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역사를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복습-각국이 근대 국가를 형성함으로)
1) 영국
로마 시대 – 켈트족 통치시대
1> 웨섹스 家 (829 – 1016)
2> 데인 시대(1016- 1066)
덴마크를 지배한 바이킹 족의 데인족이 침공하여 영국을 통치
3> 노르만 왕조(1066 – 1154)
프랑스 노르만의 바이킹 후예인 윌리엄 공이 영국을 침공하여 왕실을
접수했다
영국 국민은 영어를 사용하고, 왕실에서는 불어를 사용했다.
4) 플랜레져 왕조(1154 – 1399)
노르만 왕조가 후손이 끊어지자 프랑스 앙주 백작 가계에서 왕위를 계승
앙주 백작 가문은 프랑스에 많은 땅을 소유했으나, 법적으로 프랑스 왕의 영주이다.
* 리처드 1세(1189-1199)
십자군 3차 원정에 사자왕으로 이름을 날리다.
이때를 배경으로 로빈 훗 이야기 나온다.
* 존 왕(1199 – 1216)
대체로 무능한 왕으로 나오며,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서명, --민주 주의 뿌리 되다.
* 에드워드 3세(1327 – 1377)
백년전쟁(1337 – 1453)을 일으키다.
1346년 – 칼레 포위, 점령
* 마지막 왕은 랭커서트 가문의 헨리 4세(1399 – 1413) 이다.
5) 장미 전쟁(1418 – 1450) - 플랜레져 가문끼리 붙은 왕위 계승전쟁
랭커스트 가문의 통치에 요크셔 가문이 반기를 들면서 시작했다.
두 가문에서 왕위를 차례대로 차지했다.
6) 튜더 왕조(1485 – 1603)
* 랭커스트 가의 헨리 7세(1485 – 1509)가 왕조를 열다.
* 헨리 8세 – 에드워드 6세(8세의 세 번 째 왕비의 아들) -
에드워드 6세가 시아버지에 떠밀ㄹ 메리 왕이라는 이름으로 9일 간
왕 역할을 했다. (제인 그레이는 헨리 7세의 증손녀로 시아버지가
왕위에 앉혔다.(1553.7.10.~19) 1주일간 – 그는 성공회 신자이다.
런던 탑에 갇혀 보낸다. 런던 탑의 비극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 카톨릭 골수 신자인 메리(헨리8세의 첫 딸)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인 그레이는 반역 죄인으로 런던 탑에 갇혔다가 사형 당했다.
* 메리 여왕 (헨리의 첫 번 째 부인인 스페인이 캐서린 공주의 딸
(1553-1558). 이다.)
카톨릭으로 되돌아 가서 신교도를 피의 처형을 한다. –
*엘리자베스 여왕(1558 –1603) 영국을 중흥시킨 여왕이라고 한다.
7) 1547 – 1558
1547 – 헨리 8세 죽다
1547-1553 에드워드 6세(9세 – 16세)
(제인 그레이 이야기 – 런던 탑의 비극이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1553 – 1558 메리 여왕
1558 –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는 신교 경향이 강한 왕으로, 보수적인 영국민의 저항이 있었다.
--> 그러나 사제들의 극도의 타락이 있었다. 그때의 자료 하나를 보면
311명의 신부 중에
171명 – 모세의 10계명을 몰랐다.
17명 – 주기도문을 모르거나 영어로 외울 줄 몰랐다.
62명 - 성직을 겸직하고, 성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성직은 돈벌이 자리일 뿐이었다.
1553년에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왕위에 오른 메리 여왕은 카톨릭으로 돌아가면서 피의 처형을 했다
(별명이 ‘피에 굶주린 여왕’이었다.
38세의 메리 여왕이 스페인의 27세의 펠리페 2세와 정략 결혼
카톨릭 부흥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 이에 영국민의 여론이 메리 여왕에게서 돌아섰다고 한다.
메리 1세(1516-1558, 재위 1553-1558)
메리 1세는 오랜 기간 동안 아버지 헨리 8세의 외동딸이었다. 메리 1세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가 틀어질 때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헨리 8세는 메리 1세에게 영국 왕족 중 처음으로 웨일스의 여공작(Princess of Wales) 칭호를 내렸고 처음으로 독립된 궁정을 두도록 했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여, 새 왕비가 된 앤에 의해서 공주로서의 자격이 정지되었다.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태어나자 앤 불린은 메리의 왕위 계승권을 빼앗아, 서녀 취급하도록 했다.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에 의해 간신히 공주로서의 신분이 복권되었다.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가 1553년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죽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John Dudley, 1st Duke of Northumberland)는 자기 아들과 결혼시킨 제인 그레이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했다.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노섬벌랜드 공작은 9일 후에 구속되어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메리는 사실상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메리 1세는 카톨릭을 복원시키려는 정책으로 피의 숙청 등, 영국인이 등을 돌렸다. 신교도를 탄압했다. 메리 때의 반란군은 엘리자베스를 왕위에 올릴 것을 구호로 내세웠다.
메리 여왕은 펠리페 2세와 결혼하여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참여하여 프랑스에 패하고, 칼레를 프랑스에 뻬앗기다.
메리는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을 궁정에서 쫓아버린 앤 불린의 딸인 이복여동생 엘리자베스를 평생 동안 미워했다. 난소암에 걸려 1558년 11월 17일에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사망하였다. 메리의 기일은 200년 동안, 압정에서 해방된 축제일로서 기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