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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야! 너는 나의 영원한 추억이었어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영우가 여느 날과 변함없이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공장장이 갓 구워낸 빵을 봉지에 담아서 진열을 하고 있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속도도 빨라지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기까지 했다.
아침 할 일을 끝내고 잠시 한가한 틈에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아련한 상상을 하며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소로로빵 백 개만 주세요”
하는 손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빵 백 개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난 영우는 반사적으로
“네 손님 잠시만요”
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소보로빵을 백 개까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영우가 죄송한 표정으로
“그 만큼은 미리 주문을 하셔야 되는데요”
하며 손님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영우는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용주와 닮은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닮은 게 아니라 그냥 용주였다. 놀란 눈을 깜박이며 멍하게 서 있는 영우에게 용주가 앞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보듬어 안았다. 영우도 용주의 허리를 감았다.
“잘 지냈어?”
“어떻게 된 거야?”
“며칠 전부터 옛날 생각이 나더니 어제는 유난히 네가 보고 싶어지더라고 ,,,”
영우가 용주의 허리에 감은 손을 풀며 의자를 가까이 밀어주었다.
“여기에 앉아 내가 커피 타줄게”
급하게 커피를 타오며 영우가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어제 저녁에 너네 집에 전화를 해 봤더니 가르쳐 주더라, 먼저 전화를 하고 오려다가 제과점을 한다기에 그냥 와도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서 이렇게 불쑥 찾아
왔어, 실수한 거 아니지?”
“그럼! 잘 왔어”
“나는 한 번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어 “
“나는 바쁘게 사느라고 옛날일은 잊고 살았는데, 그래도 너는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그때가 좋았는데 그치?”
“맞아 그때가 좋았지. 아마 우리에게 그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나에게 너는 첫사랑이었던 같아”
“,,,,,,,,,,,,,,,,”
“우리 첫사랑 아니었니?”
“글쎄 그런가,,,그런지도 모르겠다”
“무슨 대답이 그래. 하기야 10년도 훨씬 지난일인 걸, 그게 뭐 그리 중요 하겠어”
‘첫사랑,,,’ 용주의 실망스런 표정을 애써 외면 한채, 첫사랑의 단어를 되새겨 보다가 푸르렀던 여고시절의 향수가 살갗을 스치며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결혼은 했어?
영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아직”
“왜 여태껏,,,?
“으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용주는 영우를 못 잊어서 다른 여자하고는 연애도 못했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너는 결혼했지? 너네 어머님이 말씀하시더라,,,”
“응 아이도 둘이나 있어”
“축하한다”
“그게 뭐 축하받을 일인가,,, 진영이 소식은 알고 있어?”
“모르고 있었어? 진영이 의숙이랑 결혼했잖아, 너 정말 친구들하고는 완전히 담쌓고 살았구나”
“그랬구나! 나는 결혼하고 아이 낳아서 키우느라 옛날일은 거의 잊고 살았어, 그때도 걔네들 사이가 보통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결혼을 했구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럼 우리는 첫사랑이라서 이루지 못한 거란 말이네,,,”
“우리가 무슨 첫사랑이야 그냥 친구였지”
“그런 게 첫사랑 아니었어?
‘용주야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네가 알지 못하는 가슴 시린 또 다른 사랑의 추억이 있었단다’ 병휘와의 사연을 떠올렸지만 차마 입 밖에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래 너 말이 맞을 수 도 있겠다. 너하고 있었던 일들은 모든 게 아름답게 남아
있으니까,,,”
영우가 이렇게 말을 하며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해 본다.
영우의 아리송한 대답에 용주가 커피잔을 들며 아주 작은 소리로 응얼거렸다.
“커피 맛이 좋다. 커피를 달게 탔네, 내가 단거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그걸 왜 몰라,,, 옛날 우리들 약속장소 정할 때는 맨날 제과점이었고 너는
항상 크림빵만 먹었잖아, 나는 소보로빵 만 먹고 그래서 우리는 빵 갖고 싸울 일이 없었잖아”
“맞아 그랬었지 그래서 네가 빵가게 하는구나,,, 하하하”
“아참 내 정신 좀 봐”
영우가 갑자기 생각난 듯 일어나더니 크림빵을 한가득 접시에 담아왔다.
“얘기하느라고 너한테 빵맛도 못 보여주고 보낼 뻔했네”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네가 만든 빵을 먹게 될 줄이야”
용주는 크림빵을 하나 집어 들며 지난날 자신이 겪었던 많은 일들을 풀어놓았다.
영우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사회인으로 살아갈 동안 용주는 격변기
대학생들이 맞닥뜨려야 할 운명적인 고난을 겪었었다. 국민들을 탄압하는 정권에
맞서서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노동현장 곳곳에선
노동자 탄압에 맞서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생들도 이에 동조 데모를 벌였는데, 새내기 대학 생활을 맛보기도 전에 거리로 나서야만 했다. 용주가 2학년 되던 해엔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에 대항해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거리로 나서게 됐다. 학생들이 학교 책상에만 앉아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사치에 불과했다. 이때부터는 용주도 편하게 공부에 열중한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용주는 독재타도를 외치며 데모 대열 맨 앞에 서는 일이 다반사였고, 어느 날부터는 노동자 권익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길거리 데모와 노동운동이 용주를 감옥에 가게 만들었는데, 감옥 생활은 그야말로 인간의 인내에 한계를 시험하는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했다.
용주와 함께 수감된 학생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교도소 안에서도 단식 투쟁을 했다. 교도관들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일명 칠성판이라고 하는 관짝 뚜껑 위에 눕혀
놓고 팔다리를 묶은 채 목구멍 깊숙이 고무호스를 밀어 넣은 상태에서 미음을 흘려보냈다. 학생들은 그 조차도 먹지 않겠다며 몸부림을 쳤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의지와 달리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달콤한 미음의 안락함이
온몸으로 퍼지며 세포 구석구석으로 전달되는 순간 맥이 풀렸다. 강력한 의지력으로 정신무장을 했다고 자부해 온 학생들은 그깟 미음 한 모금에 반응하는 육체의 본능에 처참하게 파괴 돼버린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수치심으로 울부짖기도
했다. 학생들도 결국은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용주는 노동자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노동현장의 실상을 직접 체험하기로 마음먹고 부천의 어느 생산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다가 발각되어 잡혀가게 되었는데, 용주가 직접 노동현장에서 느낀 것은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다는 거다. 특히 여공들의 노동현실은 너무 열악했는데, 저임금에 고강도 노동력 착취가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었고 하물며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들의 권익이 뭔지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일만 하면서 아무도 잘못 됐다는 인식을 못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용주에게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학생활의 특권인 낭만과 셀렘의 기대감은 현실의 벽에 부닥쳤고 불의와 싸우다가 옥고를 치르면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강해져 보였다. 그 옛날 맑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럴듯한 거짓말로
너스레를 떨며 주위를 즐겁게 해 주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적당히 싱겁고 빈틈도 많아 보였던 용주가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 상황을 영우는 모른 채 살아왔다. 그저 결혼해서 아이 낳아서 기르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살림 잘하는 게 전부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치열한 투쟁으로 격변기를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용주였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영우는 지난 세월 용주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만 적지 않은 삶의 흔적을 남기고 지나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십 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잊지 않고 찾아와 준 용주에게 꺼내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 꺼리는 별로 없었다.
간간이 들어오는 손님들 때문에 중간 중간 대화가 끊기기도 했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용주는 대학교도 6년 만에 졸업을 하고 학생운동 전력이 발목을 잡아서 취업도
쉽지 않아서 지금은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을 도우며 지내고 있단다.
접시에 크림빵이 거의 없어질 때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돌아왔다.
“엄마! 엄마!”
두 아이가 번갈아 엄마를 부르며 안긴다.
“딸이야?”
“딸만 둘이야 얘가 작은딸 방금 밖으로 나간 애가 큰딸”
영우는 작은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용주에게 인사를 시켰다.
“아저씨한테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작은 딸이 용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용주가 용돈이라도 줄냥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는 사이에 곧바로 엄마 무릎에서 내려온 작은딸이 밖으로 나갔다.
주머니에서 꺼낸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아이들 주라며 영우에게 건넸다. 영우는 극구 사양했고 용주는 영우의 앞치마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러다 두 사람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눈에 동시에 눈물이 고였다. 서로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에도 아이들은 어수선하게 가게 문을 들락거렸다. 두 사람은 얼른
분위기를 바꾸고 표정을 바꿨다.
“이제 가야지,,,”
“벌써 가려고? 식사 대접도 못하고,,,”
“밥 안 먹어도 배불러 너 봤으면 됐지 뭐,,,”
용주가 가게 문을 나서며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주었다.
“내가 학생운동 할 때 읽었던 시집이야 시간 날 때 일어봐 낭만적인 글은 아니야”
영우가 받아 든 책을 두 손으로 가슴에 대고 용주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용주도
영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얼굴만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아마 지난 고교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은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영우가 급하게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용주를 이대로 보내는 게 못내 아쉬웠던 영우가
빵을 한 봉지 담아서 들려줬다. 영우가 보여줄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은 이게 전부였다. 그런 그녀의 지금 상황이 속상했다. 빵봉지를 받아 든 용주가 아쉬움 가득한 심정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던 용주가 뒤돌아섰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글쎄,,, 또 보게 되겠지,,, 너도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해야지”
영우는 얼버무리듯 기약 없는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결혼도 하라는 응원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자주 보기는 쉽지 않겠지, 그래도 소식은 전하며 살자,,, 나 결혼하면 축하해 주러 올 거지?
“그럼 가야지 친구들도 보고,,,”
“그래 고마워 잘 있어”
“잘 가”
영우의 눈에 비친 용주의 뒷모습이 왜 그런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옛날 싱그럽고
생기 넘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영우에게 아직 미혼일지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을 갖고 찾아왔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있는 걸 확인하고 실망을 했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함께 공부하며 울고 웃던 그리운 친구들이 불현듯 생각났다. 의숙 효경 연배 성희 혜순 정미 진영이, 아련히 떠오르는 친구들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점점 멀어지는 용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용주도 몇 발자국 걸을 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여러 차례 손을 흔들며 서로 들리지도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잘 가라는 말과 잘 있으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용주의 모습이 맨 끝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영우는 하염없이 용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용주야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모든 게 아름다웠어’ 영우에게 지난 이야기들은
예뻤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리운 날의 추억이 머릿속에 투영되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용주가 간 후에 바로 책장을 펼쳤다. 용주가 건네준 시집은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이다. 처음 접해본 시집이지만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예상대로 노동자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구절이 대부분이다. 내용 중에 영우의 머리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구절이 있다.
지은이: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 처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 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동네안쪽 가까운 곳에 청소년 근로자 아파트가 있다. 정부에서 근로청소년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자 지은 아파트인데 그곳에 오백여명의 여자 직장인들이 기숙하고 있었다. 평소에 영우는 그녀들에게 별 관심 없이 살았다. 사실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녀들이 출퇴근길에 오며 가며 빵을 사 먹었고 생일을 맞은 친구들을 위해 케잌을 사가는 경우도 많았다. 최근에는 일요일 아침 식사대용으로 빵을 단체 주문해서 먹었는데, 매출에 도움이 되었다. 어찌 보면 여기 살고 있는 청소년 근로자들이 영우네 제과점 최대 고객이었다. 그런 사실을 영우는 잘 모르고 살았나 보다. 용주가 다녀간 뒤로 가게 앞을
지나는 그녀들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생겼다.
용주가 다녀간 뒤로 영우는 삶을 살아가는 작은 의미를 깨달았다. 고민 끝에 일요일 식사대용 단체 주문빵을 재료값만 받고 팔기로 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야만 용주에게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줄일 수 있을 거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