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 레시피/안현미
재료
비굴 24개/대파 1대/마늘 4알
눈물 1큰술/미증유의 시간 24h
만드는 법
1. 비굴을 흐르는 물에 얼른 흔들어 씻어낸다.
2. 찌그러진 냄비에 대파, 마늘, 눈물, 미증유의 시간을 붓고 팔팔 끓인다.
3. 비굴이 끓어서 국물에 비국 맛이 우러나고 비굴이 탱글탱글하게 익으면 먹는다.
그러니까 오늘은
비굴을 잔굴, 석화, 홍굴, 보살굴, 석사처럼
영양이 듬뿍 들어 있는 굴의 한 종류로 읽고 싶다
생각건대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끊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시 읽기> 비굴 레시피/안현미
더 사랑하기에 더 사려 깊기에
이 세상에 비굴하고 싶어서 비굴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언제나 당당하고 싶고 불의에 맞서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종종 비굴을 삼킬 수밖에 없게 한다. 콜센터에서 오래 일했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자긴 을도 아니고 병이나 정이라고 그녀라고 해서 진상 고객들에게 친절하고 싶어서 친절했겠는가. 비굴 레시피에 “눈물 1큰술”과 “증유의 시간”이 들어가는 이유는, 살다보면 닥쳐오는 슬픔은 피할 길이 없으며 그 슬픔을 덜어줄 하룻밤의 잠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비굴이 반드시 ‘용기 없음’이라는 껍데기에서 탄생하는 것만은 아니다. 더 사랑하기에 더 사려 깊기에 비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비굴은 때때로 나의 존엄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것은 비굴인가 아닌가. 그가 싫어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비굴인가 아닌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비굴’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 진정한 자기 존엄은 당장의 자존심 따위를 넘어선다.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포르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