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19
9월20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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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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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dSGu8REC5c?si=8Ctd2FVDf5fSQv9v
(의정부교구 나인가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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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사랑을 주제로 한 수많은 문학 작품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는, 묵상할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천 번 만 번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마치 천상에 계신 바오로 사도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은혜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오랜 인류 역사 안에서 한 문장 한다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사랑을 주제로 노래했습니다. 시나 소설, 연극이나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주된 단골 주제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주제로 한 그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수작이 곧 바오로 사도가 지은 사랑의 찬가입니다.
사랑의 찬가는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의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구체화시킨 불멸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눈만 뜨면 사랑을 외치지만, 그 정확한 실체, 구체적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외치고 있는 우리를 위해, 바오로 사도는 아주 친절하고 정확하게 의미를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불멸의 선물, 사랑의 찬가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진실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는데, 때로 그 정확한 의미도 모르는 우리, 때로 인간적 한계에 부딪쳐 포기하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를 통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라고 격려하십니다.
사랑의 찬가의 핵심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토 12장 4~7절)
바오로 사도는 지극히 짧은 문장의 나열을 통해 사랑의 속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심히 읽다보면 문장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됩니다. 긍정문(~합니다)과 부정문(~하지 않습니다)으로 분류됩니다. 헤아려보니 긍정문도 있지만, 부정문의 수효가 8개로 더 많습니다.
거센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려면 강력한 힘이 필요합니다. 막 태동된 코린토 교회를 바라보며 바오로 사도는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코린토 교우들의 개과천선과 새로운 삶을 위해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연유로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라고 목청 높여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 문화권에 소속되어 있던 코린토는 우상 숭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하나의 악은 또 다른 악을 불러옵니다. 코린토 사람들의 우상숭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타락했고, 코린토는 문란하고 퇴폐적인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배경 속에 태동된 코린토 교회 교우들을 향해 사랑의 찬가를 집필하셨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철저히 구별됩니다.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갈되지 않습니다. 영원 불멸의 사랑입니다.
코린토 교회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호소는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된 사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다스리고 자제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영원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지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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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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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믿음 대 믿음>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의 저자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믿게 되고, 믿는 대로 되어간다’라고 말하며 재미있는 실험결과를 제시합니다.
1990년경 에렌 랭거(Ellen Langer) 박사는 70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1959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30년 전인 1959년에 유행하던 옷을 입었고, 당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또 그 때의 신문과 잡지를 보았으며 그 당시에 사는 것처럼 대화했습니다. 몸과 정신이 그 당시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박사는 그들에게서 노화와 더불어 퇴화되는 증상들을 측정해보았습니다. 측정의 기준은 근력, 인식력, 지각력, 미각, 청각 등이었습니다. 그러한 증상들은 노인병전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생물학적 지표들입니다.
닷새 동안 그러한 생활을 끝낸 후 실험에 참여한 노인들은 많은 부분에서 개선된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5년 정도는 젊어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청력과 기억력도 개선되었습니다.
랭거 박사는 “노화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간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이렇듯 편협한 정신자세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노년을 보다 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참조: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한문화 2000, 66)
저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충격이었는지, 배가 아프면 위암이 걸렸다고 했고 머리가 아프면 그 어려운 단어인 뇌종양을 찾아내어 그것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인데 이상하게 그 두려운 것이 나에게 벌어질 것만 같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멈추지 못했다면 정말 그렇게 됐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에게는 가끔 ‘가상임신’이란 것이 일어납니다. 아기를 갖기를 너무 바라면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배가 커지고 가슴도 부풀어 오르는 등 아기를 가진 것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곧 믿음이 되고 모든 것은 믿는 대로 변하게 됩니다.
EBS 한 다큐 실험에서, 우유 시음회에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몇 명이 우유가 상한 것처럼 이상한 반응을 보이게 시키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어떠한 반응을 하는지 실험을 하였습니다.
연기자들이 우유를 마시다가 토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니 시음회에 참가한 이들도 우유가 비려서 못 마시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 명은 정말 식중독에 걸려 입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우유는 매우 신선한 우유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정보를 육체로 인지하고 머리로 분석하여 마음에 쌓아놓습니다. 마음에서는 이것이 무의식적인 믿음이 되어 다시 생각에 영향을 주고 몸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의식의학 분야의 권위자인 대팩 초프라(Deepak Chopra)박사는 덮개가 달린 병 속에 든 파리를 예로 들었습니다. 덮개가 달린 병 속에 들어 있던 파리는 덮개를 열어주더라도 몇몇 용감한 놈을 제외하고는 병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병이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는 병이 사라지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인 무의식이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증거도 있습니다. 두 부류의 물고기를 칸막이로 구분된 수족관에서 일정시간 키우면, 칸막이를 없앤 후에도 물고기들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조: 같은 책 65쪽)
문제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믿게 된 것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더라도 병이 걸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어 일상에서 항상 무기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정적인 믿음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자신은 눈이 작아서 남편이 눈 큰 여자를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은, 자신은 있는 모습 그대로 소중한 존재라 남편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을만하다고 믿어야 변화됩니다.
즉, 믿음은 믿음으로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믿음들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피리를 불고 곡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리를 불어주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어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자기 정당화만 합니다.
요한은 먹고 마시지 않으니까 마귀가 들렸다 하고, 예수님은 먹고 마시니까 먹보요 술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칸막이가 없는 데도 가지 않는 자신의 모습, 뚜껑이 열렸는데도 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내 무의식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새로운 믿음으로 바꾸는데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참다운 지혜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옳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믿어 내 안에 있는 헛된 두려움과 믿음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많은 예들이 존재합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의 모든 자녀들이 드러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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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는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위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오늘의 참된 순교 정신이란 나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세례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랫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중에 많은 분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당하고 돌아가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짐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포기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한 것이다.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 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 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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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현지인들이 즐겨 찾지만 관광객들은 쉽게 가지 못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잘 모르기도 하지만, 여행 중에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LA에 신문 홍보와 모임 때문에 10번 넘게 왔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에 다녀왔습니다. 1922년에 개장한 야외 음악당입니다. “할리우드 볼에서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로스앤젤레스를 경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LA 시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공연장이라고 합니다. 공연은 8시에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5시 쯤 미리 도착해서 준비해온 음식을 먹으며 공연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저와 같이 간 분들도 6시 쯤 도착해서 김밥과 과일을 먹으면서 공연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공연의 주제는 ‘Beethoven at the Bowl’이었습니다. 베토벤에게 영감을 준 영웅은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나폴레옹’과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끝없는 형벌을 겪어야 하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였다고 합니다. 지휘자는 ‘영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영웅이란 특별한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 일 수 있습니다. 영웅이란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준 사람입니다.” 지휘자의 설명을 듣고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감상했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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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 세대 사람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1-35)
여기서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 받아들였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지는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7-8ㄱ)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온 ‘군중’을 ‘독사의 자식들’, 즉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꾸짖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대부분 형식적으로만 회개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형식적인 회개는 겉으로 회개하는 척만 하는 위선이고, 거짓 회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은, 진심으로 회개해서 온 삶을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만 ‘회개 선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회개 선포’를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7)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이고, “회개하여라.”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라는 ‘권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심판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예수님의 선포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또는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고해성사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하지 않고 고해성사라는 형식만 거치면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까?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형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도 믿지 않으니까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2-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직업과 집안 등에 대한 편견 때문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또는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탓만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예언자다운 생활’을 미친 사람의 모습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친 사람이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실제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회개를 거부했거나, 아니면 자기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해서 회개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일 뿐이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예수에게는 ‘메시아다운 신비감’이 없다. 그러니 그를 믿을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이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과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모두 ‘하느님 뜻’에 의한 일, 즉 ‘하느님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지혜의 모든 자녀”는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고, “드러냈다.”는 “증언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증언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너희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회개’와 ‘복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여라.”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비아냥거려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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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물리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7,30 참조)을 “이 세대 사람들”이라 일컬으시며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장터의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것은 혼례식과 관련된 놀이이고, 곡을 하며 우는 것은 장례식 놀이입니다. 문제는 한쪽에서는 놀자고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는데, 다른 쪽에서 전혀 호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혼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피리를 불어 대도 춤을 추어 주지 않고,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곡을 하여도 우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에서 비유의 뜻은 더욱 명확하여집니다. 놀이를 제안하는 이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시고, 그 제안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이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였던 요한은 마치 장례식 놀이를 제안한 격이지만, 그들은 요한의 금욕주의적 태도를 비난하며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먹고 마시는 일에 비교적 자유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혼인식 놀이를 제안하신 격이나, 그들은 예수님을 방종한 생활을 일삼는 먹보나 술꾼으로 취급하여 버립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배척하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에, 곧 하느님의 제안과 부르심에 잘 호응하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그분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이 단 한 번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초대에 혹시 무관심하지는 않은지, 응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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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대주교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석양은…>
아침에 강론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나는 왜 신부가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자라난 환경이 어떠했길래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행주입니다. 바로 앞에 행주대교가 있는 곳인데 늘 한강이 보였고 들과 산이 있었지요. 지금도 어릴 시절을 떠올리면 석양이 지는 들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유난히 해 지는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석양의 풍경을 많이 보아서 제가 종교인이 되었을까요? 해 뜨는 모습을 많이 보았더라면 사업가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늘상 해질 무렵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어머니가 부르셔야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갔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특히 석양 낙조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해는 질 때 서서히 내려가다가 한순간에 쏙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해가 지금 막 지는구나.‘이렇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과학적으로 해는 방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8분 전에 이미 지고 없습니다.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가 8분이 걸리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지는 해를 보고 지금 방금 사라졌다고 8분의 시차를 망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고서도 ‘별이 참 아름답구나, 저기 저 별이 빛나고 있구나.‘ 생각하고 감탄하지만 그 별 중에 어떤 별은 벌써 수천 년 전에 없어진 것도 있다고 합니다. 오래 전에 없어진 별의 빛이 여기 지구에 오기까지 수천 년이 걸린 셈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 것들이 다 맞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에 대해 우리는 확신하며 주장하고 말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거나 상대방의 입장에 서면 전혀 다른 사실이 있다는 것을 접하고 놀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제일 힘든 것이 있다면 자기는 절대적으로 다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주장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는 같이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화가 나신 모습입니다. 자기와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는데 이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예수님을 더욱 불신하고 죽여 없애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을 두고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반대되는 생각을 합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미친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보고서는 맨날 먹고 마시기만 하는 모리배로 비판을 하지요. 아무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하였습니다. 자기들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으면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왜 그토록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대하였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제대로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났다고 교만했던 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성경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스스로를 높이고 으스댔던 그들은 결국 하느님의 아들을 처형하고 마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자기 중심의 틀과 교만함을 벗어나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신관이나 신앙 논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래된 본당에 가보면 이런 신자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다 판단을 하고 결론을 맺습니다.
또 이렇다 저렇다 하며 하느님까지도 판단을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처럼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어려움을 만듭니다. 순수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배우면서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보고 말하며 생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두고 왜 본당 신부 또는 수녀가 저런 생각을 했을까를 좀더 사려 깊게 묵상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목하는 사람은 한 두 명의 신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신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당장 눈앞의 것을 해결하려는 마음보다는 10년 후, 100년 후를 바라보는 긴 안목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에 안주하면 그 때부터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새롭게 배우려는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늘 귀를 기울이고 동시에 자신을 되돌아보며 한 가지라도 더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사리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무조건 판단하고 자기와 같지 않으면 모조리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매일 새로워지고 열린 마음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평일미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말씀을 경청하며, 또 그 말씀으로 하루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미사 중에 새로운 다짐을 하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이런 노력들이 나를 성장시키고 보다 더 많은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귀 기울이는 우리들 열린 모습 안에서 지금 뿐만 아니라 미래 우리 공동체의 힘찬 모습을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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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님]
<믿음의 생활이란?>
오늘의 복음 말씀은 루카 복음사가가 비교적 짧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무엇이었으며,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전제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며, 이를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이는 지혜의 은사를 청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관해 이야기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에 관해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하시어 당신의 위대성을 드러내십니다.(루카 7, 24 - 30)
또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루카 7, 31 - 35). 우리가 방금 들은 복음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요한을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보았습니다.(마태오 21, 26; 마르 11, 32)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루카 1, 76) 유대인 최고의회(=산헤드린)는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언자요?"(요한 1, 21)
그렇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였고, 다가올 구원을 말하면서 마음의 철저한 변화, 곧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때에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 구세주가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요한을 두고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정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신지를 물어오도록 한 바 있습니다.
온갖 질병과 고통과 마귀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고 본대로 전하게 하십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위해 활동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과 질병을 치유하러 오신 예수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메시아, 인류를 서로 화해시키고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대사제를 의심 없이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마침내 드러내신 그 모습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시빗거리로 삼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앙갚음을 하시고 화를 잘 내시고 성질이 급하신 분이시려니 여기는 자들의 자세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용납 못 하는 처지이다 보니, 예수님도 우리를 깊이 용납해주지 않으시는 분이시려니 생각합니다. 사람이 때때로 너무 자신 만만하여 철면피해지면, 우리에겐 예수님이 아무 필요도 없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좀 못마땅한 예수님, 내게 잘 해주지 않고 요구가 너무 많은 예수님, 지나치게 곤란한 처지에다가 나를 밀어붙이는 예수님, 아니면 너무 어려운 분이라서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지니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들에게도 바른 생각을 지니지 못합니다. 못마땅합니다. 불만 투성이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태도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예수님이 나를 생긴 그대로 사랑치 않으신다는, 내게 뭔가 불만이 있으시다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이와 다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생긴 그대로 사랑하시며, 나를 온전하게 받아 주시며, 내게 바로 지금 친절하시고, 상냥하시고, 관심을 기울이시고,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넘치신 분이십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잃었던 양을 찾게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잃었던 은전을 도로 찾은 여자도 예수님의 이 심경을 잘 알 것입니다. 그 여자도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하며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의 생활이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임하신 그리스도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곳으로 오신 그리스도님, 바로 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천하게 오신 그분 안에 삶의 진실이 있고, 생명의 영원한 기쁨이 있고, 온갖 풍요함이 있다는 것을 믿는 생활입니다.
사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취하시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가사의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를 가진,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미움 속에서 사랑을, 어둠 속에서 빛을, 하찮은 것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찾아내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자신의 생각과 아집, 완고한 태도를 버리고 기쁨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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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잔치놀이와 장례놀이>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완고함을 꼬집은 비유(31-32절)와 이 비유의 뜻을 풀이하는 내용(33-34절)을 담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14절)는 단 한 말씀으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소생시키신 기적을 보았다. 이 기적사화는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기 위한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업적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물러간 다음 예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세례자 요한을 높이 칭찬하셨다.(24-28절) 예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 크다"(28절)는 말씀으로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셨으나,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것이라도 이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밝혀 주셨다.
28절 후반부의 말씀은 예수께서 요한을 너무나 높이 칭찬하셨기에, 그 높이를 조정하려는 복음사가의 의도가 곁들여진 듯한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극찬 뒤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나라의 지고(至高)함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온 백성이 요르단강에 있는 요한에게 와서 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지고(至高)의 하느님나라에 성큼 다가섰으나, 백성의 지도급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례를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다는 것이다.(29-30절)
이들을 두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에서 <피리-춤>은 잔치놀이를, <곡-울음>은 장례놀이를 의미한다.(32절) 놀이는 혼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잔치에는 술과 음식과 여흥이 필요하지만, 장례에는 금욕과 절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장례놀이는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선포했던 금욕주의자 요한에 비유되고 있으며, 잔치놀이는 혼인잔치에서 신랑의 역의 맡아 잔치에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과 어울려 식음(食飮)하시는 예수님에 비유되고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으니, 결국 장례놀이에도 잔치놀이에도 호응하지 않은 세대로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잔치와 장례가 벌어진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잔치만으로도 살 수 없으며, 장례만으로도 살 수 없다. 혼인잔치의 신랑이신 예수께서 더는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잔치는 일단락 되었고,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장례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떠나가신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에 잔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잔치와 장례가 뒤섞인 세상에 우리는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잔치놀이든 장례놀이든 놀이가 벌어질 때 적극적으로 그 놀이에 참여하고 호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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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상 행복을 갈망하라>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1요한 4,10-12)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고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걸맞은 은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죽음을 감당하고서라도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 왔고 또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는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천상행복이라는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1독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 3,9)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았으며 은총과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몸소 증거 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마음입니다.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는 239년 전 초기에는 ‘사교’, 곧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단정되었고 이 사교를 뿌리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우리 선조들은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며 지냈습니다. 옛말에도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 3,1-5)라는 말씀이 바로 그들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 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인이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불젖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감옥생활 안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자 감옥을 지키는 포졸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웃으며 살고, 나는 돈까지 받으며 바깥에서 편히 있는데도 불평이 가득하다. 그러니 옥 속에 있는 그들이 죄인인지 옥 바깥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모르겠다.”
순교자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자 수가 늘어갔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가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가 심할수록 믿음도 커갔고, 형제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239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성당도 가까이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타협도 합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기보다는 세상을 선택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크게 구별이 없습니다.
‘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 ‘바보소리 듣는데’ 하면서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모습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보여지지 않으니 어떻게 믿는 이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24)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찬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를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마련됩니다. 자기중심의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기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들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하느님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 3,9)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이 물려주신 신앙을 땀의 순교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분명히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하면서 주님을 과감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 제가 한마디 하면 ‘그래도 사랑하여라’ 하고 답하십시오.
그가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 보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보면 정말 밥맛이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삶의 온전한 봉헌을 통해 땀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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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요즘에 ‘가나안 신자’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젖과 꿀을 흐르는 가나안 땅을 떠올리며 열심히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했습니다.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저를 보며 웃으면서 ‘가나안’을 거꾸로 말해 보라고 하십니다.
‘안나가 신자’라는 것입니다. 냉담 교우, 쉬는 교우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가나안 신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기 힘들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당이 재미없어서 또 신앙이 와 닿지 않아서, 성직자나 수도자에 대한 불만, 교우들과의 마찰로 인해서….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이유로 많은 이가 ‘가나안 신자’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본당은 교적 대비 주일 미사 참석률이 25% 이상입니다. 전국 평균보다도 또 인천교구 내에서도 주일 미사 참석률이 꽤 높은 편이라고 이야기 듣습니다. 하지만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그마치 70% 이상이 주일 미사에 나가지 않으면서 ‘가나안 신자’로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성당 나갈 이유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또 사람만을 바라봅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25%의 열심한 교우들의 영향이 ‘가나안 신자’들에게 조금씩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 당신만을 바라보는 열정을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얻게 됩니다. 이를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를 철저하게 지키셨던 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님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라에서 믿지 못하게 했으며,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바라보았기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이겨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어 가장 커다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가나안 신자’의 길이 아닌 순교자들의 삶을 우리도 쫓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순간의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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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 되어주어요>
루카 7,31-35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벗이 되어주어요>
처음부터
벗은 없지요
함께함으로써
벗이 되어주고
함께하기에
벗이지요
벗이니
함께하는 거고요
기쁜 이와
함께 기뻐하며
벗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슬픈 이와
함께 슬퍼하며
벗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걷는 이와
함께 걸으며
벗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멈춘 이와
함께 멈추어
벗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너의
벗이 되어주고
너는 나의
벗이 되어주고
하나 둘
모두 서로에게
벗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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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어가는? 또는 증거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이번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에는 궤변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처럼 꼭 순교해야 하나? 배교한다고 해도 하느님을 배신하는 것은 아닐 수 있지 않은가?
박해상황이 되어 또는 북한에 살게 되어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믿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면 굳이 믿겠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겉으로는 안 믿겠다고 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않는가? 입으로 안 믿는다고 해도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되지 굳이 믿는다고 하여 죽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인들 가운데 대표 성인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가문을 보면 아버지 형제 가운데 아버지 정약종과 가족은 모두 순교하였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를 선택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고 유배를 가 정말로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지금에 와서 정약용이 천주교를 완전히 떠난 것인가, 하느님을 믿지 않은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우리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옹호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그리고 입으로 배교했다고 하느님을 버린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사실 많은 신자가 순교하지 않고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간 것은 입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신앙을 증거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배교 후 교회를 파괴까지 한 완전한 배교자를 빼놓고, 나머지는 두 부류 곧 신앙을 ‘이어온 신자’와 ‘증거 한 신자’ 두 부류이며,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인들은 그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증거 한 분들이고, 대표 성인인 정하상 바오로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정하상 바오로는 6세 때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이 먼저 순교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까지 그의 가족이 천주교를 버리도록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라고 달레의 한국 천주교 교회사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것을 개인의 불행을 넘어 가족의 불행이라고 생각했으면 배교했을 텐데 정하상 바오로와 가족들은 그것을 가문의 영광이요 영광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그랬기에 그는 20대 젊은 나이에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어 대단한 활약을 펼칩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그는 1825년 조선의 독립적인 교구 설립을 요청하는 편지를 교황청에 보내어 1831년 마침내 조선 교구가 설립되게 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모셔 오기 위해 2,000km의 북경 길을 여러 차례 왕복하였고, 그래서 조선 교구 2대 주교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땅 신부를 영입했습니다.
그의 업적 중에 ‘상재상서’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이 어쩌면 한국교회 최초의 교리서 또는 신학 저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천주교가 어떤 교인지 보유론과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역설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앵베르 주교는 신학 교육을 속성으로 시키고 사제품을 주려고 했으나 1939년 기해박해로 그가 순교하게 되어 그는 한국교회의 첫 신학생이 된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것은 김대건, 최양업, 유방제의 신학생 선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정하상 바오로와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신앙을 증거 한 순교 성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돌아봅니다.
근근이 이어가는 신앙인지, 적극적으로 증거 하는 신앙인지, 하느님으로 행복하고 그 행복을 전하는 신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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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순교적 삶 -
오늘 9월20일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한국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모든 세계 가톨릭 교회가 한국 순교자들을 기리며 의무기념 미사를 봉헌하는 참 영광스런 거룩한 날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전, 1791년 신해박해로 시작하여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여년 동안 일만여명이 순교한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져 말을 잊게 됩니다. 순교자들 말고도 그 이후 근현대사를 보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지요! 이제는 제발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새삼 축복받은 순교자들의 한국 가톨릭 교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순교자들이 지켜주는 나라인데 현재 아무리 위기라 해도 대한민국은 영원할 것이며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 내용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요즘 면담성사차 제 집무실에 들리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 사랑, 나라 사랑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르게 하는 애국가 1절입니다. 바로 여기서 영감받은 만세육창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날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를 바라보며 만세육창으로 시작하면 마음이 새롭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9월 순교자 성월, 마침 오늘로써 단식 21일째를 맞이하는 이재명 정치지도자가 자꾸 눈에 어른 거리며 밟힙니다. 주님의 보호하심을 간절히 청하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오늘 강론 제목인데 답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만세육창하는 마음으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순교적 삶을 살면 됩니다. 방금 부른 입당성가 287장은 늘 들어도 가슴 뛰는 감동을 선물하며 새삼 우리의 순교적 삶을 새롭게 합니다. 꼭 시간을 내어 5절까지 오늘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최민순 신부 작사, 이문근 신부 작곡의 성가로 곡도 가사도 정말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우선 1절만 나눕니다.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한국순교자들을 대표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1821년에 태어나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니 만25세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그 지혜와 용기, 기개와 신앙은 만인의 귀감이 됩니다. 더욱 감격적인 소식은 순교 177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9월16일, 바티칸 베드로 대성전에 설치된 성 김대건 신부 성상 축복식이 거행됐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경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한국 9월18일자 모든 신문 일간지 1면에 자리잡고 있는 축복식 장면 사진의 성 김대건 성상을 보면서 새삼 성 김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명실공히 한국은 물론 한반도 평화의 수호성인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자랑스런 순교자들처럼 살면 됩니다. 꼭 피흘려서 순교가 아니라 영적전쟁 치열한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나하나 주님의 용감한 전사로 순교적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면 되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지혜서의 다음 말씀이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백절불굴百折不屈, 신앙의 용사로 만듭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늘 들어도 감동이요 우리를 격동激動케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사제서품후 만34년, 매해 순교대축일 강론 때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꼭 인용했던 윗 성서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주님의 이런 한결같은 사랑이 자발적 사랑, 자발적 기쁨으로 순교적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이 가르쳐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는 구원의 법칙은 단 하나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왜들 그렇게 방황하고 죄도 병도 많습니까? 길을, 빛을, 희망을, 꿈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의 길이자 빛이요, 희망이자 꿈인 주님을 찾고 따를 때 비로소 영육의 건강이요 제대로의 온전한 삶입니다. 순교는 주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만여 명의 우리 순교자들은 궁극의 길이자 빛이요 희망이신 주님을 만났기에 기꺼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복음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한결같은 순교적 삶을 살게 합니다.
끝으로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제 자작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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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루카 7,31)
<오늘도 기뻐하자!>
오늘은 본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 큰 대축일을 지난 주일로 이동해 경축한 곳에서는 오늘 미사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미사로 드립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루카7,31-35)은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길을 닦아 놓는 사자(선구자)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8)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복음의 말씀인,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비유해 질책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이는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우매함에 대한 질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
'내 안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우매함은 없는지?'
매일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나의 구원,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재현하는 희생 제사'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일인가?'
예수님의 내려 오심도 기쁨이요, 예수님의 죽음도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기뻐해야 하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오늘도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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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0uSRMB7r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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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 35)
지혜는
뜨거운 심장에서
시작된다.
올바른 지혜는
친구가 되는
사랑의 실행이다.
지혜는 판단의
반대편에 서있다.
지혜는 햇살처럼
어우러진다.
지혜는 외로움을
기쁨으로
바꾸어준다.
지혜는
죄인들의
친구가 된다.
친구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
지혜는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과
친구가 된다.
목마른
사람이기에
친구가 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참된 지혜는
이 순간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가장
빛나게 합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더욱 살맛나게 하며
기쁨으로 변화시킨다.
지혜는
사랑이다.
지혜는 사랑으로
용서를 이룬다.
갚아야 할
사랑이
많음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지혜는
순교처럼
둘이가 아닌
하나가 되는
사랑의 신비이다.
하느님 사랑을
결코 잊지않는
지혜의 순간순간이
일상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의 사랑과
기쁨을 지혜가
다시 일으켜
세운다.
지혜가
옳았다.
지혜가 사람이
되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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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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