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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성이 이씨인 선비가 담장을 엿보는 이야기」
<이생규장전>은 김시습이 세종 임금과의 만남이 비극적으로 종결되기까지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스스로에게 삶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이생과 최소저가 만나게 된 동기와 경위가 김시습과 세종 임금의 경우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회의 규범적 질서에 의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위기를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과정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불의의 세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회적 폭력에 대해 최소저가 절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맞서게 함으로써 세조의 정변에 맞서 세상에 대해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 절개 를 지키려 했던 김시습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이생이 불의에 의해 지배되 는 현실과 이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하늘에 대해서 반발하는 것을 통해 세조의 정변으로 사회적 폭력이 개인의 삶을 유린하는 현실의 질서와 이것을 보고도 방관하고 있는 하늘 모두에 대해 반발하고 절망했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생규장전>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만복사 저포기>와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애정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두 작품에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남녀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개입할 수 없는 두 사람만의 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사랑의 당사자인 두 사람만이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에 외적인 요인을 고려할 필요가 없이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의미만이 문제가 된다. <만복사저포기>에는 작품 속의 인물들이 아무도 개입할 수 없는 그들만의 내밀한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이것은 <만복사저포기>가 외부 세계의 개입이 차단된 상태에서 남녀의 만남과 사랑이 당사자인 두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외부 세계, 특히 적대적인 외부 세계가 개입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고통스럽게 자신들의 사랑을 꾸려갈 수밖에 없다. <이생규장 전>에서 이생과 최소저는 세 번에 걸쳐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는데 이것은 그들 사이에 적대적인 외부 세계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두 사람의 사랑은 더 이상 그들만의 내밀한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외부 세계 에 노출되어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영위되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제는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생규장전>의 사회적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시작되었 다. 이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크게 세 부류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작품의 내용을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과 대응시켜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이른바 역사 환원주의로 불려지는
2) 일련의 성과물들이 여기에 해 당된다.
3) 세조의 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금오신화창작의 중요한 동 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은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러나 이러한 연구는 작품에서 역사적 사건과 대응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데 논의의 초점이 모아져 있으므로 역사적 사건이 작품화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머무르고 있을 뿐 사실의 문학적 형상화의 문제로 논의를 진전 시키지 못하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는 작품에 나타난 유교적 윤리의식이나 도덕적 이념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4) 유교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세조의 정변이 윤리나 도덕적으로
2) 박희병, 「 금오신화의 소설미학」, 한국전기소설의 미학, 돌베개, 1997, p.231.
3) 정주동, 매월당 김시습 연구, 신아사, 1965, pp.604-605. 설성경, 「 이생규장전의 구조와 의미」, 고소설의 구조와 의미, 새문사, 1986, pp.86-88. 곽정식‧이복자, 「이생규장전의 우의적 고찰」, 인문과학논총8집, 경성대 인문과학 연구소, 2003, pp.4-8.
4) 김일렬, 「 금오신화의 작품구조」, 조선조소설의 구조와 의미,형설출판사, 1984, pp.19-21. 이상구, 「이생규장전의 갈등구조와 작가의식」, 어문론집35집, 민족어문학회, 1996, pp.330-338. 김창현, 「금오신화, 이생규장전의 비극성과 그 미학적 기제」, 온지논총28권, 온 지학회, 2011, pp.162-164. 440 韓民族語文學 第73輯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고, 불의에 맞서 절의를 지키려 했던 김시습의 행 위가 작품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는 윤리의식이나 도덕적 이념을 주제로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동반하게 되므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셋째는 작품에 나타난 사회적 현상을 폭넓게 찾아보려는 것이다. 당시의 질곡적인 사회 현실과 도덕규범에 대한 저항을 작품화한 것으로 보거나,
5) 청춘남녀의 욕망을 유가적 이념 속에 가두어두려는 현실의 질서를 비판하 고,
6)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욕망조차 억누르는 유가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7) 보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김시습이 부당하거나 부조리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현상을 고발하거나 비판하고 유교적 윤리의식이나 도덕을 드러내기 위해 <이생규장전>을 창작했다는 입장에 선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김시습이 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을 충 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김시습은 <이생규장전>에서 객관적인 사회 현상, 즉 세조의 정 변과 같은 역사적 사건 등을 끌어와서 작품의 소재로 삼았을까, 아니면 자 기 자신의 체험을 작품화 했을까? 객관적인 사회 현상을 소재로 삼았다는 입장에서 볼 때, <이생규장전>은 단종 임금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을 드러 낸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관점이다.
8) 불의에 맞서 죽음으로 써 정절을 지키려 했던 최소저의 행위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설득력을 갖 고 있다. 그러나 <이생규장전>과 <만복사저포기>는 모두 남녀의 애정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입장에 선다면 <만복사 저포기>도 단종 임금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을 다룬 작품이어야 한다.
9) 그 러나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의 인물과 사건 등을 단종이나 현덕왕후, 사육신을 비롯한 신하들과 대입시킨 다음 단종 임금에 대한 신하 들의 충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두 작품의 의미가 변별 되지 않는다. 문제는 김시습이 무슨 까닭에 단종 임금의 비극적 최후나 신 하들의 충성을 두 작품으로 나누어서 다루었는가 하는 것이다. 단종 임금 의 최후나 신하들이 보여주었던 충성의 서로 다른 점을 다루려 했기 때문 일 것이다. 그렇다면 김시습 생존 당시 단종 임금의 비극적 최후나 신하들 의 충성에 대한 해석에서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리고 있었고, 김시습 이 이것을 두 작품으로 나누어서 다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 적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입장에 선다면 이러한 문제들이 작품의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생규장전>이 김시습 자신의 체험을 작품화 한 것이라고 보 면 보다 나은 해답이 도출되어 진다.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모두 김시습 자신의 삶의 체험을 작품화 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래 서 <만복사저포기>는 고아로서 불우하게 살았던 김시습 자신의 어두운 삶의 체험을,
10) <이생규장전>은 세조의 정변에 맞서 소극적으로 절의(節 義)를 지킨 자신을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절의를 지키는 인간으로 거듭 나 기를 바라는 욕구를 작품화 했다고 보았다.
11) 그러나 여기에는 서로 다른 삶의 체험과 욕구가 어떻게 남녀의 애정이라는 동일한 소재에 의탁해서 표출되어야 했던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이 모두 남녀의 만남과 사랑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기본 명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두 작품은 모두 남녀의 애정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애정을 다루는 방식이 두 작품에는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두 작품 이 동일한 소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룬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다. 또한 남녀의 만남과 애정을 다루었다는 데에서 두 작품은 모두 김시 습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 그래서 평생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가슴에 품고 살았던 세종 임금과의 만남을 우의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세종 임금과 만났던 김 시습 자신의 체험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만복사저포기>가 외부 세계의 개입이 없는 두 사람만 의 내밀한 관계를 다룸으로써 김시습과 세종 임금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내밀한 사랑의 교류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인데 비해, <이생규장전>은 외 부 세계의 개입으로 작중인물들의 사랑이 고통스럽게 전개되고 있는 모습 을 다룸으로써 김시습과 세종 임금과의 만남이 사회적 질곡 속에서 비극적 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던 김시습 자신의 체험을 작품화 한 것이라고 할
12) 김시습, 매월당집권14.
13) 김시습, 「 유적수보」, 매월당집부록권1.
14) 김시습, 매월당집부록권1. 444 韓民族語文學 第73輯 수 있다. 그런데 <이생규장전>이 세종 임금과의 만남이 사회적 관계에서 비극적 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던 김시습 자신의 체험을 작품화 한 것이라면 그 것을 통해 드러내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회를 향해 던지는 비판의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내면의 목소리였을까? 이 문 제는 <이생규장전>, 나아가 금오신화가 어떠한 목적으로 창작되었는가 하는 창작의 목적이나 동기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 이다. Ⅱ. 시에 나타난 사회의식 송도(松都)의 낙타교(駱駝橋) 옆에 살고 있던 이생과 선죽리(善竹里) 에 살던 최소저는 빼어난 재주와 외모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어 느 날 이생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최소저와 연서(戀書)를 주고받다가 드디 어 담장을 넘어 최소저의 집으로 들어가고 최소저는 이생을 안내해서 자기 의 방으로 데려 간다. 최소저는 먼저 문방기구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방으로 이생을 안내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작품은 최소저의 방을 자세하게 묘사하면서 벽 에 걸려 있는 두 종류의 그림과 시(詩)를 소개하고 있다. 최소저의 방 한 쪽 벽에는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 한 폭과 <유황고목도(幽篁古木 圖)> 한 폭, 모두 두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림마다 시가 쓰여 있었다. 또 다른 벽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경치를 그린 네 폭의 시가 걸려 있 었다. 그런데 그녀를 위해 특별하게 지은 별당이라 하더라도 방 하나에 여섯 <이생규장전>에 나타난 사랑의 사회적 조건과 작가의식 445 점의 그림과 시가 걸려 있는 광경은 부자연스럽고 산만하다. 방 하나에 너 무나 많은 그림과 시가 걸려 있어 공간 배치에서 균형 감각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생규장전>에는 여섯 폭의 그림과 시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인용하여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다. 공간 구성 의 부자연스러움을 감내하면서까지 그림과 시를 빌어서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전달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자연스러움은 공간 배치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과 시를 장황하게 소개하고 난 뒤 작품은 여기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없이 곧 바로 이생과 최소저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가연을 맺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 문에 그림과 시의 내용과 의미가 인물들의 행위와 의미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부자연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과 시를 소개하는 부분과 가연을 맺는 인물들의 행위가 각각 별개의 사건으로 나누어져 서술되고 있을 뿐 두 사건을 의미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행위의 의미와 연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림과 시를 소개하고 있는 이 부분은 작품의 전개 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어질 수도 있다. 이처럼 최소저의 방에 걸려 있는 그림과 시를 자세하고 장황하게 서술 하고 있는 이 부분은 작품의 전개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자연스러움을 드 러내고 있다. 이것은 미숙함의 결과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배치일까? 이런 점에서 최소저의 방에 걸려 있는 그림과 시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은 <이 생규장전>이 어떤 작품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연강첩장도>부터 살펴보자. <연강첩장도>는 중국 송나라 때의 왕선 (王詵)이 그린 것으로서 이후 청나라 때까지 많은 작가들이 <연강첩장 도>의 이름으로 문인산수화의 전통을 이어가게 한 작품이다. 왕선은 이 작품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호북성(湖北省)으로 유배되었던 자신의 446 韓民族語文學 第73輯 경험과 감흥을 담아내었다. 왕선이 <연강첩장도>에 사회적으로 좌절했던 시기의 사회의식을 담아내었다는 것은 왕선과 절친한 사이였던 소식(蘇 軾)이 <연강첩장도>를 보고 지은 시 <서왕정국소장연강첩장도(書王定國 所藏煙江疊嶂圖)>와 이에 화답했던 왕선의 화답시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 다. 이 때문에 <연강첩장도>는 왕선 이후 그림 속에 사회적으로 좌절한 사람의 사회의식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었다.15) 최소저의 방에 걸려 있는 <연강첩장도>의 시에도 사회의식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붓 끝에 힘이 넘쳐서 何人筆端有餘力 이 강 위의 많은 산을 첩첩히도 그렸구나 寫此江心千疊山 웅장하구나 삼만 장의 방호산이여 壯哉方壺三萬丈 아득한 구름 사이에서 반쯤이나 솟았구나 半出縹緲煙雲間 멀고 아득한 산세는 몇 백리에 뻗어있고 遠勢微茫幾百里 가까이는 높이 솟아 고동처럼 솟아있어 망망한 푸른 물은 먼 하늘에 닿아 있네 近見崒嵂靑螺鬟 滄波淼淼浮遠空 날 저물어 바라보니 고향 생각 그지없어 日暮遙望愁鄕關 그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여 對此令人意蕭索 상강의 비바람에 배 띄운 듯하구나 疑泛湘江風雨灣16) <연강첩장도>에 있는 시이다. 방호산(方壺山)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풍
15) <연강첩장도>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했음. 박은화, 「왕선의 연강첩장도와 문인산수화의 전통」, 미술사학연구, 한국미술사학 회, 2003.9, pp.57-84.
16) <이생규장전>은 아래 문헌의 자료를 대본으로 사용하며, 앞으로 본문을 인용할 때에는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는다. 김시습, <이생규장전>, 매월당외집권 1(매월당전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 구원, 1973). <이생규장전>에 나타난 사랑의 사회적 조건과 작가의식 447 광을 그린 그림을 보고 지은 시이다. 먼저 시인은 화가(畵家)가 방호산을 중심으로 산과 강, 하늘과 구름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화폭에 한 폭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놓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시인은 쓸쓸 한 감회에 빠져들고 있는데, 그 쓸쓸함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상과 맞서다가 조정에서 추방되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자살했던 굴원(屈原)의 절망과 애달픈 심정에 비유하고 있다. 최소저의 방에 걸려 있는 <연강첩장도>의 시가 굴원을 끌어와서 사회적으로 좌절한 사람의 절망과 애달픔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강첩장도>에 이어 <유황고목도>의 시에도 사회의식이 나타나고 있다. 쓸쓸한 대나무밭의 바람소리 할 말이 있는 듯하고 幽篁蕭颯如有聲 기괴한 고목은 옛 정을 품은 듯하네 구부러져 얽힌 뿌리에는 이끼 담뿍 끼어 있고 古木偃蹇如有情 狂根盤屈惹莓苔 꺾이고 어그러진 늙은 가지는 바람 천둥 겪어왔네 老幹夭矯排風雷 무궁한 조화 자취 가슴 속에 지녀 있어 기묘한 경지를 누구에게 말을 할까 위언과 여가도 이미 세상을 떴으니 천기를 누설한들 몇이나 알아볼까 개인 창 우두커니 말없이 마주하고 신기한 필법 바라보며 삼매경에 빠져본다 胸中自有造化窟 妙處豈與傍人說 韋偃與可已爲鬼 漏泄天機知有幾 晴窓嗒然淡相對 愛看幻墨神三昧 위의 시는 <유황고목도>에 있는 것이다. <연강첩장도>가 원경(遠景) 을 담아낸 것이라면, <유황고목도>는 근경(近景)의 사물을 화폭에 담아 내고 있다. 시인은 대나무밭과 고목을 그린 그림에서 삶의 이야기를 읽어 내고 있다. 시인은 대나무밭에 부는 바람과 기괴하게 얽혀있는 고목이 무 448 韓民族語文學 第73輯 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대나무와 고목은 바 람과 우레를 견디며 긴 세월을 살아왔던 예사롭지 않은 삶의 이력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은 풍상을 견디며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무궁한 조화를 가슴 속에 지니고 천기(天機)를 읽어 삶의 이치에 두루 통 달한 기묘한 경지에 도달해 있는 존재들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대나무와 고 목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들만의 고독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보고 있다.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자신만의 고독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시인은 창(窓)을 마주하고 우 두커니 앉아서 그림 속의 의미를 생각하며 깊은 상념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연강첩장도>와 <유황고목도>는 세상과의 관계가 틀 어진 데에서 비정상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통해 삶에 대해 심각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자기 나름대로의 포부를 갖고 있다. 또한 자기의 능력을 펼치며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꿈이 좌절되고, 탁월한 능력과 재주를 갖 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소외되어 자신만의 고독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은 모두 비정상적인 세상의 모습이다. 정상적인 세상에서라면 사람 들의 꿈이 실현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 들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은 이상으로만 존재하고, 비정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 들은 절망 속에서 자신들의 꿈을 접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의 쓸 쓸한 노래를 부르며 고독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세상과 부딪쳐 상처를 받고 좌절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 <이생규장전>에 나타난 사랑의 사회적 조건과 작가의식 449 의 삶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고, 삶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삶의 바른 이치란 존재하는 것인가?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에 대해 던지는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앞에 두고 사람들 은 깊은 상념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근저 에서부터 무너지며 새로운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 이다. 그림을 보던 시인이 창을 마주 대하고 깊은 상념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까닭이다. 최소저의 방 다른 한 쪽 벽에는 사계절의 경치를 그린 네 폭의 시가 걸 려 있었다. 첫째 폭의 시는 살구꽃이 피고 나비가 날며 원앙새가 춤추는 모습을 두루 보여준 뒤 무루 익은 봄날의 경치를 보며 주렴을 걷고 봄꽃을 쳐다보는 여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7) 화창한 봄날을 맞아 주렴을 걷 고 밖을 내다보며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는 여임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폭의 시는 봄이 지나서 보리가 이삭을 배고 석류꽃이 피며 제비가 찾아와 깃드는 여름날의 풍요로운 경치를 묘사한 뒤 붉은 치마를 짓고 있 는 여인을 등장시키며
18) 시집가는 처녀의 설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뒤 이어 여인은 살구를 손에 들고 꾀꼬리를 희롱하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 을 보내는데 물이 가득 찬 연못에서 목욕하는 노자새를 등장시켜 이 시간 의 풍요로움과 충일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19) 뒤 이어 시는 오후의 저녁 햇 살이 비껴 있는 창가에서 나른함을 이기지 못해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여 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20) 둘째 폭의 시가 시집 간 여인이
17) 春色深藏黃四家 ...... 輕揭珠簾看落花(李生窺墻傳)
18) 綠窓工女並刀響 擬試紅裙剪紫霞(李生窺墻傳)
19) 手拈靑杏打鶯兒 ....... 荷葉已香池水滿 碧波深處浴鸕鶿(李生窺墻傳)
20) 懶慢不堪醒午夢 半窓斜日欲西曛(李生窺墻傳) 450 韓民族語文學 第73輯 님과 함께 풍요롭고 충일한 시간을 보내며 나른한 행복에 취해 있는 모습 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폭의 시에는 시상의 급격한 변화가 나타난다. 따스하고 풍요로웠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며 쌀쌀하게 부는 가을바람과 북쪽으로 돌아가는 기 러기 그리고 떨어지는 오동잎을 등장시켜 쓸쓸하고 스산한 이별의 정조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인은 가을벌레 소리도 구슬픈 침상 위에서 홀로 눈물짓고 있다.
21) 사랑하는 님이 머나먼 변방의 싸움터 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여인은 귀뚜라미 소리를 벗 삼아 홀로 지내 며 깊은 시름을 이기지 못해 가슴 아파하고 있다.
22) 셋째 폭의 시는 사랑하 는 님과 이별한 여인이 이별의 슬픔에 깊이 잠겨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폭의 시에 나타난 분위기는 더욱 차갑고 가혹하다. 밤 서리에 나뭇 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눈 섞인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쳐 오는 겨울을 맞아 여인은 님 그리는 상사몽에 밤을 지샌다.
23) 여인은 부끄러움을 머금고 말 없이 한 쌍의 원앙새를 수놓으며 다시 님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져 보기도 하지만, 살을 에는 서릿바람이 숲을 몰아치고 까마귀가 울고 가는 밤을 맞아 속절없이 등불 앞에서 눈물 흘리며 혼자만의 고난에 찬 시간을 보내고 있다.
24) 이렇게 볼 때 <사계도(四季圖)>의 시는 설레는 마음으로 사랑을 꽃피 우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간을 보내다가 의외의 이별을 하고 힘들고 고통스 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 여인의 삶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표현하고 있다. 결국 <사계도(四季圖)>의 시는 실패로 끝난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강첩장도>와 <유황고목도>의 시, 그리고 <사계도>의 시를 연결해 보면 최소저의 방에 걸려 있는 여섯 폭의 그림과 시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실패로 끝난 사랑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랑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던 사회적 조건을 문제 삼으며 삶의 문제에 대해 근원 적인 질문을 던져보려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생과 최소저가 처음 만나 가연을 맺는 대목에서 최소저의 방에 있는 그림과 시를 장황하 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작가가 이생과 최소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던가 하는 것을 작품의 처음 부분에 복선으로 깔아서 보 여주려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