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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6일 금요일 의정부문인협회 1월 월례회
1. 詩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2003. 문학과 지성 시인선 275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1977년 문지에 ‘정든 유곽에서’ 발표함으로 등단. 현재 계명대 교수.
14 불길이 스쳐 지나간 13 그날 네가 맨가슴으로 12 언제부턴가 너는 15 끊어지리라, 부서지리라 16 내가 너를 떠밀었으므로 18 어쩌면 솟구쳐 오르다
누구라도 앉을 수 있는 자리, 그곳에 처음 네가 들어섰을 때 부서진 더듬이 한쪽을 보았다 언제라도 머물 수 있는 자라, 그곳에 네가 앉았을 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줄 너는 몰랐다 물집이었어, 그날 불길이 스쳐 지나간 내 등허리에 부푼 너는 끝내 터지지 않는 물집이었어
그날 네가 맨가슴으로 내려앉은 건 한쪽 다리가 펴지지 않아서였던가 아직 잎새 돋지 않은 살의 한쪽 모롱이가 열리면서 나는 네 全身을 받았다 살붙이여, 잦은 흔들림 외에 다른 살이 없을 때 소금쟁이 떠 있는 水面의 안간힘으로 너를 견뎠다, 피붙이여
언제부턴가 너는 내가 꿈꾸는 푸른 잎새였다 죽음을 느낀 한 점 푸른 잎새가 내 실핏줄 끝에 매달렸다 더는 너의 身熱을 견딜 수 없을 때 내 뼈는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깎지 않은 내 손톱 머리카락 끝에서도 맑은 피 흐르는 소리 들렸다
네가 날 보고 싶어했니? 나는 너를 피했다 네가 날 찾아올 때마다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렸다 끊어지리라, 왜 몰랐던가 부서지리라, 네 잘못이 아니었다 갈라터지리라, 때 묻은 붕대를 풀고 내 惡을 보여줄까, 뛰어내려! 벼랑에서 힘껏 너를 떠다밀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내가 너를 떠밀었으므로 너는 하늘 끝에 매달렸다 너에게 묻은 내 더러운 피는 하늘길을 더럽혔다 그리고 이제 저를 기억 못하는 자줏빛 꽃 하나 내 눈 속에 피었다 잘라도 다시 돋는 억센 뿌리는 네 유골 단지를 부순다
한 번 물 위를 스치다 내 눈에 붙들린 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기억 없는 밤마다 내 눈과 눈썹 사이 스쳐 나는 새의 일생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따금 거울 속 벗은 내 몸에서 새의 날개 죽지를 보기도 한다 어쩌면 솟구쳐 오르다 멎어버린 파도였던가
2. 산문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최윤 소설집. 1992.
1953년 서울에서 출생. 서강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프랑스 프로방스대학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 취득.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강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 중.
당신이 어쩌다가 도시의 여러 곳에 누워 있는 묘지 옆을 지나갈 때 당신은 꽃자주빛깔의 우단치마를 간신히 걸치고 묘지 근처를 배회하는 한 소녀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당신에게로 다가오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말고, 그녀가 지나간 후 뒤를 돌아보지도 마십시오. 찢어지고 때묻은 치마폭 사이로 상처처럼 드러난 맨살이 행여 당신의 눈에 띄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 주십시오. 당신이 이십대의 청년이라면, 당신의 나이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야생의 빛나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먼지 낀 때에 절어 가닥난 긴 머리채에 시든 꽃송이로 화관 장식을 하고 꼭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은 초점 잃은 시선으로 머리채에 꽂힌 꽃보다 더 붉은 웃음을 흘리면서 당신 뒤를 쫓아올 것입니다. 그녀가 당신의 상의나 팔꿈치를 뒤에서 잡아당길 때, 원컨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당신에게 자석처럼 접근하는 그녀의 손을 되도록 부드럽게 떼어놓아주십시오. 그녀를 무서워하지도 말고, 그녀를 피해 뛰면서 위협의 말을 던지지도 마십시오. 그저 그녀의 얼굴을 잠시 관심 있게 바라보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바쁜 당신에게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다면, 번진 분 자국과 입술의 윤곽을 무참히 벗어난 자줏빛이 범벅이 된 뺨을 그저 가볍게 만져주시면 됩니다. 언성을 높이지도 말고 더더욱, 당신의 옷자락에 감히 때 낀 손가락을 대고자 하는 그녀에게 냉소적인 야유나 욕설을 삼가주십시오. 음지에서 양지를 갈망하다 시들어버린 그 소녀를 섣불리 동정하지도 말고 당신의 무관심, 혹은 실수처럼 일어난 당신의 미소와 손짓에 온순히 멀어져가는 그녀의 뒤에 대고 액땜하듯, 입 안의 농축된 침을 힘껏 모아 그녀가 남긴 발자국 위에 퉤 내뱉지도 마십시오... (206쪽)
...관자놀이에서 북처럼 쿵쿵대는 박동에 채찍질당하는 짐승처럼 소녀는 남자의 뒤를 쫓아가 그의 우람한 등뒤에 바짝 붙어섰다. 그때 그곳을 지나간 사람이 다른 그 누구였다고 해도 그녀는 그 사람의 뒤에 붙어섰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 남자의 발걸음에 힘들게 보조를 맞추느라 그때까지 자제했던 가쁜 숨을 단번에 터뜨렸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고 그가 후에 저주하고 구타하게 될, 그리고 더 후에는 고통스럽게 그리워하게 될 얼굴, 술기에도 불구하고 마르고 건조한 얼굴을 한, 폭발적인 호흡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멎자 그녀도 걸음을 멈추었고, 남자가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녀 또한, 큼직하고 뾰족한 이빨 새에 반쯤 타 들어간 담배를 끼워물고 따가운 햇살을 순간적으로 냉각시키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207쪽)
이성복
경북 상주 출생으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경기고교에 입학하여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1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76년 복학하여 황지우 등과 교내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 등단했다. 대구 계명대학 강의 조교로 있으면서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1』에 동인으로 참가했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평가하는 말로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었던 시인은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후 사상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했다. 그리고 낸 시집이 동양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남해금산』이다. 이 시에는 개인적, 사회적 상처의 원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정제된 언어로 표현되었다.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이 심오한 바라봄-드러냄의 변증은 80년대 우리 시단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환상소설의 한 장면처럼 납득하기 힘든 상황의 묘사, 이유가 선명하지 않은 절규 등을 담아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언어 파괴에 능란하다. 의식의 해체를 통해 역동적 상상력을 발휘, 영상 효과로 처리하는 데도 뛰어나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에 대해 냉소적이라거나 『그 여름의 끝』 이후의 관념성을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초기 시의 모더니즘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의 형이상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1991년 프랑스 파리에 다시 갔다.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시인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와 함께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테니스. 시인에게 마치 애인과도 같은 테니스는 그에게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었다. 2007년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나무인간 강판권」등으로 제5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소설가 최윤>50
쾌락과 고통의 大洋에 난 오늘도 '語망'을…
왜 당신은 문학을 하나? 여러 가지 상황이 바뀐 지금에 와서 조금 썰렁하게 들리기도 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런 물음도 필요 없이 문학에 대해 목숨을 걸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뭐라고 딱 부러지게 정의하지 않고도, 남사스럽게 원천적 질문을 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나누어 가진 것이 있어서 문학에 대한 말로 직진할 수 있었던 때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고 문학의 ‘관행’이 달라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이 내게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길거리를 넋 놓고 걸어가는 내 앞에 누군가가 마이크를 들이대고 이렇게 묻는다 치자. “안녕하세요. 취재 중입니다. 당신은 왜 숨을 쉰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어디로 숨을 쉬는 거죠?” 왜 숨을 쉬느냐고? 아마도 조만간 인간을 숨을 더 낫게, 좀 더 진보적으로, 혹은 인간의 입이나 코를 통하지 않고 숨쉬게 하는 기상천외한 과학기술이 개발됐나 보다. 그래서 취재하나 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호흡을 골라 숨을 한 번 쉬어보았을 것이다. 문학은 문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숨쉬기와 같을 것이다. 가벼운 숨, 거친 숨, 격렬한 숨, 터질듯한 숨, 메이는 숨, 잦아드는 평안한 숨, 깊은 한숨, 소리를 억누른 숨…. 매번 다르게 숨을 쉴 때마다 ‘나는 숨을 쉰다’고 생각하지 않듯 문학은 대부분의 글쟁이 들에게는 그처럼 온몸, 온 존재와 하나가 되어 있는, 리듬이 언어의 파도를 타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건 확실히 심장에 직결되어 있는, 심장을 통해서 세상과 교통하는 활동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건 모든 위대한 말을 동원해 죽어 있음을 강요하기를 그치지 않는 세상에서 드물게, 살아있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권에 충실한 활동이다. 그건 세상에 떨어져 나오면서 누구에게랄 것 없이 우렁차게 울어대는 태아의 탄생 곡성을 어딘가 닮아 있는 ‘살아있는 활동’인 것이다. 문학 속으로 걸어 들어가 문학을 ‘하기’까지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물론 어느 길로 걸어 들어갈 때 계기가 되는 사건들이나 그 길을 택하게 된 성향 같은 게 있게 마련이다. 내게는 기억에 남을 만큼 이것이다, 강조해 말할 만한 계기는 없다.
혼자 있는 것이 싫어서 끄적거리던 감상적인 글, 좀 더 커서 세상을 관찰하면서 재미로 쓰기 시작한 일기장, 문자시대에 성장한 사람이 한두 번 참여하게 마련인 글쓰기 대회에서의 크고 작은 보상 같은 것들을 문학을 하게 된 계기로 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무수한 책, 사람, 사건과의 만남이 있겠지만 거기서도 대표적으로 내세울 만큼 결정적인 몇 개의 사건은 없다. 그들은 모두 합창으로 존재한다. 대신 내게는 아주 어릴 적부터,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가 있었던 어떤 성향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명명하자면 일종의 중독 성향이다. 그것은 밤 새도록 하는 공기돌 놀이부터 시작해 세상의 온갖 잡사에 지독하게 빠져드는 경향이다. 만화도 음악도 그림도 있었지만 사람, 사랑, 사적 혹은 공적 사건들도 적잖이 그 중독적 몰입의 대상이 되었다.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대상을 달리하면서 나를 사로잡은 수집 취미도 이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기돌 놀이는 시작하면 손톱이 빠지도록 했고, 만화를 그리면 며칠을 굶고 그렸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아무리 없어도 그렇게 보낼 시간은 늘 생겼으니 이상하다. 지금도 대략 마찬가지다. 잘 살 시간은 없어도 글 쓸 시간은 있다.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다. 그런 성향이 어떻게 내게 생겼는가는 쉽게 짚어지지 않는 또 다른 문제다. 어떻건 아주 일찍이 일, 이도의 강도의 차이가 나를 주변 사람과 구별짓는 그런 성향의 문제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문학은 말하자면 내게 그런 식으로 다가왔다. 마약중독 같이 한걸음 한걸음, 야금야금 나를 끌어 잡아당기더니, 어느 순간 물귀신처럼 내 온 존재를 몽땅 잡아먹어 버렸다. 다른 중독에서는 그럭저럭 잘도 빠져 나왔는데 문학에 관해서는 상황이 다르게 진행됐다. 그렇게 문학의 바다에 빠지고 나니 홍수 뒤의 한껏 부푼 물위에서처럼, 너나 할 것 없이 구차한 삶의 모든 가재도구가 그 바다 위로 떠내려 왔고, 그것들을 집어올려 살림을 차릴 수 있었으므로 구태여 빠져 나올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중독의 기본적 생리는 무엇인가. 데일 정도로 뜨겁고 생의 상식적 경영을 내팽개칠 정도로 파국적일 수도 있지만 기본은 무엇보다도 쾌락이다. 쾌락 없는 중독이란 없다. 그래서 우선 소설 쓰는 일에 쾌락을 느껴 문학을 하느냐고 되물어도 딱히 부정할 수는 없다. 쾌락은 늘 투명한 즐거움의 색체와 고매한 의미로만 수식될 수는 없는 매우 까다롭고도 오묘한 것이라고만 대답해 두자. 한 모금만 더 빨아 들이면 꼭 죽을 것 같은데, 바로 백척간두의 팽팽한 스릴을 즐기며 금지된 한 모금을 마침내 들이마시는 파괴적 쾌락을 모든 흡연 중독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중독자들의 쾌락에는 그 전, 그 후의 고통과 씁쓰름함 혹은 회한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가 무엇에 중독되었다면 그 모든 여파나 여진을 그 무언가가 온통 흡입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문학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면 그것은 나를 사로잡았던 이제까지의 짙고 옅은 모든 중독을 모조리 흡수해 자기 것으로 하는 광대무변의 대양을 문학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 대양에 떠올라 온 허술한 살림집기 하나 타고 앉아 한 여자가 식구도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홀로 앉아 무언가를 던지고 또 던진다. 구멍 숭숭 뚫린 언어라는 이름의 어망. 어차피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어망 안으로 고기들이 끼어 들지만 대부분은 들여올렸다가 뒤집어 버리는 것이 그 사람이 무언가를 낚아올리는 일보다 더 잘 할 줄 아는 일이다. 저녁 찬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아우성소리도 그 여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고, 그렇다고 꼭 무슨 빛나는 야심찬 고기를 잡겠다고 작정을 한 것도 아니다. 찾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잡힌 것이 아닌 것은 알기에 그 일은 계속된다. 매우 위험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대충 이런 그림이 슬쩍 뇌리에 떠오른다. 사실 대부분의 독자는 물론이고 때로는 글 쓰는 사람들 당사자도 잘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있는데, 그건 문학을 하는 데 늘 똑 부러진 이유가 있진 않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하면 글을 쓰는 분명한 이유가 밝혀지는 그 즉시 그 이유가 뭣이건, 문학은 자신이 스스로 그것의 아류임을 밝히게 되는 묘한 위치에 놓이는 생리를 갖고 있다. 문학이 목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이건, 다른 영역의 활동보다 더 기능적으로 문학이 그 목적을 이루어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문학이 더 효과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다면 바로 문학은 그 목적 이상의 것을 현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문학을 왜 하는지 말 못하는 것이 좋다. 발설해서도 안되고 발설할 수도 없는 그 이유 때문에 문학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밤에만 몰래 자라는 등에 붙은 꼬리나 배꼽 속 무늬처럼 드러내 보여주지 않아야 기가 사는 어떤 것이리라. 누구나 그런 것 하나 정도는 숨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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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누구라도 앉을 수 있는 자리,
그곳에 처음 네가 들어섰을 때
부서진 더듬이 한쪽을 보았다
언제라도 머물 수 있는 자라,
그곳에 네가 앉았을 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줄 너는 몰랐다
물집이었어, 그날 불길이 스쳐
지나간 내 등허리에 부푼 너는
끝내 터지지 않는 물집이었어
혼자 낭송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