서 활약하도록 했다.
삼성물산은 그같은 경영혁신을 인정 받아 85 년 비제조업체로서는 처음으로 품질관리 대상을 받았다. 그 뒤 삼성그룹의 사무생산성 향상운동은 국내 대기업으로 삽시간에 확산됐다. 이부사장이 추진한 비상 경영체제가 매듭을 지은 88 년 삼성물산의 매출은 6 조 8 천억원이었다. 당기 순이익은 109 억원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전인 3 년 전과 비교해 두배 가량의 신장세를 보였다. 그리고 삼성물산은 85년 (주)대우를 제치고 국내 매출 l위로 부상했다. 이 영광은 7 연패를 기록했다. 또한 88 년 사창에 취임한 이사장은 사내 자본금제도를실험 운영 해 적자부서는 스스로 사업을 정리하도록 했다. 그는 91년 경영 능력을 인정 받아 삼성물산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삼성 공채 6 기 (65 년 업사) 가운데 선두주자임을 확신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0 년째 국내 최대기업의 최고경영자의 위치를 지켜 이 분야의 기록을 세웠다. 그의 장수 원천은 끊임 없는 경영 아이디어 창출과 경영현장 실무이다. 그는 현장에서 터득한 대기엽과 중소기업의 발전모렐을 명확하게 정립하는 프로 경영인이다. “경제성장 모렐은 일본식과 대만식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두 모렐 사이에는 상호보완적인 창단점이 있습니다"
이 전 회장이 선호하는 일본식 성장 모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 상승효과를 누릴 수 있는 모텔이다. 반도체 전자산업 등 첨단기술과 자본이 많이 투자되는 슈퍼산업 체질에 잘 맞기 때문이다. 프로는 역시 프로정신이 낳는다. 이부회장은 기업 조직의귀재답게 재벌 소유주들에 대한 견해가 남다르다. “부(富)에 대한 거부반응이 구조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청빈(淸資)은 있으나 청부(淸富)는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부가 사회적인 문제로 타락한 것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뿌리 내려온 청부불식 사고는 정경유착 을 배출했다. 이부회장의 기업론에 의하면 부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사회의 공기여야 한다. 기업은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국부이자 국력이다.
삼성공채 6기
이 전 회장은 삼성 업사 27 년만에 부회장직까지 오른 셀러리맨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일반 셀러리맨들 못지 않게 좌절과 아픔도 많았다. 이부회장은 철저한 노력형에 속한다. 바쁜 와중에서도 반드시 일본 등을 들러 현장 경영학습을 쌓는다. 삼성물산의 국제화를 앞장서 실천하기 위해 매일 아침 7 시 30 분이면 출근해 정식 업무가 시작되는 9 시까지 얼본어와 영어 공부를 했다. 셀러리맨들의 우상이 된 이 전 회장의 대학 때의 꿈은 소박했다. 서울대 상대 재학시절 이필곤 학생의 꿈은 은행원이었다. 은행 조사부에서 연구활동을 하는 평범한 은행원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경상계 대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갈만한 회사로는 삼성 삼호 천우사 영풍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 삼성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 은행원을 막연하게 희망한 그는 삼성 업사 시험 공고가 맨 먼저 발표되자 시험삼아 치렀다. 그의 업사 성적은 동기생 53 명 가운데 20 위 안에 겨우 들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대 상대 동기 가운데 가장 선두를 달린 전문경영인으로 꼽히는 그의 업사 성척이 1등이었을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추측과는 다르다. 65 년 삼성그룹에 업사한 이필곤 신입사원이 배치된 곳은 삼성물산이었다. 삼성은 50 년대에 수
입대체산업을 일으켜 외화절약과 국민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하여 국내 수요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되었다 .
1960 년대 들어서면서 정부가 수출증진에 박차를 가하자 삼성도 수출 제일주의를 표방해 기구를 확대 강화하고 해외시장 개척과 확장에 총력을 집중했다. 이에 따라 수출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였고 특히 60 년대 초에는 이미 설탕 통조림 양복지 타이어 박하제품 등을 수출해 타사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삼성물산, 제일모직, 제일제당 3사는 모두 상공부에서 분류한 수출실적에서 A급 상사에 들게 되었다.
1964 년 I 월 30 일 우리나라의 수출은 사상 최초로 I 억 달러선을 돌파하였다. 정확한 수치로는 l억 2천 85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정부는 이날을 기념하여 ‘수출의 날’로 정하고 200만 달러 이상의 실적을 올린 7 개 상사에 대통령 포상을 수여했다. 삼성물산은 이 해부터 보다 합리적인 체제를 갖추고 효과적인 업무수행을 위해 각사가 독자적으로 해오던 수출업무를 삼성물산이 전담하여 집중적인 수주를 벌이도록 하는 한편,뉴욕지점을 설치하고 동남아에 주재원을 파견하여 특정 상품의 거래추진 ,현지의 제도 관습 및 거래에 관한 정보 수집,신규 수출상품의 개발 등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아울러 삼성은 영화 ‘수출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TV 및 전국 각지의 영화관에서 상영함으로써 수출역군으로 서의 삼성을 부각시키는 등 수출을 통한 장기적 발전의 토대를쌓았다.
수출 대상국은 20 개국에 달했다. 상품 구조변에서 볼 때 한국 전체의 수출총액 가운데 2 차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51. 6% 언데 비해 삼성은 공산품 수출에 85% 를 기록하는 등 비록 외화 가득률은 낮았으나 상품 구조의 선진성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뒷날 삼성물산이 종합무역상사 l 호로 지정 받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65 년은 우리 정부의 국제관계와 경제정책 수행측면에서 전기를 맞이한 한해였다. 한 일국교가 오랜 진통 끝에 정상화되었고,대내적으로는 한국의 경제를 구조적으로 전환시키려는 일련의 조치가 단행되었다. 특히 무역부문과 관련해 실시된 주요 수출진흥책으로서는 유통환율제를 비롯
해 수출 특화산업 육성,수출금융의 확대,조세상의 수출산업 우대 ,수출검사제도 실시,경제외교의 전개 등을 들 수 있다.
1965 년은 60 년대의 우리 경제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다. 이 해에는 한 · 일회담이 타결되어 민간차원의 차관도입이 가능해점으로써 각종 경제개발 프로젝트가 본격 추진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월남 파병이 시작돼 월남 특수로 인한 호황을 맞게 되었다. 또 이해 6 월에는 내자동원을 위한 금리 현실화 조치가 취해졌다. 1966 년 초 삼성물산은 700 만 달러의 수출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세가지 지침을 세웠다. 첫째,도쿄 뉴욕 등 기존 해외지점망에 주재원을 증가시키고 새로이 서독 스웨덴 샤이공 등지에 유능한 사원을 배치하여 해당국 또는 인접국에 대한 교두보로 삼아 기존시장의 확대를 도모하고 사
람이 직접 시장에 진출하여 캐나다,중남미 제국,호주,아프리카에 판로를 개척했다.
삼성물산은 해외시장 개척 결과 67 년 11 월 제 4 회 수출의 날에 828 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인정 받아 수출업체로서 는 최고인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또한 같은 해 삼성물산의 총수출액 은 모두 963 만 달러 에 달해 삼성 물산은 수출 실적 순위에 있어 제 4 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막연한 출발
은행원이 되고 싶었던 그는 삼성의 발전 초기에 삼성맨이 되었다. 그러나 이펼곤 사원은 삼성에 업사할 때만 해도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막연히 무역상사 직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삼성공채 6 기생 53명 가운데 6명이 삼성물산에 배치되었는데 유일하게 흘로 경리과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영업부서에 투입됐다. 당시는 경제개발 붐이 막 일기 시작하면서 수출 드라이브의 물결이 붙고 있는 때이다. ‘직장의 꽃은 무역회사' '영업직이 무역회사의 꽃’으로 통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우기는 했지만 경리에 관한 실무지식은 전혀 없었다.
업사 동기생들이 바이어를 만나고 해외 출장을 다니는 등 화려하게 활약하는 동안 그는 경리장부와 씨름하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투지형인 20 대 후반의 그에게 갈등이 일어났다. 심한 갈등에 견디다 못한 그는 퇴사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에게 방황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질 무렵 한줄기 빛이 있었다. 그 때 손을 내민 사람은 직속상사인 경리과장이였다. 공채 1기로 입사,공채 선배이기도 한 최숭윤 과장이었다. 최과장은 삼성에서 부장을 끝으로 퇴직, 지금은 미국 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최과장은 나중에 삼성이 자랑하는 조직관리의 귀재로 성장한 이사원의 첫 조련사였다. 이 사원 은 삼성물산 말단사원으로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 관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최과장은 방황하는 이사원에게 동질감을 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퇴근 뒤 생맥주집으로 그를 데리고 가 몇차례씩 이나 설득을 했다. 최과장은 투박한 맥주잔을 기울이며 ‘직장생활을 단기적으로 보지 말아라’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l인자가 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금언적인 상식들을 강조했다.
“포기할 뻔한 단계에서 최과장의 설득은 일에 재미를 붙여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적성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 ' ' ' '
그는 일에 취미를 붙이면 재미가 없는 적성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이 주어질 때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일에 관심도 없어지고 회사생활 자체가 싫어지기 마련업니다. 결국 적성이란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뒤부터 직장에서의 하루는 신명나기만 했다. 세계 곳곳에서 날아 들어오는 텔렉스의 요란한 소리가 겨우 윗가에 ·들려 왔다. 그 전에까지는 도무지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었다.
경리분야 l인자로 목표를 설정한 그는 무섭게 회계와 경리업무의 실무지식 연마에 매달렸다. 업사 2년째 삼성물산 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국세청에서 물산에 세무감사 를 나와 물품세를 놓고 시비를 일으킨 바 있다. 당시 갓 생긴 세제라 삼성물산의 내부에서도 충분히 방어논리를 펼 만큼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원은 공인회계사 친구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논리 무장을 해 감사나온 국세청 직원과 한판 숭부를 걸었다. 그 때 부터 회사 안팎에서 ‘경리는 이필곤에게 물어보라’는 신화가 탄생했다. 삼성의 낙오자가 될 뻔했다가 상사의 도움으로 기사희생한 그는 선배로부터 전수 받은 현장교육훈련을 후배들에게 어검없이 실천했다. 후배들이 그의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방황하는 기미가 보이면 선배의 인생 역정을 들려주었다.
7년 동안의 외출
삼성물산 최고의 경리통 이필곤은 삼성 업사 4년 6개월만에 경리과장이 되었다. 이 때 은행으로 진출한 서울대 상대 동창생들은 아직 은행대리도 되기 전이었다. 삼성물산 경리과 이과장의 7 년간의 외출이 시작되었다. 73 년이었다. 고 이병철 회장은 조선을 삼성그룹 차원의 주력사업으로 지정하고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장은 경리전문가로 그룹 차원의 인정을 받아 삼성그룹이 조선사업에 진출하면서 신생 삼성중공업의 관리부장으로 발탁되었다.
이 시기는 지구촌 경제사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미 60년대 후반부터 주요 선진공업국가들의 경제는 저성장. 고실업,물가가 공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이 1968 년부터 경상수지 적자국으로 전환됨에 따라 달러를 기축통화(基輔通貨)로 하는 국제통화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1969 년 프랑스 프랑화의 대폭락을 계기로 하여 국제 통화파동이 발생하였다.
1971년 8월 미국이 달러의 금교환정지조치(소위,닉슨쇼크)를 취함으로써 IMF(국제통화기금) 금환본위제는 사실상 완
전히 붕괴되었다. 이러한 국제통화제도의 격동과 더불어 1969 년부터 국제경제는 하강국면에 진업하였으며 경기침체
는 1971 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1965 년부터 1969 년까지 장기 호황을 누려 왔던 국내경기는 해외의 경기 후퇴와 더불어 1970 년부터 하강국면으로 전환되었으며 1971 년부터 침체국면에 빠져들었다. 정부는 60 년대 후반의 고성장에 수반된 인플레 압력과 부실기업의 정리 ,기타 안정화 정책에 역점을 두는 등 경기침체가 심각하다는 업계의 주장에 대하여 소극적인 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사정의 악화와 더불어 1971 년 중에는 사법파동, 교권반대 데모, 성남 주민 소요사건, 남북적십자회담,국가비상사태 선포 등 정치 사회적인 불안정을 고조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흐름은 1972 년에 들어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와 이른바 ‘ 10 월 유신’의 단행에 의한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연결되었다.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정치 자체가 더욱 냉각되고 경직되어감에 따라 경제정책은 정치 사회적 제반 불만요소까지 수렴해 야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한국경제의 새로운 청사진으로서 80 년대초 의 '100억 달러 수출과 1천 달러 국민소득’ 목표가 1972 년 11월 '월간 경제동향보고’회의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공표되었다. 다음해 12 월에는 경제기획원에서 ‘우리 경제의 장기전망(1 972-198 1) ’ 이 제시되고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로 중화학공업 건설이 추진되었다. 당시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은 철강 화학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공업을 6 개 전략사업으로 지정하여 이들 각 사업별로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입지를 선정 ,대규모 콤비나트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낙동강 하구에 제 2제철기지 ,여수 광양지구에 종합화학기지 ,그리고 온산에 비철금속기지 ,창원에 전자공업기지를 건설한다는 것 등이 그 주요 골자였다.
1973 년 새해를 맞이해 고 이병철 회장은 삼성의 전가족 에게 보내는 신년 메시지를 통해 ‘ 삼성은 번영하는 국가의 백년대계에 속한다’고 밝혔다. 이 해 5월초 이회장은 일본 IHI 의 다구치 회장을 만나 조선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이 자리에서 다구치 회장은 “한국 대만 필리핀 등에서 이미 20-30 개사가 넘는 업체로부터 제휴교섭이 있었지만 조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거절했다. 그러냐 삼성 이라면 가능하다고 본다. 현지를 한번 답사한 후에 결정하자 ”고 말하면서 선선히 응낙했다.
1973 년 3 월 비서실에 조선사업부를 설치하고 남해안 일대와 거제도 일대에 조선소 건립 후보지 물색에 나서는 한편 섬유분야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책으로 원료에서 최종 제품에 이르는 일괄체제의 확립을 위해 석유화학공업에의 진출도 검토하고 있였다 .이같은 삼성의 노력은 1963년에 대대적인 사세확장을 강행한 이후 10년 만의 일이었다. 1973 년 8 월에 마련된 제 2차 삼성경영 5개년계획에는 조선과 TPA(고순도 테레프탈산)를 포함한 중화학공업 부문에대한 집중투자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제 4 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OPEC 가 1973년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원유 공급가격을 배렬당 종래 3 달러에서 11 달러 65 센트까지 한꺼번에 4 배나 올리는 엄청난 사태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오일 쇼크에 의해 세계경제가 갑자기 침체상태에 빠져들자 그 여파로 우리나라는 외환보유의 격감과 물가 앙등이라는 이 중고를 겪게 되었다.
삼성은 조선사업에 대한 진출 기회를 면밀히 검토해 오던 중,건설 도중에 오일 쇼크를 만나 진퇴유곡에 빠지게 된 경남 거제도에 있는 중형 조선소의 인수를 정부와 은행으로부터 권유받았다. 이 조선소는 진로주조 계열인 우진조선에서 건설 중에 있었다. 우진조선은 1974 년 3 월에 설럽되어 그해 12 월에 조선소 건설에 착수하였으나 자금난으로 공사 진척이 부진하자 삼성에 넘기려 한 것이다. 조선의 수권자본금은 54 억원이었고 l기 공사 예상소요자금은 185억 원으로 그 때까지 90억 원이 투입되어 전체 공정의 50% 정도가 진척된 상태였다. 삼성이 이 회사를 인수했다.
잊을 수 없는 사건
삼성은 1977년 4월 22일 납입자본금 27 억 2 천만원으로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였다. 삼성중공업 창사 멤버로 맹활약 한 이필곤 부장에게는 다른 인생 길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의 경영언 수엽은 계속되었다. 1975 5월 이부장은 조미료 분야의 만년 2위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제일제당의 관리부장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다시다를 개발해 천연조미료 돌풍을 일이키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후 판매본부장을 맡게 된다. 그러나 제일제당 판매본부장 2년동안의 경험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뼈아픈 과거사가 되었다. 제일제당의 대구공장이 불법 설탕 첨가물 사건으로 l 개월간 가동이 중지된 일이 있다. 설탕을 정제할 때 첨가물로 쓰이는 소석회가 있는데 식품위생법상 허가품이 아닌 제풍을 사용해 말썽이 났다. 이 본부장은 소석회의 잔류물이 설탕에 남는 것도 아니고 원당 내의 불순물을 결러내는 일만을 하기 때문에 완제품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관계 당국에 조그만 항의를 한 것이 불씨가 되었다. 그의 항의에 괘씸죄 까지 추가돼 급기야 인천공장의 문을 한달 동안 닫아야 했다
“이 사건은 요즘도 경영의사 결정을 할 때 참고하는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
이 본부장이 한 때 영업전선을 진두지휘한 제일제당은 전란의 와중에서 수입대체산업으로 출발했다가 60 년대 들어서면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많은 수난을 겪었던 기업이다. 제일제당은 소위 ‘ 부정축재처리법 ’과 관련되어 1961년 12월에 환수금 55억환을 납부하는 등 막대한 자본부담을 안게 되었다. 1961 년에 들어오면서 두 차례에 걸친 환율 인상과 물품세의 원료과세로의 전환으로 제일제당은 심각한 경제적 난관에 처했다. 또 1962 년 10 월부터 원당이 수업허가품목으로 지정되면서 외화자금 사정마저 악화되어 원당수업을 압박하였다. 거기에다 공산화된 쿠바가 자유진영에 대한 원당 수출의 거부와 1963 년의 생산지 흉작이 겹쳐 국제 원당가격은 1964 년까지 계속 폭동했다.
1964 년까지 폭등하던 원당가격이 안정세로 회복되면서 1965-1970 년 기간에 제당사업은 급성장하였다. 수요가 급증하자 부산공장은 두차례에 걸쳐 생산시설을 개수 보완하면서 생산량을 대폭 증가시켰다. 그러나 영남지역에 위치한 부산공장으로서는 전국시장을 커버하는데 영업상 불리한 점이 있어 설탕의 대량 소비지인 수도권의 인천에 공장 건설계획을 세웠다. 인천을 선택한 것은 원당하역,제품 수송 등에 많은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공장은 1970년 7월에 착공되어 같은 해 11월 5일에 준공되었다. 공장은 최신의 자동화된 제당설비를 갖추었을뿐 아니라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 설계, 건설되었다 제당사업이 내외의 어려운 여건에 부닥쳐 있던 60 대 초에 제일제당은 그 활로로서 새로운 화학조미료 사업에 착수했다. 1963년 무리한 시설확장에 따른 자금난과 경영미숙까지 겹쳐 급기야는 도산위기에 직면하여 새로운 경영주를 찾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조미료 미미소를 개발한 바 있고 미풍이란 상표의 조미료를 생산하고 있는 원정산업을 인수했다.
제일제당은 인수 즉시 제품명에 기초해서 그 상호를 미풍산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1964 년 l월 6 부터 미풍의 생산을 개시했다. 흑자로 전환된 조미료 사업이 적자로 반전되자 제일제당은 1968년 7월 미풍산업을 홉수 합병했다. 합병후 제일제당은 종래의 미풍보다 우수한 질의 조미료를 생산해서 수요증대를 도모코자 일본의 아지노모토사로 부터 기술도업을 하기로 하고 1969년 5월에 경제기획원으로부터 기술도입 허가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제일제당은 아지노모토사로부터 글루타민산 나트륨 제조에 관한 일체 의 기술을 제공받아 미풍의 질을 향상시켰다.
이 때 제일제당은 당시 삼성중공업 부회장인 경주현 사장이 맡고 있었다. 경사장은 이본부장에게 경영언의 교육을 철저하게 학습시킨 은언이다. 이 부회장이 사원시절 최숭윤 과장으로부터 삼성의 기초교육을 받았듯이 경사장에게는 전문 경영인의 수업을 받았다. 제일제당에서 저돌형인 경사장과 조용하고 차분한 경리
통 이본부장은 경영의 콤비를 이루었다. 이 본부장은 공채 l 년 선배인 경사장에게서 업무추진력을 학습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련한 회계실력에 추진력의 날개까지 붙은 그는 완벽한 경영자의 자세를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확실하게 전수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
이병철 회장의 불호령
이병철 회장의 엄한 경영언 수엽은 지금도 그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80 년대초 물산의 관리본부장(전무)으로 일하던 시절 부산사무소에서 한 사고가 발생했다. 이 회장이 직접 이 본부장을 불러 사고원인을 캐물었다. 이 회장은 이미 부산사무소 소장의 신상명세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이 본부장이 인정에 끌려 부산 사무소장을 옹호하였다가 이 회장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진 적이 있다. 수입영업 강화 문제를 놓고 이 회장에게 보고를 잘못했다가 흔난 적도 있다. 이 회장은 삼성물산의 사업기반을 다지기 위해 수입영업에 보다 과감히 뛰어들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해 보고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수입구조가 상사 중심이 아닌 실수요자 중심으로 돼있어 종합무역상사가 파고드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회장은 크게 노했다.
“자네는 우리나라 전 수입품목을 분석해 보았는가. 기존 거래관계가 형성돼 있다는데 그 내용을 철저히 분석해 보았는가 말일세 . 우리가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찾으면 얼마든지있다"
이 회장에게서 배운 경영정신은 한마디로 ‘ 불가능이란 없다’였다. 경리업무로부터 터득한 분석력과 관리능력의 토대 위에
경 부회장과 이 회장으로부터 경영언 수업을 쌓은 그는 전문경영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확고한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이 부회장은 “경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기업 환경을 가꾸어야 하며 솔선수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요즘 처럼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사회 질서 속에서 기업이 생존하려면 도전 창조 개척 등에 기초를 둔 조직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을 자랑스런 기업이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삼성을 매력적인 직장이라고 소개했다.
“삼성은 오랜 전통이 있는 회사입니다. 그리고 삼성에 폼담고 있는 사람들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
성공한 삼성맨은 뜻을 펼칠 수 있는 삼성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직장언은 조직생활에서 숭부를 걸어야 합니다. 업무를 통해서 말입니다. 삼성은 공정하게 평가된 능력이나 기여에 따라 언인가 이뤄집니다. 이 부회장의 말대로 삼성은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기업이다. 삼성은 고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이러한 인사원칙의 전통이 세워져 그룹을 유지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프로 경영인의 노사관은 상당히 이색적이다.
“삼성은 노조 없는 경영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에는 영국 등 일부 계급신분이 존재한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노사관계가 옳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영국은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정해져 있지만 대한민국은 계급이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노사관계는 항상 변할 수 있다. 즉 지배계급의 사람이 피지배계급이 될 수도 있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이 될 수도 있는 가변적인 사회이다.
“노사관계는 대립이 아닌 대화창구가 형성된 협조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금융인으로 변신
1994년 3월 중앙일보 개혁을 위해 후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삼성카드(당시는 위너스 카드) 회장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금융부문을 맡기는 처음이었다. 카드업은 가입자나 가맹점 모두에게 편익을 제공하고 일종의 수수료를 받는 영업으로 금융이라는 공공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재무부의 간섭이 매우 심했다. 일반회사 같으면 중견간부가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재무부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어서 금융이 특수성을 갖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규제 하기 좋아하는 공무원의 특성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우리 나라 카드업계는 과당경쟁으로 인해 회원자격 심사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발급을 해 주고 있었고 부담능력이 없는 학생에게조차 무차별 발급해 줌으로서 사회적 물의는 물론 회사경영측면에서도 연체가 급격히 증가 하는 등 부실징후가 농후해 지고 있었고, 사채업자가 카드를 이용하여 사채놀이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였다
삼성카드는 이런 카드업계 공동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한편,후발업체로서의 업계하위를 벗어 나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었다 나는 그룹의 질 경영방침에 맞추어 경영기조를 양 위주에서 질 위주로 바꾸기로 했다. 카드업은 가맹점, 회원 모두에게 이익을 주고 신용이 전제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외국의 경우 회원자격을 엄격히 심사하여 자격을 부여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경우 과당경쟁으로 자격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 회원심사를 원칙적으로 하도록 하고 경쟁사와의 단순한 외형적 비교는 무게를 두지 않았다. 손익위주의 평가시스템을 갖추었고 연체관리를 엄격하게 시행하도록 하는 동시에 앞으로 카드업계의 경쟁력은 사람과 정 보시스템 구축에 있다고 판단하고 일본으로 부처 전산망 구축시스템 도입에 심혈을 기울 였다.
중국본사 사장그는 97년 1월초 북경에 부임하면서 크게 발전이 기대되는 중국에서 삼성의 위치를 제2본사로 격상시켜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본사가 활력을 갖추어 나가야 하는데 그 전략으로서 본사와 지사가 원활한 의시소통을 통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동시에 현지인들에게 삼성인으로서의 귀속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 다. 그는 솔선수범하기 위해 중국어를 습득,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부임 전부터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부임 후에는 일과시간 한시간 전에 출근하여 매일 두시간씩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웠고 가능하면 중국TV를 시청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서툴기는 하지만 부임이후 분기 조회사를 중국어로 하였는데 사내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본사의 관할은 대륙,홍콩, 대만,몽골 등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고 삼성관계사 모두가 다양한 형태로 진출하고 있어서 하나의 삼성을 구현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하나의 삼성입장에서 보면 삼성은 중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삼성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받는 상생의 정신을 경영에 접목시키는 것이 급했다. 각사별 입장에서 각사가 받으려는데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성으로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각사별 이해관계로 인해 중구난방식의 경영이 되기도 하였다.그 결과 18개의 생산거점과 많은 유통거점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본지사간의 소통부재, 중국정부와의 이해부족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으로 본사 TOP의 중국출장을 독려하여 중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로 하였다. 분야별로 문제점을 분석하여 본사 책임임원에게 리포트하고 문제해결을 독려하였다 .중국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기위해 중국정부가 삼성에 기대하는 요구를 파악 본사에 전달하고 상의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내가 중국에 부임하면서 중점을 둔 신규사업은 CDMA사업,보험업 진출,자동차 의 중국교두보 확보 등이었다. CDMA사업은 상해지역에 시범사업을 실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는데 중국 장성공사와 시범사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는 단계까지 발전시켰고 본사의 전폭적 지원을 끌어내서 시범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중국시장에서 CDMA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삼성의 국제화와 해외본사제도
삼성이 신경영을 하면서 추진한 주요 전략중 하나가 국제화를 심도있게 주진하는 것이었는데 국제화 액션플랜중의 하나가 해외본사 제도이다. 해외본사제도는 한마디로 현지위주의 경영을 하자는 것인데 상품기획,생산, 공장운영,인력관리, 유통,거래관행을 현지의 문화, 국민성, 관습에 맞게 구축하고 현지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현지책임자가 책임을 지고 본사를 리드하여 현지완결형 경영을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국제화를 한다고 하면서 본사위주의 의사결정을 함으로서 현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현상이 오래 지속되었다.
중국의 예를 들면 중국시장은 인구가 말해주듯 시장규모가 엄청나게 크기때문에 다국적 기업의 각축장적 성격을 갖고있고 경쟁이 치열한 시장임에도 2nd시장으로 간주하여 적당히 한다든지,지역이 방대하고 넓기 때문에 같은 국가이기는 하지만 지역에 따라 문화,국민성,시장의 특성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음에도 한가지 잣대로 획일적 판단을 한다든지, 경제문제를 정치적 이슈와 연계시키는 것을 도외시 한다든지, 화교가 갖는 영향력을 무시 한다든지,국제표준이나 투명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정책결정 과정을 도외시 한다든지,중화사상이 강한 중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린다든지 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삼성은 78년부터 상거래를 위하여 중국과 접촉을 시작했는데 중국 매탄공사와 석탄을 거래하기 시작한 것이 효시였고 그 이후 왕래하면서 상거래를 늘려 나가다 92년 국교수립과 동시에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하여 제조업분야에서는 한국에서 제일 많이 투자한 그룹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진출 초기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데 먼저 인사관리 측면에서 보면 중국인들은 체면을 중하게 여기고 체면을 잃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잃은 체면을 만회하려고 하고 우리 나라와의 관계는 형제지간으로 표현하지만 자기네들이 형이고 우리는 동생이 되는 셈인데 이런 사고를 가진 람들에게 우리 나라에서와 같은 인사관리를 하면 마찰이 생길 수 밖에 없다 .
상품기획면에서 보면 중국은 물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웬만한 물건이면 팔릴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중국시장은 선진기업이 앞다투어 진출하고 있고 중국기업도 기업개혁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기 있었기 때문에 총력을 기울이고 현지
에 맞는 제품을 경쟁사 보다 경쟁력있게 생산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다. 공장 운영면에서는 중국의 전력사정,지역특성,운송상 특성등을 고려하여 현지에 맞는 운영이 되어야 하는데 이를 경시함으로서 많은 경영상 애로를 겪고 있었다 .
품질상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초기 국유기업인수 과정에서 현지인력을 그대로 인수 함으로서 인력과다로 인한 기회손실이 많이 발생했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인력이 좀 많아도 괜찮다는 생각은 중국내 기업간의 경쟁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고 경영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판매관리 측면에서도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데 수십년간 사회주의 속성에 관습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유에 대한 개념은 없고 공유개념이 강해 네것 내것 구분이 잘 되지 않았고 이자에 대한생각도 희박했다.
중국본사 부임과 업무추진
그는 97년 1월초 북경에 부임하면서 크게 발전이 기대되는 중국에서 삼성의 위치를 제2본사로 격상시켜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본사가 활력을 갖추어 나가야 하는데 그 전략으로서 본사와 지사가 원활한 의시소통을 통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동시에 현지인들에게 삼성인으로서의 귀속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 다. 그는 솔선수범하기 위해 중국어를 습득,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부임 전부터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부임 후에는 일과시간 한시간 전에 출근하여 매일 두시간씩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웠고 가능하면 중국TV를 시청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서툴기는 하지만 부임이후 분기 조회사를 중국어로 하였는데 사내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본사의 관할은 대륙,홍콩, 대만,몽골 등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고 삼성관계사 모두가 다양한 형태로 진출하고 있어서 하나의 삼성을 구현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하나의 삼성입장에서 보면 삼성은 중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삼성이 필요로 하는 것을 받는 상생의 정신을 경영에 접목시키는 것이 급했다. 각사별 입장에서 각사가 받으려는데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삼성으로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각사별 이해관계로 인해 중구난방식의 경영이 되기도 하였다.그 결과 18개의 생산거점과 많은 유통거점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본지사간의 소통부재, 중국정부와의 이해부족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으로 본사 TOP의 중국출장을 독려하여 중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로 하였다. 분야별로 문제점을 분석하여 본사 책임임원에게 리포트하고 문제해결을 독려하였다 .중국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기위해 중국정부가 삼성에 기대하는 요구를 파악 본사에 전달하고 상의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내가 중국에 부임하면서 중점을 둔 신규사업은 CDMA사업,보험업 진출,자동차 의 중국교두보 확보 등이었다. CDMA사업은 상해지역에 시범사업을 실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는데 중국 장성공사와 시범사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는 단계까지 발전시켰고 본사의 전폭적 지원을 끌어내서 시범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중국시장에서 CDMA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공무원이 되다
1998.6.18 저녁 IMF관계로 긴축경영을 이유로 숙소를 國貿에서 景園으로 옮긴지 얼 마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고건시장당선자 보자관이라는 소개와 함께 시장이 전화를 할 것이라는 전갈이었다. 고건시장은 민선2기 서울시장으 로 당선된 분으로서 나와는 접촉이 없던 분인데 무슨일로 전화를?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는데 서울시를 개혁해야 하겠는데 도와 달라는 내용이다. 서울시 개혁의 중점을 경영마인드 도입으로 정했는데 맡을 사람을 수소문한 결과 당신이상 적격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양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는 봉사를 해야 하겠지만 능력이 그런 일을 담당할 그릇이 되지 못하고 행정 경험도 전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과거 기업인이 정부에 들어가 성공을 한 경우가 전혀 없기 때문에 나는 적격이 아님으로 다른 적격자를 물색해 보는 것이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고건시장의 태도가 의외로 완강했다. 국가적 사명감을 갖고 도와 달라는 이야기를 반복했고 행정에 대하여는 본인이 있으니걱정하지 말라는 설명이었다 결말이 나지 않자 고시장은 청와대와 상의하고 다시 전화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는 계속 고사하는 평행선속에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이 정도 사양했으면 고 시장이 포기하겠지 라는 생각과 어쩌면 밀어 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혼란으서워졌고, 어쨋든 삼성쪽에 경과는 아야기해 주어야 할 것같아서 비서실 관계자 몇분에게 연락했다 6월 22일 고건시장으로 부터 다시 전화가 왔고 나는 삼성을 떠나 서울시로 가는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삼성 입사33년 6개월만의 일이었고 기업인이 지방자치단체 행정직을 맡는 초유의 케이스가 되었다. 때 마침 IMF사태로 인해 국가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가 있었고, 서울시도 개혁하는 일이 우선 과제였는데 무엇보다 공정하고 객관성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고 개혁 대상이 되는 서울시 공무원, 시의회, 시민, 시민단체의 공감대 확보가 중요했다. 그래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정개혁 위원회를 설치, 방향을 수립하기로 했는데 위원회 구성은 분야별 전문가, 교수, 시의회 의원,학자, 시민단체 대표 그리고 서울시에서는 행정1부시장이 참석하여 전략을 도출하고 이의 실행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구체적인 분석과 실천계획을 수립하기 위하여 실무 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원하도록 했는데 행정학자 중심으로 구성하였고 보다 객관적 평가가 필요할 경우는 전문기관에 용역을 주도록 하였다. 약 1년간에 걸쳐 수십 차례의 개별 및 연석회의와 워크?, 관련부서 실국장및 실무자 면담, 구청장 대표의 의견청취 등을 거쳐 개편 안을 확정하였고 결정된 안은 시장결재와 의회의 승인을 거친 후 기자에게 브리핑과 동시에 실시에 들어갔는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시의회와의 의견차이로 위원회 설치에 관한 조례가 처리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하였고 이해관계 있는 공무원들이 로비를 하는 경우도 있는 듯 했다. 서울시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는 모두 공감하고 있었으나 서울시 사정을 잘 아는 위원은 방어적 입장에, 학자나 시민단체 위원들은 적극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행정개혁의 개략적 내용
서울시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치유하고 보다 적은 인원과 비용으로 보다 질 좋은 서비스를 시민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조직운용의 중점을 "경쟁원리의 새 바람 도입" "시민위주 서비스 행정" "원가를 생각하는 마인드 접목"에 둠으로서 경쟁력있고 인간친화적 도시를 만드는데 개혁의 초점을 두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서울시의 21C 비젼으로 "인간적 도시" "한국적 도
시' "세계적 도시"로 설정하고 Mission으로 "도시 경쟁력 강화" "시민 삶의 질향상"으로 정해 고도성장기의 양 위주사고를 질 위주로, 관 우위의 공급위주사고를 수요자인 시민위주로,예산중심의 투입위주 사고에서 산출 위주로, 행정 독점석 사소에서 경쟁적 사고로 개혁하기 위한 조직,제도와 운영시스템우선 창의 자율형 조직을 구현하기 위하여 종래의 체계를 팀제로 바꾸고 국장 책임제를 도입하였다. 행정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함과 동시에 의사 결정구조를 하향 단순화 함으로서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무한경쟁 시대에는 민간부문의 창의와 자율이 우수성을 발휘하게 됨으로 행정에도 민간기법의 도입이 불가피 하다는 생각으로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위에 민간전문가를 적극 영입하고, 민간이 더 잘 할 수있는 부문은 민간위탁을 실시하였다. 사업소나 투자회사의 경우는 책임운영시스템을 강화했는데 책임자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자본예산제를 도입하여 경영의 성과를 분명하게 했으며 사외이사제를 도입,이사회 기능을 강화하였다.년봉제 인센티브제를 도입하였고 고객헌장을 제정토록 하여 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려고 하였다.무한경쟁 시대에는 민간부문의 창의와 자율이 우수성을 발휘하게 됨으로 행정에도 민간기법의 도입이 불가피 하다는 생각으로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위에 민간전문가를 적극 영입하고, 민간이 더 잘 할 수있는 부문은 민간위탁을 실시하였다. 사업소나 투자회사의 경우는 책임운영시스템을 강화했는데 책임자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자본예산제를 도입하여 경영 의 성과를 분명하게 했으며 사외이사제를 도입,이사회 기능을 강화하였다. 년봉제 인센티브제를 도입하였고 고객헌장을 제정토록 하여 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려고 하였다.
작은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 기구를 통폐합하고 인력을 감축했는데 조직개편 방향은 조직을 효율화하고 삶의 질 을 향상하며 열린 시정을 강화하고,활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기존 3부시장,3실,2본부,13국,14관,96과에서 3부시장,3실,1본부,9국,11관,83과로 축소됨으로서 1본부,4국,3관,12과가 감축되었고 인력은 사업소를 포함 20%가, 투자회사는 21%가 감축되었다.실수요자 위주의 행정을 구현하기 위해 고품질 서비스를 통한 시민만족도를 극대화하고 시민에게 선택권을 부여하며 인센티브에 의한 조작적 지원적 방법을 도입하게 되는데 액션플랜으로서는 BPR을 실시하였다. 서울시 핵심 업무 프로세스 82개를 도출, 재설계를 실시함으로서 불필요한 업무를 줄이고 보다 생산적 업무에로의 이양을 도모했는데 행정특유의 규정과 법이 다소 제약이 되었다. 열린시정을 구현하기 위하여 시민과의 데이트, 서울신문고, 시민감사제, 시민평가제 등을 도입하고 규제를 과감하게 개혁했는데 본청의 경우는 약 70%가 폐지 내지 개선되었고 자치구의 경우는 40%정도가 폐지 내지 개선되었다. 규제개혁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공무원들의 동참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교육을 실시하였고 일몰제 등록제, 실명제 등의 제도도 보완하였다 투명행정을 위하여는, 부정은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근본적으로 없앰으로서 근본적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몇가지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민원인이 본인의 업무처리 과정을 온라인을 통해 언제든 알 수 있게 했고 공무원과 결탁의 소지를 없앴다.규제가 부정의 원인이 된다는 사고로 전술한 바와 같이 규제개혁을 단행 하였고,기관별 청렴지수를 개발 발표하게 하였으며 다양한 부조리 신고제도를 도입하였다.
현대그룹이 아끼는
현대전자 김주용 사장
현대그룹의 대외 이미지는 정교한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더구나 정교한 기술과는 더더구나 멸다는 느낌을 준다. 현대전자 하면 그것도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현대그룹과 현대전자(SK하이닉스) 무언가 딱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필자가 검주용 현대전자 사장을 만나러 갈 때의 심정이다.
김 사장과의 언터뷰 날짜는 세 차례 이상 조정되었다. 그것은 김사장의 스케줄이 바빳기 때문이다. 염원들과의 회의관계로 30 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나는 사장 집무실 옆 회의실에서 책꽂이에 비치된 현대전자 관련서적들을 모두 뒤적였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전망이 뚜렷이 들어오는 청와대의 전경을 바라보다 벽에 걸린 액자에 눈을돌렸다. 거기에는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 담당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 바르고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라는 선방의 선문답같은 내용이 자리잡고 있였다.
그 순간 현대전자에 대한 그리고 김사장에 대한 의문이 약간 풀렸다. ‘담담한 마음’은 서두르지 않는 마음과 통한다. 정교한 기술의 제품을 생산 하려면 ‘ 담담한 마음’이 필요한 것인가?
.그는 대기업에서 보기 드문 이공계 대학 출신의 최고 전문경영인이다. 그래서 경영인의 기술에 대한 이해부터 듣기로했다. “경영인은 무엿보다도 먼저 기술의 다이내믹스를 이해하고,기술혁신의 방향과 속도를 예상하지 않으면 안될 것업니다. 경영 외곽에서 홀로 일하는 발명가가 낳은 새 기술에관한 한,경영인은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경영인들은 기술혁신을 예상하고 기술발전이 만들어 내는 기회를 포착해서 이용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기술변화를 예측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대할 수 있는가를 알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주요 경영인은 어떠한 기술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가,그러한 변화 중에서 어떤 것이 새로운 산업을 낳기 쉽겠는가,또 그러한 변화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지,아니면 이미 우리 눈 앞에 와 있는지 등등의 것을 알려고 노력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새 기술은 명령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언력과 자금을 투업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새 기술은 인간 노력의 소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업들은 가장 우수한 인력을 기술개발에 투입해야 합니다" 현대전자는 실제로 기술개발에 우수한 인력을 배치하고 있다.
연봉 18만 달러 연구원
김 사장은 반도체의 기술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기업 전략을 전개했다. 현대전자가 1093년 기술개발비 (R&D) 에 쏟아 분 금액은 매출액의 10% 이상으로서 매년 1천 500억 내지 l천 600억 원이다. R&D 투자의 대부분이 연구원들의 급료와 고가의 연구장비 구업에 쓰인다.
“현대전자의 기본 경영 철학은 국제 경쟁력을 다지는 것업니다. 고도의 최첨단 기술만이 적자생존의 열쇠입니다. 기술축적은 사람으로부터 창출됩니다. 따라서 인재 양성이 곧 회사의 운명을 결정지어 줍니다"
국제경쟁력을 약속하는 확실한 길은 기술개발이다. 현대전자는 2 개의 부설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회사의 운명이 결정지어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4 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현대전자의 연구소야말로 현대전자의 심장부다. 연구인력은 반도체 분야에 700 명 ,산업전자 분야에 300 명 등 모두 l 천명이다. 이들은 국내외 박사 100 여명을 비롯해 석사 이상의 학력을 보유하고 있다.연구원 가운데는 우리나라 최고의 연봉을 받는 과학자가 있다. 회사 대외비로 지키는 한국 최고 두뇌의 연봉은 18만 달러이다. 한국인으로서 외국에서 반도체를 전공한 사람이 라는 정도만 알려주었다. 현대전자 부설 연구소에는 연봉 10 만 달러 이상도 10 여 명이나 된다. 최고급 두뇌에게는 집과 자동차까지 무료로 제공된다.
“부설 연구소에서 미래의 컴퓨터,통신기기,자동차,전장품은 물론 인공위성까지 개발하고 있습니다"
93년 3월 현재 개발을 추진중인 반도체는 64MD RAM의 개발이 완료되었고 대량생산 체제를 위한 준비헸다. 256MD RAM 개발은 독자적으로 하든지,아니면 삼성 금성 등과 공동으로 기초개발을 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려고 한다. 그당시 미국,일본,독일의 유수한 3 사가 이미 256MDRAM 의 공동개발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었다.
“64MD RAM 은 현대 삼성 금성 등 반도체 3 사가 공동으로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기초기술은 같이 연구했지만 제품을 만드는데 펼요한 상세 설계, 제조 공정이 각 회사별로 다릅니다. 그래서인지 3사는 겉으로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면서도 불꽃 튀기 는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고도의 최첨단 기술만이 적자생존의 열쇠입니다. 기술축적은 사람으로부터 창출될니다. 따라서 인재 앙성이 곧 회사의 운명을 결정지어 줍니다"
현대전자는 한국 최초의 통신위성 무궁화호 입찰 때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인공위성 개발팀을 계속 보강하며 꾸준히 연구했다. 우주산업의 개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현대전자는 최고급 과학두뇌를 영업하는 일 이외에 인턴사원 제도를 이용해 전국 대학생 가운데 우수한 인재들을 매년 선발해 미리 인력을 확보한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품의 핵
정부의 ‘신경제 5 개년 계획’의 주요 품목인 반도체는 한국 수출품의 핵이다. 또한 정보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최고 의 가치를 평가 받고 었다. 이러한 인기품목을 대량생산해 세계 랭킹 25 위권에 진업한 현대전자의 총사령관은 건설회사 전기 기술자 출신이다. 현대맨 경력 27 년의 베테랑이다. 김주용에게 현대맨의 이름이 붙게 된 때는 65 년 가을이었다.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 출신인 김주용은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군대로 직행했다. ROTC 출신인 그는 육군 중위로 제대했다. 김주용 중위는 전방 부대 소대장,육군 통신학교 교관을 거쳐 육군본부 등에서 군생활을 마쳤다. 그는 군대를 제대한 뒤 얼마 동안 진로문제를 놓고 심한 방황을 했다. 학업을 계속해 교수의 길을 갈 것인가,집안 형편을 보아 취직을 해서 돈벌이를 할 것인가 등 두 갈래 길을 놓고 밤을 새워가며 고민했다. 취직을 하자고 다짐했다. 공학도인 그에게 열린 길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그 때를 이렇게 희상한다.
그 때도 공대생들의 취업 문턱이 높지는 않았어도 간단한 문제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공대생들이 취직할 수 있는 곳으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한국전력,이천전기,한영중공업(현 효성중공업) 등이 전기과 출신들이 갈만한 직장이었다.
김주용은 여기 저기 취직시험을 치렀다. 몇군데 회사는 응시해 필기시험에 합격했는데 면접에서 낙방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희미한 좌절의식이 자라날 즈음 현대건설 사원모집 광고가 신문지면에 발표되었다.
주위에서 건설회사도 전기부 등이 있어서 전공을 살헐 수 있다고 권해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는 1966 년 4 월 현대건설 전기부 사원으로 출발했다. 현대건설의 당시 종업원수는 사원 446 명, 공원 180 명,기공 220명 모두 846 명이었다. 이 때 현대건설은 사업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을 뿐아니라 이에 따른 업무가 늘어나고 복잡해지면서 직제의 분화와 조직화가 활발히 진행돼 근대적 조직체제를 갖춰가는 시기였다. 검 사원이 업사하기 l년 전 현대건설은 태국 고속도로 공사 수주를 맡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진출에 성공해 회사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였다. 대졸 사원들을 대거
채용하는 등 활발한 조직체계를 갖추던 때였다. 고속성장가도로 나선 현대건설 사원은 3천여 명에 이르렀다.
기업은 사람이다. 따라서 기업사는 영광과 좌절 ,혹은 기뻐하고 혹은 절망하고 혹은 다시 절망을 딛고 영광된 미래를 쟁취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엮는 장편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대하소설처럼 흘러갈 수도 있고 한편의 단막극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드라마의 길이는 참여한 출연진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 기업의 얼굴은 기업을 이끌고 가는 사람들의 귀중한 기록이다.
매머드 출연진들로 구성된 현대건설은 6.25전쟁 중의 전시 긴급공사,휴전 뒤의 부흥건설공사,그리고 5 . 16 이후의 경제개발 l 차 5 개년계획기의 국토개발공사 등 한국경제의 전개과정과 병행하며 성장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국내 건설시장에서의 주요 프로젝트는 미국 서독 일본 등 선진국 건설업체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현대건설은 그동안 많은 공사실적을 통해 기술축적을 했다. 특히 미국 연방 시방서에 의한 미군공사의 풍부한 시공경험은 현대건설의 기술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현대건설은 63 년부터 해외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주영 사장은 시무식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올해 에는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만 발표해 전직원들이 궁금해 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 바로 해외진출의 실현이었다. 그해 7 월 현대는 5 백만 달러의 월남 사이공 상수도 시설공사의 국제입찰에 참가해 최초의 해외 진출을 시도했는데 경험부족으로 낙찰에 실패했다.
국가적인 경사
현대건설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외국 공사를 통해 해외건설시장의 동향을 업수하는데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역진을 태국,월남,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 파견해 수주활동을 전개했다. 65년 9월 현대는 태국의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우리나라 건설사상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현대는 태국정부가 국제 경쟁입찰에 부친 파타니 나라티핫 고속도로 공사 업찰에서 선진국 업자들을 물리치고 최저가격 낙찰자로 결정되었다. 파타니 나라티핫 고속도로 공사의 수주는 당시 국가적인 ‘경사’ 였다. 65 년말 태국 파견 기술진과 노무자들이 김포공항을 출발할 때 KBS 에서는 우리나라 건설용역의 첫 해외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을 실황중계할 정도로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컸다.
태국 진출과 거의 동시에 월남에 진출,국내 건설업체와 함께 월남특수(特需)를 맞이했다. 월남에 진출한 현대는 캄란만 준설공사,붕타우 항만 준설공사 등 준설공사에서 괄목할만한 실적을 거둔 한편 ,세탁업을 통해서도 많은 수익을 올렸다. 현대가 세탁업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우연이다. 원래 이 사업은 주한 미군을 상대로 국내에서 세탁업을 하던 KB KIM 여인이 월남에 진출해 영세한 자본금으로 세탁소를 운영했다. 소자본으로 미처 물량을 소화하지 못한 김 여인은 현대에 합작을 제의했다. 현대는 나중에 김 여인의 자본을 홉수,단독 경영을 했다. 그래서 1 억 100 만원을 투자해 자동세탁기 16 세트,디젤발전기 6 대,스팀보일러 2 대 등 일체의 기계 설비를 구입해 나트랑에 2 개소,퀴논 3 개 소,캄란 2 개소 등 7 개 지역에서 세탁소를 운영했다. 세탁업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이익률이 높아 현대의 주요 수업원이 되었다. 68 년의 세탁수업은 약 169만 9천 달러 ,69년에는 무려 234만 9천 달러 ,70 년에는 180만 달러 등 3 년동안 수업 합계가 약 5백 85만 달러로서 이는 태국 파타니 나라티핫 고속도로 공사의 규모와 맞먹는 액수였다.
이 때 말단 김주용 사원은 한국에 남아 국내 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울산 한국비료공장 건설현장,인천 송현변전소,수원
대구 광주 비행장 확장공사 등에 동원됐다. 그가 처음 입사한 해에 현대건설은 6만 6천 KW의 군산 화력발전소 건설 때 종
전의 하청단계를 벗어나 미국 굴지의 건설회사 MWK 사와 조인트벤처로 시공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현대건설이 최초의 플
랜트 시공경험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건설은 태국에서의 고속도로 시공 경험을 바탕으로 68년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국내 고속도로 건설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고속도로망 건설사업은 68-70년에 착수되었다. 이 사업에서 현대건설은 시종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경부고속도로의 30%가 현대 기술진에 의해 시공되었다. 경언 고속도로 시공까지 겹친 68년의 경우 현대건설의 고속도로 공사 수엽은 전체 국내 공사의 41. 8%를 차지하였고 69년에는 43 . 35%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괌 하늘의 달
국내 현장 생활을 통해 실력을 쌓은 김주용에게 해외진출의 길이 열린 것은 72년 l월 29일이었다. 그는 과장으로 승진돼 광으로 떠나게 되었다. 현대는 69 년 이래 사라진 월남 특수의 후속타로 서태평양의 광도에 현대아메리카주식회사를 설립해 미군 관계 공사를 시공하는 등 동남아시아에서 태평양과 대양주 일대로 손을 뻗치는 초기였다. 괌도는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이른바 ‘광 독트린’으로 유명한 미국의 전략기지이자 항공 및 항해의 주요 기항지이며 관광지이다. 이에 따라 섬의 크기에 비해서 군사 및 관광시설에 대한 건설 수요가 많았다.
특히 62년 5월 미국의 오키나와 기지 일본 반환으로 해군병력,장비 및 시설 등이 광에 이동함으로써 건설공사가활기를 띠고 있었다. 현대는 69년 7 400피트 안테나 설치공사를 수주하면서 괌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괌도에서의 영업활동
은 크게 건설공사와 주택판매사업으로 구분되었다. “미해군시설처 발주공사,광정부 발주공사,일반공사 등 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괌정부 발주공사는 도시 재건공사가 주축을 이루었고,발전소,학교건물,주택공사 등이었다.
괌도에서의 시공경험은 김 과장을 비롯해 현대맨들의 건설기술을 완전히 국제적인 수준으로 발돋움시키는 절호의 찬스였다. 광의 공사는 미연방 시방서에 의한 공사였다. 따라서 진출 초기에는 국내 방식대로 시공해 발주처로 부터 불신을 사기도 하였는데 단시일내에 미국 시방서에 적응해 종합건설기술업체로서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괌 진출 2년만인 71년 6월에는 현지 신문에 현대가 ‘The Can Do Company'란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여기서 배출된 건설기술 인력은 70년대 중반 중동진출 때 주력멤버로 활약하였으며 ,늘날까지 건축분야의 지도세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하고있다.
김 차장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업무 폭주 속에서 4년 6개월 동안의 근무를 마치고 76년 8월 귀국할 때까지 괌도의 하늘은 항상 그리운 어머니로 얼룩졌다. 검 차장이 괌도를 향해 비행기 트랩에 오른지 닷새만에 고국의 어머니는 세상을 뜨고 안계셨다. 어머니의 타계를 안 것은 괌도에 짐을 푼지 몇달 뒤였다. 한번 가면 곧장 돌아오지 못했던 머나먼 이국 하늘의 비행기 소리가 들렬 때면 살아계실 것만 같은 고국의 어머니가 그리웠다. 머나먼 타향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때는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이제 돌아가면 홀로 살아 계신 어머니에게 효도를 해볼참이었는데,어머니는 고국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셜움이 그를 슬프디 슬프게 했다. 어머니는 해방을 얼마 안 남기고 일찍 떠나버린 아버지를 한번도 원망하시지 않고 자식들을 키웠다. 김 차장은 어머니의 피나는 노력의 뱃가로 서울공대를 마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생이건만 큰 소리 한번
내시지 않고 살렴을 꾸려 나갔다. 머리가 짓무르도록 짐을 이고 다니시며 안해본 장사가 없이 해서 아들 뒷바라지를 했다.
열사의 땅에서
75년 이후 현대건설은 기업의 양적팽창과 함께 의식구조와 경영전략을 국제화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다. 중동건설 붐이 이러한 변화들을 몰고 왔다. 중동에 진출하기에 앞서 현대는 이미 65년 태국 진출을 계기로 월남,알래스카,괌도,오스트레일리아,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등 주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외공사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비즈니스 및 공사 수행능력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이들 공사는 주로 고속도로,항만준셜,교량,건축 등 사회간접시설부문의 공사에 국한되었다. 그 규모 역시 소액공사가 대부분이었다. 가창 큰 공사가 73년 12월 언도네시아로부터 수주한 자고라위 고속도로로서 약 3천 680만 달러 규모였다.
김 차장이 괌도에서 귀국할 때는 중동 건설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서울의 현대본사에서는 대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75년 l억 3천만 달러 규모의 바레인 아스리 (ASRY)조선소 공사의 수주여부를 놓고 ‘모험이냐,안정이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최고 경영진 사이에 첨예한 의견 대렵을 보이자 안정 세력인 정인영 조성근 사장팀이 이명박 이춘럼 사장체제로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현대는 중동 진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ASRY 공사는 최고 경영진의 교체 등 내부적 진통을 겪긴 했어도 현대건설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공사는 국제 규모의 초대형 공사를 수행할 수 있는 자신감과 국제적인 공신력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얻은 명성과 경험을 토대로 현대는 중동 최대의 건설시장인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각국에 대한 진출을 본격화할 수가 있었다.
또한 현대건설은 76년 1월 종로구 세종로 178 번지 신사옥으로 이전함으로써 무교동 사옥 시대를 마감하고 세종로시대의 문을 열게 되었다. 현대는 70년대 이후 계속 기구가 팽창하고 언원이 대폭 늘어남에 따라 7층 규모였던 무교동 사옥만으로는 원활하게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공간이 절대 부족해 신사옥의 설렵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지상 16층,지하 4층 규모의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로 연건축 면적 7천 253 평이였다.
70 년대 내내 현대의 중동 공사 활동의 주무대는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연명균 77% 이상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사였다. 이처럼 사우디 동 중동에 현대건설의 열풍이 불 때 김 차장은 부장으로 숭진돼 사우디로 떠났다. 76 11월이었다. 김부장이 합류한 중동에서는 현대가 75년 1월 l 억 9 천만 달러 의 ‘사우디 해 군기 지 해상공사(海上工事)(SNEP)’를 수주한데 이어 76 년 6 월에는 ‘ 20 세기 최대의 역사(投事)’로 얼컬어지는 9억 4천만 달러 규모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는데 성공해 세계 속의 현대로 탈바꿈하던 시절이다.
그리고 76년 10월 미국 공병단(COE)으로부터 수주한 3억 5천만달러 규모의 ’사우디 해군기지 육상공사’도 시작되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일약 현대를 세계적인 건설업체로 부상시켰을 뿐아니라 현대의 시공능력,관리체제 ,경영전략 등 모든 변에서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현대건설은 매년 l 천여 명의 종업원을 신규채용해야만 했다. 그래도 부족해 폭주하는 공사량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중견사원을 대대적으로 스카우트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주베일공사에 투업된 인원 장비 자재는 2 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규모였습니다. 이 공사에는 육해상 (陸海J:.) 장비가 모두 67종 l천 200여 대나 동원되었습니다"
산업항 공사는 전례없는 대규모 해외공사로 여기에 참여한 근로자들이 하루 평균 3천명이 넘었다. 이처럼 많은 근로자들이 한 곳에서 숙식을 하다보니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김부장 등 한국 근로자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숙소문제였다. 주베일은 사우디 동부의 다란공항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인데 사방에 유전이 깔려 있는 조그만 어항으로 임시숙소로 쓸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다 사우디 정부가 숙소를 지으라고 내 준 곳은 땅이 아니라 얄은 바다였다. 우리 비용으로 그 곳을 메워 숙소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시일이 상당히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창고를 지어 임원진은 물론 사우디 파견 전사원 근로자들이 모두 한곳에서 잠을 자야했다.
검 부장에게는 열사의 땅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 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뱃가로 사우디는 물론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등을 관장하는 중동본부 기술담당 이사직이 주어졌다. 김 이사는 사우디에서도 괌의 경험을 살려 각종 공사를 척척 해치웠다. 사우디 해군기지 공사는 미국회사가 설계 를 했고,감독도 미공병단(COE) 소속 미국인들이 철저한 미국식 운영을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미국 설계는 세계적으로 어렵기로 소문나 있다.
전문경영인으로 입문
김이사는 80 년의 새봄이 막 시작될 무렵 김포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밟고 있었다. 그는 새 임무를 받기 위해 조용히 귀국하고 있었다. 김 이사는 80년 2월 미국 뉴저지주 지점장(상무)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 때가 바로 기술담당 부서에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구매담당으로 바뀌는 시기였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하는 일은 주로 중동 현장들에서 필요한 원자재,장비 등을 구입하여 적기에 보내주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김지점장은 미국에서 공사수주 활동에도 본사 빛 각지점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뉴저지 지사는 81년 10월 미니컴퓨터를 설치했다. 이 무렵 현대건설 본사에도 전산실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해 경영정보 제공과 제반 기술 및 관리업무의 온라인화를 본격화했다. 깅김지점장은 미국 생활 3년 동안 많은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 이 때 배운 미국인들의 철저한 근면성과 함께 운동 실력은 지금도 살아가면서 건강을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83년 김 지점장은 미국생활 3 년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 지점장은 돌아온 이튿날 현대건설 해외 자재본부장(전무) 자리에 앉았다.
“공사 현장에서 책임자로 일할 때보다 구매 일을 맡았을 때 어려운 일이 더 많았습니다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는 일
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였으니까요"
김 본부장이 가장 본혹스럽게 생각한 사건이 었다. 86년이었다. 현대건설이 이라크 변전소 공사 업찰에서 성공했다. 이라크가 요구한 변전설비 (GIS: 가스 절연방식 개폐설비)는 그 당시 세계 몇 군데 회사에서만 생산 가능한 특이한 구조였다 현대건설이 이라크 발주처와 모든 계약절차를 끝내고 공사를 하는 도중에 공사를 중단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유는 현대건설이 싼 가격으로 업찰한데 앙심을 품은 유럽 일본 등 선진국들이 국제적으로 담합해 현대건설 수주를 방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감했습니다. 스웨덴의 한 회사를 찾아가 3주 동안 사정 사정하며 겨우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면서 굴욕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김 본부장은 이 때 현대건설 사장이 이라크 발주처와 사인한 장면을 실은 신문을 들고 가서 보여주어도 막무가내였다. 심지어는 그 공사를 무효화시키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는 국제적인 눈치를 실피느라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고 술회했다. 86 년부터는 그룹 통합 구매실장이 돼 현대그룹내 중요한 시설투자는 모두 김 본부장의 손을 거쳐야했다. 현대자동차의 시설투자는 물론 현대전자 설립 당시 필요한 반도체 조립 및 생산공장용 장비들도 마찬가지였다. 89년 1월은 김 본부장이 울산 현대중전기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취업해 본격적인 전문경영인으로 업문한 해이다. 그러나 현대중전기 시절은 그의 생애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그시절을 이렇게 럴어 놓았다. “이 때 마침 정부 차원에서 긴축 경제정책을 실시해 자금 사정이 몹시 어려웠습니다. 현대는 물론 모든 기업이 다 마찬가지였던 때업니다. 매일 하오 5 시만 되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에 나간 재정부장이 회사에 들어오지 않고 있으면 불안감은 더 가속됐고 이러다 부도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조바성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습니다."
격동기의 노심초사
현대중전기 시절 검김장은 가장 어려운 고비를 만났다. 위기를 극복한 그는 한국 경제사의 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한국의 노사분규는 불행하게도 격동기에 나온 것이 사실업니다. 공장 근로자들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는 피해의식을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연쇄적으로 일어난 불명예스런 한국 노동사의 한 단면입니다"
김사장은 노사간의 인격적인 대화 결핍에서 노사갈등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근로자와 회사간의 대화단절이 불러일으킨 계층의 괴리현상이다.
“노사분규를 해결하는 원칙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밝히는 것입니다. 회사 사정을 정확히 밝히고 충분한 대화를 나누면 근로자들도 이해를 합니다. 회사 간부들이 그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나라 인건비는 국제적인 수준이라고 말했다. 당시 울산의 웬만한 공장 근로자들이 받는 임금은 연봉 2만 달러에 이르
는데 이러한 고임금은 세계 선진국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무 강도는 선진국에 비하면 엄청나게 떨어집니다. 근무 시간의 집중도가 낮아 생산성이 낮습니다. 근무 강도는 생산직보다 관리직이 더 열세업니다. 현대중전기 재임 3 년간 노사문제와 초기의 자금사정 악화로 고통도 많았지만 김사장으로서는 자랑스러운 일도있었다 . 83년부터 중화학 투자조정 및 산업 합리화 조치 등 의 정부시책으로 현대중전기는 국내영업을 못하고 해외만하도록 한 무리한 조치 때문에 약 1 년간 매출액 부족으로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였다. 89년 과거 부당한 정부시책이 개선되고 열심히 수주하여 90년 처음으로 흑자원년의 기록을 세워 온 임직원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현대전자도 노조가 있다. 1만 2천여명의 직원 중 6천명의 노조원을 가진 현대전자는 노사문제가 그다지 심각하지않다. 현대전자는 사원들의 불만이 싹트지 않도록 미리 예
방했다. 1만여명이 근무하는 현대전자 이천공장에는 6천500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가 완비돼 있으며 각종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24시간 가동하는 공장의 근로자들을 위해 휴식 및 오락시설 등을 마련했다. 여사원들을 위해서 는 폐백 실습실 등을 준비해 두고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평상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도록 디스코장도 마련해 놓았다.
또한 가야금 피아노 등 취미활동도 사내에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해 두고 있다.
원칙주의자
현대전자의 경영 목표는 우수한 제품을 생산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내외 반도체 시장의 왕자가 되는 것이다. 현대전자의 2000 년대 목표는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이 되는 것이다.
“세계 일류란 외형적인 명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상품을 개발하는 것업니다. 현대전자는 그룹의 미래 주력기업이며 2000년도에 8 원의 매출과 세계 30대 초우량기업 진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김사장은 말단 신업사원부터 일 속에 파묻혀 산 솔선수범형 일꾼이다. 차장 시절인 괌광에서 입찰작업을 준비할 때는 며칠 밤을 꼬박 새우는 것이 예사였다. 김사장은 외국 엔지니어링 회사 사람들로부터 기술이론및 전개 방법 등을 자세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이 때 배운 것을 실무집으로 발행해 후진들에게 좋은 교재로 쓰여졌다. “회사마다 해외공사를 해본 경험이 적은 시절 언어와 시방서를 읽는 문제 등이 국내 건설업계의 큰 문제거리였던 시대업니다"
괌 중동 등에서 배운 산 지식을 전달하는데 앞장 선 김사장은 부하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훈장형 상사였다. 그러나 일부 직원들은 엄격한 그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매사에 빈 틈이 없는 ‘꼼꼼한 원칙주의자’인 검사장은 일을 철저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김사장에게는 ‘대충’이란 통하지 않는다. 일이 똑바로 진행되지 않을 성 싶으면 바른 길로 가도록 고치고야 마는 ‘호랑이형’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하 직원 가운데 올바른 평가를 못받고 있는 사람은 끝까지 소신을 가지고 윗사람들을 설득해 올바른 대우를 받게해준다.
“머리가 뛰어난 직원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직원을좋아합니다"
검사장은 인사원칙으로서 공명하고 보편타당성을 강조한 다. 그는 지연이나 학연에 따라 결정된 인사원칙은 결국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라며 평가는 냉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전자는 예외척으로 특진 인사를 단행하기도 한다. 우수한 사람은 근무 연한제를 벗어나 인센티브제를 적용한다. 극소수의 옐리트 사원을 회사 차원에서 양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젊은 사원들에게
김사장은 ‘기업 =사람’이라는 등식의 기업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현대그룹의 신입사원을 모집할 때 면접위원 또는 위원장의 자격으로 참여한다.
“면접 접수는 성실성 정직성 적응력 진취성 표현력 등에따라 평가합니다. 학교 성적보다 사회 적응력을 우선적으로
관찰합니다"
김사장은 그가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업문할 때 몇 차례 쓴잔을 마셨다. 출신지역을 이유로 낙방시킨 기업이 문득 뇌리를 스치곤한다. “현대는 지연이나 학연 등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국내 굴지의 회사들이 암암리에 망국적인 지연과 학연을 노출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작태업니다"
김사장의 얼굴에서 약간의 흥분이 일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그리고 말문을 이었다.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라고 말한다. 수직적 인간관계만이 아니라 수명적 인간관계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대는 엔지니어 출신들의 숫자가 많은 편업니다. 엔지니어들의 단점은 장인 고집의 홈입니다. 어떤 엔지니어들은 타부서와 대화를 하는 채널이 개통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김사장은 요즘 젊은이들을 걱정했다. “너무 단기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인생을 길게 보아야합니다"
의견이 서로 다를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업장만 두둔하다 보면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김사장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언내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만족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때 사회와 국가는 밝은 모습이 된다. 김사장은 현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다. “현대그룹은 전체적으로 이미지는 매끄럽지 못하지만 진솔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집단업니다. 대부분의 현대맨들은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는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명예회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평상시 대하기에 어렵기는 하지만 그의 내면에 흐르는 정은 샘물 같은 분입니다" 자식들 집안에 변변한 그럼 한 폭 걸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근겸한 정명예회장은 공사 현장에서 인명 피해를 내는 사고가 발생할 경우 불호령이 떨어진다고 했다. 김사장은 정명예회장의 단점을 ‘너무 솔직한 것’이라고 밝히기도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끈 현대그룹이 한국 근대화를 이룩하는데 앞장 서서 실천한 공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인정돼야 합니다. 그리고 정명예회장은 세계적인 조선업국을 이룬 한국 조선업의 선봉장이며,기계공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 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건설업에서는 숱한 신화를 창조한 현대사의 중요한 언물입니다"
깨지지 않는 기록
검주용 사장은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유학길에 올라 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김 사장의 어릴 적 기억은 중앙중학교에서 역사상 가장 우수한 점수의 기록 보유자라는 것이다. 중앙중 3학년 성적은 평균 97 점이었다. 중앙중 개교 이래 그의 기록을 깬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지금도 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중앙중 ·고를 나온 김주용은 가난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만이 홀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이었다. 중앙은 그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정치학을
전공한 김계수 선생님(외국어대 교수 역임)은 김주용의 중앙중 3학년 때 담임이다. 김 선생님의 말씀은 꿈많은 검주용 학도의 가슴에 맥박쳤다. ‘젊은이여 패기를 가져라’라고 누누이 강조한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고교 때 국어를 맡은 검열규 선생님(서강대 교수),이기문 선생념(서울대 교수 역임) 영어를 지도한 양창승 선생님 등은 감수성이 예민한 검주용의 혈기를 요동치게 했다. 김주용의 이공계 과목은 더 뛰어났다. 수학 물리 화학은 거의 만점에 가까웠다. 가난했지만 김주용의 학창시절은 즐거웠다. 교정을 거닐며 괴테를 말하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논했다. 운동장에서 함께 뒹군 벗으로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의사 양운태 최준희 씨와 손한 교수(연세대 영문과) 소칠섭 교수(고려대 지질학과) 남대우 전무(신용보증기금) 등이 있다. 고인이 된 문언 김기팔도 그의 단짝 친구였다. 건강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 운명한 작가 김기팔에 대해서 그때 이미 글솜씨가 뛰어났었다고 회상하면서 그와의 사별을 슬퍼했다.
직원들과 함께하는 논높이 경영인
무림제지그룸 조문제 부회장
조문제 무림제지그룹 조문제 부회장은 '회사 밖으노 나돌아 다니라'는 드럭커의 충고를 몀싱하고 있다.그는 본사에 앉아 서류로 올라온 보고 내용만으로 회사 업무를 파악하는 군임형 경영인이 아니다. 사무실 공장 등 현지 답사를 통해 눈으로 문제점을 확인하고 현장의 직원들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또 시간만나면 직원들과 바둑도 두고 함께 등산도 즐긴다. 직원들에게 항상 지는 신세인 바둑 실력은 6급이다.
조문제 부회장. 그는 ‘눈높이 경영’을 손 수 실천하는 전문경영인이다. 그는 한꺼번에 4~5권의 책 을 읽어치우는 다독가이기도 하다. 3개 제지회사를 가지고 있는 무림그룹의 부회장이여, 창업기업에 대한 투자기관인 세진창업투자주식회사 대표이사직을 겸하여 맡고 있다. 무림기업은 모기업인 무림제지를 비롯하여 신무림제지, 세림제지 등 3개사를 통해 종합제지로 부상하고 있으며 비제지 부문에서 양지컨트리클럽, 세진창업투자, 골피신문, 서림시스템을 운영, 사업다각화를 시도하고 있는 우리나라 중견그룹이다
2년 전부터 제지업계도 여느 산업과 마찬가지로 불황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제지업계는 그동안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졌던 순탄한 환경에서 과잉공급 체제로 탈바 꿈돼 버렸다. 그 바람에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회사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부회장은 이러한 제지산업에 몰아 닥친 불황을 극복하 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략을 총집중한 전략을 구상,추진하고 있다. 그 일을 한지 3년이 되었다.
극심한 경쟁과 불황 속에서 살아남아 업계의 우량기업 으로 존립하고자 중장기 계획을 재점검하고 경영의 걸림돌 이 되는 원인들을 분석하며 환경변화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 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경쟁과 불황 속에서 살아남아 업계의 우량기업 으로 존립하고자 중장기 계획을 재점검하고 경영의 걸림돌 이 되는 원인들을 분석하며 환경변화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 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부회장은 무림의 미래가 달린 ‘플랜 베스트 5’의 기초 작업을 부임 이듬해인 지난 91 년까지 다졌다. 품질 및 생산 성 향상과 원가절감을 중점 적으로 추진하기 위 해 공장의 안 전도관리와 사무부문의 자동화 시스템을 책임지는 서림시 스템을 설립해 전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조부회장은 무림의 미래가 달린 ‘플랜 베스트 5’의 기초 작업을 부임 이듬해인 지난 91 년까지 다졌다. 품질 및 생산 성 향상과 원가절감을 중점 적으로 추진하기 위 해 공장의 안 전도관리와 사무부문의 자동화 시스템을 책임지는 서림시 스템을 설립해 전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조부회장이 지휘하고 있는 세림제지,무림제지,신무림제 지 등 제지그룹의 중장기 계획의 요체를 간추려 보자. 조직 관리부문은 초급 관리자를 양성하고 중간관리자의 자율성 과 책임을 부과한 중간조직의 기능 강화하며,임원 및 부 서장의 책임경영 의식과 리더십을 향상시켜 기업변화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조직의 유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개인 중심의 조직관리에서 조직 중심의 인력 관리체제로 전환시키고 있다.생산 및 품질관리부문은 공정별 사전 품질관리제를 실시 하고 국내외 우수제품과 비교 분석하는 정기 품질품평회를 여는 등 철저한 공정관리를 통해 불량률을 낮추는 작업을 펼친다. 또한 기술 연구개발부문은 부설 연구소 설립을 목 표로 하고 있으며, 외부 연구소와 기술제휴를 통해 신공법 과 신기술을 채택해 기술 선두를 확보한다.
플랜 베스트 5 운동’이 마무리되는 94년 무림그룹의 제 지 생산능력은 연산 50만톤 규모로 늘어나고 제지부문 매 출액도 배가될 예정이다. 또한 대망의 2000년에는 제지부 문 외형을 1조2천억원으로 늘린다는 중장기 경영목표도 갖고 있다.조부회장은 국내시장의 과잉공급에 대비해 우선 인쇄용 지의 수출비중을 현재 15%선에서 내년말까지 30% 선으로 끌어 올릴 계획이다. 중국, 홍콩 등에는 자체 사무소를 설 림, 직판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원료의 안정 확보를 위해 동 남아, 미주의 펄프국가에 대한 자본투자,인쇄용지 판지관 련 해외 합작법인 설립도 추진 중이다. 그는 우리나라 종이 산업의 장래를 밝게 전망했다.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은 에0만톤으로 1 인당 종이 소비 량이 120 Kg 정도입니다. 미국 300 Kg, 일본 200 Kg 등과 비교하면 상당히 뒤진 수준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종이 소비 량이 증가할 것은 명 확하다는 것 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만도 160Kg으로 한국보다 높으며 종이 소지는 국민총생간(GNP)과 비례한다는 것이 그의 논거였다.
우리나라 금융의 산실 한국은행에서 금융과 외환관리실 무를,그리고 한국의 간판기업인 삼성에서 기업실무를 익힌 조부회장은 실무 경영의 이상주의자이다.탄탄한 경 영 수업을 쌓은 그는 다른 산업 과 비교해 주기 변 화가 약한 제지회사의 경영을 맡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그는 전통깊은 대기업의 인력관리를 중기업에 접목시키 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경영철학의 핵심은 사람 자원 자본의 조화입니다. 이 가 운데 특히 인적자원의 개발은 기업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 인자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에 따라 그는 기업의 인력개발에 그 누구 보다도 열성이다.
삼성물산에서는 ‘무역맨’의 육성체계를 수립하는데 앞장을 섰고, 삼성중공업에서는 ‘중공업맨’의 교육체계를 확립해 놓았다. 무림제지그룹에 와서는 지금 ‘무림맨’의 육성체계를 수립하여 입사 3년차에 대해서는 기 초교육을, 초급관리자에 대해서는 관리능력 향상을,고급관 리자에 대해서는 경영능력 배양에 몰두하고 있다. 뿐만 아 니라 종이는 ‘깨끗하여야 한다’는 본질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일본에서 시작된 ‘5S 운동’을 한국적인 현실에 맞게끔 고쳐 솔선해서 직원들에게 강의와 현장 독려를 겸하여 실시하고 있다.
그는 기업의 조직원들에게 자기개발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골고루 부여한 뒤 개인에 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업무를 주기위햇서 직원들의 특성 파악을 수시로 한다. 변화 템포가 느린 제지회사에 나타가기 쉬운 보수셩향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자주적인 조직 풍토를 조성하자고 부르짓었다. 그는 우리나라 관리조직의 병폐는 역사사 오래된 조직일수록 사고의 경직성,고정관념에 따라 병폐가 심각하다고 보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품의제조'에 의한 결제시스템이라고 역설하고, 이는 곧 결제라인 장기화에 따른 시간낭비 '페이퍼 워킹에 의한 노력낭비,실천력의 부족에 등을 가져오므로 향후 정보화시대에 대비한 정보 통신능력의 배양이 절대적으로 시급하다고 한다.
현재 정부에서 힘쏟고 있는 행정관소화도 정보 통신능력수단에 의한 행정간소화 정책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왜 은행이나 관청에서 거래선에서 꼭 사람이 나와야 되고, 얼굴을 마주대고 설명을 해야 됩니까? 신청서 같은 것고 간단힌 팩스나 전화통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실천에 옮겨지지 않으면 사무 생산성이나 초관리 개념에서 대만을 따라 잡을 수 없고 간소화 정책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조 부회장은 종이와 레저산업을 양대 축으로 그룹 모야을갖춘 부림그룹의 위상을 새롭게 정림시킨 경영혁신가이다. 그는 무림이 창업투자사업으로 진출하는데 기여를 했다. 세진창업투자를 설립하고 금융업무를 대행함으로써 무림의 이미지 창출에 기여했다.
'출발은 조금 늦었지만 앞으로 국내 뿐아니라 해외까지도 중소기업 창업을 지원하는 가장 앞선 창업투자회사로 키워나갈 생각입니다."
무림그룹 계열의 세진창업투자는 경남 진주를 지역기반으로 자본금 60억원으로 출발했다. 이 회사는 국내의 동향및 해외정보 수집에 역점을 두어 해외에 진출하는 중소기업 창업 지원을 위한 준비작업을 위한 우선적으로 실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세진투자는 외국금융기관과 연관이 있는 한국종합금융과 50대 50 합작으로 설립됐으며 앞으로 종합금융의 세계적인 해외 네트워크를 최태한 활용할 방침이다.
한은 이직사건의 주동자
"조용한 가운데 일류기업을 일구어 가는 보수적인 경영상을 고집해 온 무림의 미래를 조각하고 있는 조부회장은 한국은행 12년, 삼성 12년 경력을 소유한 전문경영인이다. 그는 65년 권원기 박사(중동 비행기 사건으로 착고), 차동세 박사(럭키경제연구 소장) 등과 함께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그 당시 한국은행은 서룰상대 졸업생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인재들만이 들이가는 최고의 엘리트 직장이다. 그는 한국은행에서 외환관리, 수출금융, 해외주사 업무 등 핵심부서에서 12년 종사했다. 헤외조사과 조사역으로 과장 승진을 얼마 남겨주지 않은 장래가 촉망되는 은행원이었다. 한국의 외환관리 규정을 체계화하고 한국외환관리제도, 우리나라 수출입 금융제도 등 책을 집필한 적이 있다.
그러한 그가 한국은행 역사 이래 처음 있는 대반랑의 주역이라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조문제 조사역 등 한국은행원 8명이 삼섬으로 이직하는 일을 주동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조 조사역의 이직사건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 조 조사역은 인사담당 임원에게 불려가기도 했다. 사실 조 조사역은 한은에 머물 생각이었다. 그는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비서실장인 송세창이 손병두 사장에게 지시하여 한은 사람 열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주위 사람들의 의사를 타진하여 추천한 것 뿐이다. 조 조사역은 이 때 미국 연수가 확정돼 준비하고 있을 때 이다. 그런데 므닷없이 삼성 비서실로 부터 본인도 함께 왔으면 좋겠다는 의사표시를 받은 것이다. 그는 생각할 여유를 달라는 말만 남기고 빠져나왔던 것이다.
삼성비서실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한달에 걸친 고민 끝에 단안을 내렸다.그는 5,16 혁명 이후 금융침체기를 맞이하고 있는 은앵생활을 청산하고, 앞으로 기업의 국제화를 내다보며 삼성행을 결심했다. 그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리라믄 미래 지향적인 확신도 가졌다.
신화의 주인공
촉망 받는 한은의 조 조사역은 76년 1월 삼성물산 기획조사실 차장으로 발령받았다. 일만하는 삼성맨이 되었다. 그 덕분에 삼성 입성 약 11개월만에 자금부장으로, 다시 1년만에 이사로, 그 다음에는 2년을 주기로 계속 승진하는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렸다. 그가 입성한 삼성물산은 국내 종합무역상사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이어 쌍용, 대우, 국제상사, 한일합섭 등 5개 회사가 종합상사로 지정되었다. 이들 종합무역상사는 1978년 100억 달러 수출 목ㅍ 달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삼성은 1976년 수출 3억 달러. 77년 5억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수출업체 1위를 계속 차지했다 한은 출신인 조차장은 삼성물산이 수출실적 1위를 올리며 청옹성같은 수출탑을 세울 때 삼성물산의 금융업무와 수출계획을 맡았다. 그는 77년 1월 삼성물산 자금부장으로 승진했다. 종합상사가 기반이 없이 수출실적 일변도 정책을 펼 때 비싼 수업료를 낸 바도 있다. 1978년 삼성물산 관리이사 시절이다.
원기업의 수출 게약(5백말 달러 어치)을 삼성물산이 대행해주기로 했다가 말려 들었다. 조 아서눈 수출담당 곽원섭 부장을 대동하고 원기업 사장을 수배하기 위해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막상 잡고 보니 빈털터리가 돼 있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을 때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결국 삼성은 사우디에 3백만 달러 손해배상을 해주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이 일은 사우디 왕가의 친척인 알라제이라는 부호가 클레임을 청구하기 위해 한국에 올 정도로 국제적인 망신를 톡톡히 사기도 했다.
"한국이 수출드리이브 정책을 펴는 초기 10년 동안 바친 수업료는 엄청난 액 수입니다. 오늘 날의 종함상사는 그러한 토양 위에서 성장한 것입니다."
그는 수출 한국의 신화를 창조한 인물이다. 그는 합리성을 강조하는 원칙주의자이다. 종합상사의 자금관리가 서 있지 않을 때 기업재무관리를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정리해 아래 직원들을 훈련시켰다. 논리정연한 조 이사는 협력업체들이 이병철 회장을 직접 만나 해결하겠다고 으름당을 놓을 때 아무도 나서지 않은 와중에서도 합리적인 원칙론을 내새워 정면으로 처리했다.1976년 삼성물산이 사우디 단일 국가에서 1억 달러 수출계약을 맺었다가 하청업체들의 화재와 부도로 문을 닫아 납풀날자를 제데로 못맞춰 클레임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말끔하게 사후처리한 실력은 일류급이다.사루디 1억 달러 수출계약고는 하청업체의 부도에 따른 공급차질로 국가적인 망신을 당할 판국에 당시 수출역군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처리한 결과 천신만고 끝에 이행할 수 있었다.
드러커의 팬
조 부외장은 한껴번에 4,5권의 책을 읽어 치우는 독서광이다. 큭히 그는 경영학의 태두이자 정치 경제 사회문제를 분석한 많은 예언서적을 집필한 피터 드러커를 좋아했다. 드러커의 열열한 팬인 그는 사회가 인류를 구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의 종말, 위대한 아메리카의 실종,러시아 제국의 붕괴, 군대의 군사 정치적 무기력화 등 21세기의 서막이 어떤 모습으로 오를 것인가를 갈파한 '새로운 현실'을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말했다. 특히 통쾌한 적중률로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언한 것이 마음에 들었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 등 하드웨어의 산업구조에서 정보와 지식의 산업형태로 부의 이등이 이루어진다는 추세 분석도 튼 관심을 갖게했다.
"사상가인 피터 드러커는 미래 정부의 새로운 기능과 한계의 변화,경제및 환경, 경제발전의 무순, 탈비즈니스화 사회. 정보에 의존하는 각종조직체, 사회의 기능으로서의 경영 등 폭넓은 주제에 대해 그림을 그리듯 명쾌하게 말 할 수 있는 미래학자입니다"
조부회장은 피터 드러커의 미래기업, 다니엘 벨의 200년대의 신셰계 질서 세계경제전쟁, 단야 언덕위의 그림, 등 5권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갈이 읽었다. 중국 무협소설 등고 재미나게 읽는 전천후 독서광인 그는 가방을 직접들고 출퇴근했다. 언제나 들고 다니는 가방 속에는 책이 몇권 씩 들어 있다. 드러커를 존경하는 조부회장은 경영 예측 모델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오늘날의 경제현상은 전통적인 금리정ㅇ책이나 환율정책 등 경제논리로 풀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지금과 같은 불연속적인 경제현상이나 불확실성 시대에서 과거와 같은 정책논리에 의거하여 몇일 작전 운운하는 것을 성급하다고 보고 있다. 과거 닉슨 대통령의 병동환율제 채택, 달러가치의 급변, 엔화의 급등, 이런 모든 것이 전혀 에측 불가능한 요안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글로벌 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재화나 서비스라는 실물 경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경제에서 글로벌 기업이 등장은 경제적 초강대국이나 초강대기업이라는 개념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제는 아무리 강대하고 생산성이 높은 대기업이라도 세게시장에서 매일같이 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살기 힘들게 되어있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서 기술, 매니지멘트, 이노베이션, 설계 기업가 정신 등에서 항상 위위를 확보할 수 없으며 어떤 기업이든 간에 모두가 경쟁 상대인 것이다.
기업연령으로 보면 30년이 넘으면 노화기에 접어들게 되고 난공불락일 것 같은 IBM이나 GM, 도요타 등고 하루 아침에 선두자리를 빼앗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는 강한 기업의 조건으로 경영변화에 대한 적응력, 즉 변화를 선점하는 플레님이 없으면 기업간의 격차는 더욱 더 확대되고 결국 몰락하고 만다고 주장했다. 글로벌 기업의 출현과 일본, 아시아제국 의 출현은 경제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었으며 드럭커 박사가 지적했다시피 경제구조를 지배하는 시스템의 룰 자체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를테먄 아담 스미스가 말하던 18세기의 무역은 보편적인 무역이었지만 미국과 독일이 세계경제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부터는 세계무역은 경쟁적 무역으로 몲겨 갔고 일본을 비롯한 동양 무역의 출현으로 적대적 무역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무역형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지적에 그는 크게 공감하고 있다.따라서 보완적 무역관계에서는 협력관계가 중요하고, 경쟁적 무역의 경우에는 거래선 확보를 위해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지만 적대적 무역시대는 상대방을 파괴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므로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과 관련된 싸룸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에는 국가간 또는 기업간 이해관계가 첨예화되어 상황을 예측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했다.
경쟁적 무역시데만 하더라도 중앙집권에 의한 강력한 리더쉽이 통했지만 지역간 이해관게가 틀리고 집단적 이기주의가 첨예화되고 있는 시기에는 분권적 경영,소위 소집단 중심의 분홀 경영체가 한정변화에 더욱 더 신속하게 대응 할 수 있으며 집단과 집답사이 정보 통신에서 긴밀한 연결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따라서 그는 가는 곳마다 전산쳬계 정비,전직원의 전산인력화에 앞장 서 왔으며, 무림제지그룹에서도 그러한 맥락에서 시스템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설립하여 제지거래선까지 전산시스템을 확장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한다. 직원들의 정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견기업으로서 보기 드물게 매일 직원들의 정보수집과 정보분석의 정도에 따라 포상을 실시하는 인센티브제도까지 도입할 정도이다.
"회사 밖으로 나돌아 다니라"
적대적 무역환경에서는 상대방의 군사력과 전투력을 파괴하기 위해 정보를 통한 상대방의 능역 파악이 중요하고 무었보다 현장 확인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의 경영자다.
"러일전쟁 당시(1904년-1905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에서 얻었다가 러시아의 간섭에 의해 다시 빼앗긴 러시아의 위압에서 벋어가나기 위해 소위 10년간 한을 되씹으며 전쟁 준비를 했습니다. 이때 일본은 바로 메이지의 협력시대에 돌입한 때여서 온 젊은이들이 선진국의 주요 정보를 얻어 선진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당시 중요한 일화로 육군의'기' 장군과 해군의 '도고'둘다 승전의 영웅은 되었지만 두사람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노기는 정보력이 어두어서 후방 사령부에 진을 치고 앉아 적의 동향을 무시한 채 계속 돌진함으로써 자기의 두 자식을 포함하여 근 7만명의 일본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반면에 도고는 어뢰의 위협을 무릅쓰고 최일선까지 직접 적의 동향을 살핌으로써 러시아의 거대한 함대를 꼼짝 못하게 여순하에 몰아 두었습니다."
경영자는 현장을 떠나서 기업 겨영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의 태도에서 확실하게 현장중심의 실천적 경영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조 부회장은 '회사 밖으로 나돌아 다니라'는 드러커의 충고를 명심하고 있다. 그는 대구 부산 광주 전주 등에 있는 공장과 사무실 등을 한단에 2, 3번 골로 간다. 그리고 그때 그때마다 문제점으 발견, 처리한다. 그는 서울 본사에 앉아서 서류로 올라온 보고내용만으로 회사 업무르 파악하는 군임형 경영인이 아니다. 직접 공장 등 현지답사를 통해 눈으 로 문제점들을 확인하며공장 등을 돌며 직원들과 자주 대 화를 나눈다. 만약 그들과 주장이 다를 때는 일단 그들의 의 견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의 주장을 나중에 편다. 직원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그는 이 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 기 보다는 이 야기 하는 자세 를 중요시 한다. 눈빛 과 눈동자 를 보며 그 사람이 가진 생 각 등을 평가한다.조부회장은 시간만 있으면 직원들과 바둑도 두며 함께 등 산도 즐긴다. 직원들에게 항상 지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그의 바둑 실력은 6급이다.
노동의 굿판에 참여
무림그룹의 최고경영인으로 발을 들여 놓기 전 삼성물산 전무 (1983) 삼성중공업 관리본부장과 서울사무소 소장,안국화재보험 관리본부장(1988) 등 삼성의 요직 을 두루 거친 조부회장은 ‘수출한국’의 산증인이다. 그는 우 리나라 수출이 섬유 등 경공업제품에서 중화학공업제품으 로 이행할 때 역경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규는 무림그룹의 제 2 인자이면서도 평직원들과 소줏잔을 나누며 동고동락하 는 전문경영인이다. 그의 경영철학은 대기업의 이곳 저곳을 섭렵하며 터득한 실무지식의 결집체들이다. 특히 개인의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삼성에서 인간적인 경영인 수업을 했다 는 것은 순전히 그 스스로의 노력의 소산이다. 무림그룹의 최고경영인으로 발을 들여 놓기 전 삼성물산 전무 (1983) 삼성중공업 관리본부장과 서울사무소 소장,안국화재보험 관리본부장(1988) 등 삼성의 요직 을 두루 거친 조부회장은 ‘수출한국’의 산증인이다. 그는 우 리나라 수출이 섬유 등 경공업제품에서 중화학공업제품으 로 이행할 때 역경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규는 무림그룹의 제 2 인자이면서도 평직원들과 소줏잔을 나누며 동고동락하 는 전문경영인이다. 그의 경영철학은 대기업의 이곳 저곳을 섭렵하며 터득한 실무지식의 결집체들이다. 특히 개인의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삼성에서 인간적인 경영인 수업을 했다 는 것은 순전히 그 스스로의 노력의 소산이다. 삼성중공업 삼성조선 대성중공업이 부실경영으로 빚이 1 천억원이 넘는 위기에서 통합할 때 관리본부장을 맡았던 그 는 격렬한 노조운동을 체험했으며,3사통합에 따른 구심점 을 바로잡기 위하여 50여명에 달하는 임원들을 상대로 뚝 배기에 소주를 부어 돌려 마시며 격의를 허무는 억척스런 면도 있었다. 86년부터 불기 시작한 중공업분야의 노조운동 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중공업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조와 구사대 간의 갈등이 심 화되는 등 심 한 마찰을 빚 기 시 작했 다. 급기 야 삼성 중공업은 노조 핵 심 간부 3 명을 구속 하는 등 강경책을 폈다. 그러나 조전무는 최고경영진의 의 사와는 다른 의 견을 가지고 있었다 노조의 의견을 부조건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원칙과 대화로 풀어야한다는 노사관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경영 철학을 가진 조전무는 안국화재로 옮겨서는 노조 가 벌이는 노동굿판에 참여하는 그룹내 유일한 경영인이었 다. 그는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공개토론도 제의했다. 노조 원들이 초청한 외부강의도 함께 경 청 하는 등 직 원들과 함께 어울리는 눈높이 경영을 실천했다. 뿐만 아니라 그룹에서 제일 먼저 노조회보도 인정했으며,노사협의회 규정에 쟁의 도 가능하다는,삼성으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인정함으로 써 과거 한달간 노사격돌로 시끄럽던 안국화재의 노조활동 을 잠재웠다. 항상 자세를 직원들의 눈높이만큼 낮추고 가슴을 활짝 열 며 직원들을 대하는 조전무는 직원들과 대화를 할 때 ‘상의하달’과 ‘하의상달’이 공존노조의 의견을 무조건 무시 하는 것이 아니 라 모든 문제를 원칙과 대화로 풀어가야 한다는 노사관을 갖고 있었다. 그 러한 경영철학을 하는 U자형 의사전달 체계를 택 하는 친절한 상사였다. 직원들 속에 융화돼 한데 어울리는 조전무는 고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뒤 외부인사로서 승진에 한계를 느끼며 월급쟁이 신세를 청산하려고 마음을 굳혔다. 그는 내 일을 해보겠다는 의지로 조그마한 중소기업체에 직 접 참여한 일이 있으며,그때 그는 사무실에서 부인이 손수 지어준 도시락을 직원들과 같이 들며 한가족이 되고자 안간 힘을 썼다. 직원들보다 두어 시간 일찍 출근해서는 빗자루 를 들고 청소도 했다. 중소업체를 경영하며 중소기업체장의 철학을 익힌 그는 중소기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은 경영자의 기업가적인 성 실성과 직원들에게 각자 자기회사라는 주인의식을 심어주 고,직원들과 동고동락하는 길밖에 왕도가 없다고 주장한다.
킬리만자로 등정을 꿈꾸며
조부회장의 근면검소한 생활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물려받 귀중한 유산이다. 그는 진주에서 태어났다. 마산국민학교 교장과 초등교육 위원장을 지낸 교육자 집안의 5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천석꾼의 부잣집 가문에서 시집온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이 아닌데도 집안에 소,염소,닭 등의 가축들을 마당 가득히 키웠다. 조군은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돌아와 그들 뒷바라 지에 정신없이 보내야 했다. 조군은 저녁 10시경에나 이런 일들을 끝낼 수 있었다.그는 어머니를 돌봐 집안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아침 시간을 활용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 시절 그의 아침 기상시간은 4시였다. 이런 일은 진주고 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기 바로 직전까지 했던 일이다. 그는 그 일이 결코 싫지 않았다.
이처럼 시골에서 성장한 조부회장의 취미는 다소 서민적 이면서도 다양하다. 그는 등산과 조깅을 즐기는 편이다. 난 가꾸는 일도 좋아한다. 하루 생 활중 3 분의 1 은 자신을 위 해 할애 하려고 노력 하며 살아간다.산 오르기를 좋아하는 그의 등산취미는 1958년 당시 빨 치산 잔당이 남아 있다고 하던 지리산을 초등하면서부터 시 작된다. 한국은행 부산지점에 재직할 때 맞선을 보아 결혼 한 부인을 동반하고 1년에도성~6회는 높은 산에 오른다. 그는 지리산만 10회 이상 등정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일 본 알프스와 후지산, 미국 요세미티산 등을 오른 화려한 경 력을 가진 아마추어 등산가이다. “산은 나에게 편안함을 제공하는 천혜의 안식처입니다. 산 정상에 올라 마음을 가다듬을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상쾌 함을 만끽하기 위해 등반을 합니다.” 그는 산을 좋아하는 서울대 동기 10명이 모여 만든 명상 회(明商會)팀의 재무간사이다. 이 모임에는 정희영 사장(선 진종합),심재선 사장(금고업 경영),배정운 사장,서상록 사장, 박병윤 사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산을 유달리 좋아하는 조부회장의 꿈은 부부동반으로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끊임없이 조용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난 가꾸 기에도 정성을 들인다. 사무실과 집안에 20분의 갖가지 동 양난을 진열해놓고 가꾸는 일을 즐긴다. 사무실에는 물뿌리 개를 아예 마련해 놓고 주기적으로 물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은 아침 일찍 동네 구룡산 200 일작전(1 년 동안 200회 등산)을 펴고 있단다. 한편 틈틈이 즐기는 음악감상도 수준급이어서 중요한 음악회도 빠지지 않으며,그의 아침 일과는 집 안의 오디오를 켜면서 시작된다 고 한다. 모차르트의 화려한 음색도 좋아하지만 말러의 교 향곡이나 브람스의 교향곡과 같이 중후한 것과 4중주곡을 즐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