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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 요한 1, 6-8. 19-28
무서운 심판, 인간이 인간에게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서는 요한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있었고, 요한이 그들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또 말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것이 오늘의 복음이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활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 대해 먼저 언급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루카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는 그 사실조차 적당히 얼버무리고 맙니다. 네 복음서가 하나같이 긍정하는 점은 요한은 예수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에 대한 복음서들의 그런 진술은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이기에, 그 사실은 알립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는 부담스러웠다는 것을 엿보게 합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 요한의 제자들도 그들의 스승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기 위해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비록 세례는 베풀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인물이라고도 말합니다. 복음서의 그런 언급들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가게 하겠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극찬하여 말씀하신 사실을 보면,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찍이 가담하셨던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 운동가들은 죄에서 정화되기 위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약속을 받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세례 운동에 공감하고, 가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를 보면 요한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마태 3,10; 루카 3,9)고 말하면서 엄하게 심판하실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 함께 계심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고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심판하실 무서운 분이 아니라,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는 부모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5-36)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그 생명의 아버지로 살아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면서도,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에게로 가도록 인도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을 벌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요한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섭게 심판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요한을 넘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자비하신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 곧 성령을 베푸셔서 우리도 자비로운 당신의 질서 안에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우리 주변에 당신의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살아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청해도, 찾아도, 두드려도 하느님은 반응하시지 않더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자녀가 어리고 미숙할 때,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줍니다. 그러나 성장한 자녀는 자기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합니다. 부모는 성장한 자녀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말합니다. 사람은 “부모를 떠나 자기 배우자와 하나가 된다.”(2,24) 인간은 부모를 떠나서 비로소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떠나지만,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삽니다. 자녀는 자기 일은 자기가 하지만, 부모와 마음으로 함께 있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을 따라 살면서 부모의 뜻이 자기를 통해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하느님의 영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청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회개는 그런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 주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자비로운 하느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그분의 성숙한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대림을 관통하는 소리 -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있도록 마음에 길을 냈던 소리였습니다. 그의 사명인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이 소리는 대림 전 주간을 관통하는 소리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길을 내기 위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그는 당시 유다 민족을 억누르고 있었던 인간의 불행과 비참함의 원인은 정치적, 종교적인 억압뿐만 아니라 바로 인간의 어두움, 즉 하느님과 인간의 뒤틀린 관계로부터 왔음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화를 표현하는 회개의 상징 행위인 세례 예식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과의 화해라는 사명을 수행합니다. 회개할 때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 회개는 인간이 하느님께 가까이가려고할 때 거쳐야 할 길입니다. ‘회개한다, 참회한다’라는 말은 단지 도덕적, 윤리적인 차원에서 어떤 행위나 죄를 뉘우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회개(metanoia)를 의미하는 희랍어가 우리의 사고방식, 관점, 마음과 정신의 변화를 의미하듯이, 회개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개로 나아갔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1) 회개는 자기 편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반면에 거짓 회개는 자기 편견에 사로잡히게 하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스런 경향을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를 전가시킵니다. 거짓 회개는 이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입니다. 거짓 회개는 우리를 더욱 방어적으로 만듭니다. 그 반대는 편협한 시각과 타인을 비난하는 일에 치중합니다. 거짓 회개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내몰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G.휴즈, ‘놀라우신 하느님’ 참조) 나아가 회개로 나아갔을 때, 우리의 삶이 복음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내 안의 죽어 있는 것들이 파릇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내 안의 아픔이나 고통들이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우리의 내면이 하느님의 빛으로 환해집니다.
진짜 회개... 무섭지 않아요 따라서 “회개하라” 라는 이 말은 ‘너 죄 지었으니까 고백해’ 라는 협박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부족함, 어두움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움에 내맡기라는 부르심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희망의 초대입니다. 그러기에 죄를 인식하는 것은 은총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빛이 없이는, 그분의 도우심이 없이는 자신의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는 어두움과 죄를 바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회심한다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분의 은총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회개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어두움을 보는 것이 어렵고, 힘들고, 상당한 도전을 준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스러운 경향, 내면의 어두움을 보고, 이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자신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런 나를, 그런 죄스런 나를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꺼이’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것을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웠던 마음 안으로,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 마음 자리 안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의 은총과 사랑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풍성하게 내렸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이가 당신이에요
- 김용택 나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도 그 사람이 당신입니다. 나의 가장 부끄럽고도 죄스러운 모습을 그분이 당신입니다. 나의 아흔 아홉 잘못을 전부 알고도 한 점 그이가 당신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사람이고 싶어요. 나는... 나는 당신 하늘의 첫눈 같은 사랑입니다.
-최성영 요셉 신부님(예수회 성소 담당, 청년 담당)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요한 1,6-8. 19-28)
[생활 속의 복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지난 여름 본당 할머니 10여 명과 함께 감자를 수확했습니다. 한참 밭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소주를 한잔 했습니다. 약간 취기가 오르자 할머니들이 마음속에 담아 놓았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셨습니다. 한 할머니가 질문했습니다. “신부님요! 우리 같은 할매들한테 가장 무서운 것이 뭔지 아시오?” 고민하며 시간을 지체하다가 “죽는 것”이라 답을 하자, 그 할머니는 “아니라요, 아들들과 함께 병원에 갔다가 바로 요양원에 입원하는 거라요” 라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날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배고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유의 박탈,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그리고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잠시 독일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할 때 방문했던 장애인 시설이 생각납니다. 다운증후군을 앓던 10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와 함께 시설에 와서 공부하고 한두 시간 정도 자동차 유리를 닦았습니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잘못된 시설로 생각하고 시설장 수녀님께 “왜 장애아에게 노동을 시키느냐?”고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아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지금부터 열심히 배우면 성인이 됐을 때 직업을 통해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고 자신의 완성을 향해 살아갈 수 있다. 사회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담당 교수 집에 초대받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50세가 넘은 교수 부부는 척추 장애가 있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아기를 입양해 키우고 있었습니다. 입양 계기를 묻자 “우리 부부는 멋진 아이들이 있고, 훌륭한 부모님과 좋은 나라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복을 나누고 사는 것이 하느님과 모두에게 감사드리는 삶이고 우리의 기쁨이며, 행복”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일시적인 감정으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 주기보다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외된 이들과 한가족 한 형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사회복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골 어르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잊히고, 신체적 자유가 제한된 곳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 가정집과 요양 시설로 환자 영성체를 다닙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사시는 가정집은 좀 지저분하고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볼 수 있고, 사람 향기가 납니다. 시설에 계신 어르신들은 정말 깔끔하고 잘 정리된 곳에서 생활하시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없고 초점 잃은 눈동자를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생명다움’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서양 역사를 보면 최초의 종합병원은 정신 장애자와 알코올 중독자 등 농경 사회에서 필요 없는 사람들을 모아 두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산업 사회에 접어들며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치유에 목적을 두고 환자의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곳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게 됐습니다. 일부분은 수용 시설이 돼 사회로부터 환자를 격리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사회복지 시설들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복지 시설인 음성 꽃동네, 멕시코의 시골 여자아이들 4000여 명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있는 거대한 시설 ‘소녀의 집’, 2000여 명의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서 돌보는 페루의 ‘거룩한 가족 어린이 공동체’에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너무나 많은 가난한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일상에서 많은 장애인과 함께 어울리고 공부하고 놀며 친구로 지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거리에서 장애인을 만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누구를 위한 교통수단이지요? 우리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손은 있는데 잡아줄 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유다인들에게 공적으로 자신의 신원과 임무를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때마다 낭독하면서 사제의 참된 임무와 하느님 자녀의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받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빛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자유롭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 따스함과 평화를 주십니다. 이것이 자선이 아닐까요? 본당에서 열린 시골 음악회가 끝났습니다. 오늘은 모든 일을 내려놓고, 할머니들께 배추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서 맛있게 먹고 함께 수다를 떨며 성탄을 준비할까 합니다. -박재식 토마스 신부님(안동교구)
2014년 나해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정체성의 힘
얼마 전 MBC ‘휴먼다큐 - 사람이 좋다’에 폐암 합병증으로 사망한 고 김자옥씨의 가족들이 출연해 고인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고인의 남편 오승근씨는 암임을 알고도 치료를 미루고 고인이 tvN의 ‘꽃보다 누나’에 출연했던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병원에서는 오랜 여행으로 피곤해지는 ‘꽃보다 누나’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말렸고 촬영을 위해 출국하기 한 달 전부터 항암치료를 권유했었지만 고인은 치료 대신 프로그램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길에 있는 벤치에 눕기도 했고,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대성당에 들어가서는 목 놓아 우는 모습을 보인 바 있습니다. 김자옥씨는 ‘그냥’ 울었다고 하지만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돈을 벌어야만 했던 이유를 밝혔습니다. 어머니의 수첩에는 오영환씨의 결혼 준비과정이 빼곡히 적혀있었습니다. 그리고 암인 것을 알고도 결혼식을 앞당기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더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해주고 싶고 저것도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인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픈 와중에도 작품을 쉬지 않았다는 얘기에 대해 제작진이 묻자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는 100% 아들 결혼식 자금 때문에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인은 지난 11월 16일 사망했고 아들의 결혼식은 내년 3월 예정입니다. 고 김자옥씨가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이유는 자신이 어머니로서 그 일을 해야 하는 확신이 죽음보다도 강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오더라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을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이 정체성은 죽음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은 누구요?” 하는 정체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왜 세례를 주는 거요?”라고 하는 행위의 이유에 대한 물음입니다.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역할을 하도록 파견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따집니다. 즉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임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이들은 “메시아를 위한 예식을 하면 우리가 해야지 당신이 어떠한 권위로 근거도 없는 예식을 하는 것이요?”라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너희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남이 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 충실히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와 일은 열심히 하고 있을 지라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며 무작정 시키는 일만 하고 있었던 당시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완전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그가 행하는 세례를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반면 성전에 가서는 탁자를 뒤집어엎고 장사꾼들을 내쫓습니다. 그들은 평생 성전에서 봉사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뽑아주신 하느님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아는 것은 나를 보내신 분을 아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 나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로부터 파견되었는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위대한 수학자입니다. 그는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의 스승이기도 하며 러셀과 함께 여러 책을 저술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엥글리컨 개신교를 믿어오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학과 수학에 심취하면서 신앙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대대로 이어오던 신앙을 버리고 교회와도 담을 쌓고 살아갔습니다. 그 지방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외출 중이었던 그는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가냘픈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눈구덩이에 빠져 있는 늙은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서둘러 눈덩이에서 할머니를 건져주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나가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는 저 눈구덩이 속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오” 하고 말했습니다. 큰 확신을 갖고 찬송을 부르게 하는가? 내가 탐구하고 있는 철학이나 수학, 아니 어느 학문이라도 저 할머니가 갖고 있는 저런 확신을 줄 수 없지 않는가?’ 말하자면, 그가 젊어서는 신앙에 대해 회의하였으나 늙은 이제는 그토록 자신 만만해 하던 학문에 대해 회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버렸던 신앙을 다시 찾기로 하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기에 자신의 원천인 하느님을 모른다면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나를 만들어주시고 세상에서 살게 해 주신 분을 알아야만 합니다. 정체성은 관계에서 확실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로부터 파견 받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파견 받았다면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파견 하신 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았다면 마지막 날 주님께서도 “나도 너를 모른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저는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고 기적과 예언도 행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그분은 여전히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파견해 주신 분을 아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진정 잘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그분은 점점 커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음을 깨닫고 그저 찬미와 흠숭만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그래서 그분의 은혜에 한없이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정체성이 확실할 때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당당하게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이 감사하며 살아가기에 힘이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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