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5】
게다가 당시 일본에서 비행 공부를 하던 이정희가 2급 비행사 시험에 합격하여 쾌거를 올렸지만 제도상 여성은 2급 비행사 이상의 자격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실망하여 최승희처럼 무용가가 되기 위해 이시이 무용연구소로 들어갔지만 최승희의 방해로 쫓겨났다는 루머까지 나돌았다.
이런 곤란한 상황을 타개하고 향후 최승희 무용예술의 깊이 있은 전개를 위해 새로운 방향 전환을 도모하던 사건이 1931년 5월 9일에 치러진 안막과의 결혼식이었다.
이제 최승희는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안막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무용기획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최승희에 대한 안막의 후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안막은 秋白이라는 필명으로 조선 문단의 비평가로 활약했다.
그는 1920년대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중앙위원이었다.
특히 그는 카프의 볼셰비키화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예술대중화논쟁, 창작방법 논쟁,등 당대의 주요한 이론 논쟁을 이끌어간 바 있다.
그러나 카프 조직에서의 입지와 주요 이론 논쟁상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라는 사실에 비해 안막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그다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막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에서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은 그의 예술대중화론이 대중에 대한 사상 주입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즉 안막의 예술대중화론이 다수의 대중이 감흥할 수 있을 만한 예술의 내용과 형식을 우선시했다는 사실은 근대적 시민사회에서 기초한 대중적 감수성의 문제와 대중 서사 양식에 대한 이론적 해명에까지 나아간 것이었다.
대중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데올로기보다 인간의 심리와 감성에 근거해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며, 또 아무리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 중요하다손 치더라도 노동자·농민이 그것에 감흥하지 못한다면 예술의 아지프로 agitation propaganda는 무가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막이 제시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의 ’형식문제‘는 대중의 흥미를 끌면서 동시에 현실에 대한 대중의 감정을 조직할 수 있는 예술가의 ’기술문제‘와 연결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안막의 대중적 예술관은 최승희 무용의 향방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최승희 무용이 ’조선적인 것‘ 혹은 조선의 전통적 양식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범위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포함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된다.
다시 말해 최승희의 무용 예술에서 ’조선적인 것‘ 혹은 민족 정서를 발견하고자 할 때 그것의 출발은 프롤테타리아 예술운동의 계기를 포함하는 것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혼 직후 안막이 쓴 ’조선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의 현황‘이 문제가 되어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한 인터뷰에서 최승희는 자신이 남편의 사상에 공명하고 또 그것을 사명으로 한 공연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거니와 특히 동아일보가 후원한 제4회 공연에서 의 작품들은 노동계급의 미래 지향을 묘사한 것이나 민중봉기의 승리를 그린 작품으로 일관해 있다.
이 작품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 팔을 휘두르는 장면이 많았다고 해서 당시 관객들은 ’주먹춤‘이라고 빈정대기도 했지만, 훗날 이 공연을 관람했던 평론가 백철은 결과적으로 최승희의 예술적 센스가 발휘되지 못하고 그저 안막의 공식적인 주장만 반영된 ’프로 무용‘이 되고 말았다는 실망감을 토로한 바 있었다.
해방 직후에도 안막은 북한에서 유물론의 최고 형태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을 그대로 고수했다.
아울러 최승희가 북한에서 제현한 무용예술은 어디까지나 안막이 카프 시기부터 견지해왔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그대로 실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북한의 체제 선전에 기여한 셈이 되었다.
예술가는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 대중의 생활과 사상,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그들에게서 배우고 또 가르쳐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 조선 건설을 위한 역사적 단계를 현실 속에서 형샹화해야 한다는 안막의 주장은 카프 시기에 주장했던 예술의 볼셰비키화를 그대로 반복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글의 출처
제국의 아이돌
이혜진 지음, 책과 함께 출간