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해를 마감하는 12월의 끝자락에 미국과 유럽연합(EU)로부터 러시아 제재를 강화하는 조치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기존 제재의 틈을 막기 위한 보완조치다. 기존의 대러 제재가 겉으로는 '가혹한' 것 처럼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빠져나갈 구멍이 쑹쑹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조치로 틈새를 메운다고 해도, 반(反)서방 성향의 '브릭스'(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공)와 '글로벌 사우스'(남반구의 개발도상국 총칭)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와 완전히 척을 지지 않는 이상, 그 구멍을 완전히 막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제재 조치들은 러시아가 군수산업에 대한 서방의 제재를 우회하는데 끌어들인 제 3국의 기업들과 연계된 금융권, 또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 상한제를 무력화한 소위 '그림자 선단'의 선사(船社)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게 핵심이다.
EU 정상회의 모습/사진출처:President.gov.ua
주목되는 것은 '연말'이라는 시점이다. 한해를 결산하는 측면도 있지만, 해를 넘기지 않겠다는 조급함도 느껴진다. 새해 들어 닥쳐올 지정학적 변수가 그만큼 크다. 당장 내년 2월부터 미국의 11월 대선을 향한 민주·공화당의 '프라이머리'(예비선거)가 시작된다. 모든 이슈가 대선으로 빨려들어가게 돼 있다.
EU도 새해 들어 대(對)우크라 지원 체제를 일사분란하게 유지하기 힘들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지원에 앞장서온 슬로바키아에는 지난 총선을 통해 친러시아 성향의 내각이 들어섰고, 네덜란드에서도 반우크라 성향의 극우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해를 넘겨 새 내각이 출범할 경우, 기존의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함께 반우크라 연대가 결성될 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전황도 날이 갈수록 불안하다. 대러시아 제재와 대우크라 지원 조치를 서둘러 확정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대통령에게 지지율이 뒤지는 것으로 나타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4년 차는 마음이 급할 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면, 대선 승리가 그만큼 더 멀어진다.
◇미국의 첫 세컨더리 금융권 제재
바이든 대통령은 상하 양원이 크리스마스 휴가에 들어가는 등 파장 분위기가 완연해진 22일 러시아 군수산업체를 직간접으로 돕는 제 3국 금융기관을 제재(세컨더리 제재·제 3자 제재)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명령(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러시아 군수산업체와의 무역 거래에 관여하는 외국 금융기관을 미국 정부가 단독으로라도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튀르키예(터키)의 소규모 무역업체 A가 군사 장비 제작에 쓰이는 물품을 서방의 모 기업에서 수입한 뒤, 이를 러시아로 재수출했다면 A기업에게 무역거래 금융(결제 등 편의)을 제공한 터키 B은행을 미국이 제재한다는 것이다. B은행이 A기업의 무역 금융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A기업이 러시아로 군수 물품을 수출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키예프를 방문한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왼편 두번째)이 우크라이나측과 회담하는 모습/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번 (세컨더리 제재) 조치를 "러시아의 불법 전쟁을 도운 사람은 더 이상 미국의 금융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명확한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전세계 거의 모든 금융기관이 앞으로 러시아를 계속 도울 것인지, 미국의 금융 시스템 접근 권한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이 겨냥하고 있는 표적은 중국과 터키, 아랍에미리트(UAE), 모로코 등 러시아에게 서방 제재의 우회 루트를 열어준 국가들의 금융권이 될 게 확실하다.
◇ 러시아산 유가 상한제 강화 조치
제 3국의 금융권 다음 타깃은 러시아산 원유 수송을 돕는 선사들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은 20일 러시아산 원유를 실어 나르는 유조선에 대한 선적 관련 규정을 더욱 까다롭게 적용하기로 했다. 서방선진 7개국(G7)와 EU 등이 야심차게 도입한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상한제가 지난 1년간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으로 드러난 데 대한 보완조치다.
동시에 미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이날 러시아 국영 선사가 소유한 아랍에미리트(UAE)의 선박 관리회사 '선십'(SUN Ship)과 UAE에 본사를 둔 '볼리턴'(Voliton), 홍콩 소재 기업인 '벨라트릭스에너지'(Bellatrix Energy), 코바트(Covart) 등을 제재 목록에 올렸다고 발표했다. 지난 5, 6월부터 많게는 150여 차례나 러시아를 오가며 러시아산 원유 수천만t을 배럴당 60달러 이상으로 거래했다(가격 상한제 위반)는 이유에서다.
러시아산 유가 상한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미국과 유럽의 조치가 계속 나오고 있다
러시아산 유가 상한제는 러시아가 원유 수출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도록 배럴당 60달러 이상의 '좋은 가격'으로 수출하지 못하게 막는 조치다. 러시아산 원유 수입국(업체)이 상한 가격 이상으로 거래할 경우, 해상 운송에 필요한 금융, 보험 등 각종 서비스 제공을 끊는 방식으로 불이익을 안겨주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가격 상한제는 러시아가 제재 범위 밖 국가들의 노후 유조선으로 이른바 ‘그림자 선단’을 꾸려 해상 운송을 맡김으로써 사실상 깨졌다. FT는 지난 9월 러시아가 서방의 해상 보험을 받지 않는 '그림자 선단'을 통해 배럴당 60달러 이상의 높은 가격에 원유를 수출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미 CNN 방송은 '그림자 선단'이 600척에 이른다고 전했다. 600척이라면 전체 대형 유조선 수의 약 10%다.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경제대학 자료에 따르면, 유가 상한제 시행 이후 G7과 EU의 보증을 받지 않은 선박(그림자 선단)을 통해 수출된 러시아산 원유의 비중이 60% 이상으로 커졌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도 지난 10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7월 중순 이후 러시아 우랄산 원유는 꾸준히 60달러 이상으로 거래돼 왔다”며 “국제유가 상승에 따라 가격 상한제의 치명적 결함이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과 영국, EU가 서둘러 가격 상한제의 실효성 높이기에 나선 이유다.
EU는 지난 18일 확정한 12차 대러 제재 패키지에서 가격 상한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회원국간 정보 공유 체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원유의 출발지나 도착지를 감추고 가격상한제를 피하기 위해 선박자동식별장치(AIS) 응답기를 끄거나, 해상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선박간 원유 '이적'(移積, 옮겨 싣기)이나 다른 원유와 '혼합' 등 '꼼수'를 적발하는 게 목표다. 또 정보 공유를 통해 '꼼수' 행위를 일삼는 선박과 주체(수출입 업체)를 보다 쉽게 식별하자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조치는 EU에 비해 더욱 엄격하다. 선사들은 러시아산 원유를 선적할 때마다 배럴당 60달러의 상한선을 준수했음을 증명하는 신고 문서를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이전까지는 암묵적 합의에 따라 공식적인 확인 절차를 거의 거치지 않았다. 또 원유 가격이 보험료와 운임, 포장, 수출 허가 관련 수수료 등 기타 비용을 포함하는 경우, 원가 정보를 공개하도록 했다. 원유 가격은 60달러 이하로 산정한 뒤 기타 비용을 부풀려 수출 가격 자체을 올리는 '꼼수'를 막기 위해서다.
◇ 러시아산 다이아몬드 금수
미국과 EU는 또 러시아산 다이아몬드의 금수 조치도 도입했다. 미국은 22일 발표된 대통령령에 제3국에서 가공된 러시아산 다이아몬드 제품을 수입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EU는 12차 대러 제재 패키지에서 내년 1월 1일부터 러시아산 천연·인조 다이아몬드의 수입을 단계적으로 금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EU는 다이아몬드 추적 체계를 만들고 정보를 공유할 예정이다.
미·EU의 다이아몬드 금수조치 역시, 러시아의 전쟁 자금줄을 막기 위해서다. 전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러시아는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생산국으로, 연간 다이아몬드 수출로 40억 달러(약 5조2천억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U는 그동안 벨기에의 반대로 다이아몬드 금수 조치를 도입하지 못했다. 벨기에 앤트워프는 16세기 이래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다이아몬드 거래 중심지 중 하나다.
◇ '대형사고' 가능성이 높은 러시아 동결자산 압류(몰수)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서방의 대러 조치는, 동결된 러시아 자산 3,000억 달러(약 391조원)를 압류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데 사용할지 여부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자산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미 뉴욕타임스(NYT)의 21일자 보도를 계기로, 이 문제는 '올 연말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동결자산에 대해 눈을 돌렸다는 미 NYT 보도/웹페이지 캡처
세계 금융시장의 시스템과 환경, 신뢰를 깡그리 무너뜨릴 수 있는 초법적인 '동결 자산'의 압류및 활용은 미국과 EU의 절박함과 답답함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미국의 경우, 대우크라 추가 지원안이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의 벽에 부딪쳤고, EU는 오는 2027년까지 우크라이나 지원금으로 500억 유로를 할당하기로 한 문제가 헝가리의 반대로 최종 결정이 미뤄졌다. 내년 2월에야 재논의가 이뤄질 판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러시아 동결 자산을 압류하기에는 양측 모두 부담이 상당하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이미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존 커비 미 백악관 전략 커뮤니케이션 조정관도 21일 기자들의 질문에 "이 문제를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커비 미 백악관 전략 커뮤니케이션 조정관/사진출처:미 백악관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22일 "미국과 러시아는 국제 안보와 전략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양국 관계의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동결된 러시아 자산 압류(사실상 몰수)는 관계 파탄의 촉발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크렘린과 러시아 재무부는 "서방이 러시아 자산을 압류할 경우, 러시아도 서방의 자산 압류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한 바 있다.
러시아 자산의 압류는 러-우크라 국지전을 넘어선 러-서방간의 '경제 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EU도 실행에 옮기기에는 '폭발력이 너무 큰 사안'이라는 신호가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