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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4월13일 수요일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수도회]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8,1ㄴ-8
† 복음 요한 6,35-40
◈ 오늘의 묵상
우리 인간은 빵이나 밥으로 대표되는 음식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이란 단순한 육신의 생명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보다 영적인 생명,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뜻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참된 가치관을 갖고 이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물론 저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가?’ 하는 점입니다. 곧 어떤 것에서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고, 거기에 자신을 바치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우리 삶에 충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쁠 때는 물론 힘들 때나 분노가 북받쳐 올
때마저 주님을 의식하며 힘껏 살아가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더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기에, 예수님께서 바로 생명의 빵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모셔 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묵상했으면 합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의미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2016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8,1ㄴ-8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5-40
어느 일간지에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대학생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라는 주제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과연 직장인들이 말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런 대답을 예상했습니다.
‘다시 공부하고 싶다. 최고의 스펙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등등의 대답을
말이지요. 학창 시절에 얼마나 공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까? 또한 취업을
위해 스펙 만들기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공부나 스펙에 대한 대답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응답자의 41%가 뽑은 1위는 “적성부터 찾고 싶다.”였다고 하네요.
자신의 적성에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바쁘게
그리고 남들처럼 살다보니 정작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저 돈 많이 벌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삶을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으니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진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당하게 성공하는 것이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그런 성공은 오히려 불행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어느
대학의 신입생 OT에서 무려 1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대형 사고가
기억납니다. OT 장소였던 리조트에 눈이 너무 많이 오자 행사를 취소하려고
했지요. 그러나 한 책임자가 “뭘 그런 일로 마음 약하게 포기하느냐?”면서
행사를 밀어붙였고, 그 결과 최악의 사고를 맞이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며, 이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도 또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이어트 하는 사람도 많은 지금과 달리, 많은
이들이 궁핍한 삶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 시대에는 먹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생명의 빵이라고 지칭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가장 중요한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발 좀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믿고 따를 때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세상의 기준으로
풍요로움과 만족을 주는 삶이 아니라, 참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삶이며,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한 개의 촛불로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의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탈무드)
강화도 광성보입니다.
걱정이 태산
어떤 자매님께서 처음으로 해외 성지순례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순례 출발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걱정이 늘어만 가는 것입니다. 남편은 기쁜
마음으로 다녀오라고 했지만, 자신이 없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이 식사는 잘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제대로 출근하고 학교에 잘 다닐지가 너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자신이 없는 사이에 큰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에 성지순례를 가야 될까 라는 물음이 계속되더랍니다. 이렇게 걱정하는
아내를 향해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겨우 며칠 집을 비우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니?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냐?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가겠다고 말할 수 있어?”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복잡해서 며칠 집 비우는 것도
힘들어 하는데, 하물며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갈 때에는
모든 것을 비워야 하는데 과연 모든 것을 쉽게 비우고 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무서워하고 힘들어하나 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것들을 모두 버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그저 생명의 빵이신 주님만을 받아들여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커피 한 잔 하시면서 걱정도 내려놓으세요.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부활 제3주간 수요일
2016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 6,35-40
평소에 잘 되던 지하철 카드가 먹통이 되었습니다. 카드에는 거금
100,000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안내하는 분에게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충전기를 담당하는 회사에 물어보아야 하는지, 카드를 제작하는
곳에 물어보아야 하는지, 지하철 역무원에게 물어보아야 하는지
난감했습니다. 저는 컴퓨터에서 하던 것처럼 핸드폰을 껐다 켜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바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역무원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역무원에는 ‘T -money'관련
문의 센터가 있었습니다. 직원은 저의 핸드폰을 보더니 제가 ’NFC' 카드
기능을 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와이파이 기능을 켜는
과정에서 옆에 있는 것을 눌렀는데 그러면서 ‘NFC' 카드 기능을 껐던 것
같습니다. 역무원의 도움으로 저는 다시금 교통카드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하철의 문을 여는 것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까요?
우리에게 균형 잡힌 신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철야가 좋다고 철야기도를 주로 다니기도 하고, 어떤 분은 좋은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매일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성지순례가 좋다고 성지순례를 많이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도
적당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일까요?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분심과 잡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세상의 일과는 멀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까지 세상의 일들 때문에 주일에 성당에
못나오는 것을 봅니다.
둘째는 자주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만으로도 질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자주 기도드리면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영혼에 묻어 있는 허물들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모든 일들을 감사하게
여기고, 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성사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받아
모시는 것은 나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사람은 죄를 지었다하더라고 곧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시작하는 교육과 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더욱 활기차게 할 수 있습니다. 늘 그렇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이 교육과 피정에 더 많이 참석하는 것을 봅니다.
그분들은 교육과 피정의 효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교육을
받고, 피정을 통해서 지친 영혼을 정화시켜야 하는 분들은 아무리 좋은
피정이 있어도 교육이 있어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바쁘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어도, 사도들은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능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고, 자신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교만, 욕심이라는 장애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희생과
봉사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랑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 뜻 [잘]따름만이 맞습니다.
2016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하느님 뜻 [잘]따름만이 맞습니다.
세상살이 진행에서 거의 영생보다 현세에서 [잘]사는 걸 바랍니다.
세상 목숨이 사라지는 죽음 앞에서 죽는 것보다 사는 걸 바라고요.
영생이 시작될 때는 영생 앞에서 징벌보다 행복을 더 바랄 겁니다.
[잘]사는 게 어떤 건지 서로 다르거나 상반되기도 하니 문제입니다.
인간들이 꾸민 규정 종교 생각들을 따름은 다 잘못된 [잘]이랍니다.
가톨릭은 최고신 하느님 뜻을 지금 [잘]따르라합니다. 이게 맞아요.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4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빵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요한 6,35-40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6,40)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빵
군중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자 그
빵을 달라고 청합니다(6,3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6,36).
사람들은 율법의 멍에와 이민족의 지배, 물질적 가난과 사회적 차별 속에
힘겹게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너무도 잘 아셨고, 그들에게서 물질과 세상적 가치로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무함을 깊이 헤아리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그들을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람의 체질이 먹는 음식에
따라 달라지듯이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고 얻으려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일치하며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리워하며 그분의 선(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마음에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품고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선 대신에 나쁜 마음을 품고 악한 생각을 하면 영혼이
망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고통과 절망, 슬픔과 어둠을
뚫고 오신 ‘새로움’의 빵이시오 희망의 빵이십니다.
생명의 빵으로 배고픔과 목마름을 없애려면 오늘 복음의 표현대로 예수님께
‘가서’, 그분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 가는 것과 보는 것이 다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살려면 그리고 영원히 살려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릴 생명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 자체를 향해 다가가야 합니다.
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그저 시각을 이용해서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안(靈眼)을
이용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신비를 알아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려면 세상의 가치 기준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과 시선을 지니도록
힘써야겠지요. 그래야 눈앞의 현상과 감각에 속지 않고,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생명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 오늘도 세상이 주는 감각적 즐거움과 육신의 건강과
제 욕심을 위해, 당신이 아닌 거짓의 빵, 절망의 빵, 탐욕과 쾌락의 빵을
찾고 있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온갖 유혹이 나를 뒤흔들지라도 오늘 다시 제 영혼의
어두움에 빛을 비추시는 당신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소서.
고통과 절망과 불의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당신을 바라보며 거짓의 빵이
아닌 진실의 빵을, 악한 생각의 빵 대신에 선함의 빵을, 쾌락의 빵이 아닌
사랑으로 견디는 인내의 빵을 삼키게 하소서.
세상을 죽이는 불의의 빵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영원히 살리는
당신만을 갈망하고 그리워함으로써 당신 안에 영원히 살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 8,4)
우리는 지금 좋은 일이 생기면 마냥 기뻐하고
지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괴로워하며 고민합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지금 좋은 일이 생기면
조용히 기뻐하되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일이 다가올 것이라 여기고
조심하며 대비해야 하고 지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힘들지만 신중하게 대처하면서 지금보다는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기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부활로 기뻐 어쩔 줄 몰랐던 제자 공동체는
새로운 신도들의 증대로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그로인해 박해가 시작됩니다.
더 큰 아픔을 겪게 되지요.
그런데 그 박해가 무조건 견딜 수 없는 고통만은 아니었답니다.
이 박해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지만
그것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 더 많은 지역에서
말씀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좋은 일이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고
안 좋은 일이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니랍니다.
오늘 나에게 좋은 일이 있다면 조용히 감사드리며
다가올 더 안 좋은 일에도 당연히 대비하고 안 좋은 일이 있다하더라도
더 좋은 일을 이루어주실 주님께 대한 신뢰 가운데서
잘 참아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런 날 만드소서.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 4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 40)
아버지의 뜻은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진실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삶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하신 하느님과 하나되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 사랑없이는 영원한 생명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야 할 생명의 방향이
영원한 생명임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온전한 신뢰로
성부 하느님께 내어맡기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통해 우리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게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께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내어맡김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본질임을 기억하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내어맡김과 십자가 영원한 생명은 결국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진정성 있는 영성적 선택을 위하여
2016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 6,35-40
진정성 있는 영성적 선택을 위하여
지금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길고도 어두운 터널을
이제 그만 빠져 나가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고귀함과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거대한 구조적 악령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신앙인으로서의
진정성 있는 영성적 선택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어느 순간보다도 영적 식별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연이나
혈연, 학연이나 좁은 안목에 사로잡힌 선택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종교 지도자도 중요하지만 정치 지도자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우리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숱한 과제들을 완벽히 해결해줄 정치인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입니다. 역사상 그 어떤 명 정치인도 100이면
100! 모두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목청 터져라, 자신이야말로
해결사요 메시아라고 외치고 있지만 그도 나도 다 하느님 앞에 측은하고
부족한 한 인간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본이 갖춰진 사람을 뽑아야겠습니다. 국민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뽑아야겠습니다. 어느 정도 인간 성숙을 이룬 사람을
뽑아야겠습니다. 우리 사회 뒤쳐진 사람들도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관대한 사람을 뽑아야겠습니다.
마치도 뒷골목 조직폭력배들처럼 처신하는 사람을 선택해서 두고두고
후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지녀 자기 한 몸
다스리기도 힘겨운 사람이 우리들을 대표해서도 안되겠습니다. 국민을 자기
새끼발가락에 낀 때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안하무인인 사람을 뽑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복음적 지도자를 선택해야겠습니다. 만일 그토록
원하던 직분이 주어졌을 때, 그 직분을 하느님께서 어깨에 얹어주신
십자가로 여기는 사람, 그 직분은 오직 국민들을 위한 형제적 봉사에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을 선택해야겠습니다.
한 자리 올라 앉기만 하면 큰 착각과 오류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권한을 자신의 두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물리적인 힘으로 생각합니다. 아랫사람을 내리누르는 통솔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배려와 존중의 수단이 아니라 강압적 통솔과 지배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참으로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군가에게 티끌만한 권한이라도
주어졌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좀 더 사랑하라고, 좀 더
봉사하라고, 그들을 좀더 성장시키라고 부여하신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권위의 행사가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이기를
바라십니다. 강압적 일방통행이 아니라 이성적, 논리적 상호적이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위로부터의 권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권위’를 행사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 제게 주어진 작디 작은 권위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아무것도 아닌 제게 이 권위를 부여하셨을까? 답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양떼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고단한 인생길에
상처 나고 부르튼 양떼들의 발을 깨끗이 씻어주라고, 그들의 발에 입을
맞추라고…
결국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토록 목숨을 다해 얻으려는 권위의
배경은 겸손이고 봉사라는 것, 사랑과 헌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지금 여기서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4월13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 6,35-40
지금 여기서, 오늘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은 먼 미래에만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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