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라이(武士)
사무라이(武士)
사무라이(ぶ-し, 부시, 모노노후; 무사)는 일본 봉건시대의 무사를 뜻한다.
본래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시(侍)에서 나온 말로써 귀인을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 일반적인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는 로닌이라 불리며,
칼솜씨를 제외한 기술이 없어 특별한 직업이 없이
유랑하거나 걸식하며 살인청부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쇼군(將軍)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征夷大軍 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은
일본의 영외관 장군직 중 하나이다.
줄여서 쇼군(將軍), 구보(公方), 다이주쇼군(大樹軍) ,
다이주, 다이주 공, 고쇼(御所) 등으로 불렸다.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에는
동쪽 지역에 에미시 정벌을 위해 파견된 장군의 명칭이었는데,
가마쿠라 시대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朝)가 일본 천황으로부터
이 직책을 임명받으면서 막부의 수장이자
동국 무사단의 동량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이 직책은 무가 동량 가문이 대를 이어 계승하는 경향이 생겼다.
형식적으로는 일본 천황에 의해 임명된 신하이지만,
이미 조정을 통제하고 무가를 거느리는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를 의미하는 직책이 되었으며,
외국에서는 세이이타이쇼군을 국왕으로 간주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에도 시대까지 최고 권력자 직책으로 존재하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폐지되었다.
막부(幕府)
막부는 중국에서 왕을 대신하는 지휘관의 편 진지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뜻에서 대장군의 진영, 나아가 무관의 임시 정청으로 그 의미가 파생되었다.
일본에서는 바쿠후라고 하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
(征夷大將軍, 정이대장군(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
나중에 쇼군(장군))이 되면서
세이이타이쇼군의 원정시의 본진을 가리키던 말이던 것이,
전시의 사령부가 전후에도 정치적 기관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무가 정권의 정청을 말하게 되었다.
이후 역사상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가 존재해 왔다.
하지만 사실 '막부'라는 말이 무가 정권 자체를 가리키게 된 것은
에도 시대 중기 이후의 일로, 유학자들이 창안한 용례이다.
다이묘(大名)
다이묘(일본어: 大名 だいみょう 대명[*])는 10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가지고 권력을 누렸던 영주를 말한다.
에도 시대에는 주로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막부로부터 부여받은 무사를 지칭하였다.
번(藩)
번(일본어: 藩, はん 한[*])은,
일본의 역사에서,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를 가리키는 말로,
일본에서는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키는 역사용어로 사용된다.
사무라이 정신
우리의 양반, 유럽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사무라이도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도층인데, 무형의 정신적 전통인 사무라이 문화를 알면 일본을 다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무라이 문화는 아직까지 일본인의 생활 곳곳,
모든 분야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가지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일본인 이중성의 상징인 다테마에(建て前:겉치레)와 혼네(本音:속마음),
친절과 겸손, 많지 않은 욕...이런 것들은 오랜 사무라이 시대를 거치며
신중하고 예의바르게 처신하지 않았다가는 제 명대로 살기 어려운데서 비롯됐다.
또 많은 자살, 장인 정신, 성개방 풍토, 집단/조직주의 등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열거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사무라이는 헤이안 시대 중기인 10세기 경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중앙 귀족들의 신변이나 토지 등을 지켜주고 농사를 지었으나
헤이안 시대 말기에 귀족들이 많은 땅을 차지하고 힘이 커지면서
일왕의 권위가 떨어지고 중세의 권력암투는 더욱 혼탁해져 갔다.
결국은 무사 출신의 귀족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우여곡절 끝에
최초의 사무라이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고 쇼군이 되어 실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일왕은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 복고가 이루어질때까지
대부분의 세월을 명목상으로만 최고의 위치인 왕으로 보내게 된다.
가마쿠라 막부는 집안 살림이 시끄럽던 차에
려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전쟁준비에 재정까지 악화되어 멸망했다.
전쟁을 밥 먹는 것보다 더 많이 하며
넓은 유라시아 초원을 달리며 싸움에 이골이 난 원나라.
반면에 동네 전쟁만 하던 일본이 첫 전투후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나 그들을 살려준게 엄청난 2번의 폭풍우였다.
이에 일본은 감격한 나머지 정말 신이 점지해 준 민족이라는
엉뚱한 자부심까지 갖게 되고 이 폭풍우를 가미가제(神風)라고 했다.
이 가미가제는 670여년 후 이번에는 태평양에 나타났다.
바로 가미가제 독고타이(신풍 특공대)이다.
그들 대다수는 비행기에 칼을 들고 탑승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무사도를 갖춘 사무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엉뚱하게 왜곡된 무사도,
아직도 일본이 세계적으로 높은 자살률을 갖고 있는 것은
사무라이 시대의 무사도에 의한
할복자살 풍습이 미화되어 전통처럼 내려오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라는 명칭은 귀한 사람을 옆에서 호위한다는 '
사부라우'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다.
(백제의 무사들인 싸울아비가
일본으로 건너가 사무라이의 원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들은 지窩米館?성(姓)을 가질 수 있으며 칼도 찰 수 있었고
여자야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 공공연하게 조달할 수 있었다.
또한, '키리스테고멘(사무라이에게 무례를 범하면
언제든지 칼로 목을 쳐도 됨)'이라는 권한과
어떻게 보면 특권이라 할 수 있는 할복자살을 할 수 있었다.
배를 가르면 쉽게 죽지 않기 때문에 할복자와 친한 사무라이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쳐주는 가이샤쿠(介錯)도 있었다.
이러한 할복자살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나 가이샤쿠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지고 법적 문제 등이 대두되면서 점차 없어졌다.
그러나 그들에게 특권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행동으로 임무가 주어지면 목숨걸고 해내야 했으며
특히 '겐무 시키모쿠'라는 무사의 생활규정이 있어 모범적인 생활을 해야했다.
권리도 컸지만, 의무도 그에 못지 않아 사무라이에겐 자연히 많은 고뇌가 따랐다.
여기서 그들이 심취하게 된 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불교의 禪이었다.
실제로 일찍 죽지 않고 나이가 든 사무라이들은
절에 들어가 승려로 일생을 마친 경우도 많아서 그들의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다.
옛날 일본 사무라이정신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영화 라스트사무라이에서 나오는 사무라이란
서양 중세 봉건사회를 대표하는 기사도 정신을 말하고
옛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은
일본 중세를 대표했던 사무라이들의 기사도 정신을 말합니다.
두 정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하면...
공통점 : 우선 기사와 사무라이는 둘다 전쟁을 하면서
급부상한 계급으로 일종의 무인 계급이라고 할수 있다.
또한 기사와 사무라이는 둘다 더 높은 사무라이나 기사를 섬겼다.
그리고 자신에게 할당받은 땅을 다스리며
전쟁이 나면 자신이 섬기는 주군을 위해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꽤 높은 계급이었다.
차이점 : 기사도는 간단히 말하자면
어린아이와 여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싸울때는 용감히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무사도는 주군을 목숨을 다해 충성을 바치는것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주군에게 피해를 입힐경우 곧바로 그냥 배를 가르는 할복 자살을 한다.
무사도는 상당히 친절과는 거리가 먼데,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 자신을 모욕하면 곧바로 그사람을 베어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고 한다
무사도(武士道)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즉 武士道란?
쉽게 말해 무사가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를 말하는 것인데요..
주군을 배신하지 않고 전쟁에서 질경우는
목숨으로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정도의 강한 책임감을 가졌다.
절대 복종의 미덕
약자를 보호하는 정신 등을 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잘못 알려져 있다.
원래 일본 춘추 전국시대는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설 때 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사도란게 별로 없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것 처럼...주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배신을 죽어도 안하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실제로 춘추전국시대 까지만 해도 무사들의 운신의 폭은 상당히 넓었다.
즉 돈때문에 의리를 져버리는 일이 태반사 였고..
또 그것이 그렇게 흠이 되지 않는 시대였다.
그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도(사무라이 정신) 란 언제 생겼느냐?
이건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고..
유교의식을 많이 적용 함으로써 비로소 성립한 정신이다.
특히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고 군국주의가 되면서
이정신이 강하게 국가적으로 강조 되었다고 보면 될듯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 德川家康)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 豊臣秀吉)가 죽고 정권을 장악할 때..
바로 이런 권모술수 배신과 배반을 통해서 자기가 정권을 잡았는데..
원래 뭐한 넘이 더 한다고.. 자기가 정권 잡을때 그런 식으로 잡았기 때문에..
집권후에는 유교적 이념을 접목해서.. 절대 주군을 배신해서는 안되고
특히 돈이나.. 이런 것 때문에 주군을 배신하는 행위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며 주군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등의
사상을 무사들에게 각인시키면서 무사도를 만들어 간 것이다.
전 개인적으로 일본인들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상당히 아무것도 아닌 것을 형식화하고 체계화한다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면에서 무사도도 정권유지 차원에서 형식화 체계화 된것일 뿐이다.
그것도 오랜 시간동안의 노력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배신하지 말고 잘해라.. 뭐 이런걸 배신하면 나쁜사 람..
어른말은 항상 잘들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것을 세뇌시켰다고나 할까...
간단히 말하면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구..
가르칠 넘이 없어 공부는 못하고 맨날 칼질이나 하며 자란 무식한 넘들을
우리 나라의 삼강오륜.. 세속오계.. 이런것을 무사들에게 쉽게 강조해서..
무사들의 정신이라 뭐 이렇게 이름 붙쳤다고 보시면 편하실듯...
<사무라이> 책 비평
사라지지 않는 일본의 혼, 사무라이 정신
사무라이 니토베 이나조 지음/ 양경미·권만규 옮김
생각의 나무/ 198쪽
이어령·문명비평가 2004.11.19 16:56 29'
지난 1년간 나는 일본에서 연구생활을 위해 체류하는 동안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국내외로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일본의 무가사회(武家社會)의 특성을 생각해보고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가족, 회사, 커뮤니티 그리고
국가 같은 시스템 안에서 많은 억압을 받는다. 엄청난 스트레스다.
예의 바르고 자기주장도 별로 하지 않으면서 집단에 순응한다.
한국처럼 징병제도도 없고 분단의 냉전도 겪지 않은 그들이지만
신체검사처럼 그들의 몸은 집단 속에 억압되고 규율화된다.
일본 문화에는 푸코가 말한 신체 구속의 규율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 규율의 근저에는 벚꽃과 사무라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하지 않나 싶다.
벚꽃은 일본적 미의 상징이다.
일본인들은 이 아름다운 꽃들이 일시에 시들어 지는 모습 속에서
인생의 무상과 신속한 변화에서 스스로 아름다운 청춘과 그 덧없음을 본다.
벚꽃을 바라보면서 봄의 한철 속에서 가을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일본의 이 감상적인 집단주의, 이것이 한 번 잘못 방향을 틀면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고 수천 수만명의 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군국주의의 광기로 흐르게 된다.
내 어린 시절, 뜻도 제대로 모르고 부르던
“일본 남아로 태어났다면 산병전(散兵戰)의 벚꽃처럼 지거라”라는 군가가 떠오른다.
말하자면 전쟁터에서 죽으라는 전사의 찬미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는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武士)’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그러나 벚꽃과 사무라이가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나 군국주의 이념으로 변하게 된 것은
쇼와(小和)) 10년께(1930년대)부터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왜곡 날조 되지 않은 순수한 무사도의 이미지와
그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20세기 초
세계에 널리 읽힌 니토베 이나조의 고전 ‘사무라이’부터 검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5000엔짜리 지폐에 그 초상화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국가적 인물로 추앙 받는 니토베는 도쿄 대학을 거쳐
미국의 존슨홉킨스 대학과 독일의 본 대학에서 수학한 수재였다.
국제연맹 사무차장을 역임한 그는 1905년 미국의 중재로
일본에 유리하게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는 1899년 미국에서 영어로 ‘사무라이’(원제 BUSHIDO-The Soul of Japan)란
책을 썼다. 일본의 무사도(武士道)와 일본인의 모럴을 확고히 한 이 책은
영어판 외에도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17개국에 번역되어
서양에서 일본 정신을 이해하는 교과서로 읽혀졌다.
일본인들은 창의력은 별로 없어도 이미 있는 것을
임기응변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응용술은 뛰어나다.
영어로 말하면 invention(발명)이 아니라 innovation (개발)에 강한 셈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사무라이 정신,
그것이야말로 이미 있는 것을 근대에 새롭게 개발한 이념이랄 수 있다.
일본인들의 전통 문화에 깔려 있는 무상과 같은
선(禪) 사상이나 자살문화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건너간 주자학이나 불교문화도 고루 그 내면에 깔려 있다.
사무라이 정신을 대변하는 덕목으로서
의(義), 용기(勇氣), 인(仁), 예(禮儀), 명예(名譽), 극기(克己),
그리고 비장한 죽음, 할복(割腹) 문화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무사도를 유럽문화의 기사도와 비교하고 있는 해박한 지식
그리고 문학적 표현 속에 담긴 질서 정연한 논리는
이 책이 단순한 무사도의 소개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니토베는 무사도를 힘의 집단이나 무력주의가 아니라
동양의 교양주의에 접목시킴으로써
19세기 말 문명개화에 열을 올려 엄청난 속도로 서구 문명을 흡수하고
있었던 풍조 속에서도 일본과 동양정신의 굳은 심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책의 저변에 깔려 있는 사무라이 정신,
무사도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바로 군국주의 일본의 행보를 가늠케 하는 전체주의 이념의 씨앗을 품고 있다.
니토베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는 사항은
일본 무사도의 기원 및 연원이며, 그 희생정신과 교훈,
그리고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 대중에게 미친 감화이며,
그 감화의 지속성과 영속성이다.
그에 따르면 사무라이 정신은
일본 국민의 아름다운 이상이자 종교와도 같다.
인간의 삶에 대한 본연의 자세, 사고방식 등
무엇 하나 무사도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게 없었다.
“무사는 일본의 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근원이기도 했다”는 그의 말대로
“지적인 일본, 혹은 도덕적인 일본은 직·간접적으로 무사도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무라이 정신의 가장 기본은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이다.
그 정신을 아우르며 감싸는 탐미적인 비장함에 쉬 현혹될 수 있지만,
살펴보면 대의에 모든 가치가 우선되어지는
파시즘의 정서가 이미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아들과 남편을 여의고 여승이 되었던 시인
지요죠(千代女)의 하이쿠가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이미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잠자리 잡으러 너 오늘은 어디까지 갔느냐”는 처절한 정서를
사무라이 정신을 말하는 자리에서 일본인의 정서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에 담긴 “사라지지 않을 일본의 혼으로서의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 군국주의 군부의 도덕적 토대가 되고,
오늘날까지 일본 우익의 정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면 교과서의 구실을 하기도 한다.
평화주의자 니토베는 말한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이끌어준 것은 우
리 마음 속에 살아 숨쉬는 조상들의 영혼이었다.
…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일본인이라도 표피를 벗겨보면
거기에 무사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일본인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에서 상인의 나라 근로자의 나라로 바뀌었다.
에도(江戶) 시대에는 ‘사무라이(무사)의 날’이 있었다.
11(十一)을 종서(縱書)하면 선비 ‘사(士)’처럼 보인다.
일본에서는 ‘사’라고 하면 ‘문사(文士)’가 아니라 ‘무사(武士)’를 뜻한다.
그래서 11월 11일을 ‘사무라이의 날’로 정했던 것이다.
같은 한자의 士자를 놓고서도
한쪽은 선비로 다른 한쪽은 사무라이로 읽은 두 얼굴의
한자문화권의 앞날을 점치기 위해서도 우리는 니토베의 무사도를 펼쳐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