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향각(凝香閣)의 교성(嬌聲) 숙종이 열네살 때 아직 동궁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갑인년의 봄이 돌아 오고 그때 왕대비로 계시던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의 환후가 위중하게 되었다. 평일과 마찬가지로 밤 문안을 드리려고 할머니(繼會祖母, 莊烈大 妃)의 처소로 와서 보니 때마침 할머니는 왕대비(仁宣王后)의 병실로 가서 없고 나인들만이 몇 사람 있었다. 어린 동궁은 혼자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앉아 있는데 다른 궁인들은 어 디로 갔는지 다 없어지고 오직 각시 나인 하나만이 앞에서 거행을 하는 것 이었다. 그런데 이 각시 나인이 어린 동궁의 마음에 매우 아름다워 보였 다. 동궁은 어깨를 으쓱으쓱 하면서 애를 쓰다가 각시 나인을 보고 "얘, 내 등 좀 긁어다오." 이런 명령을 내렸다. 각시 나인은 좀 머뭇머뭇하다가 세자 등뒤로 가서 도포를 들치고 손을 옷 밑으로 넣어 조심스럽게 긁어 드리고 물러나려 하는데 동궁은 각시 나인의 손목을 꽉 쥐고 "어디 그 손톱 좀 보자, 어째서 긁는 것이 그렇게 시원치 않으냐?" 이런 말을 하고 손을 들여다보았다. 각시는 그만 수줍어서 머리를 돌렸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우냐?" " ..." "네 성이 뭐냐?" "사친의 성은 장가라 하옵니다." "몇 살이지?" "열여섯이옵니다." "얘, 내 얼굴이 붉어졌나 좀 보아라. 아까 어떤 나인이 장난으로 술을 권 해서 한 모금 마시었다. 혹시 얼굴이 붉어져서 꾸지람을 들을까 염려된 다." 세자가 이런 말을 하자 아직까지 수줍어하고 있던 각시 나인이 이 말을 듣 더니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들어서 생긋 웃으며 세자의 얼굴을 마주 건너 다보았다. 마주 건너다보다가 깜짝 무슨 생각이 났던지 얼른 고개를 숙이 고 약간 돌리면서 억지로 대답해 아뢰었다. "소녀가 뵈옵기에는 아무 기색이 없사옵니다." 실상은 술을 마셔서가 아니요, 각시 나인의 얼굴을 좀 바로 보자는 지혜에 서 나온 말이었다. 세자는 비로소 분명히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아름답고 어여뻤다. 바로 이때 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대왕대비 환어하는 기척이었다. 각 시 나인은 황망히 문을 열고 나가서 행차를 맞았다. 세자도 밖으로 나와 서 할마마마를 모셔들였다. 그 후부터는 매양 이 궁에 왔다가 각시 나인 장씨를 보면 남의 눈에 띄울 세라 몰래 웃음을 보내고 그럴 때마다 장씨는 수줍어서 머리를 돌렸다. 이 와같이 하는 사이에 은연중 사랑은 자라났다. 봄부터 가을까지 지내는 동안에 왕대비와 임금의 국상을 치르고 세자가 왕 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남몰래 기뻐한 사람은 장씨 궁인이었다. 장씨 궁인은 벌써 자기가 세자의 애정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 세자가 왕위에 오르자 다음 날의 영화를 꿈꾸었다. 어느덧 세월은 이년이 흘렀다. 그 해 겨울 어느 눈내리는 밤, 젊은 임금은 미행으로 장씨 궁인 처소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장씨 궁인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황공무지하여이다." 하고 그 앞에 엎드렸다. 장씨 궁인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짐작하였고 또 며칠 전 꿈에는 황룡이 자기 몸을 칭칭 감았던 일도 있었으므로 이상히 생각하 고 벌써 여러 날 전부터 밤단장을 하며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녀는 곧 방장을 두르고 촛불을 대홍촉으로 갈아끼고 한옆에 공손히 서서 분부만 기다렸다. 이때 장씨의 나이는 열여덟이니 이년전 그때보다 얼굴 은 더 곱게 피어났고 태도도 그 전보다 점잖아졌다. 얼마 후 젊은 임금은 깔아놓은 비단 이불 한쪽을 젖히고 장씨의 손목을 잡아 끌어들였다. 장씨 궁인에게 이런 엉뚱한 꿈이 지나간 후에도 임금은 자주 이런 엉뚱한 꿈을 그녀에게 실어다 주었다. 한번 두번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두 사람의 애정은 차츰 깊어갔다. 이듬해 봄 임금은 호조판서 김만기(金萬基)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왕비는 임금과 동갑인 열일곱이지만 그 조성한 지각과 활달한 언동은 벌써 성인을 능가할 만했다. 왕비는 곤순전(坤順殿)의 새 주인이 된지 얼마 안 가서 임금의 은총이 어디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하루 는 대왕대비에게 사후를 갔을 때에 조용히 대비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소녀가 무엇을 아오리까마는 들으니 주상(主上)은 어느 곳에 총애하는 바 궁인이 있다 하옵는데, 그런 궁인을 그대로 두오면 왕실에 누(累)가 될 것 같사오니 명분(名分)을 달리 하시고 처소를 따로 정해 주시옴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대왕대비는 이 말을 들으니 너무도 기특하고 고마왔다. 진작부터 장씨 궁 인을 명분을 달리해주려 해도 새로 들어온 왕비의 마음이 어떠할까 염려되 어 마음은 있으나 발설치 못하고 있던 차였다. "중전의 말이 너무도 기특하오. 그러나 궁인으로서 따로이 무슨 공이 없으 면 후궁을 책봉하지는 못하는 법인즉 아직 명분은 정해 줄수 없고 처소나 따로 정해주랴 하는 바이오." 대비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이후부터 장씨는 응향각(凝香閣)에 옮겨서 거처하게 되었다. 앞으로 장씨 궁인이 왕자라도 탄생하는 날이면 직첩이 내릴 것이다. 그런데 차츰 궁중 여기저기서 쑤군거리는 말들은 심장히 들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왕비 처소와 응향각을 드나드는 나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장씨 궁인은 임금 을 대할 때마다 왕비를 비방한다는 것이었다. 왕비는 처음에는 그 말이 모두 중간에서 말을 좋아하는 철없는 궁인들의 지껄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들이 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더라도 노상 심상 하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떤 궁인은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었다. "황공한 말씀이오나 나인 차림으로 한번 미행을 납시어 친히 그 거동을 보 옵소서." 왕비도 마침내 몸소 그 거동을 살피기로 했다. 어느날 달밝은 밤 왕비는 나인의 복장을 하고 두어 궁인만 데리고 응향각으로 갔다. 조용 조용히 창 밑으로 가서 귀를 대어보았다. 무슨 말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임금과 장씨 궁인 사이에는 한창 봄바람을 일으키고 꽃을 피우는 때였다. 젊은 임금의 걸걸한 웃음소리와 간드러진 장씨의 웃음소리가 교차되는 이 광경은 귀보다도 눈이 더 궁금해했다. 얼마 후 장씨의 암상이 난 독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아, 글쎄 중전인지 뚱전인지가 이러더래요, '그까짓 게 무슨 상감이야, 그래 관례도 하기전에 상복을 입은 채 요사스런 계집년에게 홀려서 왕비가 무언지 임금노릇이 무언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년의 치맛자락에 휩싸여 헤 어나질 못하는 것이... 그년부터 능지처참해서 없애버려야 나라가 될걸' 이러더라니 이게 차마 입으로 할 소리입니까.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소녀 는 정말 치가 떨리고 분해서 못 견디겠어요." "중전이 그랬을 리가 있나." "중전이 무슨 중전이예요?" "왕비니까 중전이지 무에야." "왕비는 누가 왕비에요. 상감을 먼저 모셨어요. 먼저 모신 사람이 정궁비 (定宮妃)가 아니에요. 호호호호." 얼마전 까지만 해도 뽀루퉁하던 장씨에게 어디서 그런 간특한 웃음소리가 나오는지, 그 웃음소리에 젊은 임금도 따라서 걸걸하게 마주 웃어버렸다. 이런 정경을 듣게 된 왕비는 너무도 해괴하고 치가 떨려서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물러났다. 자기 처소로 돌아 온 왕비는 곧 봉서나인(封書內人)을 불러들여서 대필을 잡게하여 장씨 궁인의 죄상을 일일이 들어 기록하게 하고 {아무날 밤에 응향각에서 어떠어떠한 일까지 있는 것을 본 자가 있으니 대 개 이런 계집을 일향 관대하신 처분으로 그대로 궁중에 묻어 두시면 훗일 어떠한 회한(悔恨)이 계시올지 모르는 일이며 소비(小妃)의 처지로 보아서 이런 말씀을 아뢰오면 혹 질투로 그런다고 하실지 모르오나 널리 통촉하시 옵고 사실을 살피시온 후에 곧 장씨 궁인을 방축하시옵기 바라옵니다.} 하는 것을 다음날 날이 밝은 후에 대왕대비에게 올렸다. 이 글을 본 대왕대비는 크게 놀랐다. 대비는 그 봉서를 자리 밑에 넣어둔 채 따로 지밀상궁을 시켜서 수일 동안 응향각의 동정을 살피게 하니, 참으 로 왕비의 말대로 해괴망측한 고로 드디어 장씨 궁인을 불러서 꾸짖고 그 날로 사친의 집으로 방축하는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일은 이것으로 일단락이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장씨 궁인은 원래 덕기가 없는 위인 이어서 자기의 잘못은 추호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왕비 의 책동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여 속으로 깊이 왕비를 원망하고 사친의 집으로 돌아가니 사태는 점점 험악해졌다. 장씨 궁인이 궁중으로부터 추방 처분을 받게 되어 사친의 집으로 나온 때 는 숙종 오년 늦은 가을의 일이었다. 이때에 임금의 나이는 십구세요, 장씨는 이십세였다. 장씨는 집에 나와서 머리를 동여매고 드러누워 한숨으로 날을 보내고 그 모친 윤씨는 쫓겨나온 딸을 보고 몸부림쳐가며 통곡했으나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하루는 이 눈물과 탄식으로 지내는 장씨 모녀의 집 문을 두드리는 허름한 사나이가 있었다. "아니, 대감이 웬일이십니까?" 장씨의 어머니 윤씨가 문을 열고는 기겁을 해 놀란다. 사나이는 손을 내저으면서 조용히 "떠들지 말게. 남의 이목을 가려서 오느라고 혼이 났네. 그런데 대관절 각시를 좀 보아야겠는데." "원 이런 미안할 데가 있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윤씨는 손님을 맞아 들이고 장씨 궁인을 불렀다. 손님이란 다른 사람이 아 니라 전에 윤씨가 침모로 가 있던 숭선궁저(崇善宮邸)의 아들 동평군(東平 君)이었다. 승선군은 인조(仁祖)의 왕자의 한 분이다. 얼마 후 장씨 궁인이 모친을 따라서 동평군 앞에 나타났다. "대감, 오래간만입니다." 허리를 반쯤 꾸부려서 인사를 드렸다. "듣자니, 너무도 아깝고 가엽고 그런 변고가 어디 있더란 말인가?" "모두가 제 팔자이고 운수이지요. 하는 수 있습니까." "지금 밖에서 서두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얼마간 기다리게, 다시 부르실 날이 계실거요." "정말이십니까?" 장씨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정신이 드는 듯 물었다. "내가 왜 헛말을 지껄일 리가 있나." 동평군은 장씨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조용히 무슨 말을 일러 주었다. 그 대체를 말하자면 지금 왕비가 아무리 장씨를 괄시하고 내쫓았다 하더라 도 임금이 장씨를 총애하던 그 정은 오히려 잊지 못할 것이다. 대왕대비께 서 비록 일시적 처분으로 그와 같이 명령은 내렸으나 지금 조사석(趙師錫) 같은 분이 대왕대비한테 들어가서 마음을 돌리게 하려고 서두르는 중이니 재소입(再召入)의 날이 멀지 않았다 라는 것이었다. 조사석이라 하면 대왕대비의 사친이 되는 조창원(趙昌遠)의 사촌 아우로서 대비가 가장 가까이 두고 신임하는 사람이다. 장씨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이 몸을 비호해 주시니 그 은혜를 갚을 바를 아직 못하겠습니다." 하고 사례를 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경신대옥(庚申大獄)으로 인해서 허적(許積) 등 남인일파 가 쫓겨나는 바람에 남인측의 한 사람인 동평군과 조사석도 두문불출 근시 하는 몸이 된고로 장씨 궁인의 재소입운동(再召入運動)은 한때 주춤하게 되었다. 이러던 중 궁중에는 또다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왕비가 하룻밤 사이에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까닭이다. 모든 국민이 슬퍼하고 아까와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기뻐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장씨 궁인 이었다. 장씨 궁인이 임금을 사모하는 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간절해 졌다. 아쉬운 마음에, 공방을 지키다가 쓸쓸함을 못 이기어 혹시나 임금께서 자 기를 불러들이지 않을까 기다려지는 것이 근일의 장씨 궁인의 심경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추측하는 것과는 전연 달랐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와도, 다시 여름이 돌아와도 다시 가을이 돌아와 도 왕비의 일년 기복을 마치게 되는 때까지도 이렇다 할 소식이 궁중으로 부터 들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장씨 궁인은 매일 문 밖만 기웃거리고 새 벽녘이면 궁중에서 승은(承恩)하는 꿈을 꾸었다. 이럴 즈음에 장씨 궁인의 가슴을 서늘케 하는 소식이 들리었으니 그것은 숙종이 다시 계비(繼妃)를 간택한다는 것이었다. 장씨 궁인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실망낙담했으나 역시 하는 수 없었다. 오직 그 누가 왕비가 되는 가가 궁금했다. 새 왕비가 되는 이 거룩한 행운은 수백명 간택 처녀들 중에서 서인파(西人 波)의 거두 민유중(閔維重)의 둘째 딸이요, 송준길(宋俊吉)의 외손녀에게 로 떨어졌다. 한동안 쓸쓸하던 곤순전(坤順殿)에는 또다시 봄바람이 깃들 기 시작했다. 새왕비와 임금의 금실은 나날이 깊어서 임금은 장씨 궁인을 완전히 잊은 듯이 보였고 또 이런대로 한해 두해 지나가니 국가의 기초가 바야흐로 자리를 잡은 듯 튼튼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