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1895년 양(陽) 10월 8일 새벽 5시경 경북궁 광화문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사냥'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암살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왕비의 거처인 건청궁에 난입, 명성황후의 암살에
성공하고 유해(遺骸)를 불태웠다. 110년전의 그날, 명성황후의 목숨을 끊은 자객의 칼은
일본 쿠시다 신사의 귀중품으로 기증되어 지금까지 남았다.
[쿠시다 신사 정문]
[쿠시다 신사 내부모습]
쿠시다 신사는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해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은 MBC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등
일행에 대해 신사 관계자는 대단히 난처해 했다. " 이칼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쿠시다 신사의 책임자 아베 켄노스케 궁사는 상기된 얼굴로 일행을 맞았다.자주색
보자기에 싼 칼을 취재진에게 풀러 놓았을때 가슴 한쪽에서 피가 울컥 쏠리는 느낌이었다.
[칼을 빼고있는 궁사의 모습]
[ 칼집에 새겨진 '일순전광자노호'는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弧)-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렀다'고
적혀있다. 칼주인이 시해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궁사는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며 이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칼은 하젠도라고 불립니다.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명검입니다.
제작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살상용 다시말해 사람을 베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명치 41년(1908년) 토오 가쯔아키란 분이 신사에 기증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히젠도로 명성황후를 살해한 토오가쯔야키가 신사에 칼을 봉납한 기록]
"토오가 정말 명성황후를 절명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왕비의 침실에 난입한
사람중 하나란것은 맞습니다. 사건당시 왕비는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해한 사람은 궁녀일수도 있고 ...." 궁사는 그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증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문서에는 모든것이 다 적혀있었다. 토오가 이 칼을 기증할
당시 궁사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는 서류에는 '왕비를 이칼로 베었다'고 적혀있다.
[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끝 매우 예리하게 연마 되어있다]
토오 가쯔야기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사람중 하나다.
일본의 저명한 쯔노다 후사꼬의 저서 '명성황후 - 최후의 새벽'에는 사건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쯔끼아끼,나(데리야키) 세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고 적혀있다.
그리고 또하나의 주장에 따르면 '나라무라 다테오가 곤녕합(梱寧闔)에 숨어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기재되었다.
정리하자면 토오 가쯔아끼는 왕비의 침실로 최초 난입한 세사람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칼을 휘둘러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뒷날 토오 가쯔아끼는 그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당부했다고 한다.
"다시는 이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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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ㅆㅂ.... 일본은 절대 화해할 수 없는 종자들이다!
22222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것들.
총선압승하고, 정권바꿔서...반민특위 합시당...사족하나, 정준호가 저때까지는 멋있게 봤는데...명박이 똥꼬 빠는거 보구 밥맛이라는...
쳐죽일놈들. 이렇게 화가 날때는 그곳의 지진도 쓰나미도 감사할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