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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묵상글 ( 주님 봉헌 축일. - 낮춤과 바침.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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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낮춤과 바침
오늘은 주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무릇 모든 기념이 그렇듯이 이 축일을 지내는 것도
주님의 봉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기념하는 것이 한 가지이고,
그런 의미를 우리도 본받아 살자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첫째로 주님 봉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보면 이렇습니다.
주님 봉헌의 첫째 의미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봉헌입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이고,
그래서 이것은 십자가상의 희생 제사와 같은 의미이고,
촛불이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듯 그런 촛불의 의미입니다.
이 의미에 대해 주님의 오심을 평생 기다려온 노인 시메온은
마리아와 요셉이 주님을 봉헌하러 왔을 때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인간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인간은 신화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봉헌은 부모 마리아와 요셉의 봉헌 이전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드님 그리스도를 세상에 바치신 의미이고,
십자가 수난의 의미 이전에 성탄 곧 육화와 낮춤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을 위해 바치신 것처럼
이제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처럼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모범이신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세상을 위해 바칩니다.
이렇게 할 때 곧 낮춤과 바침을 할 때
우리도 세상의 빛이신 주님처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고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축성 생활을 하는 수도자의 날이기도 합니다.
수도자들이 주님의 이런 봉헌의 의미를 충실히 살아
주님처럼 세상의 빛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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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30)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랍비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노래를 불렀듯이,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 시메온이 찬미합니다(라틴어 성경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른다).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해줍니다.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35)
이는 더러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임을 밝혀줍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도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문제가정이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남편 요셉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셨다는 것,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과 구원의 길에 참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사셨던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봉헌의 삶’, ‘축복의 삶’은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축복 하시는 그분의 뜻에 봉헌하고 사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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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 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 구세주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순명하였기에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백 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걸맞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으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으니,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 수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이 순간을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히브13,15).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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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함께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지명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면서 디에고 성인에게 ‘나는 과달루페의 성모’라고 하셨습니다. 과달루페라는 말은 원주민의 말인데 ‘뱀을 물리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뱀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동물입니다.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의 성모님과 달리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디에고 성인의 틸마(원주민이 입던 망토)에 ‘성화’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모님의 성화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먼저 성모님의 피부는 원주민의 피부와 같습니다. 성모님의 망토에는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1531년 당시의 별자리와 같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드레스는 스페인의 여인들이 입던 드레스라고 합니다. 성모님의 발아래에 천사가 성모님의 망토와 드레스를 잡고 있습니다. 이는 원주민과 스페인 정복자의 화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필마의 수명은 대게는 40년 이내인데 성화가 새겨진 필마는 7년 후면 500년이 되지만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눈을 컴퓨터로 확대해 보면 성모님의 눈에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풀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디에고 성인에게 성당을 지어 봉헌하라고 하였습니다. 디에고 성인은 주교님께 성모님의 이야기를 전했지만 주교님은 원주민인 디에고 성인의 말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성모님은 12월에 장미가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고, 디에고 성인은 그 장미를 틸마에 담아 주교님께 드렸습니다. 주교님은 12월에 그것도 멕시코에서는 볼 수 없는 유럽의 장미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디에고 성인이 그 필마를 펼쳐서 장미를 주교님께 드리는 순간 틸마에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졌다고 합니다. 이후로 과달루페에는 성전이 봉헌되었고, 멕시코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이후로 800만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칼과 총으로 선교하려고 했을 때는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는데 성모님의 발현 이후로 많은 원주민들이 스스로 세례를 받으려고 성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게 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주교님이나 사제에게 발현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신앙이 깊었던 원주민 디에고 성인에게 발현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직책이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신앙입니다.
오늘 서울대교구에서는 사제서품식이 있습니다. 16명의 부제가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것처럼, 새 사제들의 부모님도 사랑하는 자녀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고, 봉헌하였습니다. 새 사제들은 신학교에서 3가지 덕목을 배웠습니다. 첫째는 성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선포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새 사제들이 기도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둔다면 앞으로의 사목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지덕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영성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전해주는 영성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개인의 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셋째는 체덕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였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심한 기침을 하는 사람이 감기약을 팔면 사람들은 사지 않습니다. 사제는 늘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 사제서품을 받는 16명의 새 사제들을 축복해 주시고, 주님께 받은 모든 사랑을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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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느껴지실까요? 시메온의 기다림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주님을 만나기를, 눈으로 보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의 마음이 느껴지실까요? 그의 삶은 오로지 주님을 뵙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우리가 진심 바라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이루고자 하는 작은 소망들, 즉 건강과 부와 명예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우리가 뵙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의 작은 소망들도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그리스도를 뵙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천상의 행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메온과 같은 기다림이 우리 안에도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뵙고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시메온과 같은 모습이 우리 신앙생활 안에도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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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사람이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부유한 사람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 없어도 되는 것이 많을수록 부유한 사람이다.-
잠시 생각해 봅니다.
없어도 되는 것이 많은 사람이 부유한 사람이라는 말의 뜻을 말입니다.
그러고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마음에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에 많은 것을 품고 있다면
더 이상 하늘나라를 품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가끔은 마음을 비워보세요.
가득 찬 쓰레기통을 비우듯이
너저분하게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을 비워보세요.
그곳에 하늘나라가 들어차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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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노잣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잣돈은 사망한 고인이 저승길을 떠날 때 여비 하시라고 관에 지참금을 넣는 것으로, 고인의 수의 가슴이나 허리춤에 끼워 놓습니다. 도시에서는 이 모습이 사라졌지만, 지방에는 아직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만 있는 전통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입에 뱃삯으로 동전을 넣었습니다. 통행료를 내야 죽은 자의 나라로 들어가는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고대 사람들은 무덤에 음식을 넣기도 했습니다. 저승에 가는 동안 배고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 이후의 시간을 아무도 모르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갈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영생을 위해 한 가지 화폐만이 가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이웃에게 자신의 보물을 선물한 만큼만 저쪽으로 옮길 수 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랑만을 말씀하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구원의 길에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먼저 당신 몸 전체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범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에 굳이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시고, 또 똑같이 생활하시면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십니다. 당신 삶 전체로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 자체로도 충분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단순한 봉헌만으로 멈추지 않지요. 자기 생명까지도 봉헌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 등장한 시메온 예언자는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생명과 삶을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쓸데없이 ‘노잣돈이나 두둑하게 준비하지.’라는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더 사랑하며 살면서 사랑이라는 화폐를 내놓고 당당하게 하느님 나라에 입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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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3막이 고약하게 쓰인 조금 괜찮은 연극이다(트루먼 카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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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봉헌의 여정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주님 성탄후 40일째 되는 2월2일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봉헌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특히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습니다.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는 주님의 모습을 말라키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대로 오늘 봉헌 축일 미사전례 은총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그는 은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의 봉헌을 날로 새롭게 함으로 말그대로 봉헌의 기쁨을, 봉헌의 행복을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이자 수도자들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봉헌 축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봉헌의 축복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절호의 날입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아름다운 말마디는 없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봉헌이란 말마디의 깊은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수 없는 말마디가 봉헌입니다.
봉헌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이며 봉헌은 믿는 이들의 모두이자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봉헌의 사랑,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자유, 봉헌의 평화등 봉헌의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봉헌의 행복을 체험해보지 못하고 아까운 인생 헛되이 마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전하고 쓸쓸하겠는지요! 봉헌의 삶에서 저절로 솟아 나오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봉헌의 삶을 통해 존엄한 품위의 인간 존재임이 잘 드러납니다. 오늘 축성생활을 맞아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아빠스의 담화문중 주목되는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요즘 나이 많은 수도자들이 수도회를 떠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수도회에 거의 없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중 큰 하나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수 없고, 수도회 안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봉헌을 새롭게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내 소중한 성소를 날마다 가꾸고 돌보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니 또한 영적훈련이요 영적전쟁에 속합니다. 한두번 봉헌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하느님 중심의 ‘봉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니 매일이 봉헌 축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봉헌의 절정은 죽음이요 언젠가의 갑작스런 거룩한 죽음의 봉헌이 아니라 하루하루 크고 작은 일상의 봉헌의 여정에 충실할 때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봉헌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봉헌 축일이되면 떠오르는 두편의 시가 있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늘 주님이신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은 목마름과 배고픔이, 갈망과 열망이, 마르지 않는 봉헌의 샘이자, 지칠줄 모르는 성소의 원동력이 됩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어느 자매님이 살아 생전에 작은 꽃 한송이를 선물했을 때 드린 짧은 자작시도 잊지 못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삶자체보다 더 좋은 봉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좋은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듯이 날마다 사랑의 봉헌의 삶을 사는 분들이라면 하느님께는 그 삶자체로 최고의 봉헌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봉헌의 모범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던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요, 의롭고 독실하게 살면서 봉헌된 삶에 항구하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또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도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던 한나 예언자였습니다.
우리가 끝기도때마다 바치는 참 아름다운 시메온의 노래는 정말 날마다 정성을 다해 바친다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타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새삼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영성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바로 정주의 삶은 봉헌의 삶, 성화의 삶이요, 정주의 여정은 봉헌의 여정, 성화의 여정이요, 정주의 축복은 봉헌의 축복, 성화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정주의 삶, 봉헌의 삶, 성화의 삶이 깊어가면서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의 실현도 이뤄지겠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의 묘사처럼 봉헌의 축복은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믿는 이들의 자녀가 모두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봉헌의 축복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끝까지, 한결같이, 살아있는 그날까지,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을 이뤄주는 정주의 여정, 봉헌의 여정, 성화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봉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끝으로 봉헌생활을 압축한, 늘 바쳐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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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봉헌>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내가 빚은 것이
아니라
나를 빚으신 분께
내가 지닌 것이
아니라
나를 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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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2. 주님 봉헌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8-30)
시메온이 예수님에게서 속박이 풀어짐을 보다
시메온은 자기 팔에 안겨 있는 그리스도 한 분 말고는 장차 올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사람을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하지요.
‘주님, 이제야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날 수 있게 해 주시는군요. 제가 그리스도를 뵙고 제 팔이 그분을 받아 안기까지는, 제 몸을 묶은 사슬과 감옥에서 풀려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시메온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 사슬에 묶인 채 집과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으로 다스리게 될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잡아야 합니다. 두 팔로 감싸 품에 안아야 합니다. 그래야 갈망하던 곳으로 기쁘게 갈 수 있습니다.
그는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우연히,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성령에 이끌려 들어갔지요.... 여러분도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품에 안고 싶으면, 감옥에서 풀려나기 바란다면,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성전으로 오십시오. 보십시오, 여러분은 주 예수님의 성전인 교회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돌들로 지어진 성전입니다(l베드 2,5 참조).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엑카르트가 말하는 스파치오시시무스(Spatiosissimus)는 글자 그대로 ‘가장 드넓은 것’을 의미한다. 이 내밀한 심층 단계에서 우리는 가장 드넓고, 무한하고, 가장 광활하다. 거기에서 우리는 가장 잘 결합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창조주와 하나가 되고, 참되고 참된 하느님의 형상이 되며, 성이나 인종이나 민족에 상관없이 우리의 이웃과 하나가 된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만물 안에 있음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모든 창조성의 놀라운 본성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주 안에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모든 피조물은 밖으로 흘러 나오되 안에 머무른다. 그는 또 다른 대목에서 이러한 창조 이해를 상세히 설명한다.
“아버지께서 모든 피조물을 낳으셨을 때 그분은 나도 낳으셨습니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밖으로 흘러 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내 안에서 싹트면, 나는 그 관념을 숙고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표출하고, 여러분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113)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그는 자신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활동적인 삶과 관상 생활을 하나로 일치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므로 그는 평신도들도 복음에 따라 살아가도록 권유했다. 이러한 그의 권유에 일반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응답했다. “저희들은 수도자가 아닙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복음서의 지침들은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수도자와 일반 신도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평신도들도 복음에서 말하는 완전한 삶, 즉 완전한 사랑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평신도들도 성서를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는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일과 정치적인 일을 해 나가는 데에서 반대자들을 거슬러 강하께 투쟁해 냐갔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반대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유배를 당했고, 470년에 또다시 유배를 가는 도중에 폰투스(Pontus)라는 지역에서 마침내 최후를 맞이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한 말은 “모든 것을 위해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아멘” 이었다.
요한 코리소스토모는 386년과 398년에 안티오키아에서 주교로부터 강론을 하는 직무를 위임받았다. 이 일을 수행하면서 그는 예비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신경의 의미를 가르치고 성사적 전례를 설명해주었는데, 이런 일은 대부분 사순시기에 했다. 세례를 받기 전에는 예비신자들이 전례에 함께 참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대부분은 전례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기도문들을 모르고 있었다. 교회는 초기 5세기 동안 전례의 핵심 부분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개방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특별한 경의를 표현하려 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음흉한 호기심으로부터 하느님의 신비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미사를 드리는 시간과 장소, 미사를 진행하는 모습, 주님의 기도와 세례 의식 등에 대해 침묵하기를 권했다.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 과정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예비신자들에게 주님의 기도와 세례 의식에 대해 가르쳤고,세례를 받을 무렵에 성사에 대한 의미를 충분히 가르쳐 성사를 올바르게 믿고 참여하도록 했다.
1955년 아토스(Athos) 산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8개의 강론이 발견되었다. 처음의 세 강론은 “신비한 교리교육”에 대한 것이고, 네 번째 강론이 여기서 소개하는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다 이 강론은 이제 막 세례를 받아 부활시기에 새하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내면의 세계도 빛이 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즉 받은 세례를 삶으로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려 하고 있다.
세례는 세례 의식이 끝났다고 하여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세례를 통해 받은 새로운 삶은 이제 새로운 외적 자세들에 의해 표현되고 구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삶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야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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