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곰솔과 해식절벽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하는 지심도 마끝. 앞바다에선 '꼬마 고래' 상괭이를 볼 수도 있다.
봄 절기를 갈아야 할 판이다. 동해안은 또 폭설이다. 봄 시샘도 이쯤이면 지나치다. 저만치 와 있던 봄이 속삭였다. 조금만 버티라고, 겨울은 간다고. 아니, 못 참겠다. 남녘으로 봄 마중을 나섰다. 봄이 '동백섬' 지심도에 걸쳐 있었다. 섬 형태가 心자라 해서 지심도(只心島)인 섬. 가는 겨울 희롱하는 동백꽃이 지천이다. 뭐가 급한지 어느 날 통째로 툭 떨어진다. 그러고는 또 한 차례 땅바닥에서 개화한다. 두 번 피는 동백꽃 사이로 봄바람이 불었다. 동백꽃만 좋은 게 아니다. 하늘 가린 숲, 가슴 때리는 파도 소리, 바닷바람 머문 해안 절벽. 그 앞에서 눈과 귀는 속수무책이다. 마음 닮은 섬에서 마음을 뺏긴 몸은 봄 앓이로 고생했다.
■동백터널, 그리고 샛끝벌여
선착장에서 동백하우스 펜션을 거쳐 샛끝으로 발길 옮기기가 무섭게 동백숲이다. 섬 40~50%가 동백이니 놀랄 건 없다. 온통 붉게 물들지는 않았다. 추운 날씨 탓에 덜 폈다. 그저 군데군데 고개를 내민 정도랄까. 다음 주부터는 섬이 동백꽃에 덮이겠다. 꽃은 유난히 붉었다. 샛노란 수술을 감싼 꽃잎이 피를 뿜었다. 햇살 부딪쳐 반짝이는 이파리 틈새로 수줍게 보일듯 말듯이다. 이건 교태다. 혼 빼놓고는 부러 샐쭉한 표정을 지으니 미칠 노릇. 동백꽃은 이래서 요염하다.
섬 절반 뒤덮은 동백꽃 그 사이로 봄바람 '살랑살랑' 하늘 가린 숲·가슴 때리는 파도 소리 바람 머문 해안 절벽 마음 닮은 섬에서 마음 뺏긴 몸 '봄 앓이'로 행복한 고생
비늘조각 껍질의 후박나무 군락지, 쭉쭉 뻗은 대나무숲을 지나면 회백색 동백터널이다. 빛이 힘을 못 쓴다. 간간이 동박새 울음소리가 터널에 울렸다. 호흡은 짧지만 곱다. 삼색 깃털이 예쁜 새를 끝내 보지는 못했다. 동백꽃은 향이 없다. 대신 새빨간 꽃잎으로 동박새를 유혹해 가루받이를 한다. 겨우내 나비와 벌이 활동을 안 하니 꽃가루를 옮기는 이 새가 동백섬의 귀조(貴鳥)다.
동백터널은 구불구불 끝이 안 보였다. 앞서 걷던 사람이 사라졌다 나타나고를 되풀이한다. 지심도 최고령(?) 동백을 만났다. 거목은 가지끼리 얽히고 꼬이고 옆 나무와 뒤엉켜 있다.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지만 족히 수백 번의 겨울을 이겨냈겠다. 앙상한 고목 가지 끝엔 어김없이 젊은 이파리가 앉았다.
유난히 더 붉은 지심도의 동백꽃.
하늘 열리는 동백터널 끝이 일제강점기 전등소장 사택이다. 전형적인 사각지붕의 일본식 가옥. 지심도는 원시 자연림이 아름다운 섬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섬을 차지했다. 해안 방어용 포진지와 서치라이트 시설을 구축했다. 당시 10여 가구였던 주민들이 쫓겨났다. 전등소장 사택은 그 시절의 잔재다.
샛끝은 샛바람 길목이다. 습기 먹은 샛바람은 탁 트인 바다를 달리다 거침없이 파도를 일으킨다. 샛바람이 강하면 먼바다에 폭풍이 인다 했다. 샛바람이 오랜 세월 동안 깎아낸 해식 절벽은 장관이었다. 샛끝보다 더 마음이 붙들린 자리가 있다. 벌집구멍 닮은 바위 샛끝벌여다. 바다 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해국 군락지를 지나자마자 귀청이 아프다. 힘찬 파도가 절벽을 사정없이 때린다. 하얀 포말은 객을 덮쳐 온다. 세상 잡념이 놀라서 파도에 씻기겠다. 샛끝벌여 주변엔 키 작은 곰솔이 몇 그루 있다. 그 그늘 밑에선 시간도 쉬어갈 법하다.
비밀 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같은 동백터널.
■일제강점기 흔적들
샛끝엔 '그대 발길 돌리는 곳' 푯말이 서 있다. 탐방로 만들 때 더 갈 길이 없다 해서 붙였다.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리면 일제강점기 서치라이트 보관소와 방향지시석에 닿는다. 방향지시석은 서치라이트를 비추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가덕도, 절영도, 장승포 등 총 6개 방향으로 표지돌이 있었다. 현재는 5개뿐이다. 일본군이 적의 동태를 살피는 장치로 서치라이트와 함께 동박새를 활용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거제분소 손순국 씨의 설명이다.
동박새는 예민하다. 5m 전방에 사람이 나타나면 운다. 해서 일본군은 야간 순찰을 할 때 조롱에 동박새를 넣고 다녔다. 동백섬 귀조의 울음이 위험신호라, 어쩐지 애처롭다. 이처럼 예민한 동박새가 내달부터 본격적인 짝짓기에 돌입한다. 숲을 지날 때 들고 간 음악을 꺼두시길.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의 샛끝 전망대.
활주로 쪽 동백터널로 들어가기 전 수령 300년의 곰솔에 이끌렸다. 서치라이트 보관소에서 10분쯤 걷다 보면 왼쪽에 '탐방로 아님' 푯말이 있다. 그쪽에 곰솔이 있다. 찬찬히 걷지 않으면 곰솔을 놓치기 십상이다. 어른 세 명이 팔 벌려 안을 정도로 굵다. 큰 줄기를 땅에 굳게 박고 양 가지를 벌린 게 하늘을 뚫을 기세다. 지심도 가면 안아 보고 기운 받으시라.
동백터널 끝이 활주로다. 도시락 까먹기 딱 좋은 곳이다. 일본군 경비행기가 이착륙했던 자리다. 이제는 해돋이 명소로 바뀌었다. 바다 쪽에서 뜨는 해를, 뒤편 옥녀봉 쪽에서 지는 해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다. 연말이면 여행사 손님들로 발디딜 틈 없다.
국방과학연구소 해양시험소 갈림길에서 포진지로 갔다. 캐넌포와 기관포를 장착했던 포 자리 4곳이 눈에 띈다. 옆 창고는 탄약고다. 탄약고 문틀을 꼼꼼히 보면 3중으로 처리됐다. 철틀과 철틀 사이에 납을 끼웠다. 외부 포격소리에도 큰 진동 없이 포탄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일종의 완충장치인 셈이다. 그 주변으로 아는 사람만 아는 사진 찍는 자리가 있다. 굵은 곰솔 두 그루 사이로 동백나무가 비집고 앉았다. 마치 훼방꾼 곰솔이 양쪽에서 말려도 동백이 끝끝내 꽃을 피우겠다는 모양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찍으면 좋겠다.
■마끝, 그리고 생태섬
마끝 가기 전 일본식 건물이 한 채 더 있다. 일본군 최고급 장교의 막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해돋이 민박 간판을 달았다. 건물 앞엔 300년 된 동백 고목이 있다. 고목 구멍 속에 고둥이 산다. 입술대고둥이다. 수액을 먹는 대신 진딧물을 잡아 준다. 흐린 날이면 고둥이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한다. 태풍이나 해풍을 타고 날아 온 종자인데, 재밌는 녀석이다.
마끝은 남쪽 따뜻한 바람인 마파람이 닿는 자리다. 벼랑 위 수십 그루 곰솔이 한폭의 그림이다. 눈이 오면 '세한도'가 따로 없겠다. 곰솔은 적송보다 잎이 더 억세다. 마끝 바람을 버티고 서 있으려니 안 그렇겠는가. 색깔이 검어 흑송, 바닷가에서 자라 해송으로 불리는 지심도의 대표 나무다. 예전엔 여기가 더 좋았다. 굵직한 곰솔이 군락을 이뤄 객의 발걸음을 제법 잡았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할퀴기 전 얘기다.
마끝에 서면 바다 건너 저 멀리 촛대바위 옆으로 거제도 본섬의 '꽃바구니'가 들어온다. 해식애가 꽃 펼친 듯하다 해서 꽃바구니다. 감상 자리로 이만한 데가 없다. 마끝의 아름다움은 7월이 절정이다. 손순국 씨는 "억새풀 위로 반딧불이의 노란빛이 밤별과 노니는데 천지를 얻은 기분"이란다.
마끝 앞바다엔 고래가 산다. 상괭이다. 몸집이 기껏(?) 1.5m 안팎이라 통칭 '꼬마 고래'다. 이날도 상괭이 여러 마리가 수면 위로 들락날락했다. 운 좋은 가족 동반객이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장승포항으로 되돌아가는 배에서 멀어지는 지심도를 본다. 저 섬은 동백섬일까. 그랬다. 하지만 동백섬만으론 부족하다. 지심도는 하루쯤 묵어야 속살 드러내는 생태섬이다.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ilbo.com
TIP
■지심도
지심도는 조선 때 거제현 고현면 지심리였다가 1913년 통영군 일운면 옥림리로, 그리고 현재 거제시 일운면 옥림리로 변경됐다. 섬 북쪽으로 진해만과 부산 가덕도를, 동남쪽으로 대한해협과 일본 쓰시마를 볼 수 있다. 면적은 0.4㎢가 안 된다. 1980년대까지 지삼도와 지심도로 혼용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보리섬으로 불렀다.
■교통
자동차: 거가대교를 타고 거제도 장승포항 지심도터미널(지심도 도선협회 055-681-6007)에 도착한다. 지심도 가는 배편은 이곳에서 오전 8시 30분부터 1시간 간격으로 오후 4시 30분까지 있다. 장승포항으로 돌아오는 배편은 오전 9시 50분부터 오후 4시 50분까지. 편도 15분.
대중교통:지난달부터 운행하고 있는 부산 하단오거리∼거제 연초를 오가는 2000번 직행 좌석버스(편도 4천500원)가 우선 추천된다. 이 버스를 타고 가다 옥포중앙시장에서 내려 10, 11, 16-1번 등의 거제 시내버스(1천200원)로 갈아타면 장승포항에 닿는다. 직행 좌석버스는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 25∼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시외버스는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1688-0078) 구간을 오전 6시 10분부터 오후 9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1시간 20분 걸림. 편도 7천700원. 장승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장승포항까지는 택시로 5분이면 족하다.
■잠잘 곳
지심도 내 숙박은 13곳이 있다. 펜션은 동백하우스(010-3859-7576) 뿐이고, 나머지는 민박으로 해피하우스(010-3235-7503)를 포함해 12곳이 있다. 임태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