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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마르 9,30-37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살암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루카 9,23-26
순교는 과연 행복한 선택인가?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교는 조금 남의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하시지만, 사실 사람은 어떤 것이 ‘행복’으로 보여야 선택합니다.
자살까지도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길로 가려면 순교가 참으로 행복으로 보여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도 후회가 없다면 그 삶은 행복일 것입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직전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중에 공통된 다섯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둘째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남성 환자들이 이러한 후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직장 생활 때문에 아내, 자녀들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이 어쩌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넷째는 `옛 친구들의 소중함`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오랜 친구들이 보고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이 다섯 가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초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한 광암 이벽 성조를 봅시다.
그는 정약용이 친구로서 인정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 연구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진리에 더 심취했습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이승훈을 중국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승인 권일신, 권철신까지 설득하여 박해받는 상황에도 천주교 신자를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중의 꾸중을 받고 오자 아버지는 이벽을 집에 가둡니다.
그리고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벽은 솔직히 자기감정을 털어놓고 집에 갇혀 죽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한 것으려 여겨집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유배나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지만,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외에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목숨을 함게 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의 행복도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길을 갔기 때문에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75년간 하버드에서 연구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관계’였습니다.
주위에 생명의 은인이 많이 모이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언덕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집을 잃었어도 사람을 얻었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거저 치료해주었지만, 가난한 그 환자들이 자신에게는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맞아준 철거민들과 학생들은 그분을 생명의 은인처럼 좋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주위의 많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모읍니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하는 수많은 사람을.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연중 제25주일: 나해
오늘의 독서와 복음도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신비를 계속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문제이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여 스승의 수난을 거부했던 것처럼 오늘도 제자들은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듣고 같은 태도를 보인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이것을 보면 인간은 분명히 고통을 거부하는 본능이 있다. 더군다나 하느님이 그렇게 나약한 분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제1독서: 지혜 2,12.17-20: 그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죽음을 안겨보자
제1 독서는 물질주의와 쾌락에 젖어있는 악인들의 너저분한 이야기이다. “우리 삶은 짧고 슬프다. 인생이 끝에 다다르면 묘약이 없고 우리가 알기로 저승에서 돌아온 자도 없다. 자 그러니, 앞에 있는 좋은 것들을 즐기고 젊을 때처럼 이 세상 것들을 실컷 쓰자.”(지혜 2,1.6). 이러한 삶에 대해 하느님께 의탁하여 인생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의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 장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제로 침묵을 하게 하려 한다(12절).
그러면서 만일 하느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면 그들의 함정에서 구해주실 것이 아니냐고 하는 이 악인들의 태도는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17-18.20절).
여기서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고통 받는 모습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최초는 아마도 십자가 밑에 있던 유다인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조롱 섞인 말로 떠들게 했던 마태오 복음사가로 본다. “다른 이는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마태 27,42-43). 이것은 확실히 위내용(지혜 2,18-20)의 반향이다.
두 번째는 화답송에 나타나고 있다. 역시 무구한 자가 받는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권리를 찾아주소서. 이방인들이 제게 맞서 일어나고, 포악한 자들이 제 목숨을 노리나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안중에도 없나이다. 보아,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 53,3.5-6).
이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당하는 고통을 노래한 것이지만(참조: 1사무 23,19-28), 당신의 제자들에게까지 버림을 받게 되는 수난 가운데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하셨던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복음: 마르 9,30-37: 사람의 아들이 잡혀 넘어갈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예수께서는 당신께 닥칠 수난을 예고하시고(29-32절), 후반부에는 제자들이 자리다툼 하는 것을 보시고 겸손할 것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엄한 권고 말씀이 담겨있다(33-37절). 수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다른 군중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그 여정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길은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넘어가다, paradidotai”라는 동사는 수동형으로서 예수께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을 암시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승리가 있을 것이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이렇게 승리의 빛이 비치고 있지만 사도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32절). 메시아의 고통은 그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이며 부활의 영광도 체험해 보지도 않았고 상상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기에 두려움에 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32절).
복음은 메시아의 수난 앞에 두려움에 싸여 있는데,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지를 다투는 장면을 소개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얼마나 다른지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버리기까지 스스로 낮추시는 데 반해, 사도들은 걸레 조각 같은 명예 다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일은 우리 공동체에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다. 만일에 그렇다면 교회의 참모습은 상실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이것은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공동체나 교회 안에도 다른 형제들을 보살펴줄 첫째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다만, 첫 자리의 의미와 권위의 의미를 뒤집어놓으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첫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형제들을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의 왕권을 획득하셨다. 참된 권위라는 것은 봉사와 사랑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명심으로 가득 찬 적대감이나 천박한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는 고사하고 그 어떤 인간 공동체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그들 가운데 세운 뒤 그를 안으시며 그들의 본보기로 제시해 주신다. 이렇게 어린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에서 혁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어린이들과 같이 ‘꼴찌’가 되는 것이 당신 자신을 비천한 사람들과 동일시했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사도들이 예수님의 참된 증표가 되려면 어린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꼴찌가 되어야 하고 그때 첫째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어린아이는 무한한 가치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신비롭게 현존하신다. 즉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 등 그들 가운데 항상 현존하신다(참조: 마태 25,31-46). 바로 그들의 품위와 가치를 존중해주시고 그들의 나약함을 감싸주시기 위해 그들 가운데 계시다. 그래서 그 어린이들이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 사랑의 성사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제2독서: 야고보 3,16-4,3: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는 사람들
어린아이의 미소와 사랑스러움과 같은 단순한 사실들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2독서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지혜가 이루어질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17절)는 겸손되이 항구히 원함으로써만 가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지혜가 우리 마음에 올 때 “평화로운”(17절) 그 지혜는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의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줄 것이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4,1-2). 윗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이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 야기하는 부패의 면모를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함을 느낀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가르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표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봉사를 통한 세상의 변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변화이며 기적을 이루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봉사와 사랑(꼴찌)을 통하여 진정한 권위(첫째)를 드러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지난여름은 정말로 더웠습니다. 수도권에만 38일간의 열대야가 있었고, 열대야가 끝났어도 낮 더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9월의 중순도 넘어가면서 좀 살 만합니다. 이렇게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 하면 겨울나무가 떠올려집니다. 봄의 화사한 꽃도, 여름의 싱싱하게 푸르던 잎도, 가을의 풍성한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마치 죽은 것처럼 딱딱한 가지만 남아있습니다. 사실 아주 현명한 모습입니다. 푸르른 나뭇잎을 겨울까지도 가지고 있으면 혹독한 추위에 가지고 있는 많은 물기가 얼어서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나무 전체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을이 되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잎사귀로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버립니다. 물이 공급되지 않아서 나뭇잎은 마르고 땅에 떨어집니다.
버리는 길이 바로 자기 살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돈, 명예, 지위…. 그 밖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바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첫 번째 자리에 두어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무엇을 가져가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세상의 칼날에 쓰러질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까지 합니다. 그들은 모두 첫째가 중요했고, 가장 높은 자리가 중요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집착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낮은 이,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까지 짊어지는 용기와 자기 비움, 그리고 작아짐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이별의 커다란 슬픔 그 너머 영원의 문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내게 있음에 감사한다(고영배).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2,12.17-20
악인들이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3,16─4,3
사랑하는 여러분,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4,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