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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기적이나 환시, 특별한 체험, 그거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열심한 교우들 가운데, 기적이나 환시,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 뵐 때마다 꼭 말씀드립니다.
“그거 결코 좋은 것 아닙니다.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아주 예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그런 현상을 허락하십니다만, 그로 인한 기쁨과 황홀함은 한순간 뿐입니다. 그 뒤로 남게 되는 것은 혹독한 고초와 오해, 편견과 십자가 길입니다. 그걸 묵묵히 감수해야만 하는 긴 여정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딱 그러셨습니다. 그분은 사제가 된 지 1년이 지난 1911년 9월 7일부터 몸에 예수님의 오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구름처럼 비오 신부님에게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비오 신부님은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새벽 1시부터 몰려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당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에게 발생한 특별한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은 관구는 1919년부터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습니다.
정말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안 그래도 오상으로 아프고 쓰려 죽겠는데, 의사들은 상처 위아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상처 내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비오 신부님은 천상의 비밀이 모독당하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23년부터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일체의 편지에 대해서도 답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비오 신부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3천여 명의 신자들이 격렬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오 신부님은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고백성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당국이 비오 신부님에게 허락한 것은 오직 미사와 고백성사뿐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미사와 고백성사를 온갖 정성을 다해 집전했습니다.
1시간 넘게 지속되는 미사는 늘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보통 사제들은 1분도 채 안 걸리는 거룩한 변화의 기도는 5분 이상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기도를 드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집전하신 미사에 참석했던 한 사제는 ‘머리털 나고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간 그 사제는 자신이 봉헌했던 성의 없던 미사에 대해 크게 반성하면서, 지극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답니다.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비오 신부님께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오상을 똑같이 받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그의 생애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카푸친 수도자로서 보여준 무조건적인 순종과 한없는 겸손의 삶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으로 인해 숱한 오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 깊은 수도원 안에 유폐되곤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교회에 대한 신뢰, 장상에 대한 순명의 강도는 점점 더 커져만 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성경 말씀을 더 깊게 이해하고 깨닫는 유일한 방법>
복음: 루카 8,16-1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고 하시며, 반드시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인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며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만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성경의 앞뒤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앞에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말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뒤의 내용은 진정한 당신의 참 가족은 당신의 핏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씨가 우리 안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내용 안에서 이 부분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더 많은 은총을 받으려면 열매를 맺으려 해야 합니다. 그 열매는 길과 같지도 않고 돌밭과 같지도 않고 가시밭과 같지도 않아야 맺힐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세속-육신-마귀, 곧 탐욕과 성욕, 교만을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읽어야만 그 깨달음이 있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는 5세기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약 17년 동안 깊은 죄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12세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매춘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회심은 여전히 죄 많은 삶을 살면서 군중을 따르려는 호기심과 열망으로 예루살렘 순례에 합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 현양 축일에 성 십자가를 공경하기 위해 무덤 성당에 들어가려 했으나 초자연적인 힘이 그녀의 길을 막았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 끝에 마리아는 자신의 죄악된 삶이 자신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깊은 통회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성당 밖에 서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이콘을 바라보며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를 존경하게 된다면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바꾸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도 후에 그녀는 저항 없이 교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심오한 회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례 중에 루카 복음에서 이 말씀을 듣고 그녀는 깊은 회개를 경험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그녀는 앞서 자신이 기도했던 이콘 앞에 돌아가서 감사기도를 올리고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요르단을 가로질러 세례자 요한이 살았던 광야, 즉 예수가 세례 받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찾아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그 즉시 광야로 들어가 이후 47년을 세례자 요한처럼,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속죄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기간에 그녀는 극심한 유혹과 육체적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전생에 대한 기억과 음식과 위안의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기도와 말씀 묵상, 금욕으로 이러한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생애 말년에 요르단 근처 수도원에 살고 있던 성 조시마(Zosimas)라는 수사를 만났을 때 알려졌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막에서 거룩한 은수자를 찾던 조시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그녀의 무식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신성함과 성경 지식에 놀랐습니다. 그녀는 성경에 대한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기했습니다.
마리아는 조시마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성체를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1년 후 조시마가 성체를 모시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고, 조시마가 그녀를 묻어 그녀의 거룩함을 확인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세.육.마.에서 자신을 이기려는 이들에게 깨달음과 빛을 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정원에 앉아 있을 때 근처 집에서 라틴어로 "Tolle, Lege", 곧 "집어서 읽어라."라는 문구를 부르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근처에 있는 성경으로 달려가서 무작위로 펼쳤고, 그의 눈은 로마서 13,13-14의 한 구절에 머물렀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3-14)
이 말은 번개처럼 아우구스티노의 마음을 강타했습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 순간을 즉각적인 명확성과 확신의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그 순간 이전의 삶을 버리고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른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해박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도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는 말로 완전히 바뀌었고, 성 프란치스코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로 완전히 변화되었으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미지근한 삶에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0)라는 말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말씀이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게 만드는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로 자기를 변화시키려 할 때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을 읽는 방식이고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방식입니다. 자신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사랑이 많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지향으로 읽어야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수준에 따라 항상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8,16-18: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16절). 어두움을 밝히고 다치거나 헤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거기에서 제 역할을 하여야 한다. 등불의 존재 이유는 방에 들어오는 사람을 비추어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데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두움을 밝혀주는 그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구원의 빛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삶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 앞에 나의 믿음의 등불을 가리거나 덮어두어서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의 삶의 길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또한 거룩한 교회를 “등경”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비추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운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그러나 이 삶이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는 집안에 어느 누가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보여주자면, 시련과 고통이 따르게 되고 인간적인 정마저 금이 갈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수용하기 힘든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야 하는, 그리고 새로이 모든 것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방어적인 본능이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것 같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진정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느끼며,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이 자유와 구원을 체험하게 해주는 삶임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올려놓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8절)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들은 계속 더 큰 하느님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중요성도 모르고 그러한 말씀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씀을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이 세계를 아이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수만 명의 어린이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안전띠와 유아용 의자를 의무화했습니다. 담배로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담배를 어린아이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성년자의 흡연이 늘어나면서 가게 점원에게 나이를 확인받으면서 직접 담배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보호하는 방법을 계속 만듭니다. 그러나 그 보호를 잘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스마트폰입니다. 그 중독성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전자기기는 사탕이 아니라 마약이다’라고 IT 전문 매체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은 말합니다. 생각을 멈추게 하고, 많은 자극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속 보다가 습관성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통, 수면장애, 기억력 상실 등의 증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기에 우울증까지 심해진다고 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그 편리성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부작용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남들도 다 쓰고 있다는 생각, 편리하다는 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름 캠프 전에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캠프 안 갈꺼에요.”
아이뿐이 아닙니다. 현대인 모두가 중독된 것이 참 많습니다. 술, 마약, 쇼핑, 드라마, 게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러한 중독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풍요와 편리보다 더 높은 가치를 쫓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 많이 바라보고, 주님을 높이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밝게 살 수 있습니다.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감추어질 수 없고, 밝게 빛나는 빛처럼 멀리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계속 감추어집니다. 자기를 중독에 빠지게 하는 풍요함과 편리함만이 오히려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면서, 주님 말씀은 고리타분한 옛이야기처럼 취급하며 감추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갖고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갖지도 않고 오히려 피하면서 세상의 것만 가지려는 사람은 어떨까요? 주님의 말씀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지만, 세상의 것은 죽음 이후 완전히 내게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갖고, 무엇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지혜로운 이가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자가 하는 일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원효 스님).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8,16)
말씀의 등불이
교회의 등경 위에서
한결같이 빛나고 있어야
길 잃은 사람들이
멀리서도
그 불빛을 보고
교회를 찾아간다네.
말씀의 등불이
집안의 등경 위에서
따스하게 빛나고 있어야
가족들은
그 불빛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내가 예수님을 위해
버린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의 자존심.
나의 고집.
나의 중심적 삶.
시기 질투.
미움과 증오
평화를 깨뜨리는 말과 행동들.
지지 않으려 하는 마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이것들을 버림으로써
더 가지게 되는 역설적인 삶!
이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더 탐하면 탐할수록
우리는 더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힘을 빼고 머무르며 버림으로써
오늘도 하느님께
더 많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사제이기를
두 손 모아 청해 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신다.>
▥ 잠언의 말씀입니다.3,27-34
내 아들아, 27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28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29 이웃이 네 곁에서 안심하고 사는데 그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30 너에게 악을 끼치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하고도 공연히 다투지 마라.
31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길은 어떤 것이든 선택하지 마라.
32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하신다.
33 주님께서는 악인의 집에 저주를 내리시고 의인이 사는 곳에는 복을 내리신다.
34 그분께서는 빈정대는 자들에게 빈정대시지만
가련한 이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말씀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