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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휴게실은 ‘지하’ 4층. 내 삶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사진 제공 김정주) |
사우나는 '지하' 2층.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던 식당은 '지하' 3층.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휴게실은 '지하' 4층. 내 삶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이건 책에서는 전혀 가르쳐 주지 않은 영역이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지나치게 찬란한 현실이었다. 믿음으로(?) 살아 왔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다른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 없이 쉽게 쉽게 결혼하던데 왜 나만 이렇지?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동기들은 하나둘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대학원에 입학해 졸업도 앞두고 있고, 목사 안수를 받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는 지하 2층 사우나에서 바닥 닦고, 회원들 털(?) 줍고, 로션이랑 샴푸, 비누, 치약을 리필하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뭐징?' '나는 도대체 누구징?' '여기는 또 어디징?' '나는 도대체 어.디.에.있.는.거.징?' 야간 근무가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가서 수도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렇게나마 돈을 모으고 있기는 한데 결혼은 에베레스트 산 같았다. 그리고 그 뒤로 학자금 대출 원금은 산맥처럼 이어져 있었다. 열심히 살지 않은 건 아닌데…. 학비가 없으니 당연히 대출을 받아서 학교를 다녔는데…. 장학금 받을 만큼 열심히 공부를 안 한 내가 죄인인가? 아버지 돌아가신 뒤 매일 아침 6시면 나가셔서 저녁 8시에 들어오시며 우리를 먹여 살린 어머니가 그 흔한 적금 하나 못 들었던 게 잘못인가? 그럼, 정말 나 같은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건 과분한 건가?
자주 서러웠다. 지하 2층에서 일하고, 지하 3층에서 저녁 먹고, 지하 4층 휴게실에서 울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좋은 글이나 행복한 사진을 보면 더 슬퍼졌다. 그들은 날마다 진보하는데 나는 여기서 퇴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혀 나아질 기미도, 빛도 보이지 않았다.
4월은 눈물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 맑고 따뜻하고 생명의 기운이 만연해서 더욱더 가혹한 계절이었다. 그럼에도 눈물이라도 있기에 그렇게 하루하루 버틸 수 있었다. 생애 가장 많은 눈물을 그때 하나님 앞에서 쏟았다. 외적으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내면은 눈물을 잔뜩 먹고 은밀하고 위대해졌다. 화려한 벚꽃이 푸르름과 바통 터치를 할 무렵, 아득하게 멀어져서 보이지 않던 희망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불음기의 역사
우리 교회는 세 달에 한 번씩 새 신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경험할 수 있는 수련회를 연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이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이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는다. 근데 교회에서 나와 자매의 결혼을 위해 정말 많은 기도를 해 주시던 권사님께서 바로 그 수련회에 어머니를 초청하는 게 좋겠다고 권면해 주셨다.
처음 그 권면을 들었을 때, 오글거림이 극치에 달한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도저히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권사님은 결혼을 위해 그 정도도 못하느냐고 하셨다. 아울러 그것이 어머니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셨다. 담임목사님은 그냥 가자고 하면 절대로 안 오실 수도 있으니 본인을 팔아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용기를 내어 어머니께 수련회에 가자고 간곡히 권면했다. 아울러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려면 가족은 이 수련회에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고 협박(?)도 했다.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내 청을 들어주셨다.
나는 이 일을 위해 많이 기도했다. 내 사정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 부탁을 했다. 자매와도 열심히 기도했고, 담임목사님께도 특별한 섬김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수련회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진행되는 수련회였는데 어머니는 잘 참여하시는 듯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수련회의 공통된 피날레인 '불음기'(불 끄고, 음악 틀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담임목사님은 기도를 인도하시면서 각자 가족에게 가서 안아 주며 기도하라고 하셨다. 분명 나 들으라고 하신 말씀 같은데, 어머니를 안고 기도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전두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오글거림으로 충만해지는 듯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멀리서 '시즈탱크 모드'로 기도하기로 했다. 근데 담임목사님이 어머니 쪽으로 직접 가서 어머니를 붙잡고 기도해주시더니 '시즈탱크 모드'로 기도하고 있는 나를 향해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곁으로 갔더니 어머니를 안고 기도하라고 하셔서 나는 오글거림에 순교할 작정으로 어머니를 꼭 안고 기도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를 안아 본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어머니가 살아온 시간들의 아픔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홀로 살아 내신 아픔. 홀로 키워 내신 아픔. 절망. 막막함. 외로움…. 뭔가 뜨거운 것이 관통하듯 가슴을 지나가면서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비로소 상견례 때 어머니께서 그렇게 반응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해가 됐다. 줄곧 어머니를 믿음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었던 내가 나쁜 놈이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오히려 믿음이 없이는 결코 여기까지 살아 내지 못했을 삶이었다.
어머니와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내가 내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어머니는 자신만의 언어로 한참을 더 우셨다. 그리고 불이 켜지고 마지막 찬양을 한 뒤 수련회는 마무리되었다. 나는 마무리 정리를 해야 해서 수련회장에 남고 어머니 먼저 출발하시는데 그 얼굴이 밝아 보였다.
'돈'만 없을 뿐이었다
도시가 아닌 산속이어서 그런지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잘 보였다. 조심스럽게 그분께 여쭈었다.
'지금입니까?'
아무런 소리도 없었지만 밤을 삼킨 별을 보면서 조심스레 용기를 내 볼 마음이 생겼다. 집회를 마치고 자매를 찾아가, 바로 지금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결혼을 시작할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자매 역시 그러한 것 같다고 했다. 다음 날, 모든 예배를 마치고 자매와 자매의 어머니와 함께 피자학교에서 피자를 먹으면서 결혼 얘기를 다시 꺼냈다. 자매의 어머니는 엄청 쓴 한약을 먹는데 하나도 안 쓴 척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 없으셨다. 분위기가 서먹해졌다. 딱히 어떤 말도 안 하시고 그냥 그렇게 헤어졌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지난번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수련회를 통해 해결된 관계 안에서 차분히 얘기했다. 분명 그때와 이때는 달랐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잘 들으시더니 돈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나도 어머니도 모아 놓은 돈이 하나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 돈만 빼면 결국 결혼은 허락하신 거나 마찬가지였다. '돈'만 없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때 상견례가 파투 난 것은 사실은 돈 문제가 아니라 나와 어머니의 관계 문제였다.
▲ 교회와 15분 거리에 있는,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5만 원, 관리비 5만 원짜리 옥탑방(고양이 없음). 방 2개, 화장실 1개, 옥상 축구장(?). 장독대 2개 서비스. (사진 제공 김정주) |
하지만 남자는 집 아닌가?
그리고 마침내 나의 결혼을 어머니께서도 완전히 긍정해 주셨을 때, 그때부터는 인터스텔라처럼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결혼 날짜였다. 가능하다면 여름 성경 학교 전에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매가 평소에 결혼하고 싶어하던 예식장에 가서 예식할 수 있는 날짜를 물어봤다. 마침 6월 14일 3시 반이 비어 있었다. 본래 그 날짜에 예약을 해 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 취소하는 바람에 그 자리가 비었다. 그러면서 그 시간을 예약한다면 리치 할인을 적용해 엄청난 할인을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아니, 이럴 수가!! 우리가 원하던 곳에서, 적합한 시간에, 거의 50퍼센트나 할인받으면서 결혼을 할 수 있다니.
식장을 예약했을 때는 결혼식을 한 달하고 1주일 정도 남겨 놓은 급박한 시점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신혼여행인데, 한 달 남겨 놓은 시점에서 예약하면 엄청난 바가지를 쓸 것 같아서 두려움이 컸다. 그런데 사우나에서 일할 때 손님 한 분이 허리를 다쳐 내가 수차례 마사지를 해 드린 적이 있는데, 그분이 내 결혼 소식을 우연히 알게 되어 자신이 아는 여행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여행사 이사님께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그 사우나 손님이 그 여행사 VIP 고객이었고,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이사님께 부탁을 했던 것이다. 어메이징 하나님! 그래서 한 달 남겨 놓은 시점에 바가지도 전혀 쓰지 않고 오히려 몇 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아주 깔끔하게 신혼여행도 예약할 수 있었다.
결혼식장과 신혼여행 비용은 모두 자매 쪽 부모님께서 도와주셨다.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으셨지만 딸 결혼을 위해 따로 모아 놓은 돈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남자는 집' 아닌가? 그런데 우리 집은 신혼집을 마련해 줄 돈이 전혀 없었다. 내 통장에는 알바해서 간신히 모아 놓은 몇 푼이 전부였다.
대책은 없었지만 일단 집을 보러 다녔다. 난생 처음 시세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웬만한 전세는 엄두도 못 낼 만큼 높았고, 심지어 조금 깔끔한 오피스텔이라도 얻으려면 보증금 1억이나 1억 5,000에 월 40만 원은 내야 했다. 그야말로 헐~이었다. 눈을 낮추어서 내 분수에 맞게, 사역하는 교회 근처에 싸게 내놓은 집이 있다고 해서 가 봤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20만 원 지하 단칸방이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자매와 그 방을 보고 오는데 한참 동안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나 자신이 무능력해 보이고 심지어 병신 같았다.
잔인한 침묵을 자매가 먼저 깨뜨렸다. 좁고 불편하겠지만 처음부터 어떻게 모든 걸 갖춰서 시작하느냐, 좁고 빛도 잘 안 들어오는 곳이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저기 살아도 괜찮겠다고 했다. 찡하기도 하고 먹먹하기도 하면서 많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래, 저기서 한번 시작해 보자. 저 집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런 다음 딱 한 군데만 더 둘러보자고 해서 보게 된 집은 4층 옥탑방이었다. 집보다 마당이 더 넓은 집이었다. 많이 아프신 그 집주인 아주머니를 전도하기 위해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10년 동안 관계를 맺어 오셨는데, 권사님이 우리에게 그 집을 소개해 주었다. 지하 단칸방을 본 뒤라 그런지 푸른 초장같이 펼쳐진 옥상을 보니 기분이 참 좋았다. 자매를 바라보는데 같은 마음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와 15분 거리에 있는,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5만 원, 관리비 5만 원짜리 옥탑방(고양이 없음). 방 2개, 화장실 1개, 옥상 축구장(?), 장독대 2개 서비스. 시세로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가격이었다. 함께 온 권사님과 함께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지하 단칸방을 보고 와서 그런지 하늘이 유난히 맑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나님께 깊이 감사했지만 당장에 1,000만 원을 어디서 구할까 싶어 답답함도 물과 기름처럼 한마음 안에 섞이지 않고 공존했다.
도배도 시작하고 소박하지만 살림살이도 하나둘 채워 가는데 정작 보증금 1,000만 원이 없었다. 어머니와 상의하며 어렵사리 결정한 것은 주택 담보대출이었다. 신길동에 있는 우리 집이 우리에게 유일한 재산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미 전부터 많은 주택 담보대출을 받아서 사실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할머니께서 큰 수술을 두 번 하셨고 어머니도 한 번 하셨다. 수술비를 마련할 방도가 없으니 주인 잘 만난 집은 은행과 늘 베프였다.
어렵게 살아오신 세월의 흔적과 같이 어머니의 신용도 고초를 겪어 이 은행 저 은행 찾아다녀도 대출이 쉽게 승인되지 않았다. 이 과정은 정말 피를 말렸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굉장히 까칠한 분이어서 보증금 지불 날짜를 지키지 않으면 정말 힘들어질 판국이었다. 마침내 약속한 날짜가 다 되었는데도 대출 승인은 나지 않았다. 돌아 버릴 것같이 머리와 마음이 트위스트를 췄다. 전혀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나의 그런 사정을 아는 어떤 분이 무려 1,000만 원을 빌려주셔서 극적으로 해결했다. 31년 묵은 변비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결혼 일주일 전까지 사우나에서 일했다. 새벽 5시 반부터 2시까지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결혼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대출은 결혼 정확히 하루 전 2시 30분에 승인이 났다. 대출받은 그 돈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에게 잘 갚을 수 있었다. 드디어 참아 왔던 숨을 내쉬었다. 결혼으로 가는 항해의 길에 파도가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밤에 폭풍을 만나기도 했고, 그 폭풍 속에 배가 침몰할 것같이 크게 흔들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예수님은 함께 계셨다. 비록 잠시 주무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폭풍 속에서도 늘 함께하셨다.
기나긴 항해가 끝나고 마침내 항구에 도착했다. 날씨가 맑았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결혼을 축하해 주셨다. 기쁨과 환희를 느끼기보다는 얼떨떨하고 실감이 안 났다. 나는 결혼식 날 활짝 웃지 않았다. 살짝 웃었다. 아버지 없이 혼자 가족석에 앉아 계신 어머니를 향한 나름대로의 깊은 배려였다. 어머니께 절을 하고 안아 드리는 순간, 어머니는 "정주야, 수고했어"라고 말씀하셨다. 심장 옆에 있는 열 주머니를 아주 뾰족한 송곳으로 찌른 듯 뜨거운 것이 온 장기를 적시고 넘쳐서 안구까지 올라와서 삐져나오려고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나'와 '너'가 만나서 '우리'가 되었고,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하객 숫자를 잘못 예측해서 예약하는 통에 50명분을 고스란히 더 지불해야 했다. 끝까지 겸손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하객 수는 절대 믿음으로 높게 잡지 마시라. 겸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다!)
결혼식을 마치고 새집에 돌아와서 홀로 방에 무릎을 꿇고 고백했다.
'나 같은 죄인 결혼시킨 주 은혜 놀라워'
▲ 어머니께 절을 하고 안아 드리는 순간, 어머니는 "정주야, 수고했어"라고 말씀하셨다. 심장 옆에 있는 열 주머니를 아주 뾰족한 송곳으로 찌른 듯 뜨거운 것이 온 장기를 적시고 넘쳐서 안구까지 올라와서 삐져나오려고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사진 제공 김정주) |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이번 글을 쓸 때에 '믿음으로'(?)라는 말을 유난히 많이 썼다. 이유인즉 교회 안에는, 우리 안에는 이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설령 그게 있더라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가득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모든 길과 재정에 축복을 해 주셔서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고 결혼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믿음으로? 그게 어떤 믿음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믿음으로 나아가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여러 모양이고 구조적인 악으로 뒤틀려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나아가면 → 하나님의 축복 → 만사형통 → 할렐루야' 도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이 도식에 무언의 강요를 받고 있다. 이 도식의 틀에 맞지 않게 우리의 삶이 흘러가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사람인 것처럼 낙인찍혀 버린다. 나 역시도 그랬다. 특별히 결혼 앞에서는 더욱더 그랬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도 그런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도식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싶었다. 믿음으로 나아가도 나처럼 파도가 많을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내가 경험한 결혼 과정을 이렇게 웃으면서 쓸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몰랐다. 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세 번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중에 한 번이 바로 상견례 파투가 났을 때였기 때문이다.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까지… 많은 분들이 결혼을 포기한다. 아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런 분들에게 찌질한 내 이야기가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을 썼다.
이렇게 해서 결혼을 했으니 둘은 행복하게 살았더라, 결혼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셔서 재정이 부족하지 않았더라…. 하지만 현실은 이런 식의 핑크빛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어렵다. 결혼을 하고서도 사우나에서 계속 일을 했다, 택배 알바를 했다, 공장에 가서 알바를 했다, 모 대학에 가서 창문 닦는 일을 했다. 그런데 내가 이 일을 한 것은 목회자로서 일반 성도님들의 삶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어서 한 것이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복은 한이 없지만, 그 복을 받음으로 재정적으로 나아진 것은 거의 없다. 매달 사례비가 70만 원인데 월세가 40만 원이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사냐고?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
아플 수밖에 없는 청춘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이제 그만. 믿음으로 나아가면 된다는 말도 이제 그만.
영화 '굿윌헌팅'의 숀 교수가 윌에게 외친 한마디,
"It's not your fault."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넌 왜 그러니', '그것밖에 못하니' 하시기 전에 곁에 있는 2030 세대들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 주시고, 마음의 문을 열어 따뜻하게 안아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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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송파구의 한 교회에서 '파전'(파트타임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동년배 직장인으로 치면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84년생 서른두 살의 김파전. 비록 전도사님이라 불리지만 세상살이는 '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김파전이 자신의 세대인 2030들이 위로받아야 할 교회에서조차 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신학과 이론으로 내린 정답과 같은 '제자도'가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 크리스천들이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삶의 제자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제자도'란 말은 멋지지만 사실 실제 삶은 김파전의 '파전행전'일 수밖에 없지만요.
김파전의 이야기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이 겪고 있는 리얼한 삶입니다. 어렵고 힘든 미생의 삶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복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제목은 파트타임 전도사(파전)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행전)라는 뜻으로, '파전행전'이라 지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한 편씩 업데이트됩니다.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