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 헌책방 정 혜 숙 경주아래시장옹기전 골목에 ‘평산 헌책방’이 있다. 회색 올 굵은 단벌스웨터를 입고계신 주인아저씨의 수줍은 미소가 난로불길 없이도 따뜻하게 맞아준다. 장황하게 출입문에다 가게 안 물건들의 설명을 적은 대다수의 가게들과 달리 단출하게 ‘헌책방’이라는 글자로 이곳이 책방임을 알리고 있다. ‘헌책방’이라는 어감이 정겹기도 하지만 읽고 싶은 책을 헐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의 첫째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아이와 일 년에 하루 날을 잡아, 서울에 있는 대형서점에서 책을 사오는 일을 몇 년째 해오고 있다. 하루 온종일 걸리는 일정에다 야멸치게 ‘정가’에서 십 원도 에누리 없는 이 일을 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다. 아이의 미래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엄마의 소망과, 여기에 다 여린 심성의 아이가 넓은 세상에 겁먹지 말고 당당 하게 서는 연습을 시키고픈 욕심이 얄팍하게 숨어있다. 헌책방은 좁고 침침하다. 그 속에 주인으로 자리 잡고 앉은 책들과 닮은 먼지와 손때들이 빼곡하다. 운 좋게 책꽂이를 차지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신간들과 아슬아슬 탑으로 쌓인 책들을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바빠졌다. 허겁지겁 책을 고르다보니 20여분 만에 팔십 권이나 골 라졌다. 한 권의 책을 낙점하기 위해 수 십분 동안 고민 하고, 골랐다가도 계산대직원이 바코드를 찍는 순간까지 도 석연치 않던 기분과는 사뭇 다르다. 노끈에 묶인 책을 풀면서 부자가 된 것처럼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일일이 헌책들과 인사를 나누며 물기 없는 깨끗 한 걸레로 책들이 말개지는 걸 보며, 나도 말개진 책들과 함께 오랫동안 행복에 젖어들었다. 책의 행간을 펼치며 노란 은행잎과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이름모를 사람들의 흔적을 만나기도 한다. 풋풋한 사람의 냄새…. 초겨울 내내 나를 따라붙던 우울의 그림자가 멀찌감치 달아났다.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책으로 성을 쌓고 앉아 푸지게 책 읽는 호 사를 누렸다. 중․고등학생일 적, 여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가난한 살림살이에 새 책 한 권, 그것도 교양으로 읽을 책사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다. 버스비를 쪼개서 산 ‘삼중당문고’판 책을 밤을 새워 읽었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깨알 같은 글자와 세로로 촘촘히 박힌 ‘톨스토이’, ‘ 헤르만 헷세’, ‘루이제 린저’는 문학소녀의 별밤을 함께 동고동락 하던 좋은 친구였다. <라이프 매일>-'목요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