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거나, 읽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복음 말씀인데 저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신부님은 문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동양의 고전을 접목해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자캐오 통장’을 만들었다는 신부님의 강론도 제게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피정이나 특강 때 받은 강사료는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축일에 받은 축하금도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그 통장의 이름은 ‘자캐오 통장’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통장에 있는 ‘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때로 자캐오 통장을 개인적인 용도에 사용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아직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강론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으니 신부님의 강론은 살아있고,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의 강론을 쓰기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들 강론의 원천은 ‘복음’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4개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복음입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표징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는데 있어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3개의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아예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만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의 공동체에는 예수님의 탄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었습니다. 마태오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담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전합니다. 루카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을 넘어서 모든 인간의 원형인 아담의 후손이며,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사실과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표징과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새로운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로고스찬가’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이 숙명입니다. 그러나 애벌레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얀 날개가 날린 나비가 됩니다. 이제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찬가를 읽으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오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요한복음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면 어떨까요? 저는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