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기억력 안 써 약해질 수 있지만 창조 등 다른 분야에 지적 능력 쓰죠 전반적 뇌기능 감퇴하는 치매와 달라
15세기 인쇄술 발명 때도 나왔던 우려 디지털 기기 무조건 멀리할 필요 없어
언젠가부터 인터넷 세상에선 '디지털 치매 자가진단법'이 화제입니다. '외우는 전화번호가 5개 이하다' '어제 먹은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뒤 지도를 보지 않는다' 이런 질문 10여 개를 물어보고 '절반 이상이면 디지털 치매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흔히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일상생활에서 기억력과 계산 능력 등이 크게 떨어지는 현상을 디지털 치매라고 합니다. 더 많은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여 사는 요즘 우리는 디지털 치매를 얼마나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 걸까요?
◇'디지털 치매'는 병이 아닌 사회현상
'디지털 치매'는 2013년 독일 뇌신경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 만프레트 슈피처(Spitzer)가 '디지털 치매(Digitale Demenz)'라는 책을 내면서 널리 쓰이고 있어요. 예전에는 가족 전화번호는 기본적으로 다 외웠고, 노래방 가면 자막을 보지 않고도 가사를 다 외워 노래를 불렀는데 이젠 그렇지 않죠. 그래서 우리는 '아 맞아. 정말 디지털 치매가 있네'라고 생각하고요.
▲ /그림=박다솜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디지털 기기를 써서 기억력과 계산 능력이 떨어진다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일부 관련 연구에서도 기억력 감퇴와 디지털 기기 사용 사이의 명확한 인과관계를 밝혀내진 못하고 있어요. 실제로 정신과에서 '디지털 치매'를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지도 않아요.
그런데 '디지털 치매'가 질병이 아니라면 왜 사람들이 실제로 외운 전화번호가 줄어들고, 택시기사들은 더는 시내 도로 곳곳을 '외우고' 운전하지 않을까요. 이는 사람 뇌가 쓰는 만큼 쓰는 부분만 강해지고 안 쓰는 부분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전 같은 단기 기억력을 쓸 일이 줄어드니 관련 기능이 약해지는 것이죠. 치매 환자는 뇌 조직에 병적인 변화가 생겨 전반적인 인지능력이 감퇴합니다. 소위 '디지털 치매'를 경험하는 현대인은 지적 능력을 다른 곳에 대신 쓰고 있다는 거죠. 과거보다 쓸모가 적어진 단순 기억력은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고, 더 창조적인 정신적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는 뜻입니다.
◇'순간 기억력'은 침팬지가 인간보다 뛰어날 수도
디지털 기기에 대한 반발이 새로운 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큰 변환점을 만들 정도의 새로운 기술이나 도구가 등장하면 인류는 혁신적인 도구가 대체할 기존의 인간 능력을 아쉬워하면서 무언가 큰일이 날까 걱정했습니다.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기가 나왔을 때도 그랬거든요.
1450년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이래로 활자와 인쇄술을 통해 책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보급하는 게 가능해졌어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인쇄술은 그 이후 인류사를 바꾸어놨습니다. 구텐베르크는 지난 1000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로 꼽힐 정도지요.
하지만 그 시대의 꽤 많은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지식은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가야만 습득된다'라거나 '인쇄된 것을 읽어봐야 조금도 머리에 저장되지 않는다'라면서 인쇄술과 인쇄된 책을 깎아내렸습니다. 이들은 손으로 직접 글을 필사하거나, 뭔가를 달달 외워야 공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지털 치매' 현상으로 암기력이 떨어질 걸 우려하는 지금 모습과 비슷해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래도 '기억력'이 중요한 거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께는 2017년 일본 교토대가 외신 기자들을 초대해 보여준 연구를 소개해 드립니다. 스크린에 0.5초 동안 숫자 5개를 보여준 뒤 숫자가 있던 자리를 낮은 것부터 높은 것 순서로 터치하는 과제였습니다. 침팬지 아유무는 당시 약 100차례 벌어진 외신기자와의 암기력 대결에서 완승했습니다. 더 빨랐고, 더 정확했습니다. 인간이 기억력이 뛰어나서 '만물의 영장'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 잡기
'디지털 치매'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로 디지털 기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디지털 디톡스(detox)'라는 말도 유행입니다. 디톡스는 말 그대로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해독한다는 뜻입니다. 디지털 기기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죠. 그렇지만 디지털 기기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현대인의 과제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세상에서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문화적 체험, 육체 활동, 실제로 사람을 만나 교감하는 것의 가치는 여전하니까요. '디지털 치매' '디지털 디톡스' 같은 말을 쓰며 디지털을 무조건 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디지털 기기로 생기는 부작용은 잘 해결해나가면 될 일입니다. 인간은 늘 변화를 추구하며 지금까지 발전해왔으니까요.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