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7:36-50
저는 올 한해 빚 청산에 몰두했습니다. 여기서 빚이라 함은 교회 개척을 하면서 지게 된 여러 사람들의 금전적인 도움과 헌신과 충성의 사랑의 빚, 교회 대지와 건물을 구입하면서 지게 된 은행 간의 빚, 여러 가정들과 개개인들의 도움의 빚, 교회와 외부 성도들 도움의 빚과, 우리교회 성도들의 헌신과 충성 등등을 청산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여 왔습니다. 그 일을 제가 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넘치도록 행하였고,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마다 즉각적인 응답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나, 외부의 도움을 주었던 성도, 비 그리스도인, 교회들에 문제를 좋은 것으로 채우심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6가지가 남아있는데 이것은 저의 마음에 걸림이 있어서 완벽하게 꺼내지 않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일을 행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목사가 성도에게 빚(금전적인 부분부터 일상의 모든 도움)진 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인 응답으로 동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넘치도록 부어주셔서 제가 다 부러울 정도였어요. 그래서 목사는 성도들에게 사랑의 빚을 많이 져야하는구나. 그리고 지혜로운 성도는 목사가 사랑의 빚을 많이 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맛보는 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번의 걸쳐서 예수님을 항상 당기는 성도의 힘에서 마음의 병인 의심이 들 때 예수님을 당겨야하고, 분열시키는 신앙의 적인 근심이 찾아오면 예수님을 당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항상 당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길을 거니실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구하는 기도, 찾는 기도, 문을 두드리는 열정적인 기도를 항상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찾는 자에게,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것을 넘어 그의 길을 함께 거닐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는 수시로, 필요하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음을 “돌이키사” 응답하여 주셨음을 성경은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통해 이 사실이 증명되어집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라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히스기야 왕이 죽을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기도의 엄청난 중요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을 얼마나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셨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 열왕기하 20:1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이런 사랑의 배려를 모세를 빼고 베풀어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을 하고 이사야는 떠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하고, 찾고, 두드림의 모든 기도를 필사적으로 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채 성에 들어가기 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러니 히스기야의 기도는 얼마 지나지 않는 기도였습니다.
열왕기하 20: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이건 엄청난 사건이고, 그와 동일하게 기도하는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희망의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돌이키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한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계획을 수정”하셨어요. 이 얼마나 놀라워요? 이 은혜가 예수님을 항상 당기는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구별된 은혜의 힘입니다.
이 사실로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면 줄 수 없는 것, 준비가 안 된 것, 뜻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실천하시고자 하셨던 것을 거두시고, 요구하는 것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기도를 성도 여러분의 개개인, 또는 가정 가정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모든 것을 해결하여 주신 결과들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조심해야할 부분은 응답해 주셨으면 반듯이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열심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 자나, 응답자에게 하나님의 책임성 질책이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응답해 주시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당기는 힘은? 하나님이 나의 생활의 보조를 맞추어 걸어주시고, 끌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하나님의 계획도 수정하셔서, 기도를 통해 요구하는 것을 채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항상 당기는 성도의 힘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첫째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우리 맘이 평안해집니다. 둘째 항상 기쁘고 하루하루 생활이 복이 됩니다. 셋째 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의 빛이 비추어 우리가 가야할 길을 넉넉히 갈 수 있게 됩니다. 넷째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을 고난이 많으나 편안히 그 길을 걸어갑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쁨의 칭송만 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주의 친절한 팔에 안겨있는 우리들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볼 마지막 부분인데요.
예수님을 항상 당기는 성도의 힘 세 번째로 죄악의 무거운 짐이 나를 억누르고 있을 때 비록 잘한 것이 눈곱만치도 없어도 바로 이때가 예수님을 힘껏 당겨야 할 때입니다. 죄악의 무거운 짐이 나를 억누를 때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가차 없이 당겨야 해요.
의심, 근심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의심, 근심은 마음만 고쳐먹으면 될 수 있지만, 오늘 우리들이 반듯이 알아야 하는 주제는 행함과 믿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죄지은 한 여인의 대해 나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 동내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기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성경에 이 여인이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자기의 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당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마도 그 성 전체가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요? 얼마나 자기의 죄 짐이 무겁고 슬펐으면 눈물로 발을 적셨을까? 이후의 이 여인은 죄도 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고, 평안한 맘을 가지고 삶의 현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와 같은 죄의 무거운 짐 때문에 예수를 등지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죄의 대해 회개를 하고도 동일하게 지난 죄 때문에 스스로 자기무덤을 파고 빠져 들어가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왜 있을까? 그것은 죄악의 무거운 짐을 예수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해서 오는 결과입니다.
즉 회개는 했지만 어딘가 찜찜한 맘이 남아있고, 전에 회개했던 죄의 문제로 억눌림을 받을 때도 있지요. 그것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예수님의 이름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함에 오는 것일 수도 있고, 그 부분이 내 약점이어서 사탄이가 계속해서 생각나게 하고 불신하는 마음을 조장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예수이름으로 찜찜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사탄을 강력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죄의 무거운 짐을 내 스스로 짊어질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당기고, 예수 이름이 생각나고, 예수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예수님이 온전히 자립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것이 변하지 않고 불안해도 그는 주의 친절한 팔에 안겨 살아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의심 중에도, 근심 중에도, 죄의 억눌림 중에도 항상 예수님을 나의 실생활에 끌어드림으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처럼 누가 뭐라고 속삭이든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처럼 그 누구의 시선에 굴하지 않는 거예요. 또한 어떤 이들의 비판적인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등장하는 여인이 그랬거든요. 그리고 그가 어떤결과를 가졌는지 우리는 알잖아요. 그것이 내게 임하게 하려면 이 여인처럼 주님께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우리 모두를 괴롭히던 심리적인 문제, 현실적 압박에서 평안해지고, 해결되어짐을 눈으로 보게 되죠.
저는 예수님을 항상 당기는 성도의 힘에서 신앙의 가장 높은 단계의 고백이 되는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길 바랍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절에 표현한 것처럼 “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은”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로 깊이 들어갔을 때,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될 때 고백되어질 수 있는 믿음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 가면 갈수록 전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에서 바울이 로마서 1장에 고백한 것처럼 종이라 고백되어지는 거예요. 여기서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 한 종의 본 뜻은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쓰시는 노예에 불과합니다.” 라는 고백 이예요.
즉 하나님께로 깊이 들어가면 자녀로 대해 주심에 감사드리고, 당당하지만 노예처럼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지기에 그렇게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는 자가 곧 나의 친구라” 해주셨지만 그 은혜가 너무나 크고 난 작기에 난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노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고백에 대해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훔치는” 고백이라고 봅니다. 의식해서 하는 고백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흠치고, 마음에 울어나서 고백되어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하나님을 온전히 훔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고백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아멘이 되시는 분은 지금 실제 자녀의 믿음의 자리이든, 노예의 믿음의 자리이든 다 같이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길을 가고 있고, 하나님께 우리 주님께서 구하여 열어 놓으신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새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이미 예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 되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여 허락받은 것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 나와 융합됨으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의 불가합니다. 내게 말씀 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예수를 빼놓고 출발 할 수 없고, 예수를 빼놓고 1초도 살 수 없음이 인정됩니다. 그러니 내 마음의 의심이 있든, 근심이 내 앞을 분열시켜 가로 막든, 죄의 억눌림이 내 모든 생각을 멈추게 하여도, 우리들은 항상 예수를 내 중심으로 당기고 있어야 하고, 예수를 당기는 모든 행위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의 억눌림의 마음이 찾아와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라고 고백이 되고, 종처럼 순종하는 믿음으로 성장하여 예수님을 항상 당기는 권세가 발휘되는 우리 모두의 믿음의 여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