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와 제대로 싸우는 ‘기독교인’보고 싶다.
http://www.chtoday.co.kr/view.htm?code=oc&id=176936
수유+너머 집단의 공식 종교는 ‘들뢰즈’이다. 기독교 교회가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라’는 말로 쓰는 논리를, ‘****기제에 포획되다’라고 쓴다. 대한민국주의에 불복하는 좌익들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쪽일 것이다. 또, 말씀의 권위를 내세우는 바가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수직적 조직’을, 곧장 권위주의로 비추면서 ‘수평적 타령’을 내세우는 전도사였다. 그 ‘수평성’은 학생운동권의 조직운동성의 운동권 소모임 문화였다.
조지 레이커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수입되고, 한국의 대중적 정치 마인드는 일제히 비약했다. 거기에서, 상대의 프레임을 쫓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김종준 목사님께서 수유+너머를 공격적으로 지적했어도, 이 글의 속내가 ‘홍보’인지 ‘공격’인지 구별이 어렵다.
한나라당이 좌파 척결을 하는 즉시 ‘컨텐츠 부족’과 ‘외연확장’이란 이유로, 좌파에 흐지 부지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도 못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젊은층에 대화한다는 이유만으로, ‘수유+너머’발 사유 이미지를 쓰는 바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 지지자 상당 수가 ‘구호주의’에 젖어서 철학에 약해서 좌파 침투에 무방비 상태이고, 한국 교회 상당 수가 역시 동일한 문제에 젖어 있다.
김종준 목사님의 칼럼에는 ‘은은한 선망의식’이 포착된다. 그들에도 ‘성경’역할이 있다. ‘들뢰즈’이다. 소련공산사회에서 맑스나 김일성 스탈린논리가 성경 대용을 하는 바와 비교가 된다. ‘들뢰즈’책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어중간한 들뢰즈 비판은 조지 레이커프가 말했던 상대를 홍보해주는 차원의 비판에 그치기 쉽다. 최근 좌익 출신 농민이 소박한 유물론적 생각으로, 철학사의 집약체란 들뢰즈를 공격하는 바에서, 좌파들끼리 요란하게 홍보해주었던 바처럼, 현재의 좌익의 새로운 물건에 중심을 제공하는 쪽이라 여겨진다.
골로새서 2장 8절 인용의 교회 내의 철학 비판이 ‘보수 교회’내의 ‘수유+너머’와 싸움에서 치명적 독약임을 이해해야 한다. 결국은, 들뢰즈가 가장 싫어하는 철학사의 가닥이 뭔지를 이해하고, 결국은 성경 탐독가들이었던 철학가들의 주장들을 확대해야 한다. 구세대 기독교인들일 수록, 1965년 무렵에 자신의 성격 형성기만 생각하여, 좌익과 싸우기 위해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 젊은층의 좌익과 싸울 토대를 짓밟는 몰상식이 주전문이면서 반성조차 안하는 일도 너무 흔하다.
최근 10여년 보수 교단 내에는 ‘국가반역자의 아버지’를 섬기는 몰상식한 일이 횡행했다. 철학논리적으로 ‘6.15사상’을 일찌감치 오래전에 완성한 함석헌에 대하여 무분별한 숭배가 횡행했다. 건국 대통령 숭배와 ‘국가반역자의 아버지’ 함석헌 숭배가 동시적일 수는 없다. 동시적이라면 스스로 사유할 머리를 어디에 팔아버리고 만, 공부와 담을 쌓은 이북 실향민 향우회의 낮은 수준의 목소리일 수 밖에 없다.
보수 지식인 공동체는 늘 ‘좌익’을 닮아가려는 좌익‘을 향한 따라잡기(catch-up) 모델을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 보수 역사로 호평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성상옹호주의와 말씀 중심주의가 아니라, 성상파괴주의와 시각중심주의로 ’대한민국‘과 ’북한‘의 정당성을 공평하게 가로지르기 하는 입장을 보인다. 이는 동시에 ’보수기독교인‘들에 읽어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언제든지 ’기독교 내부‘에 가로지르기 물질적 시각을 허락하는 바가 된다. 전문용어로 위장된 보수 사회 내부의 ’기만‘과 ’사기질‘에 대하여, 골로새서 2장 8절의 남용은 언제든지 한 마디도 못하게 침묵시키고 만다.
한국 교회가 좌익과 싸우려면,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지식인’들이 늘어야 한다. ‘성경’과 ‘자유주의 철학’이다. 더 이상, ‘반공철학’의 결론만을 가지고 암기로 외워서 싸우는 이들로는 경쟁력이 없다. 상대는 좌익 입장에서 보수주의를 현미경처럼 들이파는 데, 보수세력은 1965년 무렵에 20대 식자층이었던 이들의 단순성 따라서 아직도 88년판 반공서적의 결론만을 복창하고 있다.
‘성경’과 ‘자유주의 철학’을 동시에 읽고, ‘사도신경’의 믿음에 따라서 ‘보수세력’내에 ‘대화성’을 회복해야 한다. 보수세력은 늘 권위있는 ‘말씀자’에 꾸벅 죽는 경향이 강하다. 왜냐하면, 1965년 무렵에 식자층이었던 이들이 과도하게 사회를 단순화시키고 영구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좌익 세력은 계급혁명의 효용성이 대화성의 기본이지만, 우익세력에는 성경적 진리를 온전히 세속적으로 바꾼 바로서가 사회에서 실현되느냐가 핵심이 될 것이다.
보수 사이트에서 전혀 반박을 하기 위한 체계적 준비를 하지 않은 이들의, 단순한 ‘겸손하라!’타령이 실제로 존재한다. 정말로, 젊은 세대들에겐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파 공동체 내에서의 ‘대화성’회복이 시급하다. 이상돈 교수님께서 [독립신문]에서 보수주의 서적의 출판 미흡을 지적했다. 올해 들어서 급격하게 책이 는다. 그러나, 그것의 독자들의 형성이 되지 못했다. 독자층의 형성이 중요한 이유는 ‘위대한 말씀자’에 꾸뻑 죽는 어리버리 땡중 문화의 진정한 극복이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 강독 공동체는 어느 교회나 넉넉하게 남고 남듯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관’은 성경의 디테일을 좔좔 외우는 수준일지래도 깊이 있는 바가 아니다. 초중고생에 [독서논술]이란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성경의 각 챕터 각 장르와 더불어 같이 읽어 좋은 교양철학등이 반드시 존재한다. 현실 사회에 걸맞는 ‘직관’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한, ‘성경 말씀’봉독 수준이라면 동일한 것의 반복을 위해서 좌익 지식인들을 홍보해준 혐의를 벗기 어렵다.
‘수유+너머’와 싸우려면 들뢰즈가 배척하려는 성경논리를 옹호했던 자유주의 철학자들을 성경과 더불어 읽어야 한다. 성경만 읽으면 사실상 싸우겠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에서 ‘선’과 ‘악’에 대한 비타협적인 입장 없이 군대의 애국주의 존재할 수 없듯이, 88년판 반공서적의 결론에만 도취되어서 한국교회가 계속 철학을 폐기하면서 좌익철학에 김목사님 처럼 선망의식을 보여준다면, 좌익만이 미래에도 기세를 올릴 것이 분명하다.
싸우려면 제대로 싸우시라!!
88년판 반공교재의 결론만 되뇌여도 좋은 구세대들에 순종이란 이름으로서 계속 끌려다니는 입장으로서는, 좌익이 우익을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이상으로 우익이 좌익을 현미경으로 공격해주는 각오가 생길 수 없다.
특히, 학술단체 협의회라는 좌파 정권 최대의 좌익 지식인 집단에 결속된 이들을 ‘제도권 밖’이라고 하는 세상을 전혀 모르는 판단을 하다니, 참 심각하게 울분이 든다. 이 시대에 ‘대한민국’의 본질을 믿고자 ‘의인’으로서 고통을 받는 ‘제도밖’사람들에 대해서, 참으로 모질고도 모진 고통을 주는 표현일 것이다.
첫댓글 대한민국 기독교인은 김정일 독재자 악마로 규정합니다.그중에 사이비 종교(기독교을 사칭)목사들이 있을겁니다.김정일은 기독교나 종교는 박대하다(기독교는 공산주의 암적인 존재로) 못해,이북엔 교회가 없읍니다.김정일 신이거든요.남한의 기독교인을 속이기 위해 위장된 교회는 있읍니다,
대한민국에 하나님이 임재하느냐(정통교단), 임재하지 않고 건국 불복에 임재하느냐(함석헌교단)의 차이는 중대합니다. 이승만 박정희 부관참시족은 전부 함석헌 제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