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생 완벽(趙生完璧)이란 자는 진주(晉州)의 사인(士人)이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정유년(1597)의 왜변(倭變.정유재란)을 만나 붙잡혀 일본(日本) 경도(京都)로 들어갔으니, 그곳은 바로 왜황(倭皇)이 있는 곳이다. 왜를 위해 복역(服役)하는 것이 너무 고되어 고향을 그리며 늘 도망쳐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 왜놈들은 생명을 경시하고 이익을 중시하여 상업을 농업처럼 여기고 배를 말처럼 여겨 바다 건너 남방의 머나먼 제국(諸國)을 두루 다 다녔는데, 조생이 문자를 안다는 이유로 그를 끌고 배에 올라 갑진년(1604)부터 세 차례에 걸쳐 매년 안남국(安南國.베트남)에 갔다.
안남은 일본과 해로(海路)로 3만 7천 리(里) 떨어진 곳인데, 살마주(薩摩州.가고시마)에서 대양(大洋)으로 나가 중국 장주(漳州)와 광동(廣東) 등의 경계를 지나 안남 흥원현(興元縣)에 당도하니, 흥원현은 그 나라 동경(東京)에서 80리 떨어진 곳이다. 국내는 안남국과 교지국(交趾國) 둘로 나뉜 채 서로 전쟁을 벌여 승부가 나지 않은 상태이다.
문리후(文理侯) 정초(鄭勦)라는 자는 환관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는데 나이는 80세이고 거처가 매우 호화롭고 그 지역이 대부분이 띠풀 지붕인데 그의 집만 기와를 썼고, 기와는 유회(油灰)로 봉합하였으며, 공작새의 깃털로 비단을 짜서 장막을 만들었다.
하루는 문리후가 조생을 불렀는데, 조생이 가보니 고관(高官) 수십 명이 벌여 앉아 연회를 하고 있다가 조생이 조선인(朝鮮人)이란 말을 듣고 모두 후대(厚待)하며 술과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생이 잡혀온 연유를 묻고는 “왜놈이 귀국(貴國)을 침략했다는 말은 우리도 들었소.”라고 하면서, 자못 측은해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어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주며 “이것은 귀국 이지봉(李芝峯)의 시(詩)요 (지봉은 바로 이수광의 호이고, 시는 바로 수광이 정유년에 중국에 사행을 갔을 때 그 나라 사신에게 준 것이다) 당신은 고려인(高麗人)이니 이지봉을 잘 알 것이오.”라고 하였다. 조생은 시골 유생으로서 연소(年少)할 때 잡혀간데다가 또 이름을 대지 않고 ‘지봉’이라고 하였기에 지봉이 누군지 알지 못하자, 그들이 한참을 탄식하고 의아해하였다.
조생이 그 책을 뒤적여보니 고금의 명작(名作)을 기록한 것이 수백 편이나 되었고, 첫머리에 ‘조선국 사신 이지봉 시(朝鮮國使臣李芝峯詩)’라고 쓰고는 주묵(朱墨)으로 비점(批點)을 해놓았다. 또 그 가운데 “산은 기물을 내니 상골이 넉넉하고[山出異形饒象骨]”라는 한 연(聯)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에 상산(象山)이 있으니 그래서 더욱 기묘하다.”라면서 서로들 칭찬해 마지않았다.
며칠 뒤에 유생들이 또 자기들 집에 오도록 청하고서 술과 음식을 잔뜩 대접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귀국은 예의지국(禮義之國)이니 우리나라와 체모가 같다.”라고 하면서 매우 지극하게 위로하였다. 얘기하는 도중에 책 한 권을 꺼내 보이며 “이는 귀국의 재상 이지봉의 작품이오. 우리 유생들이 저마다 베껴 쓰고 암송하는데, 당신도 볼 만할 것이오.” 하였다. 조생은 조만간 죽을 사람이란 생각에 기억해둘 뜻이 없었지만 그래도 종이와 붓을 청하여 몇 편만 베껴 쓰고 배로 돌아갔다. 그 후에 학교의 생도들을 보니, 과연 이 책을 끼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문리후가 조생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여기서 중국으로 쇄환(刷還)해야 거기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여기 머물러야 할 거요.” 하였다. 조생은 그의 말을 따르려고 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속임수가 많아 믿기 어렵단 걸 알았고 또 본국과 너무 멀다는 말을 듣고 결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나라는 남녀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다리에 신발도 신지 않았으니, 관직이 높은 자도 그러하였다. 어른들은 이를 꺼멓게 칠하였다. 그 사람들은 장수하는 이가 많았는데, 어떤 노인은 머리카락이 하얘졌다가 다시 누렇게 되고 치아는 어린아이 같았으니, 이른바 ‘황발아치(黃髮兒齒)’라는 것이다. 그의 나이를 물어보니 120세였는데, 100세를 넘긴 자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또 풍속이 독서를 숭상하여 시골마을에도 왕왕 학당(學堂)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이들은 모두 《몽구(蒙求)》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 즉 통감을 암송하였고 더러 시문(詩文)을 익혔는데 글자를 읽을 때 합구성(合口聲)을 쓰는 것이 우리나라 자음(子音)과 유사하다. 단 종이가 귀하고 서적은 모두 당본(唐本)이다. 또 조총(鳥銃) 익히는 것을 좋아하여 어린아이들도 다 쏠 줄 안다.
그 지역은 매우 따뜻하여 2, 3월에 수박[西瓜]이나 참외[甜瓜] 등의 과일이 있고, 논에 아무 때나 씨 뿌리고 경작하니, 3월에 한쪽에선 논을 갈고 한쪽에선 곡식이 익고 한쪽에선 바야흐로 수확을 하였다. 날씨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하며, 바닷가이긴 하지만 해산물이 풍부하진 않다. 과일은 귤(橘)과 여자(荔子) 외에 여타의 다양한 과일은 없어, 곶감[乾柹]을 가져다 줬더니 뭔지 몰랐다. 다만 늘상 빈랑(檳榔)을 푸른 잎과 함께 먹는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빈랑수(檳榔樹)는 키가 몇 길[丈]이나 되고 대나무처럼 곧게 솟아 마디가 있으며, 잎은 파초(芭蕉)와 유사하다. 목화수(木花樹)는 매우 높고 큰데 밭머리 어디에나 있으며, 꽃은 작약(芍藥)만큼 크고, 방적(紡績)을 하여 포(布)를 만들면 매우 질기다. 뽕나무는 매년 밭을 일구어 벼나 보리처럼 심으며 뽕잎을 따서 누에를 먹이는데, 비단이 제일 넘쳐나서 귀천의 구분 없이 모두가 입는다. 목이 마르면 사탕수수[蔗草]를 먹고 밥은 겨우 배나 채울 정도만 먹으며, 늘 소주(燒酒)를 마시고 침향(沈香) 가루로 기름을 만들어 온몸에 바른다.
멧돼지처럼 생긴 물소[水牛]가 있는데 색은 검푸르며, 민가에서 사육하여 경작에 쓰거나 잡아먹기도 한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낮에는 소들이 전부 물에 들어갔다가 해가 진 뒤에야 나온다. 그 뿔은 매우 큰데 바로 지금의 흑각(黑角)으로, 왜놈들이 이를 사가지고 온다. 코끼리는 오직 노과(老撾) 지방에서만 나오는데 상산(象山)이라고 하며, 덕스런 모습이 있고 상아가 제일 긴 것은 거의 5, 6척(尺)에 달한다. 국왕은 코끼리를 70두(頭)나 기르며 나갈 때 코끼리를 타는데, 코끼리 중에는 사람처럼 절하고 꿇어앉는 것도 있다. 공작(孔雀)ㆍ앵무(鸚鵡)ㆍ백치(白雉)ㆍ자고(鷓鴣)ㆍ호초(胡椒)도 많이 난다.
조생이 한번은 여송국(呂宋國.필리핀 루손섬)에 따라갔는데, 여송국은 서남쪽 바다에 있다. 그 땅에선 보화가 많이 생산되고, 사람들은 모두 삭발하여 승려가 된다. 유구(琉球.오키나와)는 국토가 매우 작고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상투를 한쪽으로 틀고 두건을 쓰며, 칼이나 총 같은 무기를 익히지 않는다. 살마도(薩摩島)에서 대략 3백 리 떨어진 곳에 유황산(硫黃山)이 있는데, 멀리서 보면 산빛이 모두 누렇고 5, 6월에는 늘 연기와 화염에 휩싸여 있다.
조생은 일본에 있을 때 경도에 있는 서복사(徐福祠)를 보았는데, 서복(진시황때의 方士로, 서불의 후예)이 주관을 하며, 불법(佛法)을 배우고 식읍(食邑)이 있으며, 국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또 왜인(倭人)은 우리나라 서적을 최고로 중시하여 많이들 보물로 간직하는데, 안남인들도 많은 재물을 들여 구입한다.
조생이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수면이 서쪽은 높고 동쪽이 낮으며, 광동(廣東)과 70리 떨어진 바다에 계룡산(鷄龍山)이 있는데 산이 높고 험하며 지면은 모두 얕은 여울이다. 계룡산 동쪽으로 물이 꺾여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배가 다니기 어려워 반드시 산 안쪽을 경유해서 지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류하여 동해까지 이르고야 마니, 물살이 사납고 세찬 것이 이 정도이다. 일본에서 밤낮없이 40일 혹은 5, 60일을 가야 비로소 안남에 도달하는데, 돌아올 때는 물길을 따라 15일이면 일본에 당도할 수 있다. 대해(大海)에선 배가 순풍을 타고 가기 때문에 3, 4, 5월에는 늘 다닐 수 있지만, 6월 이후로는 배를 운행할 수 없다. 또 왜선(倭船)은 작아 대해를 건널 수 없기에 백금(白金) 80냥(兩)으로 당선(唐船)을 구입한다. 그 배에는 모두 180여 명이 타는데 뱃길에 익숙한 중국인이 선장이며, 지남침(指南針)을 이용해 방향을 정한다. 또 노끈을 아래로 드리워 해저(海底)의 흙을 낚아 올려 그 색으로 방위와 원근을 구별한다.
기괴한 일을 본 것이 매우 많은데, 바다에서 꿈틀대는 용이 심상하게 출몰하는 것을 보았다. 하루는 수십 보 밖에서 푸른 용이 갑자기 나타나 뱃사람들이 실색(失色)하였는데, 이윽고 시커먼 안개가 하늘에 잔뜩 끼더니 오색 무지개가 덮이고는 비와 우박이 뒤섞여 내리고 파도가 끓어오르듯 용솟음쳐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의 뒤집힐 정도로 진동하였다. 이렇게 서너 차례 반복하였으니, 이는 용이 솟구쳐 하늘로 날아오르려다가 좌절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뱃사람들은 용을 만날 때면 늘 유황(硫黃)과 닭털을 불사르는데, 그러면 용이 그 냄새를 싫어하여 피해 간다. 그런데 이 날은 창졸간에 산 닭 수십 마리를 잡아 불에 던져 태웠는데도 용이 또 배에 다가오려 하기에, 뱃사람들이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수십 개의 총포(銃砲)를 일제히 발사하자 용이 홀연히 물속으로 사라져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생은 정미년(1607)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들어갔을 때에야 왜인 주인에게 애달피 호소하여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의 노모와 아내가 모두 무탈하였으니, 이 또한 특이한 일이다.
저 안남은 우리나라와 몇 만 리나 떨어져 있어 예로부터 교통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아득한 바닷길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조생은 동쪽 끝인 일본에서 교지와 안남에 갔는데, 모진 풍랑을 겪으며 오랑캐 지역에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는 전고에 없던 일이다.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말이 진실하고 미더우며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스러우면 오랑캐 나라에서라도 행해질 것이다.[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行矣]” 하였는데, 조생 같은 이는 거기에 거의 근접했다 하겠다. 게다가 조생은 이름이 완벽이니('完璧'은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어떤 사물이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거나 또는 일처리를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게 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도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註: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